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안전과공공질서의수호를위한대통령긴급조치[제정 1975.5.13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
1. 다음 각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유언비어를 홰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 하여 선전하는 행위. 나.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수단이나 문서, 도서,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 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 하는 행위. 다. 학교당국의 지도, 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례 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관여 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2. 제1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 배포·판매·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한다. 3. 재산을 도피시킬 목적으로,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을 국외에 이동하거나 국내에 반입될 재산을 국외에 은익 또는 처분하는 행위를 금한다. 4. 관계서류의 허위기재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해외이주의 허가를 받거나 국외에 도피하는 행위를 금한다. 5. 주무부장관은 이 조치위반자·범행당시의 그 소속 학교, 단체나 사업체 또는 그 대표자나 장에 대하여 다음 각호의 명령이나 조치를 할 수 있다. 가. 대표자나 장에 대한 소속임직원·교직원 또는 학생의 해임이나 제적의 명령. 나. 대표자나 장·소속 임직원·교직원이나 학생의 해임 또는 제적의 조치. 다. 방송·보도·제작·판매 또는 배포의 금지조치. 라. 휴업·휴교·정간·폐간·해산 또는 폐쇄의 조치 마. 승인·등록·인가·허가 또는 면허의 취소조치. 6.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은 이 조치에 저촉되더라도 처벌하지 아니한다. 다만. 그 발언을 방송·보도·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한 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7.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한다.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또는 음모한 자도 또한 같다. 8.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구금·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다. 9. 이 조치·시행 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제2조(뇌물죄의 가중처벌)의 죄를 범한 공무원 이나 정부관리기업체의 간부직원 또는 동법 제5조(국고손실)의 죄를 범한 회계 관계 직원 등에 대하여는, 동법 각조에 정한 형에, 수뢰액 또는 국고손실액의 10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병과한 다. 10. 이 조치위반의 죄는 일반법원에서 심판한다. 11. 이 조치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주무부장관이 정한다. 12. 국방부장관은 서울특별시장·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치안질서 유지를 위한 병력출동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이에 응하여 지원할 수 있다. 13. 이 조치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
부칙 <제9호, 1975. 5. 13> 14. 이 조치는 1975년 5월 13일 15시부터 시행한다. |
2) 긴급조치 9호 시기
긴급조치 9호 시기는 정확히 법률적으로 말하면 1975년 5월 13일 공포일부터 전두환 신군부가 1980년 10월 27일 폐지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긴급조치 9호의 종료일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된 시점의 한 달 후인 12월 8일 긴급조치 9호 해제일로, 약 4년 7개월 여 사이의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긴급조치 9호 세대
이 시기동안 활동했던 지식인 재야인사, 정치인, 학생 및 청년, 노동자, 농민 등 긴급조치 9호로 인해 고통 받았던 사람들을 모두 ‘긴급조치 9호 세대’라 호칭할 수 있겠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순수하게 긴급조치 9호가 작동하고 있던 시기에 긴급조치 9호 철폐투쟁 및 민주화운동을 집단적으로 실천한 세대라는 개념을 갖는다고 해석할 때, 1973학번부터 1979학번까지의 학생운동 집단을 지칭할 수 있겠다. 물론 학생운동 이외에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의 부문운동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존재할 수 있으나, 당시의 부문운동 정도가 자연발생적이었고 또한 활동가들도 극히 소수였기 때문에 동일 연령층의 집단적 의미를 지닌 세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재야운동에서 세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9)
3. 긴급조치 9호 시기의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1) 긴급조치 9호 시기의 학생운동-민주교육지표사건을 중심으로
(1) 긴급조치 9호 시기, ‘학생운동’의 정의(定義)
당시 학생운동에 대하여 정의한다는 것은 좀 어설프긴 하지만, 당시 대학생들의 입장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학생운동에 임하였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학생’이란 무엇인가? ‘학생’을 사회적·경제적·정치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학생을 사회적·역사적 입장에서 표현하자면 여러 가지 이론이 나올 수 있겠지만, 대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을 없다. 즉, 학생이란 사회적·경제적으로 아직 독립성을 갖지 못하고 부모의 영향아래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회진출을 앞 둔 예비적 계층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노동자나 농민이 아니고 회사원도 아닌 상태인 계층집단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계층에는 투표권을 가진 20세 이상의 유권자도 상당수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의 정치참여나 사회참여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국민적 주권운동에 참여하는 것에 일단 자격을 갖춘 셈이다. 당시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이 정치에 관여한다”고 꾸짖었다. 그렇지만 대학생들의 입장에서는 20세 이상의 유권자 학생들이 정치에 참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학생들의 정치참여나 사회참여는 유권자인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반독재 투쟁의 대열에 나서는 것이 당연한 권리주장이라고 보았던 것이다.10)
단지 학생운동의 경우, 미래가 불투명한 예비적 계층이기 때문에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대열에 들어선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고, 자신의 가정을 포기해야 하는 엄중한 결단을 내려야만 하였다. 기성세대가 볼 때는 실로 위험천만한 결단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우국충정의 불꽃을 태우려 달려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광주전남지역의 사회운동이 지향해야할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2012년 민주․진보적 정권의 재창출일 것이며, 아울러 5.18단체들 간의 갈등봉합 및 5월정신의 계승문제가 시대적 화두가 될 것이다. 이렇듯 한 시대가 갖는 구현하고자 할 정의가 있을 것이며, 지향하고자 하는 시대정신이 있을 것이다. 1970년대를 관통하여 청년, 학생, 문화운동을 포함한 모든 부문의 운동이 지향하는 시대정신은 분단된 ‘남북의 통일(민족통일)’과 ‘민주적 정권의 수립’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들의 최종 목표가 ‘집권’에 있다면, 사회운동의 최종목표는 좀 더 나은 ‘민주적 정권창출’에 있을 것이며, 학생운동의 최종적 목표 또한 분단조국의 통일과 민주정권 창출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너무 아전인수 격의 해석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대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했었다.11)
