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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嘉靖) 무오년(1558년ㆍ명종 13년) 초여름. 나는 진주목사 홍지(泓之) 김홍(金泓)과 수재(秀才) 인숙(寅叔) 이공량(李公亮ㆍ남명 조식의 자형)과 고령현감을 지낸 우옹(愚翁) 이희안(李希顔)과 청주 목사를 지낸 강이(剛而) 이정(李楨) 과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였다. 산 속에서는 나이를 귀하게 여기고 벼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술잔을 돌리거나 자리에 앉을 때에도 나이순으로 하였지만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10일. 우옹이 초계(草溪)에서 와서 뇌룡사(雷龍舍)에서 묵었다.
11일. 계부당(鷄伏堂)에서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났는데, 집의 아우인 조환(曺桓)이 따라나섰고 유생인 원우석(元右釋)은 승려가 되었다 속세로 돌아온 사람으로 깨달음이 있고 노래를 잘 하여서 불러 함께 떠나게 되었다. 문을 나서서 겨우 수십보 쯤 걸었을때, 어린아이가 앞을 가로막으면서 말하기를, “도망친 종을 좇아왔습니다. 종이 이 길 아래에 있지만 잡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옹이 갑자기 구사(丘史) 네댓 사람을 지휘하여 좌우로 포위하게 하였는데, 조금 지나서 과연 남녀 8명을 포박하여 말 앞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말을 달려 길을 떠나면서 함께 탄식하기를, “우연히 손을 쓰게 되었는데, 원망하기도 하고 덕이 있다고도 하니 조물주가 무엇을 부려서 인가.”라고 하였다. 내가 가만히 탄식하기를, “우옹이 오십년 동안 소매 속에 손을 넣고 쓰지 않아 주먹이 메주와 같이진 줄 알았더니 황하와 황수 유역 천만 리의 땅을 수복할 수는 없더라도, 오히려 잠깐의 사이에 방법과 계략을 지휘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좋은 수완이라고 이를만 하구나.”라고 하면서 서로 웃으면서 출발하였다.
저녁이 되어서 진주에 이르렀다. 홍지와 사천에서 배를 타고서 섬진강을 거슬로 올라 쌍계에 들어가기로 약속했었는데 마현(馬峴)에서 갑자기 종사관(從事官) 이준민(李俊民)을 만나게 되었다. 호남에서 그의 어버이를 뵈러 오는 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인숙 이공량이었다. 다시 홍지가 체차되었음을 듣고 둘러서 인숙의 집에 투숙하였는데 인숙은 바로 나의 매부이다.
12일. 큰비가 내렸다. 홍지가 서찰과 음식을 보내와 더 머물렀다.
13일. 홍지가 와서 소를 잡고 풍악을 베풀어 우옹과 홍지와 이준민이 함께 다투듯 술을 마신 뒤 그쳤다.
14일. 인숙과 함께 강이의 집에 가서 숙박하였는데, 강이가 우리를 위해 전도면(剪刀糆), 예락재(醴酪齋), 물고기 회와 흰고 노란 경단, 푸르고 붉은 절편을 만들었다.
15일. 또 강이와 함께 모두 장암(場巖)으로 향했는데, 강이의 서제인 이백(李栢)도 따라나섰다. 먼저 옛 장군이었던 이순(李珣)의 쾌재정(快哉亭)에 먼저 올랐는데, 조금 뒤에 홍지의 중씨(仲氏)인 김경(金涇)과 홍지의 아들 김사성(金思誠)이 이어 이르렀고, 홍지는 가장 늦게 도착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사천의 군수 노극수(魯克粹)가 고을의 주인 자격으로 와서 만나보고 조촐한 술자리를 열었다. 모두 큰 배에 오르니 사천 군수 노극수는 술과 안주를 실어주고 배에서 내려 돌아갔고 충순위(忠順衛) 정당(鄭澢)이 물품들을 감독하였다. 열 명의 기생이 피리, 생황, 북, 나발을 모두 벌여놓았으나, 이 날은 회간국비(懷簡國妃) 한씨(韓氏ㆍ성종의 아버지인 덕종의 비. 소혜왕후 한씨)의 기일이어서 풍악을 연주하지 않고 채소를 먹었다. 그때 유생인 백유량(白惟良)이 배 위로 나아가 인사하고 동행하게 되었다.
