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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문(Golden Gate)]
소피아 대성당 남쪽 500m 거리엔 예전 키예프공국을 들어갔고, 양쪽엔 긴 성벽이 있었으며, 내부가 금빛난다고
붙여진 ‘황금 문’은 11세기 건설된 키예프 성채의 정문으로 1240년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1982년 복원했으며, 문 앞에는 소피아 성당을 만든 야로슬로브 동상은 키예프 공국을 들고 있으며, 남쪽엔 우크라이나 국립오페라극장이 있고, 키예프 국립 오페라 극장(Opera house)과 국립 서커스(National Circus of Ukraine) 공연장를 지나 호텔에 도착하여 키예프 관광을 마쳤다.
[8일] 18년 10월 24일 수요일 ●일정: 09: 50(PS 57) 오데사 향발→ 10: 50 오데사 도착 관광[1 보론초프
궁전 2 예카데리나 2세 동상 3 포템킨 계단 4 푸시킨 동상 5 시청 6 오페라 발레극장 6 시 공원 7 파시지 호텔
8 대성당 광장 → ALEXANDROVSKIY 호텔 [오데사(Odessa) 역사] 인구 100만 명
수도 키예프에서 남쪽으로 443㎞ 떨어진 오데사는 고대에 취락지가 형성되었으며, 지금의 면모는 14세기에
세워진 타타르족의 하지베이 요새에서 비롯되었고, 요새는 그 후 폴란드로 넘어갔다. 1764년 투르크에 점령되었고, 1789년 러시아로부터 대 공격을 받았으며, 1791년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1792~ 93년 새 요새가 세워졌고, 1794년 해군기지와 무역용부두가 건설되었다. 모든 건축들은 러시아제국 시절 건축했으며, 1795년 오데사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고대그리스의 취락지 오데소스의 이름을 따서 오데사라고 했다.
1881년 유대인선술집에서 러시아인이 쫓겨난 것이 발단이 되어 유대인 학살사건이 있었으며, 오데사는 5월
3~8일까지 5일간 계속되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이것을 기념하는 홀로코스트(Holocaust) 비가 있다.
1866년 철도가 들어온 후 급성장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은 제2의 항구이고, 러시아 제3의 도시가 되었으며, 주요수출품은 곡물이었고, 1905년 러시아혁명의 중심지에 하나였고, 전함 포툠킨호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1925년 무성영화 ‘전함 포툠킨’이 이곳에서 만들어졌고, 2차 세계대전 중 1941년 8월 8일 루마니아 공격을
지원한 독일군에 대항하여 69일간 방어하여 ‘영웅도시’로 칭호를 받았으나 심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군에 900일 동안 점령당했고, 2014년 ‘시청사 거리’는 크림사건 때 친서방파사람들이 친러파사람들을 학살한 추모공원의 역할을 하며, 오데사는 친서방파보다 친 러시아파가 더 많다. 언어도 주로 러시아어를 쓰고 있으며, 훌륭한 부두와 선박 수리 장을 갖추고 있는 우크라이나 최대 항구로 철도망도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모든 지역들과 잘 연결되었다. 예술의 어머니라고 할 만큼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여 카페, 샵, 식당 이름도 예술가 이름이다.
[오데사 필하모닉 홀(Odesʹka Oblasna Filarmoniya) 식당으로 향하면서]
오데사 공항에서 남자가이드를 만나 차를 타고 시내로 향하면서 오데사에 대한이야기를 했는데 역사와 중복되지 않는 것만 간추려 기록하면 소비에트 시절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곡물 80%가 이 항구를 통해 수출되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하면서 경기는 급격히 악화되었는데 그것은 모든 물동량이 끊기면서 쇄락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러시아로 남을 것인지를 두고 대립 중이며, 찬성과 반대는 반반이라고 한다. 좀 이른 시간이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식당은 궁전 같이 생긴 웅장했는데 돌아와 찾아보니 필하모니 홀로 식당 입구에 걸려 있는 포스트가 왜?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며, 손님은 우리뿐이다.