(2) 긴급조치 9호 시기, 학생운동과 역사적 의의
가. 긴급조치 9호 시기, 학생운동의 현황과 과정
이제 발제자의 경험과 선배들의 구전을 바탕으로 1970년대의 학생운동 현황과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으스스하고 살벌한 판이 되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유신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발제자는 선후배들과 만나 독서모임을 가졌으며, 시국에 관한 토론들을 경청했다. 1972년 하반기를 거의 고뇌 속에 허둥지둥 보내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발제자는 1973년을 재수하면서도 전남대학교 휴학생이라며 전남대학교를 들락거리면서 선배들과 어울렸고, 그 당시에 이미 많은 선배들과 만나게 되었다. 윤한봉(민청학련), 김상윤(민청학련) 선배들은 물론, 민청학련을 준비하던 윤강옥(동신고 졸, 당시 전남대 사학과 재학 중) 선배와 연결되어 1974년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73년 12월께와 1974년 1~3월은 그룹별로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면서 1974년 봄을 준비했는데, 발제자는 주로 광주 풍향동에 있는 윤강옥 선배의 집이나, 그 근처의 주막에서 윤강옥 선배와 만나, 서울과 광주의 돌아가는 준비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1974년 3월 전남대학교 문리대(사학과)에 들어간 발제자는 거의 매일 선배들과의 접촉으로 민청학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3월 말인가 4월 초에 윤강옥 선배에게서 비통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야, 용화야. 사전에 발각이 되어 모두들 잡혀가고 있다. 너도 얼른 튀어라!” 바로 휴학계를 내고 주위 눈치를 살피며 집과 학교를 오가는 신세가 되었다. 민청학련 전남대학교 집회의 D데이가 4월 3일이었던가? 발제자는 학생들을 동원하려고 금호각(당시 전남대 문리대 교양과정부, 현재 사회대 건물 근처)에서 대기했으나, 끝내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이미 몇몇의 선배들이 연행된 상태였고, 당일 스쿨버스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거의 연행된 터여서 계획했던 교내의 대규모 집회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나중에 민청학련으로 구속수감 되었다가 출감한 윤강옥 선배를 상면하고, “진술과정에서 너는 완전히 뺐다”는 말을 들으면서 매우 송구스러워 했었다. 훗날 그것이 ‘부채의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세월이 지난 뒤였다.12)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자, 제일 먼저 긴급조치 9호 철폐투쟁의 신호탄은 서울대에서 올랐다. 불과 9일 뒤인 5월 22일, 대규모 학생시위와 80여 명이 연행되어 29명이 구속·수감되었고 대규모 제적사태를 몰고 왔다. 피해 학생들의 대다수는 지방 학생들이었는데, 특히 광주·전남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고향에 가서 지역의 학생운동 등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1976년 봄인가, 여름인가? 이양현, 정상용 선배 등이 군복무를 하고 있던 청와대 경호실로 면회를 왔다. ‘독재자 000를 제거하자!(암살하라!)’는 제의를 해왔다. 한마디로 난감했으며, 매우 골치가 아팠다. 잽싸게 휴가를 내 광주로 가, ‘봉선동 산채’13)에서 김남주, 김정길, 이양현, 정상용 등의 선배들과 ‘독재자 제거계획의 비현실성과 실현 가능성의 희박함’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엉뚱하다고 생각되는 그 계획 속에는 이미 ‘도시게릴라’와 ‘무장혁명투쟁’의 냄새가 풍겨나고 있었다. 여하튼 일단 그 계획은 보류되었다. 1979년 가을인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이 터지고서야, 그때 왜 선배들이 독재자 제거계획을 세웠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상 그 당시 발제자는 민청학련 때 빚을 졌다는 부채의식이 마음속에 깔려 있었기 때문인지, 선배들이 동원령을 내리면 항상 동원되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은 모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14)
1977년 4월, 만기 제대한 발제자(정용화)는 곧바로 복학하지 않고, 녹두서점을 운영하고 있던 김상윤 선배를 주축으로 하는 여러 학습모임(스터디그룹)과 어울리면서 이 강(광주고 졸, 전남대 함성고발지 및 민청학련 관련), 김운기(조선대 제적), 나상기(사레지오고졸, 숭실대 민청학련 관련), 김정길(전남대 함성고발지 및 민청학련 관련), 박형선(전남대 민청학련 관련), 이기승(성균관대 민청학련 관련), 유선규(전남대 민청관련), 조봉훈(순천고졸, 전남대 농대), 김현준(고인; 서울대 제적), 강종호(서울대 제적), 박현옥(전남여고졸, 전남대 영문과), 이세천(사레지오고졸, 전남대), 노준현(전남대 공대; 고인), 문승훈, 박몽구, 신일섭(광주고졸, 전남대 사학과), 김선출, 안길정(광주고졸, 전남대 영문과), 김윤기 등 선후배 제현들을 두루 만나게 되었고, 김남주 선배가 일어판으로 강독하는 “파리꼬뮨”팀에서 공부하다 급기야 당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에 끌려가 3일 정도 심한 공갈과 협박에 시달리다 나오기도 했다. 김남주 선배는 그 길로 도피해 1979년 가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구속 수감될 때까지 숨어 지냈다.15)
전남대 학생운동권 선배들과 민청학련 선배들은 전남대에 1971년, 민족사회연구회(민사연)를 조직하였다. 민사연이 내외의 압력으로 교양독서회로 명칭을 바꿔 오국영, 오재일 등에 의해 1973년까지 유지되다가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이후 기독학생회(KSCF) 멤버들을 주축으로 한 맷돌, 그 뒤 교양독서회(오재일 주도)와 이재의, 조양훈이 주도하는 루사(RUSA)로 이어지는 학생 써클의 흐름이 있었다. 물론 독서잔디(지병문 주도)도 교양독서회 직후에 생겨나 활동했었으나, 지성주의적 교양써클의 범위를 넘지는 못했다.16)
1978년 3월에야 전남대학교를 복학한 발제자는 학생 써클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을 했다. 양강섭(광주고졸, 전남대 영문과)과 박관현(광주고졸, 전남대 법대, 1980년 전남대총학생회장; 고인) 등과 어울리면서 ‘대학생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논란을 벌였고, 후배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공부해 가면서 자연스럽게 후배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다. 특히 박관현, 양강섭, 정용화 셋이서는 거의 매일 만나, 라면 안주에 막걸리를 마시며 티겨태격 ‘대학생들의 사회참여’에 관해 논전을 벌이곤 하였다. 1978년 여름, 발제자가 교육지표선언 관련 학생시위로 감옥에 가고, 양강섭은 정학을 당한 뒤로 박관현은 좀 괴로워하면서 고민에 빠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박관현은 1978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전남대 ‘사회조사반’이 펼치는 광천공단 실태조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1979년 출감 이후 후배 신영일에게서 들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박관현은 곧바로 들불야학에 참여하게 되었고, 윤상원, 김상윤, 윤한봉 선배들과의 운명적 만남에 이어,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까지 연결되게 되었던 것이다.17)