이날 밤 밝은 달이 한낮같고 은빛 물결은 잘 연마한 거울 같아서 천근(天根)과 옥초(沃焦)가 모두 자리에 함께 있는 듯하였다. 사공들이 번갈아 노래를 부르니 교룡(蛟龍)이 사는 굴까지 메아리가 퍼지는 듯하였다. 삼태성(三台星)이 어느새 하늘 가운데에 이르고, 동풍이 희미하게 일어났다. 서둘러 돛을 펴고 노를 걷어 바람을 타고 강을 올라가니 사공이 조금 뒤에 하동을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자리를 베게삼아 뒤엉켜 잠들었는데 세로로 눕기도 하고 가로로 눕기도 하였는데, 홍지가 펴놓은 담요와 겹이불은 폭이 매우 넓어서 나는 애초에 그의 이불 한쪽에 끼어 잠을 청했다. 점점 밀치고 들어가서는 홍지를 자리 밖으로 밀어냈으니 이 어찌 꿈속에 빠져 혼미하여 자기의 물건이 남의 소유가 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16일. 새벽빛이 희미하게 밝아지자 섬진(蟾津)에 이르러 사람들을 깨우는 사이에 곤양(昆陽) 땅을 지나버렸다고 하였다. 빛나는 해가 처음 떠오를때 만경이 붉게 물들고, 양쪽 언덕의 푸른산이 출렁이는 물결 속에 거꾸로 비쳤다.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다시 연주하니 노랫소리와 나발소리가 번갈아 일어나고 아득히 구름 속에 솟아 나온 산이 서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이었는데 이곳이 두류산의 외면이었다. 서로들 기뻐하고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방장산이 삼한에 있다더니, 멀지 않은 곳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고, 강가에 삽암(鍤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 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혼란해질 것을 예견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징초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는데, 하룻 저녁에 달아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아! 국가가 망하려 하니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착한 사람을 선양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섭자고(葉子高)가 용을 좋아한 것 만도 못하니, 나라가 어지럽고 망해가는 형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가득 따라놓고 거듭 삽암을 위해 길게 탄식하였다.
정오가 될 무렵 도탄에 배를 정박하니 어수룩한 늙은 아전들이 소골다(蘇骨多ㆍ좌수나 별감 등이 썼던 꼬깔 모양의 관)를 쓰고 와서 절을 하였는데, 바로 악양현과 화개현의 아전들이었고, 단령(團領)을 입은 몇 명의 아전들이 찾아와서 절을 하였는데, 바로 김홍지가 다스리는 진주 관내에서 규찰과 권농 등을 맡은 관리였다. 강가에는 산촌이 위아래로 연이어 있고, 어지럽게 생긴 밭이랑이 지금은 열에 하나 정도만 남아 있지만, 옛날에 임금의 덕화가 미쳐 백성과 물산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도탄에서 1리쯤 떨어져 정여창(鄭汝昌)선생이 거처하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선생은 바로 천령의 유종(儒宗)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에 실마리를 열어준 분으로 처자식을 이끌고 산 속으로 들어가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喬桐主ㆍ연산군을 가리킴)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인의 행과 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홍지와 강이가 먼저 석문에 도착하니, 이곳이 쌍계사(雙磎寺) 동문이다. 푸른 빛깔의 바위가 양쪽으로 서서 한 길 남짓 정도 열려 있는데, 학사 최치원이 네 글자를 직접 새겨 놓았는데, 오른쪽에는 ‘쌍계’, 왼쪽에는 ‘석문’이었다. 돌에 깊게 새겨진 글자의 획이 큰 것은 사슴의 정강이와 같았다. 천년(千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남아 있었는데, 이후에 몇 천 년이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서쪽 가로 한 시내가 벼랑을 가르고 돌을 굴리며 백 리 밖에서 흘러오고 있었는데, 바로 신응사(神凝寺)가 있는 의신동(擬神洞)의 물길이고, 동쪽 가로 한 시내가 구름 속에서 새어나와 산을 가르고 아득히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고 있었는데, 바로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靑鶴洞)의 물줄기이다. 절은 두 시내의 사이에 있는데 ‘쌍계’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높이가 10자 정도 되는 비석이 귀부 위에 우뚝 서 있는데, 절문 밖 수십 걸음 지점에 있었다. 최치원의 글과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 앞에는 높은 누각이 있었는데 팔영루(八詠樓)라고 편액이 되어 있었다. 뒤의 비전(碑殿)은 중수하는 중이어서 기와가 아직 덮여 있지 않았다. 이 절의 승려 혜통(慧通), 신욱(愼旭)이 다과를 내오고, 산나물을 곁들여서 빈주의 예로 우리를 대접하였다. 이날 초저녁에 갑자기 구토와 설사가 나서 음식을 먹지않고 누워 있었다. 우옹이 나를 간호하며 서쪽 행랑에서 잤다.
17일. 이른 아침에 홍지가 와서 문병하였다. 갑자기 전라도 어란달도(魚瀾㺚島)에 왜구(倭寇)의 배가 와서 정박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바로 유람 계획을 취소하고 아침밥을 서둘러 먹고서 돌아가려 하였다. 몇 잔 술을 돌렸다. 이에 앞서 호남 유생 김득리(金得李), 허계(許繼), 조수기(趙壽期), 최연(崔硏) 등이 먼저 이 절에 와 있어서 이들을 모두 법당으로 맞이하여 한 차례 술을 돌리고 풍악을 울렸다. 갑자기 작별하게 되자 서로의 행색이 매우 급하여 ‘북산이문(北山移文)’에 관한 일은 토론해 볼 겨를도 없었다.