[쵸쉰 다리와 보론초프 궁전(Vorontsov Palace)]
식당을 출발하여 항구를 통과하면서 오데사에서 가장 유명한 ‘포템킨 계단’과 부두의 시설들을 보면서 포템킨
계단 북쪽 400m 지점에 있는 공원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사랑의 자물통이 가득한 걸 치대이다. 바다 쪽으로 있는 쵸신교에 무질서하게 있었던 것을 없애고 이곳에 모아둔 것으로 쵸신교 위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며, 당시에는 가장 길었던 이 다리 별명은 장모님 다리(Mother in law Bridge)라고 한다. 1950년 대 구소련 때 높은 지위에 있었던 한 공산당원이 장모님이 집에서 주무시지 않고 빨리 가도록 놓았는데 주위의 돌들은 모두 이탈리아에서 가져 온 것이며, 다리 밑에는 사람이 살기 힘든 스레드 지붕의 폐가도 보였다.
이곳은 공산당원의 사랑 때문에 연인들이 많이 찾는 데이트 코스로 작은 ‘사랑의 다리?’도 있고, 좀 더 가면 바다 쪽으로 ‘보론초프 궁전'과 뒤편에는 예쁜 주랑(콜로네이드, colonnade)도 보인다.
크림반도에 20년 동안 짓은 큰 보론초프 궁전이 있고, 이곳은 작은 궁전으로 작년에고 올해도 수리 중이며,
당시 책 가격이 엄청 비싸서 책 한권이 소 3마리 가격인데 이 많은 책들을 도서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책은 하루만 빌려주고 반드시 반납을 해야 하는데 반납을 하지 않거나 다시 빌려가려면 책은 꼭 사야한다고 하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빌려주려고 조치인 것 같았다고 했다. 코인이 그려져 있는 기둥(Pam'yatnyk Olʹviyi) 앞에 섰는데 이곳이 그리스 사람을 뜻하는 그릭 파크(Greek Park)가 있는 곳으로 이 공원은 시티 공원과 연결되며, 시티 공원은 시청사에서 끝난다. 오데사 이름의 어원인 오데소스는 그리스인들이 살았던 취락으로 그들이 사용했던 코인을 그려 놓은 것이며, 이곳은 처음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점령했고, 다음은 오스만 터키가 다음은 러시아 제국이 점령했다. 이제는 넓은 가로수 길을 영어로 불루버드(Blvd)라고 하는데 이 산책로 중간에 ‘포툠킨 계단’과 ‘리슐리외 동상’이 있고, 길 끝에는 푸시킨 동상이 있으며, 가로수로는 마로니에(marronnier) 이다.
이 나무는 체스낫(chestnut)이라고도 하며, 열매는 반들반들해서 먹음직스럽지만 독성이 있어서 먹을 수 없다.
인가와 공원 사이에는 불루버드 산책로가 있고, 공원과 항구 사이엔 ‘프리모르스키 (Primorsky) 대로’가 있고,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어로 ‘바다와 접해 있다’라는 뜻으로 한자로 훈차한 것이 연해주(沿海州) 이다. 러시아의 극동 즉 우리나라 두만 강 위에 있는 ‘프리모르스키 주’의 행정 중심지가 블라디보스토크이며, 이제는 비록 볼 것은 없지만 오데사에서 가장 유명한 ‘포툠킨 계단’에 도착했다. ※보론초프(Prince Vorontsov, 1714~ 67): 외교관인 세미욘 R. 보론초프의 아들로 1782년 출생하여 1856년 오데사에서 사망했으며, 18세기 러시아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801년 육군에 입대 후 나폴레옹 전쟁(1806~15)에 참가하여 1815~18년 프랑스 주둔 러시아 점령군을 지휘했고, 1823년 크림반도와 오데사를 포함한 인구가 희박한 변경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공정하고 효율적인 행정체계를 확립하고 러시아 정착민들의 대거 이주시켜 무역과 산업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고, 1844년 카프카스 지역의 총독과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통제권을 확고하게 다졌다. 1848년까지 다게스탄의 영토를 러시아의 지배하게 하였으며, 농노해방과 온건 개혁조치를 지지했으며,
1853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1856년 육군원수가 되었으나 사망했다.