각설하고,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 사건이 터지자, 발제자는 선배들로부터 연락을 받은 즉시 후배들을 긴급하게 소집했다. 고교시절부터 시위의 경험이 있는데다 선배들로부터의 직간접적 경험도 쌓은 터라 세칭 ‘운동선수’가 되어 있던 발제자는 선후배들로부터 당연히 ‘한 건 올릴 놈’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만한 신뢰가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긴급소집한 주모자들 중에서 발제자가 가장 나이가 많았으나, 저학년이어서 “누가 주동을 할래?”하고 물었더니, 고교 2년 후배인 노준현이 “제가 주동을 맡겠습니다”라고 답변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대학 안팎에서 공부해 오던 선후배 제현들이 모두 총동원되어 노준현(전남대 공대)을 주축으로 6월 29일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점거농성 및 광주시내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7월 3일까지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조선대에서도 후속시위가 벌어졌다. 1978년 6월 ‘교육지표 사건’은 먼저 6월 27일의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의 서명에 의한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에서 발단이 되었다. 이 선언에 뒤이어 6월 29일 전남대 학생들의 교수들을 지지하는 성명과 석방요구 등 3일 간의 연속 시위, 7월 3일 조선대 학생들의 ‘조선대학교 민주학생 선언문’ 사건18)까지 이어졌다. 거의 대부분의 주동학생들이 현장에서 연행되어 구속 수감되었으나, 발제자는 고교동창 김좌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가며, 여수의 김영신 선배, 부산의 송근석씨(공수부대에서 만난 상급자), 서울의 김현준(고인), 김삼수(광주고졸, 현 대학교수) 등 선배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약 1개월 15일 만인 8월 15일 서울 비원 뒤 원서동의 고교동창 김정기, 김규성의 자취방에서 체포되어 구속 수감된 후, 각각 2년6개월의 징역형과 자격정지를 받고 복역하게 되었다. 1979년 7월 17일, 형 집행정지로 출감한 이후에는 민청학련 선배들과 청년사회운동을 하면서 문화운동의 스텝으로 활동하게 되었다.19)
1979년 말, 유신독재의 종말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헤매고 있을 때, 수사·정보기관은 대학에 정보원을 상주시키면서 교직원들을 보초화하는 작태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남대 상담지도관실은 정보원들의 휴식처가 되었고, 교직원인 상담지도원들은 학생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정보기관에 수시로 보고하였다. 1979년 9월~10월 사이 전남대 상담지도관실 방화사건이 터졌다. 고희숙, 박유순 등 여학생들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불똥은 학교 밖까지 튀어 현대문화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윤한봉 선배가 배후조종으로 연행·구금되었고, 2대 소장으로 김희택(한신대 제적) 선배가 활동하게 되었다. 10.26 이후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게엄령이 선포되고 11월 10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11월 24일, 서울에서는 홍성엽의 YWCA 위장결혼식을 통하여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가 개최된데 이어 유신철폐 가두시위가 벌어졌고, 이어 광주에서도 11월 28일, 광주YWCA 연합기도회에서 광주기독교연합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남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회전남지부(황석영), 전남민청협(김희택) 등의 주도아래 시국선언이 있었으며, 12명이 연행되고 황석영, 김희택 등 주동한 선배들은 도피하였다.20) 이에 따라 발제자는 김희택 소장 후임으로 현대문화연구소장과 전남민주청년협의회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 해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자 윤한봉 선배는 풀려났으나, 윤상원 선배와 함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일에 신경 쓰느라, 이런 저런 소소한 일들은 5.18민중항쟁이 발발할 때까지 발제자가 도맡아 처리하였다.
지금까지 1970년대 후반, 긴급조치 9호 시기의 학생운동을 개인사적 측면에서 살펴봤는데, 당시 학생운동을 포함한 광주전남지역의 부문운동의 총량이 너무 확산되어 있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추스르고 심층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나. 긴급조치 9호 시기, 학생운동의 역사적 의의
현직 교수 11명이 서명한 교육지표 선언이 발표되자, 대학사회와 시민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면서 운동단체나 재야단체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학생, 종교계 및 양심범가족 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등의 지지시위와 성명이 잇따랐다. 이어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과 전국 교구 사제단도 잇따라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1978년 7월 28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에서는 “‘우리의 교육지표’선언에 즈음한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이어 8월 해직교수협의회와 9월 서울대학교 시위 선언문에서도 전남대학교의 교육지표 선언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21)
그렇다면 교육지표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당시 유신독재 체제 하에서, 부당하게 침해받는 국민기본권 차원에서, 교육지표 사건은 민주회복 운동이자 민주투쟁의 한 결단이었다. 민주운동으로서 교육지표 사건의 역사적 의의는, 첫째 그동안 신성시 되어온 국민교육헌장에 대해 처음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여 사회에 공론화시켰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유신독재 체제 하에서 최초로 교수들이 집단적으로 연대하여 민주주의와 민주교육을 위하여 저항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양병우 교수 말에 따르면 “교수들이 정권에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경우는 나치 치하에서 한 건 있었고 교육지표 사건과 같이 적극적인 저항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22). 그 전에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단체에서 서명한 사건은 있었으나 교육지표 사건처럼 현직 교수들이 그것도 서울이 아닌 지방 대학에서 집단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던 만큼 사회적 충격과 파장도 컸다.
셋째,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이후 침체된 대학의 학생운동에 큰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대학가의 학생운동은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의한 가혹한 탄압으로 상당히 위축된 상태였고, 민청학련 사건 이후 더욱 침체되었다. 더구나 교수들이 집단적으로 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학생들에게 현실의 부당함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었으며, 학생운동의 정당성을 증명해 주었다는 점은 더욱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교육지표’선언 이후, 서울의 재야 및 종교단체, 사회운동단체, 각 대학들의 학생운동에서 지지성명과 시위가 잇따랐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넷째 대학교수에 의한 교육지표 선언은 광주지역 사회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광주지역 민주화운동 세력을 더 한층 성장시키고 결집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뒤에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 계기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지역 민주화운동 세력과도 연대가 강화되었으며,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에도 큰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다른 측면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지만, 교육지표 선언은 분명 그 당시 사회에 큰 관심과 충격을 주었다. 교육지표 선언은 교육자적 입장에서 매우 온건한 내용이었으며 주장이었다. 3.1기미독립선언이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그 선언 자체로 역사적 의미가 있듯이, 교육지표 선언도 살벌한 유신독재 체제하에서 모든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용감하게 비판하고 저항하는 선언을 하였다는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민주화운동은 어두운 시대를 깨부수기 위한 용기 있는 실천이었으며, 결코 부정되거나 폄하될 수 없는 고귀한 인간화 운동이라고 하겠다. 1978년 6월의 ‘교육지표 사건’도 한국의 민주화운동사 차원에서 항상 새롭게 평가되고 연구되어져야 한다.23)
