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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 15주차(돌고지재 - 고운동치)
2004년 8월 29일(일요일) 맑음
드디어 지리산 품안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25인승에서 33인승으로 승격된 애마가 남해고속도로 진입을 위해 낙동강을 건널 쯤에 물금 나루 쪽을 내려다보고는 낙남종주 시작점인 메리 삼거리를 찾아본다. 이제 대원들과 함께하는 마루금의 감상도 다음주 뿐 이리라.
시원하게 달려서 나는 처음 들려보는 문산 휴게소에서 휴식을 하며 미비한 간식들도 준비들을 한다.
회장님이 늦잠을 자서 점심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김밥을 사서 들고 오자 출발 전에 전화만 했어도 같이 준비하여 가져 올수 있었다며 연자 아줌마가 안타까워한다. 그러자 이수형님 형수는 철수가 맨날 김밥을 사서 오기에 오늘은 일부러 전화까지 해서 함께 도시락을 준비 하셨다며 밥만 한 그릇 더 퍼서 가져오면 되었을 것 이라며 같이 걱정해 준다.
“회장님은 오늘 굶어도 배부르겠소”
16호 태풍 차바(태국 말로 열대의 꽃이라는 의미라 함)가 북상중이라 오후부터 비가 예상된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낌새 없이 화창하다. 지난 차주를 함께하지 못하여 들머리의 진입로가 궁금하다. 그러나 동주형님이 아예 말도 못 꺼내게 한다. 무조건 기사 분을 믿고 따르란다. 지난번 절골고개를 찾아가다 문산 나들목에서 잘못된 경험들을 한 바라 내가 미덥지 못하리라.
“흐흐흐 서운타 말거라 니 죄를 니가 알지 않느냐?”
남해고속도로에서 대진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대전 쪽으로 진행을 하여 서진주 나들목을 빠져 나와 잠시 지나니 높다란 봇둑이 나온다. 남강다목적 댐인 진양호다. 수문에는 방류를 조금씩 하고 있다. 아마 저녁에 온다는 태풍에 대비하나보다. 오른쪽으로 넓은 진양호를 바라보고 달리던 애마는 또 가화강의 수문을 그러니까 호수 쪽으로의 수문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애마 기수 ‘이 전무님’의 특별한 배려이리라.
(진양호 수문과 보뚝)
(진양호)
(가화강의 수문)
다시 2번국도와 만나 낙남종주를 통해 횡단을 했던 지점들을 눈도장 찍고 지나가니 완사역이 눈에 들어온다. “형님! 라면 끼리 묵운 데가 저기 아이가?” 광율이가 내 아픈 곳을 건드린다.
원전고개를 앞두고 애마는 우회전을 하여 지방도로를 따라 옥종면으로 간다. 지난주 산행을 마치고 들렸다는 옥종유황온천단지를 지나 59번 국도를 만나 좌회전을 하여 다시 횡천면으로 내려오니 왼쪽의 계곡에는 물이 제법 많이 내려간다.
돌고지재를 경계로 해서 이곳 옥종 쪽의 물줄기는 아마 덕천강으로 해서 남강으로 흐를 것이며 횡천쪽은 섬진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다시 남해바다에서 만나겠지만 그리 높지는 않은 재를 사이에 두고 둘 물줄기의 여정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골짜기 좁은 논에도 벼가 익어가기 시작한다.
몇 굽이를 돌아 오르막을 서서히 오르니 하동군 옥종면과 횡천면의 경계인 오늘의 들머리 돌고지재다( 310m 10:18).
*돌고지재(10:28) - 양이터재(13:08)
(돌고지재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대원들)
애마를 하차하니 아스팔트 도로는 열기로 달아있다.
“이수형님! 와 나만 빠지는 날이면 하산주 메뉴가 고래 고기입니까!”
“아 찌라! 전번 주에 미리 예고 안 했더나 지가 못 챙겨 묵어노코 와 나한테 원망이고”
3일전 목요일에 혼자서 힘들게 이곳에 도착한 기억을 떠올리고는 형님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해본다. 채비를 마치고 대장의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데 원전고개쪽 방향의 절개지에서 한 무리가 내려와 온다. 남녀 4명인데 창원에서 다음 카페를 통해서 만나 낙남을 진행 중인데 오늘은 배토재에서 시작하여 양이터재까지 일정이라며 우리부터 앞서라며 길을 터준다.