[리슐리외(Richelieu) 동상, 포툠킨 계단(Potemkin stair)과 후니쿨라]
포툠킨 계단입구엔 ‘리슐리외(쥭 제 레쉘야, Duc de Richelieu) 동상’은 ‘듀크 상’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러시아 군에 입대하여 장군에 올랐고, 후에 오데사 초대총독에 임명되었다.그는 11년간 총독을 하면서 도시계획을 세워 도시민에게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1년 이내 집을 짓지 않으면 다시 회수하는 방법으로 4천 채의 건물을 세웠다고 하며, 경제, 문화 예술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1세의 명령으로 동상이 세웠으며, 동상은 세계 2차 대전 폭격으로 손가락 하나를 제외하고 기적적으로 남았고, 이젠 오데사의 가장 유명한 포툠킨 계단을 둘러볼 차례이다.
포툠킨 계단은 영화의 한 장면을 모르면 그저 평범한 계단인데 1905년 일어난 전함 포툠킨호의 반란을 혁명
20주년 기념으로 1925년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감독이 연출한 소련의 무성영화이다. 사실을 주제로 만든 영화지만 이 계단사건은 사실이 아니나 더 유명한 것은 영화 속의 한 장면으로 아래 ‘전함 포툠킨과 계단’에서 기록했으니 참고하시고 우리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가 후니쿨라를 타고 올라왔다. 포템킨 계단은 1841년 동쪽 흑해 쪽으로 역사적인 계단은 만들어졌으며, 높이 40m에 192개의 계단은 1928년 ‘불바르 계단’에서 ‘포템킨 계단(Potemkin stair)’로 개칭했고, 영화 속의 명장면으로 유명한 계단이다. 계단 동쪽엔 리슐리외 동상에서 항구로 가는 후니쿨라(funicular)가 있으며, 러시아혁명 때 코사크 친위대가 시민들을 학살한 ‘프리모리스키(Primorsky) 장면’을 촬영한 계단은 표시가 안 나지만 아래가 넓고 위가 좁다. 넓은 부두엔 해양무역조합, 어부의 아내 동상, 성 니콜라이 교회가 있고, 가장 높은 건물이 이 오데사 호텔은 (Captain of the port of Odessa)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포템킨(포툠킨): 예카테리나 2세는 90여명 정부와 즐겼으나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여 업무를 엄격히 분리했고
예외로 투르크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크림반도와 흑해로 진출하게 한 하급귀족 출신인 '포툠킨'이다. 1791년 죽을 때까지 여제와 같은 지위를 누렸고, 2년간 정부생활을 끝낸 뒤에도 계속유지 된 것은 그의 야심과 뛰어난 예지와 유능함을 겸비했기 때문이며, 1783년 투르크가 차지하고 있던 크림 반도를 빼앗아 병합했다. 예카테리나의 영광은 1787년 포템킨이 주선한 크림 반도의 항해로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 여제는 새로이 자신의 영토가 된 땅을 횡단했고, 오스트리아 황제, 폴란드 왕, 수많은 외교사절들이 왔다.
그녀를 축하하고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라고 불린 호화로운 행사를 즐겼는데 이렇게 불린 이유는 예카테리나가
배를 이용했고, 이 때 포템킨은 여제에게 치적을 자랑하고 빈민가를 숨기기 위해 여제가 이동하기 전 ‘위장(
세트장) 마을’을 옮겨 놓았는데 이를 ‘포템킨 빌리지’라고 하며, 겉만 화려한 거품경제의 경제 용어로 사용한다.
거짓을 정치적 용어로 사용할 때는 ‘포템킨 주의’라고 하며, 현재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미관, 관광, 교육장,
광고, 촬영, 훈련장소, 위장전술 등으로 ‘포템킨 빌리지’를 만들고 있다. 가옥은 전면만 있는 경우와 건물전체가 있는 경우, 마을과 도시 또는 무기와 유적 등의 유사품도 있으며, 경제 용어로는 ‘포템킨 빌리지’ 정치적 용어로는 ‘포템킨 주의’라고 하고, 거시기 크기가 큰 것으로도 알려졌다.