2) 긴급조치 9호 시기의 청년운동-현대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1) 긴급조치 9호 시기, 청년운동의 전개와 과정
청년운동이란 무엇인가? 청년운동의 주체인 ‘청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청년운동이 갖는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한 시대의 시대적 정의구현을 목적으로 한 시대정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청년운동은 정치적, 사회적 운동과 문화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다양한 부문에 걸쳐 관여하고 실천할 수 있는 범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청년’이란, 아직은 사회 기성세대로 진입하지 못했으나, 끝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당시에는 유신독재 체제나 사회적, 경제적 요인 등 타의에 의해 기성사회에 진입하지 못한 청년세대들이 많았다. 이들의 돌파구로써 청년사회운동이 활발해질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청년운동은 그 역동성이나 광범위함을 전제로 한다면, 한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운동에 가장 순수하게 접근할 수 있는 운동(방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령적으로도 그렇고 가치지향적 명분에 있어서도 그러할 것이다. 점점 더 복잡다단해지는 이런 논의에 대해서는 좀 더 전문적인 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긴급조치 9호 시기, 광주전남지역 청년운동의 전개와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자.24)
1979년 7월 17일, 1년여 만에 석방된 발제자는 자연스럽게 윤한봉, 김상윤, 김희택 선배 등과 함께 청년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부마항쟁과 10.26 이후 ‘전남민주청년협의회’25) 회장과 현대문화연구소장을 겸임하면서, 희망에 찬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이하게 된다. 전남민주청년협의회는 민청학련 출신 선배들이 1975년 2월 15일 석방이후 그해 4월, ‘전남구속자협의회’를 결성해 활동해오다 긴급조치 9호위반 학생들이 양산되자, 1978년 하반기에 ‘전남민주청년협의회’로 확대 개편한 것이며,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는 조성우, 양관수 선배 등의 주도하에 ‘민주청년협의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훗날 5.18 이후, 1984년 11월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초대 의장; 정상용, 부의장; 정용화)’로 이어지고, 그 뒤 장갑수, 신영일, 이춘문, 김전승 등이 활동한 ‘전남민주청년운동연합(의장; 송재형)’으로 발전하여 80년대 정치투쟁을 담당하게 된다, 아울러 5.18단체, 청년·학생운동권, 그리고 기독학생회, 기노련 등이 망라되어 최평지 등이 주도한 ‘전남사회운동협의회(의장; 전계량)’가 명실공히 사회운동의 연대 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김근태 선배 등이 주도하여 ‘민주화운동청년연합’으로 확대·재편되었다. 현대문화연구소는 1978년 후반 전남민주청년협의회의 근거지로서 광주시 동구 장동 소재 연합빌딩 2층에 사무실을 두고, 서울과 광주의 정보교환과 여러 부문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면서, 청년사회운동은 물론 문화운동의 태동과 지원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현대문화연구소 바로 옆에 김상윤 선배가 운영하는 ‘녹두서점’이 있었고, 여기서 멀지 않은 대의동 광주YWCA에 장두석, 문병란 시인, 황일봉 등이 관여하는 ‘양서조합’이 있었다. 1975년 2.15 석방조치 이후, 김남주 선배가 대의동에 ‘카프카서점’을 내 오다가다 소식을 주고받던 장소가 되었으며 소위 “양서”라 불리는 사회과학 서적을 보급하기 시작한 이래, 김상윤 선배가 계림동에 ‘녹두서점’을 내 그룹스타디와 사회과학 서적을 광범하게 보급하였다, 녹두서점은 5.18 전에 장동로터리 근처로 이전하여 5.18을 맞아 5.18투쟁의 본거지 중의 하나로 등장했으며, 5.18이후 김상윤 선배, 정현애(김상윤 선배의 부인) 등이 구속·수감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80년 이후 녹두서점을 인수한 한얼서점(문승훈)과 황지서점(송재형, 유증렬)이 뒤를 이어 사회과학 서적 보급에 앞장서 왔다. 당시 조아라, 이애신, 김경천 등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던 광주YWCA는 광주전남지역 재야운동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중요한 사항으로는 당시 학생운동권 민청학련 선배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여러 부문별로 포진해서 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이미 부문운동별 활성화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에 따라 농민운동에 이 강, 정상용, 박형선 선배 등이, 노동운동에 이양현, 최연석 선배 등이, 기독교 청년학생운동에 나상기, 최 철 선배 등이, 학생운동 지도에 김상윤, 김운기, 김정길 선배 등이 맡아 활동하였고, 전체적인 연결을 위한 청년사회운동 부문에 윤한봉 선배와 정용화, 임영희 등이 배치되어 활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었다.26)
당시 청년운동은 청년정치운동과 청년사회운동으로 대별되었다고 보는데, 서울의 민청협이나 전남민청협은 다방면으로 각 부문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조직이었다. 왜냐하면, 민족자주통일운동은 물론이고 노동운동, 농민운동, 문화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동, 교사운동, 종교적 부문운동 등 안 걸치는 데가 없을 정도로 여러 부문에 관여하고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현대문화연구소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청년운동가 윤한봉 선배는 스스로 모든 부문운동 분야의 ‘총괄본부’ 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홍남순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정치운동세력과 그 산하 ‘민주수호국민협의회(71년 결성)’, ‘민주회복국민회의(74년 11월 결성)’, ‘민주헌정동지회(같은 정파의 계모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79년 3월)’ 등과의 소통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연대활동 또한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또한 1970년대 중반 문화운동의 태동에서부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도 소통과 연대활동을 강화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윤한봉 선배는 발제자에게 이양현, 최연석 선배를 지원하도록 지시하여, 노조 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당시 호남전기(현 로케트전기 전신), 삼양제사, 전남제사, 남해어망, 들불야학, 백제야학 등을 돌아다니게 만들었고, 가톨릭농민회나 기독교농민회 행사와 교회 및 성당의 관련행사에도 파견을 보내곤 하였다. 그런가 하면, 황석영, 김남주로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여 윤만식, 박효선, 전용호, 김선출, 김윤기 등이 주도하는 문화운동의 후견인 겸 스텝으로서의 역할까지를 감당하도록 유도하였다. 또 여성으로 구성된 구속자 옥바라지 모임인 ‘송백회’의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양서조합운동 등 각종 부문운동의 지원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연대활동은 각종 모임이나 시위 때 모든 역량을 연결하고 결집시킬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며, 실제로 그런 양상을 도출해 내곤 하였다. 함평고구마 사건 때라든가 그 이후 벌어진 북동성당에서의 단식농성 등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이런 연락과 연대의 전통은 줄곧 이어져서 5.18민중항쟁으로까지 연결되었다고 생각된다.27)
