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숙모 정씨와 비촌황씨 에필로그 (153회)
제19장 나의 집안과 외가
어머님을 제외하고 가장 나에게 정을 베푼 여인이 있다면 역시 나의 큰어머니(백모)와 큰 외숙모라 하겠다. ‘짠하다’는 소리는 외숙모의 상용문자였고, 우리를 보면 항상 눈물이 고이는 여린 데가 있던 외숙모님이다.
그리고 신문물에 개방되고, 진보적인 우리 몰랑몰 김(金)씨를 특히 좋아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비촌을 공식 방문하는 우리 백부님에 관한 이야기인데, “부자는 먹을 것도 타고 나는 것 같다. 이 산간벽촌에 너의 큰아버지가 모처럼 찾아오시면 꼭 좋은 반찬거리가 생긴단 말이야.” 하셨다.
예를 들어 소고기가 생긴다든지, 산짐승이 선물로 들어와 푸짐하게 대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지랑마을의 우리 큰댁의 삼촌, 고모들의 근황도 항상 관심을 가지고 나에게 물어보시곤 했다.
명문가의 종부(宗婦)로 황씨가(黃氏家)에 입실했지만 당시의 황(黃)씨가는 외화내빈(外華內貧)으로, 망명생활로 가산이 바닥이 났고,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통가문의 까다로운 법도와 하루가 멀다고 이어지는 기제사(忌祭祀)와 시제(時祭)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각오는 단단히 하고 왔지만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도 자주 하셨다 한다. 가장인 외숙(外叔)은 가문을 과거의 입지로 되돌리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가계(家計)는 밥만 먹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외숙모님의 살림에 관해서는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아이를 가졌던 어느 날, 그렇게도 생선이 먹고 싶어 외숙께 하동 장에 가시면 생선 좀 사오시라고 부탁했다. 저녁 때 돌아오셨는데 분명히 생선은 들어 있었고 고마운 마음에 바로 부엌에 가서 봉투를 열어보니 싸구려 간꽁치 세 마리가 전부였다.
그 흔한 딱돔이나 광어, 도다리 정도를 기대했는데, 너무 섭섭해서 먹지 않고 그대로 지푸라기에 묶어 처마에 매달아 놓고 시위를 했다고 한다. 내일 당장 땟거리가 없어져도 이웃이 해산을 한다 하면 뒤지를 박박 긁어 한 됫박이라도 보내야 하는 서방님의 자선심에는 너무 야속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가장 잊혀지지 않는 사건은 둘째딸 순윤(順允) 누나의 혼사 때의 일이라 하셨다. 1944년 겨울, 전쟁으로 인해 물자가 극도로 부족하고 식량은 모두 배급제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는 것이 흔한 일인 그때 외가댁은 많은 노력 끝에 어느 정도 가산이 회복된 상태여서 정상적인 가계(家計)가 가능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외숙의 명령은 분명했다. 이 어려운 비상시국에 절대로 사치는 안 되고 대나무, 동백 꽂아 놓고 정한수 정도 교환하는 검소한 행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닭 한 마리 잡아 상객 상 차리면 체면은 유지되는 것으로 치부하고, 절대 돼지 잡고 술 빚어 넣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외숙모님 생각에 술이 없는 혼사는 빈강정으로 생각하고, 궁리 끝에 찹쌀 딱 두 되를 누룩과 함께 조그마한 독에 담아 아랫목에 놓고, 이불을 덮어 씌워 놓았다. 무어냐고 물
으면 단술(식혜)이라고 대답하면 될 것 같았다.
신랑이 도착하는 바로 전날 밤, 평소에 사랑방 거처만 하시던 외숙부가 그날따라 안방에 들어섰고, 이상한 냄새에 이불을 들치고 독 뚜껑을 열어보게 되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외숙은 당장에 옆에 요리하느라 가져다 놓은 도마를 힘껏 치켜들더니 사정없이 독을 내리치고, 와르르 소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그때 마침 누님의 결혼을 보기 위해 외가에 갔고, 사건의 본당 바로 그 안방에서 선잠을 자다가 모든 것을 다 목격했다. 부엌의 아주머니들이 재빨리 걸레로 닦아내고 야단이 났는데, 외숙모는 태연히 앞문을 열고 앉아 담뱃대를 재더니 뻐끔뻐끔 담배만 빨아대다가 휘-, 휘-, 속의 화를 뿜어내듯 먼 산만 바라보는 형국이었다. 저항의 한 마디도 없고 너무너무 외로워 보였다.
