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라는 두 영국 젊은이가 페루 안데스 산맥에 있는 시울라 그란데의 서벽을 오르러 갔습니다. 중간에 페루 지역을 여행하고 있던 리처드 호킹이라는 친구를 만나서 일행은 셋이 되었지요. 호킹은 남아서 텐트를 지켰고 심슨과 예이츠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 형식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는 그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들의 인터뷰입니다. 다른 하나는 대역 배우를 써서 당시 사건을 재현한 극영화입니다. 이 형식의 의미에 대해서는 한없이 이야기해도 모자라지만, 꼭 그럴 필요가 없기도 합니다. 텔레비전 매체에서는 아주 익숙한 형식이잖아요. 이런 익숙한 형식이 극장용 영화로 옮겨갔을 때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는 건 재미있습니다.
하여간 케빈 맥도널드가 감독한 이 <터칭 더 보이드>라는 영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간 사람들은 도입부에서 일단 안심했을 것입니다. 세 사람은 모두 멀쩡해보입니다. 주로 얼굴만 나오지만 장애를 가진 것 같지도 않아요. 가끔 올라오는 손을 보면 손가락들도 다 붙어 있고. 그럼 해피엔딩입니다. 그렇죠? 네, 맞아요. 심슨과 예이츠는 지금도 등반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은 이 영화의 등반장면에서 직접 스턴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겪은 일은 결코 가볍게 볼 이야기가 아닙니다. 특히 그 중에서 조 심슨이 겪은 일은요.
그러니까 이야기는 이렇게 됩니다. 그들은 서벽을 알파인 방식으로 등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든 짐을 한꺼번에 지고 올라갔다가 텐트를 치지 않고 정상에 오른 뒤에 내려오는 식이라고 하는군요. 당연히 짐은 최소화하고 등반 파트너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들은 정상에 올라갔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어요. 하지만 등산사고의 대부분은 내려오는 길에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하강코스에서 그만 조 심슨이 다리를 다친 겁니다. 정강이뼈가 무릎 뼈를 뚫고 나가는 사고였대요. 끔찍하죠.
보통 이런 경우 한 사람이 부상을 당하면 그는 그냥 거기서 끝입니다. 하지만 사이먼 예이츠는 조 심슨을 그냥 버려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심슨을 자일에 매달아 미끄러뜨리면서 하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와, 좋은 친구입니다. 그러나 중간에 자일은 무언가에 걸려 버리고 눈보라 속에서 친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던 예이츠는 결국 자일을 잘라버립니다.
놀랍게도 이야기는 끝이 아닙니다. 크레바스로 떨어졌던 심슨은 죽지 않았던 거예요. 그는 거기서 살아남아 크레바스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뒤 며칠 동안 그는 물도, 식량도, 가스도 없이,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산을 내려옵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공포물입니다. 다른 장르를 상상할 수가 없군요. 조 심슨이 겪는 공포와 고통은 웬만한 신체손상 영화의 몇 천 배입니다. 한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해서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종류죠. 영화를 따라가다보면 우린 거의 실재하는 지옥도와 마주치게 됩니다. 지옥이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거기서 죽음의 운명과 맞서 싸우는 남자의 머릿속에는 있었습니다.
산악 영화라는 장르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그와 관련된 장르 클리셰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터칭 더 보이드>는 그 클리셰들을 피해갑니다. 일어났던 일들만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다큐멘터리 정신 때문이겠죠.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진짜 같습니다. 사실 조 심슨이 쓴 원작은 한동안 할리우드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아무리 멋진 특수효과를 동원했다고 해도 이 정도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어떻게 만들어도 조금씩은 가짜 같았을 거예요.
영화의 내레이션도 흥미롭습니다. 이들은 모두 전형적인 영국인답게 감정을 억제하고 남의 일인양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가끔 자기나 친구의 목숨이 걸린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오면 시치미 뚝 떼고 미소까지 짓더군요. 전 등반가들이 일반인들을 겁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걸 종종 봤는데, 동기야 어떻건 영화에서는 딱 맞습니다. 중반 이후로 그들도 조금씩 그 냉정한 외양을 벗어던지고 당시 감정을 회상하는데, 그 역시 영화에 맞고요.
<터칭 더 보이드>는 감동적인 결말이 있는 무시무시한 영화입니다. 단지 전 이 영화에 대해, 등산 경험이 거의 없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등산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제가 겪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공포를 선사할 것이라고 믿어요. 아마 더 무섭고 매혹적인 종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