(2) 긴급조치 9호 시기, 청년운동의 역사적 의의
1970년대 후반 긴급조치 9호 시대, 청년운동의 전개와 그 과정에서 보듯이 청년운동은 각 부문운동의 윤활유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연합전선이나 공동전선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견인차 역할을 감당하였다. 청년운동의 장점은 학생운동의 지도자들을 동원할 수 있는 역동성이 있는데다가 재야 명망가와 종교지도자들을 견인할 수 있는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울러 각 부문운동과 연결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론적 무장과 명분을 축적하고 있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강점이었다. 청년운동의 이러한 강점과 장점은 전통적으로 위와 아래를 연결시키고, 좌우로 수평적 연대를 강화시켜, 역사의 고비마다 역사의 커다란 수레바퀴를 돌릴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원동력으로 기능하고 작용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28)
그렇다면 요즈음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청년운동은 어떠해야 할까? 과연 청년운동은 가능한 것일까? 청년실업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이 시대의 청년들은 과연 어떤 양태로 청년운동을 펼쳐 나가야 할까? 정보화 시대와 인터넷 시대에 촛불집회 같은 현상은 일회적인 한계를 지닌 것은 아닐까? 학생운동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청년운동에 대해서도 많은 회의와 의문이 꼬리를 무는데, 과연 우리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오늘날 광주전남지역에서 청년운동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집단은 아이러니컬하게도 30여 년 전 청년운동을 했던 50대 장년그룹이다. 단체로는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광민회)’29)이고, 그 전신은 ‘70동지회’이다. 10년 정도 활동기간의 ‘70동지회’는 많은 부문운동에 관여하였다. 좀 더 선후배들로 확산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지난 2008년 가을에 발전적 해산을 하였으며, 그 후에 그 운동정신을 이어받아 ‘광민회’가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다.30)
3) 긴급조치 9호 시기의 문화운동
(1) 긴급조치 9호 시기, 문화운동의 태동과 전개
문화운동에 대해 남달리 생각하면서 지원 및 후원활동을 벌였던 발제자는 나름대로의 지론이 있었다. 우리들의 사회변혁운동이 전쟁으로 가정할 때, 세 개의 군대가 필요할 것인바, 그것은 바로 선봉군, 중군, 지원군 등 ‘삼군론’이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문화운동은 지원군이 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봉군의 기능을 담당해가면서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즉,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전선으로 가정할 때, 최전방의 선봉군은 누가 뭐라 해도 학생·청년운동권의 몫이었다. 이에 비해 문화운동은 문학에 있어서의 필화사건과 문화·예술적으로 표현되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방향성이 직접적이기 보다는 간접적 접근성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한계를 지니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각 부문운동마다 문화선전팀을 가지고 있으며,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1970년대 중반을 광주전남지역 문화운동의 태동기로 보는 게 타당하
다고 생각된다. 유신독재 체제가 굳어져 가는 1975년 2월 광주시 대의동 옛 광주
YWCA 강당 구국기도회장에서 중앙여고 교사 양성우 시인은 ‘겨울공화국’을 발표함
으로써 1970년 5월 김지하 시인의 ‘오적’, ‘비어’에 이어 두 번째로 필화사건의 주인
공이 되었다. 그 후, 학교에 파면을 당한 양성우 시인은 1977년 일본잡지 ‘세계’에
‘노예수첩’을 발표하고 수감되었다. 1970년 중반에 문학의 사회참여가 필연적으로
대두되었고, 집단적으로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해 1974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
협의회(자실)’가 결성되었다. 이 모임에는 광주전남지역 문인들과 서울의 광주전남
출신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는데, 박봉우, 문병란, 송기숙, 조태일, 이성부, 김남
주, 김준태 등이 곧 이들이다. 1970년대 중후반, 김남주 시인이 살고 있는 전남 해
남으로 소설가 황석영이 이사를 오게 되는데, 당시 해남은 농민운동의 기운이 크게
일어나고 있던 지역이었다. 이들은 청년운동을 감당하고 있던 윤한봉과 농민운동 활
동가 등과 연결되면서 정치적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이 더욱 대중적이어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다양한 양식의 문화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전남대를
비롯한 조선대 등에서는 탈반, 민속연구반, 미술패 등이 태동하기 시작하였고, 서울
의 채희완(탈춤패), 임진택(판소리), 김봉준(미술패), 유인택 등이 광주에 들락거리
면서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1978년 봄, 전남대에서 광주
전남에서는 최초의 대학탈반 ‘민속문화연구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전남대 문화운동
팀들은 그 해, 교육지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많아 잠시 주춤하기도 하지만, 곧
바로 후속 주자들이 중심에 서서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전남대 탈반의 등장과 함께
오랜 전통이 있는 기존의 연극반, 국악반 등도 순수 예술에서 벗어나 현실사회에 관
심을 두는 리얼리즘 추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마도 시대적 흐름이라고 생각된
다. 문학에서 시작된 문화운동의 싹은 연희패로 옮겨 갔고, 급기야 미술, 노래 등 여러 장르의 문화예술에 자극을 주어 현장 중심의 리얼리즘이 폭발적으로 위력을 확산시켜 나가게 된다.31)
1970년 중후반,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의 활동가들은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에서부터 ‘8억인과의 대화’까지를 섭렵하면서, 중국공산화 과정에서의 대중획득 전술 중에서 문화운동이 주요한 기능과 역할을 감당했음을 인지하였다. 아마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또는 문화예술인들의 각성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1970년대 후반의 문화운동은 들불처럼 번져가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문화예술인들과 청년학생운동의 활동가들과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문화운동은 정치사회운동의 문화선전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 내고도 남았다. 실례로 1978년 11월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 가진 ‘전국쌀생산자대회’가 있었는데, 전국에서 5백여명의 농민들이 운집했었다. 전남대 탈반과 연극반이 모여 전라도 마당굿의 효시로 꼽히는 ‘함평고구마’ 공연에 농민들은 열광하였다. 이 문화운동 팀들은 전남대와 조선대 탈반, 연극반, 국악반, 미술패 등을 결집하여 1980년 1월 마당극 운동의 본류를 여는 ‘광대’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광주YWCA에 적을 두고, 그해 3월 광주YMCA 무진관에서 창작 마당굿 ‘돼지풀이’를 공연하여 2천여 관람객들의 감동과 갈채를 받았다. 물론 이 때에도 현대문화연구소는 이들 공연을 뒷바라지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발제자는 당시 ‘광대’의 스텝장을 하면서, 공연장을 마련하고 배우들의 연습장에 가서 이것저것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으며, 공연 포스터를 제작하여 시내 요소요소 붙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연 티켓을 제작하여 각 팀별로 배포하게 하고, 선수금하여 공연준비에 충당하면서도, 그 와중에 노동, 농민 등 각 부문운동의 진행에도 차질이 없도록 동분서주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돼지풀이’는 공연 이후에도 한동안 농촌 현장을 돌며 현장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물론 발제자도 동행하여 스텝장으로서의 역할을 미진하나마 감당하였다.32)