어제 배 안에서 잠시 홍지가 허리에 자주색 띠를 매고 있어서 내가 “이는 토끼나 원숭이를 묶는 물건인데, 도리어 토끼나 원숭이에게 묶여 갈까 두렵습니다.”라고 농담을 하고 박수를 치며 한바탕 웃었는데, 이에 이르러 과연 그러하였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우리들이 수행에 힘쓰지 않아 한 늙은 벗을 보호해 함께 지기석(支機石) 위에 앉아 창자에 가득한 티끌을 토해내고 금화산(金華山)의 무한한 정기를 호흡하여 늘그막의 절반 양식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생 봉월(鳳月), 옹대(甕臺), 강아지(江娥之), 귀천(貴千)과 피리 부는 천수(千守)를 남겨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냈다.
큰 비가 내려 종일토록 그치지 않고 음산한 구름이 사방에 자욱하여 이 바깥 인간 세상과는 몇 겹의 구름과 물이 중첩하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정오에 이르러 호남의 역리가 종사관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연대(烟臺)의 보고에 따르면 어란달도에 나타났다고 하는 왜선은 바로 몇 척의 우리 조운선이라는 것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홍지의 골상이 연분이 없어서 도끼 자루 하나 동안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홍지는 셀 수 없이 중생을 제도하는 계율을 닦았는지,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연이어 가져오고 기별과 서찰이 계속 이어져 이르렀다. 육갑(六甲ㆍ쌍륙과 비슷한 놀이기구)과 취사 도구의 준비를 모두 강국년(姜國年)이 맡고 있어서 우리들은 모두 계옥의 누가 됨을 알지 못하였다. 강국년은 진주의 아전이다.
이날 강이의 집안 사람 이응형(李應亨)이 와서 절문에 이르렀다. 저녁에 인숙이 설사를 하고 신음을 하였다. 저물녁에 강이가 갑자기 가슴과 배의 통증을 호소하더니, 토한 것이 두어말이나 되었다. 창자가 뒤틀리고 위가 뒤집히는 듯한 기세로 매우 괴로워하더니 설사가 점점 급해졌다. 소합원(蘇合元ㆍ위장을 맑게 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하는 약)으로도 효험이 없었고, 다시 청향유(淸香油ㆍ맑고 깨끗한 향기가 나는 기름)를 투약했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가 예부터 친압했던 강아지가 그의 머리맡에서 간호했는데, 새벽녘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막연히 고개를 들고 말하기를, “지난 밤 가슴이 하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내 죽더라도 여러분들이 곁에 있는데, 어찌 부인의 손에 죽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제군들이 그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그대도 겁쟁이구려. 오래 살려는 생각을 항상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잠시 대단치 않은 병에 걸렸는데도 죽을 것을 안타까워한 것이네. 죽고 사는 것이 큰일이지만, 어찌 이처럼 하찮은 병으로 잘못되겠는가?”라고 하였다.
18일. 산길이 젖어 미끄러워 불일암에 올라가지 못하고, 시냇물이 불어나 신응사로 들어가지 못하여 쌍계사에 그대로 있었다. 호남순변사(湖南巡邊使) 남치근(南致勤)이 이인숙에게 술과 음식을 보내왔는데, 종사관의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진사 하종악(河宗岳)의 종 청룡(靑龍)과 사인(舍人) 계회(季晦) 정황(丁璜)의 종이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와서 인사를 했다. 신응사 지임인 윤의(允誼)가 와서 인사를 했다.
내 동생이 타던 말이 병이 나서 접천(蝶川) 밖에 사는 진(塵)이라는 사람에게 맡겨서 돌보도록 부탁하였다. 저녁에 우옹과 함께 뒤채 서쪽에 있는 방장(方丈)의 방에서 함께 잤다.
19일. 재촉하여 아침을 먹고는 청학동으로 들어가려 하였는데, 인숙과 강이는 병이 들었다고 하고 머물렀다. 진실로 속세와 끊어진 세계는 인연이 없으면 신명이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겠다. 인숙과 강이가 예전에 한 번 들어왔었던 것은 바로 꿈속에서였지, 실제로 왔던 것은 아닐 것이다. 홍지와 견주어 보면 차이가 있지만, 이들도 일을 정리하는 인연이 없는 듯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세 번이나 이곳에 들어왔었지만 속세의 인연을 아직 다 버리지 못했다. 팔십 된 노인이 벼슬도 없이 세 번씩이나 봉황지(鳳凰池)에 들어갔던 것과는 오히려 내가 양보하고 싶지 않지만, 세 차례나 악양에 들어갔으나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과 비교해 보면 그렇지 않았다.
