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헤며 생각하며
조명이 너무 찬란하여 별을 잘 볼 수 없다. 그러나 교외로 나가 한적한 시골,
날이 맑은 날 밤, 별이 솟아지는 밤을 지낸 기억을 되새겨 본다. 어린 시절의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본다. 그곳에는 소박한 사람들이 평상에 앉거나
돗자리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밤하늘에는 별이 솟아져 내린다. 별을 헤
아려 보지만 도저히 셀 수 없다.
지난 옛날에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을 보며 아빠별, 엄마별, 저별은 나의 별하며
각자의 별들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윤 동주 시인은 별과 관련한 시적 감수성으로
표현하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별을 헬 수 있다는 사실에 난 감사합니다.
나는 더욱 깊어지고 치열하게 생각 합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곧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니 어찌 아니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살아있습니다.
나는 격렬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나의 이 강렬함이 별을 헬 수 있게 합니다.
내 청춘이 다해도 계속해서 별을 헤고 싶습니다.
별 헤는 밤이 멈추지 아니하면 내 청춘 또한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서고금의 철학자들과 많은 현자들은 하늘의 별과 우주와 인간을 사유하는
생각을 표현하기도 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머리 위에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 내 마음
에는 도덕률. 이 두 가지를 삶의 지침으로 삼고 나아갈 때 막힘이 없다.”며 자신의
삶의 지침의 한 가지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라고 하였다.
최근에 천문학자들은 별의 수가 700해 개로 추산하였고 이 숫자는 지구상의 모든
모래 알갱이 수보다 10배나 더 많은 수라고 했다. 또 최근 밝혀진 자료는 우주 내의
은하의 수가 2조개나 될 것이며, 앞으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하며, 하나의 은하 내에
1,000억 개의 별을 있다는 추산에 따르면, 우주의 별은 2,000해 개가 된다.
2,000해 개라는 수를 인간이 상상할 수 있을까? 그 수는 2곱하기 10에다가 ‘0’을
22개나 붙인 수이다. 예로서 그 수를 1초에 하나씩 센다고 하면 약 600조년이 걸린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가 불가능하다. 그 뿐 아니다. 하나의 은하를
가로지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만 광년이라고 한다. 이 말은, 빛의 속도로 10만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빛의 속도는 1초에 약 30만km이다. 즉 빛은 1초에 서울 부산 간
거리 약 400km를 750번을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측정 불가능한 우주에 비하면 인간이
얼마나 한 숨의 시간 속에 있는 미소한 존재임을 생각게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별들이 총총한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미소한 존재이고 약한 갈대와 같지만
생각을 한다는 면에서 우주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별들로 가득한 우주는 어떻게 있게 되었고, 인간인 나는 왜 저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져 볼 수 있
지만, 인간이 상상의 나래를 펴는 저 별들로 총총한 우주는 자기가 왜 그기에 있게
되었는지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갈대인 인간이 우주 보다 더 위대하
다는 것이다.
한 문헌을 보면 하느님이 지은 모든 물질적 사물과 지상에 있는 생명 있는 것들 중에
인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기 시작하셨으니, 곧 하느님
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그 존엄
함을 지적한다. 그렇다. 인간이 존엄한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다면, 동물의 수준에
머물러 밀림의 원숭이처럼, 야수처럼 생식 본능과 먹이를 위해 사냥만을 위해 살아가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의 지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칸트는 “머리 위에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 내 마음 에는 도덕률”을 삶의 지표로 삼았
듯이 우주 보다 위대한 인간이라면, 무생명체인 우주보다 위대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많은 철학자들, 수많은 현자들도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연구를 거듭해 왔다. 그렇지만 존재론은 이 과학의
시대에 와서는 답이 분명해 졌다.
한 가지 분명한 명증은 생명은 자연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재 인간의 과학은
살아 있는 세포를 떼어 내어 시험관에서 배양할 수는 있어도 시험관에서 생명을 창조
할 수는 없다. 오직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각각의 생명 개체는 고유한 DNA라는
설계도대로 모체를 통해 형성된다. 이 법칙을 벗어난다면, 그 생명의 개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아주 간단한 사례를 살펴보자.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가 병원에서 주사
를 맞아야 할 경우라면 어떠한가? 살균하지 않은 주사기를 사용하는가? 그렇지 않다.