시작이 좋다(10:28) 희미한 대나무 사이를 흔적을 찾으며 올라간다.
“어이 차 기자! 원래 거풍은 대나무 밭에서 해야 진짠 기라”
“그라만 우리 한번 하고 가까요”
대나무 밭을 빠져 나오니 방화로 오름길이다. 둔덕에 올라서니 평탄해지면서 왼쪽 아래에는 안양골로 가는 2차선 도로가 나란히 간다. 오른쪽에 밤나무들이 자라나 키가 억새와 같다. 밭에서는 부자간에 경운기로 밭을 갈고 있는데 인분 거름냄새가 코를 찌른다.
잠시 내려가던 등로는 본격적으로 오르막이다. 북서진에 해를 등지고 걷지만 그래도 아직은 여름이라고 따갑다. 그야말로 태풍전야 인지 하늘에는 구름한점 없다.
“헉! 쾍쾍.... 퉤.. 퉤퉤.”
방화로 에는 억새가 덮고 있어 앞서가는 사람이 건드려 놓은 털이 날려서 거칠게 숨을 쉬다 보면 입으로 날아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등성이가 있는데 등로는 왼쪽으로 조금 내려간다. 결국 사고를 친다. 억새들로 인해서 등로를 놓쳤다. 막무가내로 오른쪽 등성이쪽으로 잡목을 헤치며 급한 경사를 올라 다행히 곧바로 등로를 회복한다. 산불이 났던 지역이다. 아직 검게 탄 흔적이 있는 고사목들이 많다.
(산불의 흔적들)
모든 초목들이 화기로 인해 생명을 잃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생명력이 강한 초목부터 뿌리를 내릴 것 이므로 온통 잡초와 잡목뿐이다. 오른쪽으로 휘어졌다 왼쪽 조금 돌아 천천히 올라서니 580봉이다.(11:18) 오른쪽으로 휘어져 완만하게 내려가니 고도가 조금 높아졌다고 억새는 줄고 싸리나무 군락지가 평탄하게 이어진다.
다시 오르막을 오르는데 동주형님의 폰이 울린다.
“응, 그래.... 한참 지리산 올라가고 있다........”
“야..야! 말하는 것도 힘들다 헉...헉 만나서 이야기 하자”
하필이면 힘들게 오르막을 오르는 중이라 말하기도 정말 힘들 것이다. 억새와 잡초들이 많이 사라지고 떡갈나무 사이로 등로는 또렷해진다. 오르막을 마저 올라서니 600봉이다(11:48). 왼쪽 계곡으로는 안양골로 가는 아스팔트 도로가 휘돌아 가고 있고 그 사이로 농원인지 농가 몇 체가 보인다.
잠시 내리막이던 등로가 다시 오르막이며 여기도 간간이 산불의 흔적이 보인다. 바위사이로 잠시 오르니 651봉이다(11:52).
(651봉에서 휴식하는 대원들)
따가운 햇볕과 더위에 오르막을 오르느라 모두들 지쳤고, 그늘도 있고 자리도 그만하여 점심을 먹을 것인가 상의하고 있는데 벌들이 날아든다. 지난주에도 한바탕 소동을 벌렸다는데 특히 여성대원들이 날리다. 누군가 벌이 소리 따라 간다면서 소리도 지르지 말란다. 어디보자 오늘도 학순이 형님이 벌에 쏘이나.
“형님 손 내밀어요!”
지도를 판독하던 김내곤 선생이 양이터재에 샘터도 있고 하니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자며 일어선다.
아휴! 고개를 두개나 넘어야 하는데. 이른 새벽에 아침을 먹고 출발해서 시장기가 돌아 배도 고푼데. 마 묵고가면 조켓구마 그놈의 벌 때가 하필 그때 나타났노.
여기도 산불의 영향이 있었는지 크기도 고만고만한 거의가 떡갈나무다. 다시 고도를 높이며 급한 오르막을 오르니 670봉이다(12:21). 선두는 지나가고 오늘도 후미다. 3일전의 여독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축구 한계임 뛰면서 오른쪽 허벅지부분의 근육이 뻐근해 맨소래담을 바르고 찜질을 했지만 아직도 불편함이 느껴진다. 여기서 부터는 왼쪽이 청암면이고 오른쪽이 옥종면이다.