※전함 포툠킨과 계단: 1905년 여름 흑해 러시아함대 포툠킨 전함에서 혁명파군인들의 봉기로 포악하게 굴던
장교들이 바다에 던져졌고, 오데사 군항에 도착하여 혁명시민의 반란을 지휘했다. 다음날 진압을 위해 함대가 나타났으나 정부군함은 포툠킨 전함에 발포하지 않는데 그들은 학대받는 병사들의 마음이 서로 통한 때문이었는데 이 영화는 1925년 사실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혁명 선전용으로 만들어졌다. 계단의 학살 사건은 실재가 아니며, 혁명 때 있었던 '피의 일요일'(1905. 1. 22)을 이 계단에서 재현했는데 계단으로 대피하는 시위 시민을 아래에서 황제 친위 코사크 족 기병대가 막아섰다. 위에서 군대들이 열을 맞춰 계단을 내려가면서 학살하는 장면인데 가장 압권인 것은 유모차를 잡고 있던 검은 두건을 쓴 여자가 살해되어 유모차는 계단 아래쪽으로 구르면서 아기가 탄 유모차 이미지와 잔혹한 군인들의 모습이 교차되어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 혁명(1905~17): 1905년 1월 제정 러시아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평화시위의 군중을 군대가 무차별
살상하여 절정에 이루었으며, 엄청난 파업으로 황제는 헌법제정과 의회의 창설을 약속했다. 정부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군대의 통제권을 다시 장악해 혁명이 막을 내렸으나 1917년 3월 혁명은 차르체제를 붕괴시키고, 11월 혁명에서 볼셰비키는 권력 장악에 성공했다.
[코사크(Cossack) 족과 카자흐(Kazak) 족]
1. 코사크 족의 코사크는 영어이며, 터키어로는 ‘자유인’을 뜻하는 카작(Kasak, kazak)이 어원이며, ‘대장
부리바’에 나오는 코사크 족은 2차 대전 때 러시아를 도운 족과 독일을 도운 족이 있다.그들의 호전성과 잔인성은 항복한다고 치켜든 손마저 잘랐으며, 대화는 오직 칼로만 했고, 전쟁과 약탈을 직업으로 하는 용병들이며, 어릴 때 목축을 하면서 자연이 전사로 자랐다. 이처럼 독일과 소련에서 모두 '야만인'이라 불리면서도 그 양편으로부터 천부적인 전사들이라는 일치된 평가를 받았던 타고난 투사들이라 불렀던 그들은 유럽 정벌에 나섰던 칭기즈칸의 후손이다. 이들은 말 잘 타고 싸움 잘하며, 패배를 모르고, 자존심이 강해 어느 나라, 어느 정권에도 굴복하기 싫어하는 이 혈통 중에는 하나가 테러로 이름난 ‘체첸’인데 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직업이 군인이다.
250년간 러시아와 동유럽을 지배했던 제정 러시아의 황제들은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1918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공산혁명이 때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던 황제의 근위기병대는 모두가 코사크 족이다.
그 후 10여 년간 계속된 내전에서 공산당 정부의 적군(赤軍)에 최후까지 맞서 싸운 백군(白軍, 왕정 지지파)의
핵심도 코사크 족들이었는데 소련의 공산화로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갔다. 1939년 2차 대전 발발로 소련군복을 입고 다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붉은 군대의 코사크들은 거주 지역에 따라 돈 강 유역의 돈 코사크, 폴란드 국경 스텝(초원)에 살고 있던 쿠반 코사크가 있다. 그리고 시베리안 코사크 등 있는데 이들은 복장은 소련군복보다는 고유의 양털모자와 체르케스카 코트를 입는 경우가 많았고, 전차보다는 말을 좋아한 것은 시대착오적이었지만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다. 모스크바까지 진격했던 나폴레옹은 ‘코사크 기병대 1만 명만 있으면 전 세계를 정복 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나폴레옹은 코사크 족보다 더 놀란 것은 추위에 강하고 눈 속에서 먹이를 찾아내는 강인한 말이었다고 한다.
