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보는 것과 글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일에 속한다. 말과 사진은 똑같이 대상을 표현하고 똑같이 분위기를 갖지만, 이 두 가지는 언제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소설을 쓰는 나의 경험에 의하면, 나에게 감동을 주는 사진은 예외없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내가 써야 한 말의 숫자는 갑자기 늘어난다. 최민식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과 지금도 겪고 있는 일, 그리고 그것이 크고 깊어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상처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최민식은 1957년에 사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민족 단위의 수난과 상처를 더듬어 볼 때 나는 자꾸 좀더 먼 과거, 한 세기 전으로 올라갈 필요를 느끼고는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보게 되는 것은 영상으로 기록된 재난들이다. 물론 우리 민족이 피사체가 되어 처음으로 사진이 앞에 섰던 해는 1871년이다. 정확히 말해 백열여섯 해 전에 있었던 일로서, 미국의 극동함대가 강화(江華) 해협을 침입한 그 해의 사건을 우리는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배웠다. 살색이 흰 저들은 총칼로 무장을 한 병사와 철제 대포에다 옛날 사람들이 처음 보는 또 한가지를 전함에 싣고 왔었다. 그것은 사진기였다. 우리 땅에서는. 무명에 솜을 넣어 지은 바지와 저고리를 방탄용 군복으로 입고 눈 파란 군대와 목숨 건 싸움을 하다 포로로 잡혔던 강화 수비대의 병사들이 처음 보는 기계 앞에 참을성 있게 서서 사진 찍힌 첫 번째 조선인이 되었다. 그 전쟁에서 조선군은 삼백오십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내침군 가운데서 죽은 자는 단 세 명밖에 안 되었다.
사진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첫 모습은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