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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본기 琉璃明王(유리명왕) (BC19년 ~ AD12년)
琉璃明王立 諱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初 朱蒙在扶餘 娶禮氏女有娠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 幼年 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頑如此” 類利慙 歸問母氏 “我父何人 今在何處” 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曰 汝若生男子 則言我有遺物 藏在七稜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 類利聞之 乃往山谷索之不得 倦而還 一旦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稜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句鄒〈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己所有斷劒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子 至是繼位
유리명왕(琉璃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유리(類利)이다. 혹은 유류(孺留)라고도 하였다. 주몽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전에 주몽은 부여에 있을 때 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는]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고약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요.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그 아이는]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는데,
어느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1년(BC19년, 壬寅) 9월, 추모왕 사망.
*9월, 阿爾가 都切을 낳음. BC19년생.
二年 秋七月 納多勿侯松讓之女爲妃 九月 西狩獲白獐 冬十月 神雀集王庭 百濟始祖溫祚立
2년(BC18년, 癸卯) 가을 7월, 다물후(多勿侯) 松讓(송양)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9월, 서쪽으로 사냥가서 흰 노루[白獐]를 잡았다. 겨울 10월, 신작이 궁궐 뜰에 모였다. 백제(百濟)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여름 5월,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백제본기> 온조왕 1년, BC18년 근거.
三年 秋七月 作離宮於鶻川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以繼室 一曰禾姬 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涼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爭鬪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3년(BC17년, 甲辰) 가을 7월, 골천(鶻川)에 별궁(別宮)을 지었다. 겨울 10월,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들어 [이들을] 후처(後妻)로 삼았다. 하나는 화희(禾姬)인데 鶻川人(골천인)의 딸이다.
또 하나는 치희(稚姬)인데 한(漢)나라 사람의 딸이다. 두 여자가 사랑 받으려고 서로 다투며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양곡(凉谷)에 동·서 2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그 후에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었다. 禾姬(화희)가 稚姬(치희)를 꾸짖어 “너는 한나라 사람 집의 천한 첩으로 어찌 무례함이 심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稚姬(치희)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쳐 돌아갔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좇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어느날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黃鳥]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노래하였다. “훨훨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의지하는데, 외로운 이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 것인가?”
*이때 송씨(松氏)는 죽지 않았음. <고구려본기>는 거짓말했음.
*十年 四月 禾氏生子解術
BC10년 解術 출생.
*출처: <孺류王(유류왕)>
*유리왕 4년, 을사, BC16년, 八月 松氏生子都助 都助태자 출생. BC16년생.
*유리왕 7년, 무신, BC13년, 五月 松氏生子解明于豆谷 解明태자 출생. BC13년생.
*유리왕 10년, 신해, BC10년, 四月 禾氏生子解術 解術태자 출생. BC10년생.
*유리왕 5년 雉氏가 시집 옴. 凉谷宮을 마련함.
*유리왕 9년 雉氏 도망. 황조가를 부름.
*유리왕 6년 BC14년, 4월, 왕의 동생 溫祚(온조)를 馬韓(마한)에 보내어 땅을 빌렸다.
*유리왕 10년 BC10년, 1월, 再思 薨. 沸流太子가 太輔가 됨.
<고구려사략> 유류기 유리왕 10년.
*<백제서기> 비류왕 5년, BC14년. (유리왕 6년)
五年 丁未 四月 遣王弟溫祚於馬韓 借地 時馬韓政衰 畏末曷樂浪加耶之漸盛 欲使王制末曷樂浪 乃許東北百里之地 且許採鐵鑄兵戈 優待王弟而歸 十月 王巡撫北邊 獲神鹿 十一月 馬韓使來 請王女 王謝以年幼 馬韓君臣耽樂 不恤國民 樂浪加耶年年納美女 侵入其封疆 疆域日縮 而不以爲意 甘兒生子馬婁
5년 丁未(정미, BC14년)
4월, 왕의 동생 溫祚(온조)를 馬韓(마한)에 보내어 땅을 빌렸다. 당시 馬韓(마한)은 정세가 쇄락하여 末曷(말갈), 樂浪(낙랑), 加耶(가야)가 점점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왕으로 하여금 末曷(말갈), 樂浪(낙랑)을 제어하기를 바랐다. 이에 동북 100리의 땅을 허락하였다. 또 철을 캐내어 兵戈(병과, 무기)를 주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왕의 동생을 우대하고 돌려 보냈다.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순무하다가, 神鹿(신록)을 잡았다.
