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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6 13:38 |
◈ 사색당파의 이해 -17
사색당쟁 최후의 승자는?
드라마〈이산〉에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악의 축’이었다. 표독스런 표정으로 세손 음해세력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간교한 정순왕후를 바라보면서 많은 시청자들은 공분(公憤)해마지 않았다. 때문에 드라마가 방영되는 내내 시청자들은 이산이 이 ‘얄미운’ 여인을 통쾌하게 ‘조져’ 주길 학수고대했었다.
미상불 이산이 왕위에 오른 직후 정순왕후를 자못 모질 게 몰아세우는 듯하자, 당시 이산 게시판은 환호와 격려의 문구들로 뒤덮였었다. 하지만 정조는 끝내 정순왕후를 응징하지 못한 채 급서하였고, 시청자들은 다시 좌절하였다. 이후 펼쳐질 정순왕후의 전횡들이 눈에 잡힐 듯 선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다행(?)스럽게도, 정조의 죽음과 함께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정순왕후의 ‘눈꼴사나운’ 갖가지 독선과 전횡을 접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쯤에서 드라마가 끝나 준 게 차라리 고맙기도 하였으리라…
하지만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정순왕후의 존재감을 분명히 각인시켜 주긴 하였으되,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데는 다소 미흡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왜냐, 정순왕후는 그야말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악의 축’이었으니까. 오죽했으면 그녀가 조선에 입힌 피해는 ‘임진왜란의 그것과 맞먹는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기까지 하였을까….
정순왕후의 전황이 4년 정도에서 종지부를 찍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그녀는 짧다면 짧은 그 4년의 기간이나마 온전히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 버린, 무서운 여인이었다. 그것도, ‘인간도살(人間屠殺)’이라는 처절한 피바람의 역사를…
* * *
정조가 급서한 뒤 왕위(제23대)를 이어받은 사람은 순조였다. 정조와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순조는 그해 7월 4일 즉위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11세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조정 신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즉위와 동시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정순왕후의 등장은 노론 벽파의 재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개혁세력의 와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여느 대비의 수렴청정과 본질부터가 달랐다. 그녀는 스스로 여군(女君-여자임금)을 자임하면서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냈고, 신하들 또한 ‘그의 신하’임을 공언하는 등 국왕에 상응하는 칭호와 권위를 행사하였다.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왕후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인사(人事)였다. 정순왕후의 인사권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수행되었다. 그녀는 심환지를 영의정에 재수하는 등 노론벽파세력을 요직에 대거 등용하고 자신의 6촌 오빠인 김관주에게도 이조참판이라는 힘있는 벼슬을 내리는 한편 시파인물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였다. 요컨대, 노론벽파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였던 것이다.
정순왕후와 노론벽파는 내친 김에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인세력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하기로 모의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인세력을 ‘체제부정세력’으로 몰아야 했다.(당시 성리학에 도전한 사상은 천주교였는데, ‘친 천주교’적 입장을 취하였던 남인과 노론시파가 ‘신서파’를, 이를 공격하는 입장에 있던 노론벽파가 ‘공서파’를 각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인을 성리학을 부정하는 사교(邪敎)집단으로 몰아 숨통을 끊어놓기로 하였다. 그렇잖아도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에 나선 직후부터 "사학이 서울에서부터 시골까지 불길 번지듯 번지고 있으니 사학 배척 방도로 코를 베어 씨를 없애버리겠다"고 수차례 공언해온 바 있었던 터였다.
드디어 순조 1년(1801년) 1월 10일, 정순왕후는 사학엄금(邪學嚴禁) 교서, 즉 「금교령」을 반포하였다.
“선왕(정조)은 바른 도리를 빛나도록 힘쓰면 사악한 도리는 저절로 소멸되리라고 자주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말에는 상궤를 벗어난 도리가 아직도 존재하며 서울에서 시골 구서구석에 이르기까지, 특히 호중(기호지방)에 날로 더 퍼진다 하니 어찌 떨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은 인륜을 지킬 때에 비로소 참 사람이 되며, 한 나라는 지식과 참 도리에서 비로소 그 생명을 찾아낸다. 그런데 문제의 사학은 부모도 국왕도 몰라보고 일체의 근본을 배척하며 사람을 오랑캐와 짐승의 지위로 떨어뜨린다.