오른쪽으로 휘어 방향을 거의 북진으로 잡으며 완만하게 내려서니 제법 굵고 키도 큰 싸리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곧 굴참나무들이 주종을 이루고 왼쪽으로 휘어져 급하게 내려간다. 완만하게 오르니 오른쪽에 봉우리를 두고 우회를 하는데 아마 643봉일 것이다.
잠시간 평탄하던 등로는 왼쪽으로 휘어지며 서진해서 급하게 내려가다 소나무 숲을 지나 안부에 이른다. 이놈의 양이터재가 어디 갔나? 배가 고파 죽겠는데. 왼쪽으로 살짝 휘어지며 작은 봉우리를 내려서니 임도가 보이고 두런두런 인기척이 들린다. 먼저 당도한 대원들이 점심준비를 하고 있다. 넓은 비포장 임도의 나무 밑에는 하얀색 승용차가 주차 돼 있고 오른쪽으로는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으며 임도 시설비가 보인다(13:08 510m).
뒤 따라서 아침 돌고지에서 만났던 창원 팀이 내려온다. 길마재에서 마감을 하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며 마중 나온 승용차를 이용해 광율이에게 “바람따라 낙남종주”라는 노란 표지기를 하나 주면서 오른쪽 양이터 마을로 내려간다.
*양이터재(14:05) - 고운동치(18:57)
(양이터재에서 중식을 먹고 휴식하는 대원들)
(양이터재의 임도 시설비)
(중식후 양이터재의 절개지를 오르는 대원들)
오른쪽으로 고개를 넘어 100미터정도 내려가니 왼쪽으로 배수로에 계곡물이 졸졸 흘러 내려간다. 물통에 식수를 보충하고는 머리에 물을 껴 얹고 세수도 하고나니 이것만으로도 시원하게 날아갈 것 같다. 회장님이 주시는 얼얼한 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뜨거운 커피 한잔으로 피로와 긴장이 조금 풀리니 눈이 설설 감긴다. 출발 10분전 명령이 내려져도 움직이기가 싫다. 내가 농반 진담 반으로 선동을 한다.
“대장! 우리도 창원 팀처럼 오늘 여기서 끈코 한 구간 널려서 10월에 새 기분으로 호남 시작하면 안 되나?”
“그래 그라자!”
“맞아요! 그래요”
여기저기서 동조를 하지만 광율이 대장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는다.
“탈출을 하실 분들은 길마재에서 차편을 연결 시켜 줄 테니 갑시다. 추울~발!(14:05)”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절개지를 올라 경사를 더하니 오른쪽으로는 사태로 인하여 황토빛 속살을 들어내고 비탈이 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휘어지며 완만한 등로는 소나무 사이 육산길이다. 회장님과 학순이 형님이 도라지를 캐고 있다. 같이 거들어 주고 한 뿌리 얻어먹을까 생각을 하며 다가가니“슬기 너는 빨리 올라가라” 내가 매일 후미로 가는 것이 안타까운 회장님의 조금이라도 앞서 가라는 배려다. 봉우리에 올라서니 586봉이다(14:26).
오른쪽으로 급경사로 잠시 내려서다 평탄하게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는데 학순이 형님과 회장님이 또 도라지를 캐고 있다. 잔대라는 약초도 캤단다. 잔대는 도라지와 같은 보라색의 꽃도 예쁘던데?
“오늘 우리 마눌이 산도라지 캐 오라고 엄명을 내렸다 아이가”
(도라지 캐는 회장님과 학순이 형님:심마니가 도라지도 캐는교?)
방향은 다시 북진이다. 다시 봉우리에 다가서니 더디어 조리대라는 산죽이 시작된다. 565.2봉이다. 내 키만 한 산죽이 평평한 봉우리를 덮고 있어 왼쪽으로 보인다는 하동호의 조망은 물론이고 삼각점도 확인하지 못하고 댓잎을 헤치며 그대로 지나친다(14:38).
완만하게 내려가다 평탄해지니 산죽도 사라지고 육산길이 좋아질 무렵에 다시 산죽이 조금 보이더니 소나무와 굴참나무의 육산길의 더러는 산죽도 만나며 오르막 내리막을 지나 세 봉우리를 넘고 나니 경사가 조금 가팔라진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니 왼쪽 약간 위에서 “슬기야! 길 따라 곧장 가지 말고 이쪽으로 올라 온나” 회장님이시다.