옛적에는 주사기를 100도의 뜨거운 물에 살균하여서 사용하였지만 요즘은 모두 일회용
살균된 주사기를 사용한다. 왜 그렇게 하는가? 세균이 우리 몸에 침투하여 질병을 일
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바로 세균은 생명이고 생명이 자연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바로 19세기 과학자 파스퇴르가 실험을 통해 증명하고 난 뒤
이 사실을 뒤엎을 증명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각 생명체에 DNA라는 설계도가 있다는 사실은, 이 19세기에 증명된 사실을 뒤엎을 수가
없게 한다. 설계도는 자연발생 되는가? 그것은 불가능이다. 건물이든, 자동차든, 로봇이든
다 설계도가 있고, 설계도대로 되지 않고 한 가지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답은 자명하지 않는가? 건물이라면 붕괴 위험, 자동차라면 사고의 위험은 인명 피해를
가져 올 것이다.
자동차의 설계도를 누가 만들었는가? 분명히 지성 있는 인간, 그 분야에 재능이 있는 전문
가가 디자인하고 설계한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분명히 정상이
아니고 정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각 개체에 DNA라는
설계도가 있다는 것은 설계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시초의 설계자에 대하여 18세기
의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나는 우주를 보면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다! 시계 제작자도
없이 그와 같은 ‘시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볼테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생명과 우주가 존재하는 데에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만물을 산출해 낼 정도가
되기 위해, 이 원인은 에너지, 조직 능력, 미적 감각, 사랑 그리고 지혜 등 특별한
능력과 특성을 지녀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우주, 특히 우리의 행성 지구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물들이 그러한 특성
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들은 물체의 속성이 아니라 인격체의
속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절대자인 하느님에 대한 개념에 귀착하게 된다.
한 문헌은 이 하느님에 대하여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그분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 곧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분이 만드신 것을 통해 그 특성
들을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 없다.”고 우리가 보는
사물이 설계자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 특성들을 증명한다고 한다.
상상이 불가한 별이 빛나는 저 하늘, 광대한 우주와 이 지상에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 그리고 무구한 시간 속에 우리 인생의 한 숨 같은 제한 된 삶에 대하여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고대 하느님에 의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에서 해방
시킬 지도자로 임명된 모세는 “우리의 수명은 70년, 특별히 강건하면 80년이지만,
괴로움과 슬픔만 가득하고 신속히 지나가니 우리가 날아가 버린다.”라고 인생이 덧없
음을 표현하면서,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어, 우리가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과학이 눈부시게 진보한 오늘날에 와서도 인간의 수명은 모세가 말한 범주에서
특별히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팔십이 넘은 인간의 신체는 노쇠하여 정신과 몸의
활력은 인생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 팔십이 넘어가면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되어서 생명이 있다 뿐이지 그렇게 양호한 삶이 아니지 않는가?
이러한 인생이, 본래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한 하느님의 의도인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솔로만 왕은 “모든 것을 들려주었으니, 결론은
이러하다. 참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참 하느님께서는 모든 행위와 모든 감추어진 것이 선한지 악한지 판결하실 것이다.”
라고 한 말에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솔로몬은 이 결론에 앞서 인생의 노년을 먹구름 같은 흐린 겨울 같은 날에 비하면서
그 노년기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을 매우 시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 노년의
결국에 대해서도 시적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산 자들에게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낫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그것이 모든 사람의 끝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자는 이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괴로움이 웃음보다 나으니, 얼굴의 슬픔으로 인해 마음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지만, 미련한 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고
격려했다.
왜 그런가? 인생의 잔치는 아주 짧기 때문이다. 인생이 삶의 목적의 의미를 궁구할
시간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 제한된 인생의 시간에서 우리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우리 삶은 달라질 수 있고, 긍정과 희망과 삶을 사랑으로 가득
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
진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할 희망이 자기의 것이 되게 하는 것, 그것만큼 더 소중한
인생의 가치가 있겠는가? 부귀도 영화도 생명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생명을,
이 세상의 모든 돈을 다 동원하여, 이 세상의 모든 의술을 다 동원하여, 이 세상의
권력을 다 동원하여 계속되게 할 수 있겠는가? 답은 불가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