또 겨울을 맞아 후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는 눈 속은 자동차보다 훨씬 더 쓸모가 있는 게 말이었으며, 특히
'코사크가 뒤 따라 오고 있다'는 공포심은 소련군 몇 개 사단보다도 더 효과가 컸다고 한다. 1941년 소련 침공한 독일군을 가장 괴롭힌 것은 신출귀몰한 ‘파르티잔’이라는 러시아 게릴라들이었다. 이를 색출하고 토벌하는데 안성맞춤인 코사크 족은 대부분 소련시민이어서 소련군에 복무했지만 소속감도, 충성심도 없고, 높은 급료와 지위가 보장됐던 황제의 근위대 자리를 빼앗긴 소련정부에 반감도 있었다. 이들을 회유하여 높은 급료를 주고 독일군에 입대시켰는데 자발적으로 독일군을 돕겠다는 코사크도 있었으며, 이들은 소련만이 아니라 유고, 루마니아, 체코 등 게릴라 활동이 있는 독일 점령지에 투입되었다. 빨치산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유고슬라비아 게릴라들은 코사크란 말만 들어도 두려움에 몸을 떨었으나 1945년 독일의 패배로 독일군에 협력했던 코사크 족은 소련정부로부터 민족반역자 재판에서 대부분 사형되었다. 소련군에 종군했던 코사크는 무공훈장을 받아 '사회주의국가영웅'들이 되었는데 지금도 그들은 말 젖으로 빚은술을 즐기면서 그들만의 생활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가고 있다.
2. 카자흐 족의 카자흐 뜻은 코사크와 마찬가지로 ‘자유인’인데 독립인 또는 방랑자라는 뜻도 있으며, 이들도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코사크 조과 같은 몽골족이지만 사는 방식이 달랐다.코사크 족은 전사의 집단이지만 카자흐 족은 유목민의 삶을 살아간 것이 차이가 있다.현재 독립한 카자흐스탄에 가장 많이 살며, 인구는 720만 명이고, 러시아 혁명 후 부유한 사람들이 중국으로 도주하여 지금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 125만 명이 살며, 몽골에 10만 명이 살고 있다.
[예카데리나(Catherine the Great) 2세 동상]
'예카테리나 광장‘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 했으나 광장보다는 주위 건물과 거리가 아름다웠고,
광장에는 ‘예카테리나 2세(재위1762~96)’의 동상이 있으며, 그는 오데사를 설립한 여황제이다. 그는 부동항이 필요해 제 2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항구로 오데사를 설립하여 1792년 오데사를 편입하고 1794년 도시 명을 오데사로 변경했는데 항구를 개설한 오데사의 원년으로 삼기에 창건기념탑이라고도 한다.예카데리나 2세의 이야기는 룬달레 궁전에 기록되어 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동상]
푸시킨 동상으로 가기 위해 다시 ‘불루버드(블브드, Blvd) 산책로’에 들어섰고, 조금 가다보면 BC6~7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사람들의 유적을 유리로 씌워놓았는데 야외박물관(Archaeological Excavations)이라고 한다.
야외박물관 속에는 유적보다 현대인이 행운을 빌며 유리 틈새로 던져 놓은 동전과 지폐가 더 많았고, 산책로
끝에는 1888년 세워진 ‘푸시킨 동상’이 있는데 그는 1년1개월을 오데사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가이드는 보론초브의 아내와 바람피운 이야기가 가이드북에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고 했으나 보론초브와 푸시킨은 몇 번이나 결투를 치른 후 결국 백작은 푸슈킨의 사면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거짓말? 푸시킨동상 뒤로 보이는 흰 건물은 ‘오데사 시청’인데 1906년 이전에는 금과 은 등을 교환하는 프레스센터였고, 이후로 시청 건물로 사용했다고 하며, 시청건물 전면에는 이오니아식 기둥이 장식되어 있다.
시청 앞에는 엄청나게 큰 프라다나스 나무와 30개가 넘은 도시를 가르치는 이정표(Distance Pointer)는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많은 도시를 나타내는 이정표인데 서울은 찾을 없었고, 모스코바까지는 1130km라고 되어있다. 사이로 오데사 고고학 박물관(Odessa Archeological Museum)이 보이며, 우축으로 돌면 해양 박물관
(Maritime Museum)과 해군박물관(Navy Museum)이 함께 있다. 앞거리에는 청동으로 만든 오데사 상징인 배의 닻 앵커 (Anchor)의 하트 모양은 ‘내 사랑 오데사(I LoveOdessa)’라는 뜻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 유서 깊은 대 귀족가문 출신으로 어머니는 아브람 하니발의 손녀였고,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근대 문학의 창시자로 데카브리스트와 관련된 정치시가 화근이 되었다.