이날 아침 김경이 병 때문에 함께 가는 것을 사양하고 기생 귀천(貴千)을 데리고 급하게 떠났다. 김군은 이때 나이가 일흔 일곱이었지만 나는 듯하여 처음에는 천왕봉까지 오르려 하였으니 사람됨이 마치 이원(利園)에서 노닐다 온 사람처럼 대범했다.
호남에서 온 네 사람과 백유량, 이씨 두 유생이 동행하였다. 북쪽으로 오암을 오르는데, 나무를 잡고 잔도를 오르면서 나아가는데 원우석은 허리에 찬 북을 치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불고, 두 기생이 따르면서 선두를 이루었다. 제군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물고기를 꼬챙이에 꿴듯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중간 대열을 이루었다.
강국년과 음식을 맡은 사람과 음식을 운반하는 종 등 수십 인이 후미 대열을 이루었다. 승려 신욱이 길일 인도하며 나아갔다. 사이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언경’, ‘홍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오암도 ‘시은 형제’라는 글자를 새겼으니,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이름을 새겨 억만년토록 전하려 한 것이리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 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거론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구차하게 원숭이와 너구리가 사는 숲 속 덤불의 돌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구한다. 이는 나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해, 후세 사람들이 날아간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두예(杜預)의 이름이 전하는 것은 비석을 물 속에 가라앉혀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업적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 걸음에 한 번 쉬고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면서 그제서야 불일암에 도착하였는데, 바로 청학동이다. 암자는 허공에 떠있는 듯하여 아래로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동쪽으로 높고 가파르게 솟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은 향로봉(香爐峯)이고, 서쪽으로 푸른 벼랑을 깎아내어 만 길 절벽으로 우뚝 솟은 것은 비로봉(毘盧峯)으로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여 살면서 때때로 날아올라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아래에는 학연(鶴淵)이 있는데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였다. 좌우 상하에는 절벽이 빙 둘러 있고, 층층으로 이루어진 폭포는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쏟아져 내리다가 합쳐지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수초가 우거지고 초목이 무성하여 물고기나 새도 왕래할 수 없었으며,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왕래할 수 없는 약수도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바람과 우레 같은 폭포 소리가 서로 얽혀, 천지가 개벽하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 안에 신선, 거령, 큰 교룡, 작은 거북 등이 살면서 영원히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잘라 다리를 만들어, 겨우 그 초입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낀 돌에는 ‘삼선동’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옹과 내 동생 및 원생 등 몇 사람이 나무를 부여잡고 내려가 배회하며 이리저리 둘러보고서 올라왔다. 나이가 어리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은 모두 향로봉에 올랐다. 돌아와 불일암에 모여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다. 절문 밖에 있는 소나무 아래로 나와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음껏 술을 마시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부니, 그 소리가 암자 주위에 울려 퍼지고 산봉우리에도 가득하였다.
동쪽으로 있는 폭포는 나는 듯 백 길 낭떠러지로 쏟아져 학담(鶴潭)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우옹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물이란 만 길의 골짜기를 만나면 아래로만 곧장 내려가려고 하여, 다시는 의심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내려가니, 이곳이 바로 그곳이네.”라고 하였더니, 우옹이 말하기를, “그렇네.” 하였다. 정신과 기운이 상쾌하였지만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뒤쪽 능선으로 올라가 두루 지장암(地藏菴)을 탐방하니 모란이 활짝 피어있었다. 한 송이가 한 말 정도가 되는 붉은 꽃이었다. 이곳에서 곧바로 내려가 한 번에 몇리를 가서야 겨우 한 차례 쉴 수 있을 정도로 가파랐다. 양의 어깻죽지를 삶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쌍계사로 돌아왔다. 처음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더니, 아래쪽으로 내려올 때에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내려갔다. 그러니 어찌 선(善)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惡)을 따르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쉽지 않겠는가.
인숙과 강이가 팔영루(八詠樓)에 올라 우리를 맞이하였다. 저녁에 인숙, 우옹과 함께 다시 절 뒤채의 동쪽 방장의 방에서 잤다.
20일. 신응사로 들어갔다. 절은 쌍계사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사이에 허름한 주막 몇 집이 있었다. 절 문 앞 백 걸음쯤 되는 곳 칠불계곡 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줄지어 앉았다. 시냇물이 험하고 좁아 안장을 풀고 말등에 올라 냇물을 건넜다. 주지 옥륜(玉崙)과 지임 윤의가 나와서 우리 일행을 맞이하였다.