1979년 9월 윤한봉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홍성담을 중심으로 최 열, 김산하 등이 전남대, 조선대 미술학도들과 함께 ‘광주자유미술인협회(광자 또는 광미협)’를 결성함으로써 미술문화운동도 조직화 된다. 197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 중의 하나는, 학생운동이나 청년운동의 활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항상 술과 노래가 빠질 수 없었다. 존 바이에즈의 ‘우리 승리하리라’, 싸이먼&가팽컬의 ‘험한 세상 다리되어’, 양희은의 ‘아침이슬’ 등의 노래로 마음을 달래던 시절이었다. 이런 현상이 유신 말기에 이르러서는 직접 창작과 공연의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5.18 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전남대 상대)이 1979년 겨울 백제야학에서 ‘아침이슬’의 작곡자 김민기를 만나 김민기 작곡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공연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5.18 이후, 작사자나 작곡자도 모르는 많은 민중가요를 낳게 된다.33)
이와 같이 긴급조치 9호 시기의 광주전남지역 문화운동이 착실하게 기틀을 다져가면서 문화운동의 틀을 잡기 시작했으며, 80년대를 거치면서 민예총의 전신에 해당하는 ‘광주문화운동협의회(광문협)’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일자 |
명칭 |
내용 |
74.11.18 |
자유실천문인 협의회 창립 |
광주출신은 박봉우, 문병란, 송기숙, 조태일, 이성부, 김남주, 김준태, 양성우 등 참여 |
75.2 |
구국기도회 |
YWCA회관, 구국기도회에서 양성우(중앙여고 교사) 시인이 자신의 시 ‘겨울공화국’을 낭송. 그 사건으로 양성우 시인은 중앙여고에서 해임됨. |
1976년~ 1980년 |
운동가요 확산 |
7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 의식 서클을 중심으로 소위 ‘운동가요’가 확산되었다. 구전가요, 항일독립군가, 농민운동가, 외국곡에 개사한 노래, 김민기, 양희은의 노래 등이 대학생과 청년들의 생활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
77.가을 |
해남 추수감사제 |
황석영의 주도로 정광훈, 윤기현, 김남주 등과 함께 서울의 ‘놀이패 한두레’팀을 초청하여 민요, 판소리, 마당극, 시낭송, 깃발, 현수막 등 여러 장르의 연희 양식과 선전방법이 활용된 추수감사제 굿판을 벌려, 광주에서도 민청세대 청년들과 학내 문화운동권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
77.겨울 |
YMCA 탈춤강습회 |
서울의 ‘놀이패 한두레’(서울대, 이대 탈춤반 출신들이 모여 결성한 문화운동팀) 소속의 채희완, 김봉준, 류인택의 지도로 박효선, 김태종, 김선출, 김윤기, 윤성석, 윤만식, 김정희, 조길예, 윤상원 등 봉산탈춤 먹중과장 이수, Y가면극회 결성 |
78.4 |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회장 김선출, 부회장 김윤기 김정희 선출, 윤만식, 윤성석, 조길예 등, 신입회원 김연중, 신경화, 최인선, 전용호, 하경량, 현수정 등 |
78.5~6 |
문화운동 조직 모색 |
78년 5월경부터 김상윤, 김태종, 김선출, 김윤기 등이 모여 탈춤이나 연극을 민주화운동과 연결시켜 본격적인 문화운동을 할 수 있는 조직을 모색하는 논의를 시작함. |
78.6~8 |
민속문화연구회 등록 취소 |
전남대 11인 교수 민주교육지표선언지지 시위 참가로 민속문화연구회 김선출 회장, 김윤기 부회장 수배 후 전남대 학생처 서클 등록 취소 처분. |
78.10 |
전대연극반‘정의의사람들’ |
전남대 연극반 러시아 혁명을 다룬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 대학당국의 공연금지 지시에 기습공연 감행. 박효선의 주도로 김태종, 이현주 출연 |
78.11 |
전국 쌀 생산자대회/마당촌극 공연 |
계림동 성당, 500여 농민 집회에 마당극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마당촌극 ‘함평고구마’ 공연. 박효선 연출, 김태종, 이현주, 전용호, 김연중, 최인선 출연 |
78.12 |
전대탈춤반, 재건활동,통영오광대 전수 |
전남대 서클 등록 취소로 활동정지 된 탈춤반을 당시 신입생이었던 전용호, 김연중, 최인선, 신경화, 하경량, 현수정 등이 조선대 탈춤반을 준비중이던 김부수, 변서호 등과 함께 통영오광대 탈춤 전수활동 |
79.3 |
전대가면극 연구회등록, 탈춤반 재건 |
전용호, 김연중, 최인선, 신경화, 하경량, 현수정 등이 가면극연구회(지도교수 이상식외 1인)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 이규현, 박영정, 김상전 등 30여명의 신입생 모집 성공 |
79.9 |
광주자유미술인회 결성 |
홍성담, 최열, 김산하 등 조선대 미술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광주자유미술인회 결성 |
79.12 |
박기순장례식/민주의례의 전범 제시 |
들불야학 강학이었던 박기순의 죽음으로 재야민주세력이 참가한 장례식이 열림. 들불야학이 있는 광천동 성당에서 장례식이 시작되어 전남대에서 노제를 하고 망월동 묘지에 묻힘. 황석영 등의 조사와 김민기의 ‘상록수’ 조가가 불리워져서 민주의례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다. |
80.1 |
극단 광대 결성 |
1978년 6·29민주교육지표선언 지지시위 사건으로 수배되었다가 1979년 9월 경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다 10.26 사건이후 구속중지로 석방된 김선출, 김윤기와 윤만식, 김정희, 최인선 등 탈춤반, 윤상원, 박효선의 영향으로 리얼리즘 연극, 혹은 사회현실 참여 연극에 관심을 갖고 있던 전남대 연극반 김태종과 이현주, 김영중 연극반 서클 룸 옆에 있던 국악반 출신의 연희예능의 끼가 많은 임희숙, 조선대 탈춤반 출신 김영희 등이 광주 YWCA 소속의 극단 ‘광대’를 결성하였다. 극단 광대는 소설가 황석영의 이론적, 물질적 지원과 현대문화연구소의 지원을 받았다. |
80.3 |
마당극 돼지풀이 공연 |
극단 광대의 돼지풀이는 당시 농촌에서 돼지의 과잉 사육으로 가격이 폭락한 농정을 광주YMCA 무진관에서 마당극으로 풍자하여 표현했다. 2회의 공연에 약 2천여명의 관객이 관람하여 뒤풀이에는 모두가 참여하여 걸판진 춤판이 벌어졌다. 마당극은 기존의 무대극과는 달리 공연 장소가 원형의 무대를 이루고 관객이 둥그렇게 앉는 연희양식으로 70년대 문화운동 과정에서 창출된 민중적이고 전통적인 공연형식이라 할 수 있다. |
1980년 3~4월 |
돼지풀이 현장 공연 |
광대는 돼지풀이 공연을 준비하여 무안, 강진, 해남 등 농촌현장에서 수차례 현장공연을 가졌다. |
80.4~5 |
동리소극장 개설준비 |
황석영의 재정지원으로 동명동에 전용 소극장을 마련하기 위해 계약을 하고 개관기념으로 ‘한씨 연대기(황석영 작)’를 광주YWCA 2층의 양서조합 사무실 등을 전전하며 연습하다 5·18항쟁을 맞이함. |
1980년 5.18~27 |
YWCA항쟁 공동체 결성, 시민궐기대회 진행 |
5월 항쟁을 맞이하여 극단 광대의 박효선, 김태종, 이현주, 김선출, 김윤기, 최인선, 김영희 등은 22일부터 시민궐기대회를 조직하고 진행하였다. 극단 광대의 시민궐기대회 팀은 홍희윤, 임영희, 이윤정 정유아 등 송백회 회원들과 박용준 열사, 전용호, 김경국, 나명관, 김성섭 등 들불야학의 투사회보 팀, 홍성담, 김정희 등 대자보 팀과 함께 광주YWCA에서 선전선동활동 중심의 항쟁공동체를 결성하여 27일 새벽 계엄군이 진입할 때까지 투쟁하였다. 이 세 팀의 선전·선동활동은 도청의 수습위원회에서 윤상원, 박남선, 이양현, 정상용, 김영철 등 투쟁적 운동가들이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논리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
*출처 : 전용호, ‘광주지역 문화운동의 태동과 전개(토론문)’, 광주민중항쟁 제31주년기념 학술토론회 “민주장정50년-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재조명(1960년대~1970년대)”, pp.80~83, 2011. 참조.