1820년 키시나우로 유배되어 1820~23년까지 있으면서 ‘카프카스의 포로(1822)’를 썼고, 조지아 트빌리시의
오르벨리아니(Orbliani) 목욕탕을 극찬하며, ‘이곳보다 더 좋은 목욕탕은 없다.’라는 글을 남겼다. 카즈베키에서 3년간 머물렀고, 1823년 오데사로 이송되어 자신의 상관이자 지방 현지사인 보론초프 백작의 아내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으며, 그는 몇 번이나 결투를 치른 후 결국 백작은 푸슈킨의 사면을 요구했다.
‘무신론 수업'을 받은 죄로 1824년 어머니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예’로 유배되면서 가장 왕성한 창작을 하였다. 1825년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진압한 니콜라이 1세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푸시킨이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1826년 모스크바 귀환을 허락하고 돌아온 그를 만나 개혁을 약속했다.
1831년 격렬한 구애 끝에 당대미인이며, 13살적은 18세 나탈리야(1812~63)와 결혼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녀의 사생활은 문란하여 니콜라이 1세와 불륜의 관계를 맺기도 했다.
1837년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꾸민 음모에 말려들었고, 아내를 탐하는 남자들로부터 사랑과 명예를 지키려
부인을 사랑한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해 치명상을 입고, 2일 후 죽었다.
그가 죽기 전 쓴 시가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이며, 38세 나이에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니콜라이
1세는 결투를 금지시켰고, 그가 죽은 후에 나탈리아는 황제애첩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며, 1844년 재혼했다.
2012년 6월 국내 건립을 추진하던 민관합동 운영기관인 한러대화(Korea-Russia Dialogue)가 건립한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앞에 건립된 푸시킨 동상이 있다.
[오데사(Odessa) 오페라 발레 극장]
오페라 발레극장으로 가는 보도 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헐리우드 바인 거리(Vine St)에 유명한 스타의 이름과
손자국이나 발자국이 새겨져 있듯이 이 도시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과 직업은 그림으로 그렸다. 처음 오페라 극장은 800명의 좌석을 가진 나무로 지어졌으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87년 오스트리아 건축가가
설계한 네오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했고, 11년 동안 계속 증축되어 현재는 1636개의 좌석이 있다. 외부는 웅장한 바로크양식이며, 내부는 아기자기한 로코코양식이고, 내부 인테리어 하는데 금 9kg가 사용됐다고
하며, 이 극장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에 하나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해도 될 만하다.
입구 우측은 고대그리스 희극의 한 장면인 ‘새’를 조각했고, 좌측은 현대그리스 작가 에브리피디스(Evripidis)의
비극 ‘이폴리트(Ippolit)’ 장면을 조각했고, 정면 꼭대기 사륜마차를 타고 있는 조각이 있다. 이 조각은 음악여신 무즈(Muse)이며, 1주일에 4번 공연이 있고,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으며, 극장 앞 정원에는 자메이카 로즈 홀에서 봤던 로열폰티아나 나무 같이 생긴 것이 땅을 향해 날개를 펼친 모습이었다. 경기가 나빠 몫 종고, 멋진 상가건물 200㎡의 1층만 가격이 5억2천만 원 한다고 하여 싸니 비싸니 논쟁을 하다가 우리나라 60평짜리 아파트 비하면 그래도 싸다는 결론으로 끝맺었고, 이제는 시공원에 도착했다.
