군복에 몸을 맞추어라
김 병 헌
시내 주변에 휴가 나온 국군장병들이 착용한 제복을 보면 아주 단정한 군복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날씬한 모습들이다. 이러한 모습을 본 후 군에 갓 입대하여 내가 입었던 군복이 새삼 머리에 떠올랐다.
군에 입대할 당시의 농촌의 생활은 6.25 한국 전쟁을 치루고 정전(停戰)이 된지 5~6년 밖에 되지 않은 농촌의 농민들의 생활은 아주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 때 나는 고등학교 졸업반으로 대학시험을 치루고 등록금 준비에 정신이 없을 때였다. 내 바로 위의 형이 대학 3학년, 장조카가 대학 2학년으로 아버지는 나 까지 세 명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키 위하여 고심이 많으셨다.
전쟁 후의 농촌생활에 한 명의 대학생 뒷바라지도 어려운데 우리 집은 세 명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기르던 소와 돼지를 팔고 농토를 팔아야 한 학기 등록금 마련이 겨우 될까 하는 처지였다. 당시 농촌의 사정은 보릿고개로 익지 않은 벼를 미리 파는 입도선매(立稻先賣)로 생활을 겨우 연명 해가는 시절이었다.
이 어려운 처지의 집안사정에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민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대학입학 등록금 독촉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집안 형편에 내 스스로 아버지의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고자 대학입학 등록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하면 생활이 조금은 나아 질것 같아 1959년도에 공군에 자원입대를 하였다. 육군은 만 연령이 미달하여 영장이 나오지 않은 상태여서 공군에 지원하여 입대시험을 보아 합격되어 입대일자가 결정되었다.
8월 한여름 무더위 속에 가족에게는 알리지 않고 몰래 나 혼자서 대전에 있는 공군 부대에 입대하기 위하여 하루 전 집을 출발하였다. 부대 부근인 유성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8시에 입대하는 것이다.
날이 세자 아침 군부대 정문에 모여 입대수속을 마치고 연병장에서 맨 먼저 전원 삭발을 시켰다. 삭발을 한 신병들은 서로가 쳐다보며 웃었다. 어쩌면 모두의 얼굴의 생김새가 다 같이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군번을 받고 군복을 지급 받으니 완전한 군인이 된 것이다.
군복을 받아 바지를 입는 순간 이것은 바지가 아니라 통 자루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맞는 군복이 없었다. 신병 모두가 불평 이었다. 당시 신병에게 지급된 군복은 미군용 이었다. 체격이 큰 미군용 군복이었기에 체격이 작은 우리 한국군에게는 맞을 리가 없다. 통 자루 같은 군복바지에 도포자락 같은 군복 상의를 입은 훈련병들은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는 거지꼴과 같았다.
이런 꼴을 하고 훈련받는 신병들은 일제히 군복이 맞지 않는다고 불평을 터트리자 훈련병을 지휘하는 중대장이 말하기를 “여기는 군대다. 불평은 통하지 않는다.” “군복이 크면 모두가 군복에다 몸을 맞추어라 알겠는가?”라고 호령을 하는 것이다 이에 훈련병 어느 누구도 불평을 더 하지 못 하였다. “군대에서는 하라면 하는 것이 통하는 것이다.”
엉거주춤한 군복을 입고 사 주 동안 신병훈련을 마치고, 입대한지 한 달 만에 첫 외출이 시작 되었다. 신병 모두가 정복과 훈련복을 싸가지고 외출을 하였다. 이들은 대전역 부근의 시장 통 노점에서 군인을 상대로 재봉을 하는 미싱사들에게 군복을 맡기고 그 자리에서 자기 몸에 맞게 수선을 하였다. 모두가 통 자루 바지에서 날씬하고 멋진 모습을 한 새로운 공군이 되었다.