문학, 미술, 연희, 노래 등 여러 장르를 통해 유신독재 체제에 맞서 싸운 광주전남지역 민중문화운동은 <표 2>에서 보듯이 1970년대 후반, 긴급조치 9호 시기의 운동적 결실 중 손꼽히는 부문운동이 아닐 수 없다.
(2) 긴급조치 9호 시기, 문화운동의 의의
문화운동의 영향력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여러 부문운동이 엘리트 중심의 관료성을 드러낼 즈음, 문화운동은 민중성과 대중성 획득의 주요 매개체로 등장하여 그 기능을 충분히 감내해 내고도 남았다. 민중문화운동 활동가들의 등장이야말로 1970년대 후반 긴급조치 9호 시기, 사회운동의 최대 결실 중 하나라고 하겠다.
이들은 5.18 당시 청년학생운동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얼굴을 드러내지 못할 때, 선봉에 서서 선전선동을 통하여 대중과 민중들을 이끌었으며, 결국 문화전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던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으로 판단되며, 지금도 이들의 활동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광주문화운동협의회(광문협)’를 거쳐 오늘날 ‘민족예술총연합(민예총)’에 이르기까지 문화운동가들의 활동과 노고는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특히 요즈음은 문화의 시대이니 만큼 문화운동가들의 역할은 더더욱 커졌다 할 것이며, 그에 따른 기대 또한 증대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긴급조치 9호 시기의 각 부문운동
(1)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은 계급·계층적 운동으로서 주요한 부문운동이었으나, 학생·청년운동이 반독재·민주화 투쟁에 선봉적 역할을 감당한 것에 비하여, 계급·계층적 삶의 기본권 문제와 계급·계층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려는 운동의 방향성을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다. 긴급조치 9호 시기에 접어들면서,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넘어 민족통일 문제와 농민·산업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직시하면서 사회변혁의 문제에까지 고민하게 되었고, 이러한 여러 사회적 문제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깨닫게 되었다.
광주·전남은 예부터 농업을 주업으로 삼아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농민운동의 선진지역이었다. 1970년대 초반에 함평의 서경원, 노금노 등과 구례의 최성호를 중심으로 가톨릭농민회(가농)35)가 활동을 시작했다. 거기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출감한 이 강, 정상용 선배 등이 합류하여 힘을 보태고, 나상기 등은 해남의 정광훈, 강진의 김정순, 무안의 배종렬 등과 기독교농민회를 결성하게 된다. 역시 민청학련 출감자인 박형선은 조계선과 함께 보성농민회를 결성하게 된다. 이렇게 준비되어진 광주전남 농민운동 진영은 1976년 11월 발생한 함평고구마사건36)의 해결을 위해 함께 투쟁하게 된다. 이 사건은 50~60년대의 농민운동의 단절의 역사를 깨고 일상투쟁을 통해 농업문제의 구조적 해결을 지향하는 자주적 농민운동의 씨앗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가농은 1977년 8월 16일 농협문제세미나를 가진데 이어, 같은 해 11월 21~22일 대전에서 추수감사제 및 쌀생산비 조사 보고대회를 갖기도 하는 등, 여러 농업문제들을 다루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광주전남의 학생·청년운동권은 물론이고 지식인, 종교인(성직자), 재야인사들이 함께 힘을 모아 투쟁을 전개했다. 이렇게 공동투쟁을 중심으로 모아진 세 갈래의 농민회는 1980년대 투쟁을 거치면서 80년대 말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으로 발전하게 된다.37)
광주전남지역의 농민운동이 선진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지역적으로 산업화가 늦은 탓에 노동운동은 더딘 편이었다. 긴급조치 9호 시기, 광주에는 호남전기 김성애(고인), 삼양제사 정향자 등의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멤버들과 남해어망의 임미령, 전남방직의 전삼순 등이 노동조합 결성운동 등의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76년 후반 선진 노동운동을 공부하려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위장 취업해 활동하던 이양현 선배가 광주로 오면서 서로 조직적 연관을 갖고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긴급조치 9호 시기의 광주전남지역 노동운동은 노동자 권익을 실현하기 위한 전초단계로서의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 무렵 노동자의 의식화를 위해 본촌공단에 취업했던 학생·청년운동권의 노준현, 김상집, 한남플라스틱의 윤상원(고인; 5.18당시 도청시민군 대변인), 그리고 김윤창 등은 광주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들인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학운동으로 김영철, 윤상원, 최기혁, 박기순, 임낙평, 박관현 등의 들불야학과 최연석(현재 여수중부교회목사, 여수YMCA 이사장, 문익환 늦봄학교 이사장), 김홍곤, 김윤창, 박용성, 손남승 등이 주도하는 백제야학이 쌍벽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여러 활동가들의 노력이 80년대 ‘노동운동단체연합(노운협)’ 등을 거쳐 1989년 박종현(대우캐리어노동조합 위원장) 등에 의해 ‘광주지역노동자협의회(광노협)’가 만들어졌으며, 90년대 중반 ‘민주노총광주전남본부’로 발전하게 된다.38)
(2) 여성운동, 종교운동, 교육운동 등 부문운동
<여성운동>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구속자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임의 결실로 1974년 9월 ‘구속자가족협의회’가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1976년 10월 14일 NCC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구속자 가족들과 구속자 가족들과 관계 인사들이 간담회를 갖고 구속자협의회를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로 재발족 시켰다. 이 단체는 구속자 서방운동과 옥바라지 및 양심수 처우개선 요구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1985년 12월 15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로 확대·재편되었다.