무식한 백성은 점점 더 그것을 받아들여 그릇된 길을 방황하고 있으니, 강으로 달려가 빠져 죽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찌 마음의 충격을 받지 않겠으며, 어찌 저 가련하고 불행한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각 고을의 감사와 수령들은 저 무식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하고, 이 새 교를 믿는 자들은 진심으로 행실을 고치고, 그 도를 따를지 않는 자들은 단단히 가르치고 경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선왕이 그렇게도 너그럽게 주려고 힘쓰신 가르침과 빛나게 한 광명을 짓밟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엄한 금령이 내린 뒤에도 아직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있으면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 따라서 각 고을 수령들은 각기 자기 관할지역 전역에 서로 연대책임을 지는 ‘오가작통의 법’을 만들어, 만일 그 다섯 집 중에 사학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그 감시를 맡은 통수는 수령에게 보고하여 개심(改心)케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국법이 있으니 그들을 싹도 다시 나지 않도록 뿌리를 뽑아버리라. 나의 뜻이 이러하니 서울에서나 지방에서나 그것을 알아 시행하라.“
첫 부분부터 정조의 치세를 부인한 이 교시는 실로 인간도살의 피바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그 9일 뒤(1월 19일) 박해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려던 정약종의 ‘책상자’가 기찰포교에 의해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정약종의 머슴 임대인이 경기도 포천에 거주하는 남인학자 홍교만의 집에 임시로 보관했던 주인의 책상자를 서울 아현동 황사영의 집으로 몰래 옮기다가 불심검문에 걸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박해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는 노론벽파의 잇단 상소의 빌미가 되어 이윽고 전국 도처에서 광란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에서 전개된 양상만 보면, 그해 2월 9일 이가환․정약용․이승훈․홍낙민 등이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기 시작하였고, 2월 14일에는 정약전이, 16일에는 이기양이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혔다. 남인의 주요 지도자들과 천주교 지도급 인사인 이들의 국문은 2월 10일 시작하여 26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2월 26일에는 정약종․홍교만․홍낙민․최창현․최필공․이승훈 등 6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포청에서 심한 매질을 당한 후 장독으로 옥사하였으며, 배교를 선언한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으로, 정약용과 정약전은 경북 장기현(지금의 포항)과 전남 신기도(지금의 흑산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또한 3월 17일에는 한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궁안에 피신시키고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 며느리도 사사되었으며,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 또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5월 사사되었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보호막도 없던 일반 백성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혹하였다.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도가 나오면 나머지 네 집도 함께 화를 당하는 이른바 ‘오가작통법’은 수많은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다.
이와 같은 박해는 경향 각지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300여명의 희생자를 낸 채 그 해 12월 22일 박해의 전말과 그 당위성을 알리는 ‘척사윤음’이 반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로써 정조 때 정계에 다시 등장하여 정조와 정치적 입장을 함께 하며 든든한 원군이 되어주었던 남인세력은 뿌리까지 뽑혀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역사는 이를 ‘신유박해(辛酉迫害)’ 혹은 ‘신유사옥’이라고 부른다.
정순왕후는 또 정조 개혁정책의 무력기반이었던 장용영을 전격 해체하고, 규장각의 특별한 기능과 권한은 회수하여 역대 왕들의 글과 도서를 관리하는 기구로 격하시키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조치도 줄줄이 내놓았다.
한데 이렇듯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마구 휘두른 정순왕후였지만, 그녀도 막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순조의 중전간택 문제였다. 그녀는 내심 노론벽파 집안에서 중전을 간택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고, 김관주․김일주․김용주 등도 시파인 김조순의 딸이 중전으로 간택되는 데 대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후일 있을지 모를 시파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정조 말년에 초간택(1차 심사), 재간택(2차 심사)까지 이루어진 상태였고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최종간택만 미루어지고 있던 터라 이를 뒤엎을 명분도 달리 없었거니와 김조순이 비록 시파라고는 하나 원만한 성품의 인물이었고, 심환지를 비롯한 다수의 벽파세력도 반대하지 않아 결국 이를 뒤엎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생전의 정조는 왜 김조순 딸을 중전으로 간택하려 하였던 걸까?