[시 공원(City Garden), 파시지 호텔(Otelʹ Pasazh)]
오페라 발레 극장에서 직선거리로 500m 서쪽으로 가면 시 공원이 나오며,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레오니드유티오소프(1895~1982년)라는 기념비(Monument to Leonid Utiosov)라고 하는 동상이다. 가이드는 재즈 음악가라고 했으나 인터넷에서는 영화배우로 오데사에서 출생하고 오데사에서 죽었으며, 그는 1934년 포템킨 영화 주연을 한 남자로 이 영화에만 출연한 사람이라고 한다. 긴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기념비와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아 빈틈에 나도 같이 기념촬영을 했고, 동상이 쳤다보고 있는 곳에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은 호텔이라고 한다. 돈이 부족해서 중단된 상태이지만 외부의 아르누보 양식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건축물로 같은 양식인 탈린의 톰페아 성은 아르누보 양식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이 건물은 한눈에도 알 수가 있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지도에는 빈 의자는 일프와 페트로프 기념비(Monument to Ilf and Petrov)라고 하여 조금은 이상했으나 가이드는 오데사의 소설가가 쓴 것으로 유명한 ‘12번째 의자’를 의미한다고 했다.
시 공원 앞 남쪽엔 영어로 통행인이라는 파시지(Passage) 호텔은 19세기 건축된 아름답고 우아한 바로크
양식으로 유명한 건물로 지붕은 피라미드 형식의 유리로 자연채광을 했고, 현재 2년째 증축중이다. 호텔 내부는 쇼핑센터인데 독립 후 장사가 잘 되지 않는 다고 하며, 벽들의 조각이 너무 아름다웠고, 호텔을 나서면 서쪽 길 하나를 건너면 성당 광장과 대성당이 나오며, 먼저 광장으로 갔다. ※아르누보(Artnouveau): 불어로 ‘새로운 예술’ 뜻으로 19세기 말에서 1910년 사이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양식으로 자연의 아름다운 곡선(덩굴, 잎 등)을 모티브로 삼았으나 기능성이 강조되면서 소멸했다.
[성당 광장(Cathedral Square)과 프레오브라젠스키 대성당(Preobrazhensky Cathedral)]
성당광장 중앙엔 미하일 보론초프 기념비(Monument to Mikhail Vorontsov)가 있고, 기념비 아래는 총독시절중요한 사건을 조각해 놓았으며, 대성당에는 보론초프와 그의 부인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스파소 프레오브라젠스키 대성당(Spaso Preobrazhensky Cathedral)은 1930년 스탈린에 의해 파괴도기 전까지는 오데사의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교회이었으며, 지금은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다행이도 성당 안에서 사진이 가능했는데 아주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아직도 수리를 하고 있었고, 서 있을 수 없는 사람만 앉을 의자만 있으며, 신도들이 앉을 의자가 없었다.
[오데사(Odessa) 관광]
시간이 남아 30분간 차를 타고 시내를 돌기로 했고, 차를 타려가다가 베드로와 가브릭 기념상(The Monument
to Peter and Gavrik)을 보았으며, 오데사 기차역은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1952년 다시 복구했다. 2006년 리모델링했으며, 기차역은 궁전이나 콘서트 홀 같이 너무 멋지게 생겼는데 키예프까지 가는 침대열차를 현대에서 만들었다고 가이드가 얘기했고, 오데사는 버스, 전차, 기차 등의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가격도 저렴해서 130원 정도인데 65세 이상이면 무료이며, 정치인들과 주민들의 생각이 많이 다르다고 했는데 아마도 가이드와 주민들은 친 러시아 같았다.
우리 호텔에서 약 5km 동남쪽에 있는 4월 10일 광장은 타원형의 로터리 안에 있으며, 2차 대전 때 루마니아와
독일에서 해방된 40주년 1984년 세운 오벨리스크 꼭대기에는 승리하는 전사의 상징적인 황금별이 있다. 이 별을 승리의 날개(Wings of Victory)라고 하며, 이 탑은 고전적인 소비에트 기념비로 대리석 판에는 소련의
오데사 영웅 이름이 새겨져 있고, 동남쪽에는 아크 팰리스 호텔(Ark Palace)이 보인다. 새벽 산책하다가 이름 모르는 작은 교회도 있었고, 공원에서 법과 질서의 수호자를 기리는 기념비(Memorial to Defenders of Law and Order)도 보았으며, 아침 식사를 마치고 몰도바 국경으로 향했다..
2022-03-1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