인고(忍苦)는 외숙모의 생활의 일부가 된지 오래된 것 같았다. 2년간의 시묘(侍墓) 뒷바라지, 도가(道家)의 양생법인 생식(生食)을 간단없이 수행하는 서방님의 식단 준비, 그리고 허구 많은 풍수, 도사들의 출입으로 인한 가계의 손실 등 외숙모님은 많이도 참고, 속으로 눈물도 많이 흘리셨으리라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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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군 진상면 비촌 황씨 마을의 회관 외경 |
두 분은 상당히 대조적인 성격을 가지셨다. 외숙부는 영적(靈的)이고 형이상학을 중시하는데 반해, 외숙모는 극히 실용적이고 현실을 중시하는 면이 강했다. 숙모님은 정 당신의 뜻과 다르면 조용히 한 마디 하고 물러나는 성격이지 끝까지 대결하지는 않으셨다. 그 대신 그 한과 고뇌는 언제나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되뇌는 해소방법을 썼고, 연로해지면서 줄 담배와 짭짤한 소주로 해소하시는 듯 했다.
이러한 환경인데도 타인들에게나 특히 자식들에게 결코 당신의 불만이나 어려움을 보이거나, 원망을 토로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가정사의 우선순위는 외숙부에게 두었고, 끝까지 인내하고 자신이 스스로 풀어 나갔다. 위대한 분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서운(棲雲)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에 시종일관 철저하였고, 외숙모는 공선사후(公先私後) 대단히 좋은데 좀 균형 감각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비촌 황씨(飛村 黃氏) - 에필로그
해방이 되었고, 여순사건에 6.25까지 터져 사회와 문화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나 서운(棲雲)은 당신의 인생관대로 열심히 사셨다. 주역(周易) 등 높은 경지의 공부 덕에 예언적인 혜안이 있어 6 .25사변이 발발할 것을 예측하신 듯, 서울에서 공부하던 자식들을 모두 불러내려 난(亂)을 잘 피하고 무사하게 했다.
그리고 99번의 명당 순례로 인해 가산이 거의 바닥을 쳤는데 조상이 감응했는지 졸지에 거금이 생겨 자식들의 생활기반에 도움이 되었고, 당신도 말년에 평온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수어천 댐이 조성되면서 보상금이 나와서 다시 가계를 추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고사성어가 딱 들어맞았다.
노후에도 주역(周易) 탐구는 계속되었으며, 영특하다는 젊은 주역(周易)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일주일에 두 번 방문 학습하시는 것을 보고 그 집념에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주역(周易) 선생: 眞城 靑陽 李源善, 1919년생, 퇴계 14세손).
‘받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한다’ 는 당신이 신봉해 왔던 군자(君子)의 도(道)는 끝까지 견지하셨다. 당신이 좋아하시던 서도(書道)를 계속하셨고, 버스 안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예의 바른 젊은이에게는 ‘忠孝傳家’, ‘知足’ 등의 문구가 든 붓글씨를 선사하는 아름다운 행위도 계속되어 갔다.
끝으로 서운(棲雲)의 위대성은 자신을 낮추고, 선행을 절대로 자랑하지 않는 군자(君子)적 처신이었다. 광복과 함께 많은 애국지사, 항일열사들이 국가 포상을 받았는데 ‘망명과 애국운동은 나라 잃은 한인(韓人)으로서 당연한 처신인데 애국자라고 굳이 신청해서 인정받을 것까지는 없다.’ 라고 하며, 끝까지 거절하셔 일체의 훈∙포장이 없었던 것은 당신의 고매한 인격과 한없는 ‘낮춤’의 인생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유가(儒家)의 학문을 바탕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일체경지(一切敬之), 모든 대상에 대해 공경을 표하는 태도는 우리 후손들에게 사표(師表)로 면면히 전수되고 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선비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