김조순의 저서 <풍고집>에 따르면, 1785년(정조 9년) 김조순이 약관(20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을 때 정조는 “김상헌의 자손이 등과했다”며 매우 기뻐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친히 이름을 ‘김낙순’에서 김조순으로 바꿔주고 ‘풍고(楓皐)’라는 호까지 지어주었다고 한다.
정조가 이 처럼 김조순에게 이름과 호까지 하사하면서 특별히 배려하고 가까이 두려 한 것은,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거두였던 김상헌의 후손이자 부자(父子) 영의정을 배출한 김수항과 김창집(그는 노론 4대가의 한명으로 꼽힌다) 가문의 자손인 김조순을 근처에 둠으로써 노론세력의 지지를 이끌어내려 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등창이 악화되어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김조순을 불러 앉힌 자리에서 세손(순조)에게 “이 사람(김조순을 지칭)은 네 스승일 뿐 아니라 내 동기(同氣-형제)와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다음 김조순을 돌아보고는 “임금의 처지는 실로 외롭고 위태로운 것”이라면서 “장차 원자(순조)의 뒤를 돌보고, 또한 세도(世道)를 맞아 달라”고 말하였다.
이에 김조순이 “용렬한 천신(賤臣)이 그런 대임을 맞을 수 없다”고 아뢰자 정조는 다시 김조순에게 “경이 아니면 어느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큰 그릇은 두루 통용되어 국한되지 않는 법”이라면서 앞으로의 정국운영까지 김조순에게 맡기겠다는 파격적인 발언까지 하였다.(<풍고집>별집, 영춘옥음기)
이는 1795년의 은언군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정조가 스스로 천명하였던 ‘우현좌척’의 원칙을 또다시 뒤집는 결정이라 할 수 있었다. 초계문신 출신이며 노론시파이되, 세자빈이 될 사람의 아버지로서 ‘외척’이 될 입장이었던 김조순에게 세도(世道)를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정조가 일찌감치 김조순에게 세자의 안위를 맡기기로 결정한 징후들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정조는 김조순의 딸을 본 것이 아니라 노론의 명문가인 김조순의 집안을 보고 중전을 간택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명문가 딸을 중전으로 간택하려 한 것은 아주 파격적인 결정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100여년에 걸친 집권기간 동안 노론이 취한 최우선 전략은 ‘왕비가문 사수’였다. 숙종조 때 장희빈이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남인의 세상이 되었고,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당시는 서인)은 최악의 상황을 맞은 뼈아픈 경험이 있었다.
이후 노론은 ‘국혼의 절대고수(勿失國婚)’를 당론의 제일 원칙으로 삼았다. 왕비 가문을 놓치는 것은 작게는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맡게 돼 있는 국왕 경호업무 및 그와 관련된 핵심 정보원을 잃는 것이요, 크게는 정권재창출(왕자 출생)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었다.
다만, 그러면서도 한 가지 불문율 같은 것을 두었으니, 비록 자기세력 내에서 국혼의 대상을 찾긴 하되 되도록 세력이 미약한 집안에서 왕비가 선발되게 하였던 게 그것이었다. 강력한 가문이 외척이라는 칼자루까지 쥐게 되면 자칫 노론 전체가 요동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묵계였다. 서종제, 홍봉한, 김시묵의 가문이 선발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벽파의 이러한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았다. 며느리만큼은 자신의 의중대로 선택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조는 “금번 세자의 국혼은 ‘간택’이 아닌 ‘중매’방식을 택하겠다”고 전격 선언하였다. 후보자 물색과정에서부터 깊숙이 개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되자 도성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졌다. 정조가 마음을 둔 곳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정조는 즉위 24년 정월 초 시파인 정민시와 이만수, 그리고 벽파인 서매수를 부른 자리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규칙도 발표하였다. ‘옛 규례에는 4조(祖) 가운데 현관(顯官-높은 벼슬)이 없는 집은 그 명단을 빼버렸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말고 모든 집안을 대상으로 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언뜻 보기엔 ‘별 볼일 없는’ 집안의 규수도 빼놓지 말라는 지시처럼 들리지만, 달리 해석하면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여식도 아울러 대상에 넣으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다분히 김조순의 가문을 의식한 하교였다. 그리고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김조순의 딸은 1, 2차 간택을 단연 1등으로 통과해주었다.