등로가 우회를 하나 돌담을 올라서니 왼쪽 아래로 하동호가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답답하던 가슴이 후련해진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553봉이다(15:22).
(553봉의 산불감시초소)
(553봉에서 내려다본 하동호)
회장님이 날 불러 새우지 않았다면 우회로를 따라 그냥 지나쳤을 것 같다. 사진을 촬영하고 나서니 무겁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들어주고자 내 스틱 두개를 들고 회장님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죄송합니다 형님! 내 부지런히 연마해서 탈 후미 해볼게요. 사실 오늘따라 몸의 컨디션도 엉망이거든요’
등성이를 평탄하게 따르던 등로가 등성이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휘어지며 가파르게 내려서 흐무러지는 무덤을 지나니 빨치산들이 넘나들었다던 고개가 이제는 시멘트로 포장되어 임도가 된 길마재다(15:27).
(길마재에서 휴식하는 대원들)
내가 마지막 도착이다 보니 모두를 둘러앉았다가 토론을 마쳤는지 일어난다. 분위기가 시무룩하다. 이달영씨, 강 사장하며 생각보다 많은 대원들이 정말로 탈출을 하려고 한다. 그중에 이수형님은 그렇다 치고 형수가 포함돼 있다. 내가 생각하기엔 너무 아깝다. 낙동정맥 종주를 만자 아줌마가 개근으로 완주를 했고, 낙남은 오늘 현재 여기까지 개근 완주는 형수 혼자뿐이다. 만약 여기서 탈출을 하면 임원 진을 제외한 평회원은 전멸이 된다. 나도 오늘따라 죽을 맛 이지만 화가 난다.
“이기 무슨소리고! 그라고 갈수 있는 사람들끼리만 산행을 하나! 지쳐서 처지는 사람들을 격려를 해서 같이 가도록 해야지 분위가 와 이러노 꼭 탈출을 유도하는 분위기고”
“야! 슬기야 니가 느깨와서 몰라서 그러타 토론을 했다 아이가” 회장님이 나를 진정 시킨다.
“그렇다면 큰 소리 내서 죄송합니다.”
“다들 갑시다! 연숙이 팀들이 120분 산행에 95분 휴식으로 남은 구간을 지나갔어요. 우리도 그 시간 정도면 돼지 않겠어요? 정 안되면 선두들 산행 끝나고 하산주 먹을 동안 우리는 산행을 하면 되잖아요!”
선두 그룹이 고개 절개지를 오르자 경주 대간 철자아줌마, 옥동 현자아줌마, 그리고 형수님도 용기를 내서(?) 오르기 시작한다(15:35). 결국 무릎이 풀린 강 사장과 이달영씨는 왼쪽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나도 뒤따라 오르지만 마음은 무겁다.
잠시 올라서 터도 넓게 잡고 잔디도 잘 자라고 있는 ‘홍천박씨’무덤 앞에서 배낭을 풀고 혼자 앉는다. 영양 갱으로 간식을 하며 길마재에서 쉬지도 못하고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오후 내내 나도 다들 길마재에서 그만 두기로 했다면 나도 좋을 씨구나 했다. 고민은 한 대원이라도 진행을 한다면 그를 따라 나머지 구간을 할 수 있을까 였다. 두 마음의 내가 너무 미워 화를 냈나보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던 것이다.
700~800고지를 넘어야하니 이제부터 급 등로다. 금방 숨이 갚아온다. 위에서 이수형님이 다시 내려오신다. 포항 출장을 가서 어제 저녁 늦게 까지 근무를 하셔서 오늘 못 올 것을 오셨다더니 얼굴에도 피로한 모습이 역역하다. 가픈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한발 한발 오르니 동주형님이 혼자 서서 쉬고 계신다. 이 형님도 중국출장에서 어저께 돌아 오셨다고 했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이서 야금야금 철쭉군락지를 지나 685봉에 이르니 막 오후 4시가 지나간다. 이러다 정말 야간 산행이 되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급해 잠시만 쉬고 일어나지만 몸은 따로 논다. 급한 경사로를 올라 등성이에(16:21 745m) 이르러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완만하게 오르막이 계속된다. 오른쪽이면 주산(831.3m)이다. 여기서 부터의 능선은 산청군 시천면과 하동군 청암면의 경계를 이룬다.
