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의 斷髮(단발)
머리털은 부모님이 주신것이니 함부로 자르지도 말며 훼손 해서도 아니 되느니....
해서 총각은 길게 땋아느렸고 혼인을 해야 비로서 상투를 틀어 올렸다
또한 여인네들도 처녀는 땋아내렸고 결혼을 해서야 틀어 뒤에 비녀를 꽂아 간수 했던것이다
그래서 죄인이 유배지로 가거나 형장으로 끌려 갈적이면 남녀를 불문 하고 그 머리를 풀게 하여
예를 갖추지 못하게 했던것이니 귀신 같은 모습을 드라마에서나마 보게 되는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방조약을 하고 고종황제를 강압으로 머리를 깍게 하였는데 이는 조선사람 모두를 깍게 하기 위함이였다
하기야 지금 같으면 길르라고 해도 아니 기를것이며 귀찮아서라도 깎을것이다
허나, 그것이 강압에 의한것이라면 어떠 할것인가?
만약, 누구라도 잠자기 전에 옷을 벗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그옷을 누군가가 강제로 벗기었다면 독자들은 어떤 감정이 앞설것인가?
천추에 한을 남길 일이며 그 치욕스럽고 통분함은 하늘에 닿고 땅을 덮고도 남을것이다
여기 일제에 의해 강압에 못이겨 고종 대황제 폐하께서 머리 깍던때의 일을 소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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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신해,1911년)) 11월 15일 고종은 비로서 삭발 하고 중외신민에게 명하야 일체 삭발하도록 하였다
周衣(주의)를 입으라는 법을 발행한 이래 삭발 한다는 말이 점점 일어 나더니 10월중에 일본공사가 왕께 위협 하여 조속히 삭발 하도록 하였으나 왕은 인산을 치른 뒤로 기한을 정했다가 이에 이르러 유길준과 조희연 등이 일본군으로 하여금 궁성을 포위하고 둘러가며 대포를 묻고 머리를 깎지 않는자는 처형 허겠다고 선언 하니 고종께서 긴 한숨을 들이쉬며 정병하를 돌아 보고 가로대
경이 짐의 머리를 깎는게 좋겠소 하니 병하는 손을놀려 가위로 왕의 머리를 깎았으며 유길준은 왕태자의 머리를 깎았다
머리를 깎으라는 명이 이미 내려짐에 곡성이 하늘을 진동 하고 사람들은 분하고 노해서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며 형세가 장차 격변 하려 하자 일본군은 비상경계에 돌입하고 경무사 허진은
순검들을 인솔하고 칼을 빼들고 길을 막으며 만나는 사람 마다 머리를 깎았다
또한 서울에 손님으로 왔다가 나아가 상투를 잘리니 모두 상투를 집어 호주머니에 감추며 통곡
하며 성문을 나아갔다
무릇 머리를 깎인자는 빡빡깎지 아니하고 상투만 자르고 머리털은 남겨놓아 장발승 같았는데
오직 부인네와 어린 아이들은 깎이지 아니 했다
학부대신 이도재는 상소 하여 개원과 단발을 반박 하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 했다
이하생략
이상은 황현선생(1855 ~1910) 이 지은 梅泉野錄(매천야록)에 기록된 내용이다
매천은 황현 선생의 호요 자는 운경 으로 본관은 장수인으로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동서고금의 학문을 독파하고 신학문에도 밝았다 한다
당시 썪어 빠진 조정과 무능한 왕실, 무패하고 문란한 관리등등에 환멸을 느낀 그는 정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양친의 명을 거역할수 없어 상경 하여 과거에 응시 , 생원회시에 장원급제 한다
끝끝내 그는 벼슬길을 마다 하고 귀향하여 거옥에 만권서책을 쌓아두고 두문불출 학문연구에만 몰두 하였다
드디어 1910년 한일합방 으로 나라의 국권이 일본에 유린되니 이를 庚戌國恥(경술국치) 라 한다.
아 ...!
선생은 비분강개한 마음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다량의 아편을 복용하고 卒(졸) 하시니
우국지사의 회한을 풀지 못한채 망국의 원혼이 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 梅泉夜錄 )
첫댓글 체력은 국력이다.힘이 없으니 당하고 살지...억울한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