직업 지역 |
광주전남지역 현황 |
전국 현황 |
학생 |
72(전남대 64명) |
1,197 |
성직자 |
21 |
82 |
교직(교사·교수) |
8 |
52 |
기타(사업/무직) |
7 |
78 |
계 |
108명 |
2,704명 |
* 출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발간, “1970년대 민주화운동”, 1987. 재정리.40)
긴급조치 9호 시기의 광주전남지역 여성운동은 여성의 권리신장이나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차원의 여성운동이 아니고, 형제자매들의 감옥행을 안타까워하는 지극히 모성애적 측면에서 출발하는 옥바라지 지원활동이 전개되었다. 1978년 6월 민주교육지표 사건 이후, 감옥에 가는 청년·학생들이 갑자기 늘어나자 좀 더 체계적인 옥바라지를 해야 되겠다는 입장에서 1978년 겨울 홍희윤, 정현애, 윤경자, 박경희, 임영희 등을 주축으로 ‘송백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참고로 당시 광주전남지역 양심수 현황은 앞의 <표 3>과 같다. 이후 ‘송백회’는 현재까지도 당시의 기능을 감당하지는 않지만 모임의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종교운동>
1970년대 중반 이후 4~5년간은 긴급조치 9호가 발효 중이어서41), 학생들의 움직임이 정치사회적으로 조금만 이상하면 감옥에 보내는 상황이었다. 76년 3월 1일 서울에서는 김대중(천주교도), 함석헌(퀘이커교도), 문익환(기독교 목사) 등 민주구국선언(명동시국사건)이 있었으며, 광주에서는 광주명동사건이라고 불리는 같은 해 8월 10일, 광주 양림교회에서 임기준, 조홍래, 윤기석, 강신석 목사가 구속·수감되는 기장전남노회 사건이 터졌다. 실제로 1976년인가에 광주일고 학생들의 유신반대 데모가 일어났고, 1977년 4월 4일, 기독교계 목사들과 기독청년학생들의 부활절 시위 등이 줄을 이었다. 이 때문에 목포에서는 이철우(현재 광주YMCA 이사장), 광주에서는 배호경, 조봉훈, 김영종 등이 구속되었으며, 윤한봉 선배도 일련의 사건배후조종으로 구속·수감되었다. 이 기간에 특히,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이세천, 노준현, 박현옥, 정등용, 이영송 등이 중심이 된 기독학생회(KSCF)와 기독청년회(EYC)의 활동이었다. 물론 민청학련 선배들의 분담에 의해 기독교 운동으로 배치된 선배들의 영향도 컸다. 나상기, 최 철 선배의 수고가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된다. 아무래도 천주교단이나 기독교단이라는 엄호·후원세력으로서의 ‘비빌 언덕(목사, 신부 등의 성직자)’이 필요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기독교와 천주교는 인권운동을 중심으로 여러 부문운동을 후원·엄호해 주었고, 가톨릭은 농민회와 JOC를 통해서, 기독교는 기독교농민회와 도시산업선교회를 통해서 파탄 난 민중의 삶 속에서 구원을 찾고자 하였다. 특히 기독교는 KSCF, EYC 등 청년·학생 조직과 많은 목사들의 헌신적 정치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기독교는 정치투쟁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단체인 광주YMCA, 광주YWCA가 부문운동가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활동의 장을 제공해 주었다.42) 최근 긴급조치 9호 위반 재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정당인들,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과 교수들, 그리고 기독교 목사들과 기독학생회, 기독청년회의 청년들이 대부분이다.
<교육운동>
교육운동은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전교조를 싹이라 불리는 ‘Y교사협의회(윤영규, 고진형)’를 주축으로 교사들의 모임이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생겨나, 박행삼, 박석무, 윤광장 등의 현직 교사들이 암암리에 부문운동을 지원하거나 교육문제 등을 터치해 나갔다.
유신체제의 물리적 폭압은 자신의 인생을 거는 중요한 결단이 있어야만 사회운도에 뛰어들 수 있게 만들었으며, 개인적 신뢰 관계를 우선시하는 운동의 동원구조를 형성시켰던 것이다. 연고에 기반 한 개인적 신뢰 관계가 폭이 넓어지고 각 그룹이 서로 네트워크화 되면서, 개인의 결단에 의한 선도적 투쟁에서 점차 조직운동의 수준으로 발전되어 나간 시기가 바로 긴급조치 9호 시대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긴급조치 9호 시대의 지역사회운동 주체들이 동원맥락과 의미틀의 의미를 현재적 시점에서 재구성해가는 과정은 지역사회운동 주체들 간의 관계를 새롭게 복원해가는 단초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43)
긴급조치 9호 시기의 광주전남지역 여러 부문운동을 포함한 제반 사회운동은 다양하고 폭넓게 확장되어 있지만, 오늘 이 발제는 미진하나마 이 정도에서 설명을 마친다. 좀 더 구체적인 연구는 후학들과 전문가들에게 짐을 떠넘길 수밖에 없다.
5. 에필로그
마지막으로 1970년대 후반 긴급조치 9호 시기의 학생운동, 청년운동, 문화운동 등 각 부문운동에 관여하면서 직접 경험한 것이나 선후배들에게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내용을 발표하면서 꼭 하나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제 자신에 대한 자기고백(coming out)이다. 선배들의 영향을 받았든 자신의 경향이 그랬든, 발제자는 민족자주통일운동 부문에는 좀 거리를 두고 지내오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든다. 한 때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녔던 윤한봉 선배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속삭였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건 좋은데, 절대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조사를 받을 때나 진술을 받을 때 그런 유도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감옥에 갔다 오면 눈총과 감시를 훨씬 더 받게 되어 활동하기가 불편해지기 때문이야.” 그래서인지,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에 저촉이 되지 않으려고 신경을 무지하게 썼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은연중 민족자주통일운동 부문에도 좀 거리를 두고 멀어졌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1970년 후반 긴급조치 9호 시기의 유신독재정권이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 우리들은 메모나 기록은 물론이고 대화마저도 도청을 염려하여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던 시절을 살았다. 그러기에 일기장은 물론이고 전화번호를 적은 수첩도 없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사무실 안에서도 필담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짙은 청색이나 검정색 천으로 얇은 베니아판(또는 단단한 골판지)을 감싼 다음 마아가린이나 기름기를 먹여 그 위에 비닐을 씌워 글씨를 써가며 필담을 했던 사실을 지금도 기억하시는 선배들이 있을 것이다. 발제자는 특히 심했다. 윤한봉(대장스타일), 김상윤(훈장스타일) 등 청년·학생운동권 선배들이 깔끔하고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은 ‘어떤 중요한 사실을 잊는 연습’이었다. 자기최면을 걸다시피 하여 수배 중인 선배를 만났다거나, 서울에서 연락 차 온 누구와 어떤 얘기를 나눴다거나 등등의 이런 내용은 빨리 머리에서 지워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 어느 때 정보기관에 끌려가 협박과 공갈에 시달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정말 중요한 사안이나 내용들을 실제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하였고, 다른 선후배들의 교차진술에 의해 어떤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났는데도 발제자는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억에서 지우는 연습을 하다보니 실제로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이다. 1970년대 후반의 긴급조치 9호 시대는 지금 생각해봐도 험악하고도 엄혹한 시절이었다. 치가 떨리도록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또 하나의 가능성에 치를 떨며 몸부림친다. 그토록 지겨워했고 증오했던 독재자 박정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듯해서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 보지만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다. 겁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감옥 갈 준비는 항상 되어있다고 선후배 스스로들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있다. 이 시대가 무얼 요구하는지 잘 살펴야 할 것이고, 방향을 잘 잡아서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게 잘 전진해야 할 것이다.
지금 되돌아보면 어찌 그렇게 천방지축 뛰어다녔는지, 자신 스스로도 신통할 지경이다. 그게 정열이었는지, 열정이었는지, 또는 분노였는지, 도대체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순진’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고, 그러면서도 ‘가슴과 마음’을 지니고, ‘인간주의(휴머니즘)’에 기초했었다는 것은 말하고 싶다. 결코 낭만적 휴머니스트만은 아니었노라고.......44) 반(反)군부독재, 반(反)유신체제, 민주정권수립, 분단조국의 남북통일, 인간화 운동, 이러한 화두가 긴급조치 9호 시대를 대표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의 지향점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1970년대를, 아니 긴급조치 9호 시대를 보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