절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로 절 앞의 시냇가 바위로 가서 그 위에 벌여 앉았다. 인숙과 강이만을 바위의 가장 높은 곳에 앉히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비록 위급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자리를 잃어서는 안되네. 만일 그대들이 시냇물에 빠진다면 올라올 수 없을 것이네.”라고 말하니, 그들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자리를 뺏지않기를 바라네.”라고 하였다.
최근 내린 비에 불어난 시냇물이 돌에 부딪혀 솟구쳤다가 부서지니 만 섬 구슬을 다투어 내뿜는 듯하기도 하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는 듯하기도 하며, 희뿌연 은하수에 별들이 쏟아지는 듯하기도 하였다. 또한 손님을 맞아 잔치를 벌인 요지에 비단 방석이 널려 있는 듯하기도 하였다. 용과 뱀이 비늘을 숨긴 듯한 것은 깊어서 헤아릴 수 가 없었고, 소와 말 같은 형상을 한 우뚝한 돌들이 셀 수 없이 널려 있었다. 구당협(瞿塘峽)의 입구 정도라야 변화하여 출몰하는 것을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화공의 노련한 솜씨를 숨김없이 마음껏 드러낸 곳이었다.
서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넋을 잃고서 바라보면서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모두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했으나 기껏해야 큰 항아리 안에서 나나니벌이 우는 정도여서, 제대로 소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단지 시내의 귀신의 놀림거리가 될 뿐이었다.
이 절의 승려가 소반에 술과 과일을 차려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우리도 가지고 온 술과 과일을 내어 몇 잔씩 나누어 마시고 바위 위에서 춤을 추며 실컷 즐기다가 파하였다. 내가 고심 끝에 절구 한 수를 읊었다.
水吐伊祈璧(수토이기벽) / 물은 이기의 구슬을 토해내고,
山濃靑帝顏(산농청제안) / 산은 청제의 얼굴보다 푸르구나.
謙誇無已甚(겸과무이심) / 겸손도 과시함도 너무 심하지 않으니,
聊與對君看(요여대군간) / 여러 벗들과 함께 마주하여 대하네.
저녁에 서쪽 승려의 방에서 묵었다. 밤에 누워서 묵묵히 글을 외웠다. 그리고 일행에게 경각시키기를, “명산에 들어온 자로 그 누가 마음을 씻지 않겠으며, 누가 자신을 소인이라 하는 것을 기꺼워하겠는가? 마침내 군자는 군자가 되고 소인은 소인이 되고 마니, 한 번 햇빛을 쬐는 정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네.”라고 하였다.
21일. 큰비가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김사성이 갑자기 하직하고 비를 무릅쓰고서 굳이 떠났다. 백유량도 함께 떠났다. 기생 셋과 악공도 그들과 함께 떠나도록 하였다. 호남에서 온 제군들과 날이 저물도록 사문루(沙門樓)에 앉아서 불어난 시냇물을 구경하였다.
22일. 아침에 비가 내리더니, 저물녁에 개었다. 불어난 시냇물에 돌다리가 잠겨서 절의 내외가 통하지 않으니, 마치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되었던 상황과 같았다. 사람이 무려 40여 명이나 되니, 양식이 모자랄까 걱정이 되어 남은 양식을 헤아리고 평소에 먹던 양의 절반으로 줄였다. 술은 넉넉하여 아직도 수십 병이나 남아 있었다. 제군들이 모두 술 마시기를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남 선비 기대승(奇大升ㆍ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자는 명언 호는 고봉) 일행 11명도 비에 길이 막혀 상봉에 올랐다가 여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쌍계사와 신응사 두 절은 모두 두류산의 깊숙한 곳에 있어, 푸른 산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흰 구름이 산 문턱에 걸려 있다. 그래서 인가가 드물 듯 하지만 오히려 이곳까지 관청의 부역이 미쳐, 식량을 싸들고 부역하러 오가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주민들이 부역에 시달리다보니 모두 흩어져 떠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절의 승려가 나에게 고을 목사에게 편지를 써주기를 청하였는데, 부역을 조금 줄여달라는 내용이었다. 고할 곳 없는 사정을 가엾게 여겨 헝겊에 편지를 써서 주었다. 산에 사는 승려의 형편도 이러하니 산골 백성들의 사정을 알 수 있겠다. 정사는 번거롭고 부역은 과중하니 백성들이 끝내는 유망하여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보전하지 못하고 있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이를 염려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들의 등 뒤에서 나 몰라라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이 어찌 진정한 즐거움이겠는가?
인숙이 벼루를 쌌던 보자기에 시 한 수를 써달라고 부탁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써주었다.
高泿雷霆鬪(고은뇌정투) / 높은 풍랑은 우레와 벼락이 다투는 듯하고
神峰日月磨(신봉일월마) / 신령스런 봉우리 해와 달이 연마한 듯
高談與神宇(고담여신우) / 신응사에서 함께 한 고담준론에서
所得果如何(소득과여하) / 우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강이가 이어 다음과 같이 썼다.