잡목사이로 잠시 내려가다 안부를 지나 키 작은 철쭉이 등로의 벽을 이루고 듬숭듬숭한 바위사이를 오르니 다시 산죽 속으로 희미한 등로를 따르니 '곤양 403 1985 재설' 삼각점이 또렷이 나타나는 790봉이다(16:38). 오른쪽으로 지리산 주릉의 하늘선이 또렷하게 보인다.
(790봉의 삼각점)
오른쪽으로 살짝 휘어지며 방향은 서북 진으로 느들지대와 잡목사이로 잠시 내려서니 산죽사이로 급한 내리막이다. 산죽터널이 끝나 안부가 평탄하게 진행되더니 다시 급하게 오르막을 올라서니 735봉이다. 잠시 내려서서 평탄한 등로에서 동주 형님을 기다리며 하늘을 보고 그대로 누워 버린다. 굴참나무 잎 사이로 햇볕이 내리지만 힘을 많이 잃었다. 땅에 누워서 하늘을 사진기에 담아본다. 탈출을 한다던 여성대원들은 코배기도 보이지 않는다. 뒷심을 내서 탄력을 부치고 내가 따라 오지 못하도록 내달렸나 보다. "이눔의 아줌씨들이 오다가 산삼을 캐 묵었나?”
(누워서 바라본 하늘)
급등 오르막이 시작되며 산죽도 나타난다. 끊임없이 산죽과 잡목이 이어지더니 돌부리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오르막을 올라 바위와 잡목 속에 바위들이 솟아있는 800봉우리에 올라서니(17:16) 낙남의 최 고지대에 위치했다는 반천마을과 몇 안 되는 논이 뚜렷이 보이고 지리산 천왕봉과 주릉들도 더욱 가까이 잡힌다.
(800봉에서 바라본 천왕산)
(800봉에서 바라본 반천마을)
뒤미처 당도한 동주형님 계서 “차서방 떡 먹어라!” “(웬 떡일까?) 잡수이소 물을 하도 많이 먹어서 생각이 없습니다” 일어서 잡목을 헤치고 일어서 나오니 바위위에 “차현욱씨 떡 먹고 힘내서 빨리 오세요”라고 김내곤 선생님이 메모와 함께 떡을 두고 갔다. 정성이 고마워 한입만 베어 물고 두고 간 우리의 표지기를 기념으로 메달아 놓고 지나친다(고마웠습니다. 선생님의 배려에 힘입어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내려서서 왼쪽에 바위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봉우리를 오른쪽으로 우회를 하고나니 또 지겨운 산죽터널의 오르막이 나타난다. 나의 키보다 더 크다보니 완전히 파묻힌다. 산죽으로 조리를 만들어 장에다 내다 팔아서 생활을 했다 하더니 과연 국내 최대의 산죽 군락지 답다. 이곳으로는 어떤 짐승도 가로 질러 지나가지 못하겠다.
(산죽 터널을 통과하는 동주형님)
산죽의 잎과 가지가 얼굴과 팔을 할퀴며 거부를 하는듯하다. 산죽터널과 철쭉, 떡갈나무사이로 지루하게 오르고 내리다 경사를 점점 더하며 경사가 가팔라지자 오른쪽으로 휘어지며 왼쪽에 870봉우리를 우회하고 오른쪽 저만치에 봉우리를 두고 완만하게 오르니 잡초만 왕성한 넓고 평평한 안부에 무덤의 흔적이 보인다(18:00).
산죽을 빠져 나오니 철쭉이 울타리를 쳤다. 애기단풍도 간간이 보이는 오르막을 올라 오늘의 최고봉 880봉에 이른다(18:05).
완만하게 내려서서 한 봉우리를 치고 내려오니 여기 산죽은 여느 산의 산죽처럼 키가 작다. 오늘 제일 후미를 동주형님과 동행을 하다보니 형님이 나의 훌륭한 모델이 되어 주신다. 혼자 지나간다면 산죽의 높낮이를 비교하며 사진을 촬영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왼쪽으로 걸린 서산의 해도 한 뼘을 남기고 하루를 접을 채비를 한다.