군 복무하는 동안 나는 왜 대학진학을 못하고 군에 입대하였는가 하며 부모님을 많이 원망하고 내 자신에게 자책도 하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살림을 이끄시는 부모님을 생각지 않고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입대 한지 1년 4 개월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비보를 받고 집에 급히 내려갔으나 아버지께서는 이 막내아들을 보지도 못하신 채 이미 운명을 하셨다. 아버지는 약하신 몸으로 시골 터전의 추수를 하시다 병환이 나시어 청천벽력의 일을 당하셨다.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드리지 못하고 등록금 걱정만 드리다 군에 입대 한 불효막심한 자식이었다. 만 3 년간의 군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전역 후 서울에서 직장이 마련되어 근무 중 결혼을 하고 막상 내 자신이 학부형이 되어 자식을 키우고 가르치다보니 부모님의 어렵고 힘들어 하셨던 아픈 마음을 그때서야 조금은 느껴지고 깨닫게 되어 부모님을 원망했던 내 자신을 많이 반성하였다. 그 후 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원하였던 대학에 진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4 년을 무사히 마치고 대망의 졸업장을 받았다.
이렇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 국민의 삼대 의무중 하나인 병역의무를 마침으로서 사회에서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군에서 얻은 큰 수확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 가운데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탈골 시키면서까지 불법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아 병역을 면제 받는 한심한 청년들이 있다는 것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여보고 참으로 안타까웠다.
현재 우리 국군의 군복은 육, 해, 공군, 해병대 할 것 없이 각 체형별로 규격화 되어 각자 맞는 군복으로 제작되어 지급되므로 자기 몸에 맞는 군복으로 날씬하게 입을 수가 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자기체형에 어떠한 복장이 자기 몸에 맞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위상도 달라진다. 신체에 맞는 복장을 입음으로서 단정한 군인으로 군기가 서고 멋진 제복의 사나이로 나라를 더욱 굳세게 지켜나갈 것이다. 지금의 군대에서는 ‘군복에 몸을 맞추어라’는 중대장의 명령은 없어졌다. 지금의 제도는 완전 규격화되어 내가 복무하였던 50년 전의 제도와는 전혀 다른 체계화 된 제도로 운영되고 있다. 군복무 중에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한 가지 한으로 남았던 점은 막내이기에 항상 어린아이로 보고 걱정하셨던 아버지에게 입대 시에 알리지 않고 떠나와 걱정을 끼친 죄스러움과 제복을 입은 대한민국의 멋진 공군이었음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첫댓글 통자루와 도포자락같이렁한 군복 차림의 소년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마음이 아픈 미소가 지어지는군요.
진학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한 심정 오죽했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으면 합니다. 귀한 작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입대하기전날 유성의 하숙집에서 소지하고있던 현금을 모두 자기에게 맡기라고하였습니다 입대하면 군에서 모두 압수하여 본인에게 돌려주지않으니 맡기면 한달후 첫외출시에 찾아오면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하여 그날 숙박했던 입대자는 모두 현금을 맡겼지요. 참으로 순진한 입대 청년들이었습니다. 한달후 첫외출을하여 그 숙박집을 찾아갔더니 주인이 그대로있으며 고생하였다고 반기며 맡겼던 금액을 고스란히 돌려주더군요 그 때만 하여도 이렇게 우리국민 인심이 좋았습니다.지금과 비교한다면 맡기지도 않았을것이고 맡겼다면 그 숙박집 주인이 있지도않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없을것입니다. 그 때만해도 순박한 세상 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인심과 우리 국민의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씨가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 때가 56년전 1959년이엇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월간문학' 4월호 내용에 제출하였으나 분량이 많다고 수정을 해달라고 요청이 와서 부득이 이 내용은 원고에서 뺐습니다. 그 당시의 우리국민의 순박하고 인심좋은 소박함을 표현한것인데 원고 제한 수량에이 넘처 어쩔 수없이 빼게되어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귀한 작품 또 읽었습니다.
살아계실 때 만나 뵙지 못하고 뒤늦은 부자 상봉,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인간적인 숙박 집 주인의 마음씨에 탐복하며
가난했지만 그 시절의 훈훈한 인심이 그립습니다.
좋은 수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