溪湧千層雲(계용천층운) / 시내엔 천 층 구름과 같은 물기운이 솟구치고,
林開萬丈靑(임개만장청) / 숲에는 만 길 푸른 숲이 우거졌네.
汪洋神用活(왕양신용활) / 넘실대는 시내에 정신이 활기를 찾고,
卓立儼儀刑(탁립엄의형) / 우뚝 선 봉우리에 몸가짐이 반듯해지네.
23일. 아침에 산을 떠나려고 하자, 절의 주지 옥륜이 아침을 대접하고 우리를 전송하였다. 두류산에 크고 작은 가람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그중에서도 신응사의 수석이 가장 최고였다. 옛날 성 중려(成仲慮ㆍ남명의 친구로 자는 중려)와 함께 상봉에서부터 이 절을 찾은 것이 거의 30년이 되었고, 후에 하 중려(河仲礪)와 함께 이 절에서 여름 내내 머문 것도 20년이나 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저 세상으로 가고 지금엔 나만 홀로 왔으니, 은하수 가에 이르러 언제 올지도 모르는 뗏목을 망연히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법궁의 불탑에는 용과 뱀이 꿈틀거리는 듯한 모란꽃이 꽂혀 있고, 사이사이에 기이한 꽃들이 섞여 있었다. 외면의 모든 창가에도 복사꽃, 국화, 모란꽃이 꽂혀 있었는데, 오색이 뒤섞인 찬란한 빛이 사람의 눈을 현혹시켰다. 이 모든 것은 아직 우리나라 절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신응사는 구례현 나루터와는 20리, 쌍계사와는 10리, 사혜암과는 10리, 칠불암과는 10리의 거리에 있으며, 상봉까지는 하룻길이다.
절을 떠나 칠불암 시냇가에 이르니, 주지 옥륜과 지임 윤의가 나무를 시내에 가로질러 다리를 만들어서 모두 편안히 건널 수 있었다. 시내 양쪽에 횡으로 다리를 내어 모두 조금씩 걸음을 옮겨 천천히 건넜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 쌍계사 건너편에 닿았다. 혜통과 신욱이 시내를 건너와서 우리를 전송하였고, 건장한 승려 몇 명이 함께 와서 냇물 건너는 것을 도와주었다.
또 6, 7리 내려가 말에서 내려 시내를 건너려 하는데, 전날 말을 돌봐준 사람과 마을 사람 몇 명이 닭을 삶고 소주를 가지고 와서 우리를 대접하였다. 악양현의 아전들이 대나무를 엮어 들것을 만들어서 우리 모두를 어깨에 메고 시내를 건넜다. 시냇물이 험하고 급하게 흘러 바위에 흰 물결이 부서지고 있었지만 우리 일행을 건네주던 노복이 한 명도 넘어지지 않았으니, 수월하게 건넜다고 하겠다. 누군들 수월하게 건너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오히려 때에 따라 수월하기도 하고 불리하기도 하니, 이도 운명이 아니겠는가?
시내를 건너 10리도 못가서, 하종악의 종 청룡과 그의 사위가 술을 가지고 와서 소반에 물고기와 고기를 차려놓았는데, 모두가 도회지에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 같았다. 청룡의 아내 수금(水金)이 옛날 서울에 살적에 둘을 혼인시켜준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인숙과 강이에게 인사하러 온 것이었다. 모두 두 사람을 희롱하였다.
배를 타고 가면서 점심을 먹었다. 악양현 앞까지 내려가서 배를 정박하고, 현창에 들어가 잤다. 강이는 악양현의 동쪽 몇 리쯤에 살고 있는 족숙모를 뵈러 갔다.
24일. 새벽에 흰죽을 먹고 동쪽 고개를 올랐다. 이 고개는 ‘삼가식현(三呵息峴)’이라 부르는데, 고개가 높이 솟아 하늘에 가로놓여 있어서, 올라가는 사람이 몇 걸음 가서 세 번이나 숨을 내쉰다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두류산의 원기가 여기까지 백 리나 왔지만, 오히려 높이 솟아 있어 작아지거나 낮아지려 하지 않는다.
우옹은 강이의 말을 타고 채찍질하여 혼자 먼저 올라갔다. 제1봉의 고갯마루에 올라 말을 세우고 말에서 내려 바위에 걸터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말과 사람이 비오듯 땀을 흘리며 조금씩 올라가, 한참이 지나서야 이르렀다. 내가 느닷없이 우옹에게 면박하기를, “그대는 말 탄 기세에 의지하여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을 모르는구려. 만약 훗날 의를 좇게 되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앞장설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라고 하니, 우옹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꾸짖을 줄 알고 있었소. 내가 내 죄를 알겠소.”라고 하였다.