순조는 즉위 2년째인 1802년 9월 6일, 13세의 나이로 드디어 김조순의 딸(순원왕후)과 혼례식을 올리게 되었다. 김조순은 왕비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영안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정국은 여전히 서슬 퍼런 정순왕후와 노론벽파 대신들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하고 있었다. 다만, 이 해에 자파의 거두 심환지를 잃은 것은 통한의 아픔이었다.
순조가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것은 1804년, 정순왕후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부터였다. 정순왕후가 건강악화를 이유로 수렴청정을 거두자 노론벽파는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공포정치(실록에는 ‘迫擊’정치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덤벼들어 몰아친다’는 뜻이다)를 통해 권력을 장악해온 세력이, 그 중심축의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공포감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아니나 다를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혹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니라는 듯,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았던 절대권력자 정순왕후도 흐르는 세월을 붙잡아 두는 능력만큼은 가질 수 없었던지 다음해인 1805년, 61세를 일기로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바야흐로 명실상부한 순조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그때 순조의 나이는 15세였다.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일약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사람은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었다.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뜻을 받들어 김조순을 자신의 ‘스승’처럼 모셨고, 최고의 실세가 된 김조순은 서서히 권력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김조순이 이렇듯 정치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 정조의 당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나치게 어질고 착하기만 하였던 순조의 성정에 기인 한 바 또한 적지 않았다. 집권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화를 낸 적이 없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없이 온화하고 부드럽기만 한 성격이다 보니 외척 김조순 등이 헤집고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그만큼 많이 남겼던 것이다.
아무튼 정순왕후의 사망 이후 정국은 다시 급변하였다. 이번엔 벽파에 대한 시파의 대대적인 보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김조순은 순조의 외척인 반남 박씨 박종경 세력과 풍양 조씨 조만영 세력의 협력을 얻어 시파 탄압의 선봉이었던 이안묵을 유배시키는 것을 필두로 김조순 딸과 순조의 결혼을 반대하였던 권유, 김노충 등 노론벽파의 수많은 선비들을 모조리 처형, 유배시켜버렸다.
또한 경주 김씨의 대표 격인 김관주를 유배(유배 중 병사)보내는 한편 이미 죽은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를 ‘역적의 율’로 다스리고, 안동 김씨이면서 노론벽파 중심인물이었던 우의정 김달순까지 사사하는 등 대다수의 벽파인물들을 중앙정계에서 축출하였으며, 노론벽파의 양대 거두 심환지와 김종수의 관작 또한 추탈(追奪)해버렸다.
이로써 지난 100여년간 조선에서 주류세력으로 호위호식하며 시대를 호령하였던 노론(벽파)은 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쫓겨나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고, 친 정조세력인 시파가 조선왕조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역사의 반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김조순이 있었다.
김조순은 이후 벽파가 물러난 조정의 빈자리를 하나 둘 문중 사람들로 채우기 시작하였다.
하여, 조선은 그로부터 60여년에 걸쳐 김조순, 김명순, 김문순, 김희순, 김이익, 김이도, 김이교, 김이재, 김조근, 김좌근, 김교근, 김문근, 김좌근, 김흥근, 김홍근, 김수근, 김병기, 김병덕, 김병시, 김병국, 김병학 등 안동 김씨 일파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은 물론, 판서와 참판, 좌찬성, 훈련대장, 대제학, 대사헌, 함경감사, 홍문관제학, 한성부판윤 등 조선의 핵심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까지 싹쓸이하여 한 나라를 제멋대로 유린하는 ‘세도정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는 또한, 선조대에 김효원과 심의겸이라는 두 선비 간의 반목에서 비롯되어 모든 관료와 지식인들이 대를 물려가면서 사생결단의 권력투쟁에 나서는 양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던, 사색당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