11월, 馬韓(마한)의 사신이 와서, 王女(왕녀)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고 사양하였다. 馬韓(마한)의 임금과 신하들은 耽樂(탐락)하여 국민들을 구휼하지 않았다. 樂浪(낙랑)과 加耶(가야)가 해마다 미녀를 바치며 그 封疆(봉강)를 침입하였다. 강역이 날마다 줄어 드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甘兒(감아)가 아들 馬婁(마루)를 낳았다.
十一年 夏四月 王謂羣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주석6]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 良馬一十匹
11년(BC9년, 壬子) 여름 4월,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 = 涉臣)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굳은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왕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선비(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扶芬奴(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매우 많은 [적을] 목베어 죽였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十三年 春正月 熒惑守心星 13년(BC7년, 甲寅)
봄 1월, 형혹(熒惑)이 심성(心星)을 지켰다.
*유리왕 13년, BC7년, 無恤(무휼)이 태어남. BC7年生.
*1월, 金蛙 殂. 帶素立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 帶素恚之 冬十一[주석7]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 人多凍死 乃去
14년(BC6년, 乙卯) 봄 1월, 부여왕 帶素(대소)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볼모를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려하여 태자 都切(도절)을 볼모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都切(도절)이 두려워서 가지 않았으므로 帶素(대소)가 성을 냈다. 겨울 11월, 帶素(대소)가 군사 5만으로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었으므로 돌아갔다.
*BC6년, 1월, 온조 남하의 뜻, 재사가 온조의 왕비가 됨. => 재사가 沸流의 왕비가 됨.
유리왕 18년 (BC2년, 己未) 백제의 건국. 온조왕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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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 온조왕 14년, BC5년.
十四年 春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14년(BC5년, 丙辰) 유리왕 15년.
봄 1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 漢江(한강) 西北(서북)쪽에 성을 쌓고, 漢城(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
백제본기 온조왕 15년, BC4년.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BC4년, 丁巳) 유리왕 16년.
봄 1월,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백제왕기 비류왕 17년. BC2년. 유리왕 18년.
十七年 己未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彌鄒忽也) 王戰敗 憂懣而薨 王弟溫祚統其衆 而繼立爲王 以新都爲慰禮城
17년 己未(기미, BC2년) 봄 樂浪(낙랑)이 쳐들어 와서 慰禮城(위례성, 彌鄒忽也)을 불질렀다. (비류)왕이 전쟁에 패하여 걱정하고 번민하다 죽었다. 왕의 동생 溫祚(온조)가 그 무리를 통솔하였다.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새로운 도읍으로 慰禮城(위례성)을 삼았다.
백제본기 온조왕 18년, BC1년.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18년(BC1년, 庚申), 유리왕 19년. BC1년.
겨울 10월, 靺鞨(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七重河(칠중하)에서 맞아 싸워 추장 素牟(소모)를 사로잡아 馬韓(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 왕이 樂浪(낙랑)의 牛頭山城(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臼谷(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十九年 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殺之 九月 王疾病 巫曰 “託利·斯卑爲祟[주석9]” 王使謝之 卽愈
19년(BC1년, 庚申) 가을 8월, 교제(郊祭)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왕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택(長屋澤) 가운데에 이르러 [교시를] 찾아내어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왕은 이것을 듣고 노하여 “하늘에 제사지낼 희생을 어떻게 상하게 할 수 있는가?” 하고,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넣어 죽였다. 9월에 왕은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된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 사과하니 곧 병이 나았다.
二十年 春正月 太[주석10]子都切卒
20년(AD1년, 辛酉) 봄 1월, 太子(태자) 都切(도절)이 죽었다.
*都切(도절), BC19년생. 20살 사망.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養之 返見王曰 “臣逐豕至國內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麋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夏四月 王田于尉中林 秋八月 地震 九月 王如國內 觀地勢 還至沙勿澤 見一丈夫坐澤上石 謂王曰 “願爲王臣” 王喜許之 因賜名沙勿 姓位氏
21년(AD2년, 壬戌) 봄 3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왕은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찾아내어 국내 지방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는 돌아와 왕을 뵙고 아뢰었다.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또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수도를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끝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 4월, 왕은 위중림(尉中林)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8월, 지진이 일어났다.
9월, 왕은 國內(국내)로 가서 지세를 보고 돌아 오다가 사물택(沙勿澤)에 이르러, 한 장부가 진펄 위의 바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왕에게 “왕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기뻐하면서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沙勿)이라는 이름과 위씨(位氏) 성을 내려 주었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주석11]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墜地” 王聞之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22년(AD3년, 癸亥) 겨울 10월, 왕은 國內(국내)로 천도하고 尉那巖城(위나암성)을 쌓았다. 12월, 왕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대보(大輔) 陜父(협보)가 간하였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형정(刑政)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하러 나가서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만약 [왕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신은 정치가 황폐하고 백성이 흩어져서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왕은 듣고 크게 노하여 陜父(협보)의 관직을 빼앗고 관원(官園)을 맡아보게 하였다. 陜父(협보)는 분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二十三年 春二月 立王子解明爲太子 大赦國內
23년(AD4년, 甲子) 봄 2월, 왕자 解明(해명)을 太子(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크게 사면하였다.