강이가 두리번거리며 두류산을 찾았으나 짙은 구름이 가리고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산 중에서 두류산보다 큰 산은 없고, 한눈 안에 두류산이 가까이 있건만, 여러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두류산보다 크게 어질지도 못하고, 눈앞에 접할 듯 가깝지도 않으며, 여러 사람의 눈에 환히 드러날 정도로 밝지도 않은 사람은 어떠하겠소?”라고 하였다.
우리는 사방을 두루 훑어보고, 동남쪽으로 푸르스름하게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것은 남해의 끝에 있는 산이고, 정동쪽에 파도가 연이어 물결치는 듯한 것은 하동과 곤양의 산들이며, 동쪽에 먹구름처럼 아득히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것은 사천의 와룡산(臥龍山)이었다. 그 사이에 마치 혈맥이 엉켜 있는 듯한 것은 강과 포구가 서로 연이어진 것이었다. 우리나라 산과 강의 견고함은 위나라가 보배로 여길 뿐만 아니라, 넓은 바다에 접해 있고 1백 치의 성에 근거해 있지만 백성들은 보잘것없는 섬나라 오랑캐에게 곤란을 당하고 있으니, 어찌 그 옛날 길쌈하던 근심을 하지 않겠는가?
늦게 횡포역(橫浦驛)에 이르렀다. 배가 몹시 고파서 인숙의 가방에서 과일과 말린 꿩고기를 꺼내 먹고 추로주(秋露酒) 한 잔을 마셨다.
정오에 두리현(頭理峴)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갈증이 심하여 차가운 샘물을 몇 바가지씩 마셨다. 그때 짚신을 신고 직령을 입은 사람이 말에서 내려 재빨리 지나가다가 강이를 보고 앉았다. 그가 가는 곳을 물으니, 바로 광양의 교관이었다. 그때 장끼 한 마리가 끼룩끼룩 울어 이백이 활을 잡고 화살을 시위에 얹어 살금살금 다가가자, 꿩이 갑자기 날아가 버리니, 우리 모두는 그 광경을 보고 웃었다.
우리가 구름 속이나 계곡에 있을 때 구름이나 계곡 물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가 인간 세계에 내려오니 보이는 것이 다른 것이 없고, 지나가는 광양의 교관이나 날아가는 산꿩 정도가 보였다. 그러니 어찌 안목을 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녁에 정수역(㫌樹驛)에 이르렀다. 역관 앞에는 정씨의 정문이 세워져 있었다. 정씨는 승선(承宣) 조지서(趙之瑞)의 아내이며,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현손녀이고 승선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거센 바람이 부딪히는 곳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어도 춥고 떨린다. 그는 연산군이 자신이 지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을 알고 10여 년을 물러나 살았지만, 화를 면할 수 없었다. 부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성을 쌓는 죄수가 되어, 젖먹이 두 아이를 끌어안고 살면서도 등에 신주(神主)를 지고 다니면서 아침저녁으로 제를 지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니 절개와 의리를 둘 다 이룬 것이 지금에도 이 정문에 남아 있다.
높은 산 큰 내를 보고 오면서 얻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견준다면, 십 층의 높은 봉우리 끝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하나 비치는 것이다. 바다와 산을 3백 리 길이나 유람하였지만, 오늘 하루 사이에 세 군자의 자취를 다 보았다.
물만 보고 산만 보다가 사람을 보고 그 세상을 보니, 산 속에서 10일 동안 품었던 좋은 생각들이 하루 사이에 좋지 않은 생각으로 바뀌었다. 후에 정권을 잡는 사람이 이 길을 와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런지 모르겠다. 또한 산 속에서 바위에 이름을 새겨놓은 것을 보았는데, 세 군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반드시 만고에 전해질 것이니, 어떻게 바위에 이름을 새겨 만고에 전하려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
홍지가 또 사람을 시켜 이 역관으로 음식을 보낸 지 벌써 4, 5일이나 되었다. 생원 이을지(李乙枝)와 수재 조원우(曺元佑)가 찾아왔다. 저녁에 이을지의 아버지가 술을 가져왔고 조광후(趙光珝)도 왔다. 밤이 되어 우점(郵店)으로 갔는데 겨우 말(斗)만한 크기의 방 하나뿐이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방에 들어갔지만 다리를 펼 수 없었고, 벽은 바람도 막아내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답답함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으나, 잠시 후에는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베고서 단잠이 들어 밤을 보냈다.
여기에서 사람의 습관이란 잠깐 사이에도 낮은 데로 달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도 한 사람이고 뒤에도 같은 사람인데, 전날 청학동에 들어가서는 마치 낭풍산(閬風山)에 올라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었고, 신응동에 들어가서는 요지에 올라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은하수에 걸터앉아 하늘로 들어가거나 학을 부여잡고 공중으로 솟구치려고만 하였고, 다시는 세상으로 내려오려고 하지 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몸을 굽혀 좁은 방에서 자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분수로 감내하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평소의 처지에 만족한다 하더라도, 수양하는 것이 높지 않으면 안 되고 거처하는 곳이 작고 초라해서는 안 됨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선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고, 악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인한 것을 알 수 있고 위로 향하는 것도 이 사람이 하는 것이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같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 한번 발을 들여 놓는 사이에 달려 있을 뿐이다.