산죽 속을 지겨우리만치 오르내리다 봉우리 하나를 앞두고 동주형님과 함께 퍼질러 앉는다. 마지막 봉우리이길 바라며 지도를 펼치나 땀에 젖어 펼쳐지질 않는다. 목에 걸고 다니는 베로 만든 소형 가방이 물에 빠진 것처럼 젖어 있다. 가방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
고기 재를 지나야 한다 했는데 재를 지나오지 않았다면? 아이고 이일을 우짜노 아직도 한창 남았다 아이가. 개요를 다시 천천히 읽어보니 고기재(790m)는 임도나 요즘의 길이 아니고 옛날의 고개로 이름만 남아 있다보니 그냥 지나쳤다. 아휴! 올 메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마지막 남은 물을 마저 마셔버린다. 선두는 벌써 막걸리 파티가 한창이겠지?
등성이를 조금 비켜서 사면을 천천히 올라서니 봉우리 전체가 산죽으로 덮여서 "Y"자 모양의 등로만 겨우 남아있다(18:35). 왼쪽 길로 들어서니 산죽 터널 속은 완전히 컴컴한 밤이다. 뱀도 한 마리 지나지 못할 정도로 촘촘히 엮어 놓은듯하다. 키는 커서 좋지만 퉁퉁한 사람은 옆으로 걸어야 할 정도로 비좁다.
완만한 내리막의 긴 미로 같은 산죽터널을 빠져 나와 잡목속의 사면 길을 올랐다 가파르게 내려서서 전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조림지를 내려서니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지나가는 고운동치다(18:57 800m).
왼쪽이면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이고 오른쪽이면 산청군 시천면 고운동이다 . 고운동이란 신라 말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최치원님이 말년에 천하를 주유하면서 지리산에 들렸다가 이 길을 넘다들면서 그의 자를 따서 부쳐진 이름이란다.
오늘 구간은 도상거리가 14.2km밖에 되지 않았지만 무척 힘들고 지루한 구간 이였다. 아마 머리에는 산죽만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아침에 오면서 총무가 신신당부를 하더니 정말로 묵계리 청수로 만든 막걸리를 사 왔나보다. 함께 사온 손 두부를 가져간 김치에 싸서 걸 판한 파티가 벌어졌다. 골짜기 계곡에서 흐르는 도랑에서 목욕을 한다. 너무 차서 2,3분을 담그지 못하겠다. 머리를 감고 온몸의 땀을 씻고 찌던 옷을 갈아입고서 파티에 합석을 하니 기분은 하늘을 나를 것 같다.
4명의 낮선 분들이 함께하고 계신다. 진주 ‘자연산악회’분들로 그들은 오늘 돌고지에서 시작해서 묵계치까지 진행을 했단다. 이런 곳에서 이런 분위기에 이런 분들을 만나면 왜 이렇게 신이 날까? 그러고 보니 비 오는 날 9주차 장밭고개 들머리에서 우리를 앞서 올랐던 산악회다. 표지기를 주고받으며 그들이 먼저 내려간다.
막걸리 서너 잔을 거푸 마시고 갈증을 풀고 나니 오늘 하루의 모든 괴로움과 아픈 고통들은 언제였나 싶고 뿌듯한 가슴으로 희열이 밀려온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고운동치에게 “고운동치야! 우리도 이제 한 구간 남았다. 다음주에 또 만나자” 작별을 고하고는 하루를 접는다.
“아참! 학순이 형님! 오늘 마눌의 엄명을 완수 했습니까?”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을 9개 펴며)아~ 9뿌리 밖에 못 캤다
*현재 까지 총 도상거리: 220km(연숙이와 함께가는 낙남정맥 참조)
첫댓글 차기자 글신다고 욕봤소 그런대 대나무밭에서 거풍이바구는 누가했노?? 그라고 이쁜여우가 또 누군고?? 혹시 이쁜야시가 아닌지??? 우리마눌(중전마마로 격상되었음)의 엄명의 수량에는 한개 모자랐음...
형님! 날이 뜨거바서 하신 말씀도 이저뿌린 갑네예? 손가락도 난 분명히 9개로 봤는데요. 그라고 이쁜여시는 나도 누군가도 모르는데 몇일 활동 하더이 가 뿌린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