*유리왕 7년, BC13년, 五月 松氏生子解明于豆谷 解明太子. BC13년생. 17살 태자됨.
*AD4년, 무휼이 11살에 태자가 되었다고 봐야 함.
二十四年 秋九月 王田于箕山之野 得異人 兩腋有羽 登之朝 賜姓羽氏 俾尙王女
24년(AD5년, 乙丑) 가을 9월, 왕은 기산(箕山)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이상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양 겨드랑이에 깃이 달려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羽氏(우씨) 성을 주고 왕의 딸에게 장가들였다.
고구려본기 琉璃明王(유리명왕) 27년, AD8년.
二十七年 春正月 王太[주석13]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 解明對其使者 挽而折之曰 “非予有力 弓自不勁耳” 黃龍王慙 王聞之怒 告黃龍曰 “解明爲子不孝 請爲寡人誅之” 三月 黃龍王遣使 請太子相見 太子欲行 人有諫者曰 “今鄰國無故請見 其意不可測也” 太子曰 “天之不欲殺我 黃龍王其如我何” 遂行 黃龍王始謀殺之 及見不敢加害 禮送之
27년(AD8년, 戊辰) 봄 1월, 王太子(왕태자) 解明(해명, 21살)은 옛 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세고 무용(武勇)을 좋아하였으므로, 黃龍國王(황룡국왕= 烏伊)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로 주었다. 解明(해명)은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뜨리며 “내가 힘 세기 때문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고 말하였다. 黃龍王(황룡왕)이 부끄럽게 여겼다. 王(왕)은 이것을 듣고 성을 내며 黃龍王(황룡왕)에게 “解明(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하니 과인을 위해서 [그를] 죽여 줄 것을 청합니다.”고 말하였다.
3월, 黃龍王(황룡왕)이 사신을 보내 太子(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으므로, 太子(태자)가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지금 이웃나라가 이유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고 간하였다. 太子(태자)는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黃龍王(황룡왕)인들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는 마침내 갔다. 黃龍王(황룡왕)이 처음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를 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유리왕 7년, 戊申, BC13년, 五月 松氏生子解明于豆谷 解明태자 출생. BC13년생.
*유리왕 AD8년(戊辰), 1월, 3월 기사임. 解明(해명)이 黃龍王(황룡왕)을 만나고, 자살함. 21살.
*都助太子 薨. <고구려사략> 都助太子(도조태자)의 사망. 24살. (BC16년생)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謂解明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力 結怨於鄰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乃賜劒使自裁 太子卽欲自殺 或止之曰 “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 今使者一至而自殺 安知其非詐乎” 太子曰 “嚮黃龍王以强弓遺之 我恐其輕我國家 故挽折而報之 不意見責於父王 今父王以我爲不孝 賜劒自裁 父之命其可逃乎” 乃往礪津東原 以槍揷地 走馬觸之而死 時年二十一歲 以太子禮葬於東原 立廟 號其地爲槍原
論曰 孝子之事親也 當不離左右以致孝 若文王之爲世子 解明在於別都 以好勇聞 其於得罪也宜矣 又聞之 傳曰 『愛子敎之以義方 弗納於邪』 今王始未嘗敎之 及其惡成 疾之已甚 殺之而後已 可謂父不父 子不子矣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 讓王曰 “我先王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禮也 以幼事長者順也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難矣”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効” 乃與羣臣謀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時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扶餘王聞之 徧問羣下 有一老嫗對曰 “累卵者危也 不毁其卵者安也 其意曰 王不知己危 而欲人之來 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28년(AD9년, 己巳) 봄 3월, 왕은 사람을 보내 解明(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도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 센 것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 그리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太子(태자)가 곧 자살하려고 하자 어느 사람이 말리며 말하였다. “大王(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太子(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이제 [왕의] 사자가 한번 온 것으로 자살한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太子(태자)는 말하였다. “지난번 黃龍王(황룡왕)이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 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보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꼽고 말을 타고 달려 찔려 죽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1년 내려 와서 기록됨. 27년(AD8년) 3월에 일어난 일.
<고구려사략 원고 필사본>에 나옴.
*유리왕 28년, AD9년. 해우의 출생.