25일. 역관에서 아침밥을 먹고 각자 흩어져 떠나려 하니, 서운한 마음이 들어 잠시나마 더 머물기로 하였다. 인숙은 한성에 살고 있고, 강이는 사천으로 돌아가야 하며, 우옹은 초계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가수(嘉樹)에 거쳐하며, 김홍지는 삼산(三山)에 살고 있다. 모두들 나이가 오십 내지 육십, 칠십에 가깝고, 각자 수백리 내지 오백리, 근 천리나 떨어져 있어 다른 날 함께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려울 듯하니, 어찌 헤어짐이 슬프지 않겠는가? 강이가 술잔에 가득 술을 붓고 말하기를, “이 순간의 이별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쳐다보기만 하고 할 말을 잊는다더니, 과연 이와 같구려.”라고 하였다. 우리 모두 할 말을 잊고 말을 타고 떠났다.
칠송정(七松亭)에 도착하여 상고대(上高臺)에 올랐다. 배를 타고 다회탄(多會灘)을 건너 인숙은 강을 따라 내려갔고, 강이는 1리를 더 가서 작별하였다. 나는 우옹과 함께 쓸쓸히 돌아왔는데, 망연히 넋을 잃은 듯 하였다. 저녁에 뇌룡사에서 자고, 우옹과도 작별하였다.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처럼 막 헤어지고 난 뒤 별이 드문드문 떠 있는 새벽에 이렇듯 감회에 젖어 있으니, 마치 춘정에 겨워하는 봄처녀 같았다.
제군들이 내가 두류산을 자주 다녀 산간의 일을 알 것이라 하여 나에게 이번 유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나는 일찍이 이 산을 왕래한 적이 있었다. 덕산동(德山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청학동, 신흥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용유동(龍遊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백운동(白雲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 장항동(獐項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다. 이러하니 어찌 산수만을 탐하여 왕래한 것이라면 번거로운 산행을 꺼리지 않았겠는가? 평생 동안의 계획인, 화산(華山)의 반을 빌어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으로 했던 것일 뿐이었다.
일이 마음과 어긋나 그 속에 살 수 없음을 알고, 배회하면서 돌아보고 눈물 흘리며 나온 것이 열 번이었다. 지금은 시골집에 매달려 있는 박처럼 걸어다니는 하나의 송장이 되어버렸으니 이번 유람도 재차 가기 어려운 걸음이 되었으니, 어찌 울적하지 않겠는가? 이런 심정을 읊은 시를 지었었다.
頭流十破黃牛脇(두류십파황우협) / 누렁 소의 갈비같은 두류산을 열 번이나 유람했고,
嘉樹三巢寒鵲居(가수삼소한작거) / 차가운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또 다른 시는 다음과 같다.
全身百計都爲謬(전신백계도위류) / 몸을 보전하는 백 가지 계책이 모두 틀어졌으니
方丈於今已背盟(방장어금이배맹) / 이젠 방장산과의 맹세조차 등지었구나
제군들이 모두 길 잃은 사람들이니, 어찌 나만 허둥지둥 돌아갈 곳이 없겠는가. 다만 술 취한 사람처럼 길 모르는 사람을 위해 먼저 인도하여 부봉(副封)하는 것일 뿐이다.
남명 조식 건중이 쓴다.(출처 : 南冥集)
◆조식(曺植ㆍ1501∼1572)은 자는 건중(楗中), 호는 남명(南冥),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어려서부터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섭렵하고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병략(兵略) 등에 널리 통했으며, 또한 좌구명(左丘明)ㆍ유종원(柳宗元)의 문장과 노장학(老莊學)에 심취, 초탈(超脫)의 경지에 이르렀다.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처음 읽고 크게 깨우친 바 있어 이후로 유학에만 힘써 대학자로 추앙받았다. 중종 때부터 명종ㆍ선조 때까지 삼조(三朝)에 걸쳐 그에게 여러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덕천동(德川洞)에서 선비를 모아 강학(講學)에 힘쓰는 등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문하에서 오건(吳健)ㆍ김우옹ㆍ정구(鄭逑)ㆍ정인홍(鄭仁弘)ㆍ최영경(崔永慶)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한 학파를 형성하였으며, 그의 문인들은 스승의 기상과 학풍에 영향을 받아 대체로 은일적(隱逸的)인 학풍을 지녔고 특히 절의(節義)를 중시하였다. 광해군 15년(162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