*AD8년(戊寅), 3월 기사임. 解明(해명)의 자살.
*解明(해명)은 BC13년생. AD8년-(-13년)= 21살 사망.
사론(史論): 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는 마땅히 곁을 떠나지 않고 효를 다하여야 하는데, 문왕(文王)이 세자였을 때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해명이 따로 떨어진 도읍에 있으면서 무용(武勇)을 좋아한 것으로 이름났으니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하다. 또 들으니 좌전(左傳)에 말하기를 『자식을 사랑하거든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 그릇된 데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왕은 처음부터 미리 가르치지 않다가 악하게 되자, 몹시 미워하여 죽이고 말았다. [이것은]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였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을 8월, 扶餘王(부여왕) 帶素(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우리 선왕과 당신의 선군인 동명왕은 서로 좋은 사이였는데, (동명왕이) 우리 신하들을 꾀어내어 도망쳐 이곳에 와서 성을 수리하고 백성을 모아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다. 대개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 아이가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예이며, 어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왕이 만약 예와 순리로써 나를 섬기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나라의 운수가 오래 보존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 이에 왕은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성과 군사가 약하니, 이런 정세에는 부끄러움을 참고 굴복하여, 후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군신들과 상의하고 (부여왕에게) 회답하였다.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왕자 無恤(무휼)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신령(神靈)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는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에게 참언하여, 욕되게 말을 기르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도망나온 것입니다. 지금 대왕이 전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 나라를 경멸하니,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아뢰시오. ‘지금 여기에 알들이 쌓여 있습니다.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부여왕이 듣고 (그 뜻을) 신하들에게 두루 물으니 한 할멈[老嫗]이 대답하였다. “알들이 쌓여 있는 것은 위험한 것이고,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 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왕이 자신의 위험은 알지 못하고 남이 (굴복하여) 오기를 바라는 것이니, 위험한 것을 안전한 것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16살 無恤(무휼)이 부여사신에게 충고.
二十九年 夏六月 矛川上有黑蛙與赤蛙羣鬪 黑蛙不勝死 議者曰 “黑北方之色 北扶餘破滅之徵也” 秋七月 作離宮於豆谷
29년(AD10년, 庚午) 여름 6월, 모천(矛川) 가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무리져서 싸웠는데,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논의하던 (어떤) 사람이 “검은 색은 북방 색이다. 北扶餘(북부여)가 파멸할 징조이다.”고 말하였다. 가을 7월, 豆谷(두곡)에 離宮(리궁)을 지었다.
*陜父(협보)가 신라의 태보가 됨 <고구려사략>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斬之 傳首京師 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愈甚
31년(AD12년, 壬申) 한(漢)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 주군(州郡)에서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에 명해서 위안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따라 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흉노(匈奴)를 아직 누르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기뻐하고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래서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
*AD12년(壬申), 琉璃王(유리왕)이 王莽(왕망)에 의해 살해당함.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32년(AD13년, 癸酉) 겨울 11월, 扶餘人(부여인)이 쳐들어오자, 왕은 아들 無恤(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無恤(무휼)은 군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군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無恤(무휼)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無恤(무휼)이 扶餘人(부여인)을 정벌함. 20살 때.
三十三年 春正月 立王子無恤爲太子 委以軍國之事 秋八月 王命烏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縣屬玄菟郡
33년(AD14년, 甲戌) 봄 1월, 王子(왕자) 無恤(무휼)을 太子(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8월,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
*AD14년, 1월, 無恤(무휼)을 太子(태자)로 삼음. BC7년생. 21살. AD4년생. 11살.
*호동의 출생 = AD15년쯤.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 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 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田十頃 秋七月 王幸豆谷 冬十月 薨於豆谷離宮 葬於豆谷東原 號爲琉璃明王
37년(AD18년, 戊寅) 여름 4월, 王子(왕자, 解術)가 津(진)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은 애통해 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건지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祭須(제수)가 찾아서 알리니, 마침내 예로써 王骨嶺(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頃(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은 豆谷(두곡)으로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豆谷(두곡)의 離宮(리궁)에서 죽었다. 豆谷(두곡)의 東原(동원)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琉璃明王(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
*AD8년, 3월, 解明(해명)의 자살. 21살. (BC13년생).
*AD8년, 4월, 解術(해술)의 자살. 18살. (BC10년생)
*AD18년, 7월. 황룡왕 烏伊 薨. 81살. AD18년 - 81살 = BC63년생.
烏文 -- 烏伊 -- 烏婁.
*AD18년, 7월, 太后의 장례식으로 豆谷(두곡)의 東原(동원)으로 감.
都助太子(도조태자)의 사망. 34살. (BC16년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