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귀의(三歸依)란 무엇인가
- 백석 「여승(女僧)」
삼귀의(三歸依)는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불교 교단의 일원이 될 때의 의식에 관한 것을 기록한 문헌 『율장』에 의하면 처음 붓다 앞에서 삼귀의의 고백을 한 사람은 바라나시의 장자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인 야사(耶舍)가 붓다의 제자가 되어 출가하자 찾아와 붓다를 만나본 결과 자신도 신자가 되겠다며 다음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제 세존과 그 가르침과 그 비구중(衆)에 귀의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를 우바새(재가 신자)로서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부터 시작하여 이 목숨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나이다.”
이 고백이 교단의 일원이 되는 주요 의식으로 채택된 것이라고 합니다.
불교는 괴로움에 대한 깨달음과 벗어남입니다. 괴로움을 깨닫고, 괴로움의 원인을 발견하고. 이것을 없앰으로써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를 이룬 이에게 의지하고, 그가 가르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법에 의지하고, 또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부처님[佛]과 그의 가르침[法]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僧伽)라는 삼보(三寶)에 의지하여 살아가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부처님(佛, Buddha)이라는 피난처로 나는 갑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진리[法, Dharma]라는 피난처로 나는 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僧伽)라는 피난처로 나는 갑니다.
- 이중표 『불교란 무엇인가』 13쪽
‘피난처로 간다’는 것이 귀의(歸依)입니다. 큰 곤경에 처했을 때는 의지하여 피하라는 말인데, 그 말만으로도 참 따뜻합니다.
그럼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가장 큰 곤경은 무엇일까요?
- 괴로움과 고통입니다.
그 괴로움과 고통이 너무 크고 깊어 견딜 수 없는 지경이라면 의지처를 찾아야 합니다.
다음 시를 읽겠습니다.
여승(女僧)
-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 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그 여인이 간 곳은 분명 피난처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생이 밀려왔습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아녀자 혼자 딸을 기르며 산다는 게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평안도 어느 금광촌에서 옥수수를 팔았습니다. 그때도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던 서러운 여자입니다. 지아비는 끝내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습니다. 무상합니다. 그래서 시인도 그 사연을 가장 단순하게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봐도 비극적 삶에 무엇을 더하여 말하겠습니까. 보는 이도 단순화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런 삶의 무게를 짊어졌던 여자입니다. 인생에 대한 어떤 환상도 가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 여자에겐 말 그대로 피난처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무상함이 이 여인에게만 국한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원하는 바로 생이 와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거의 비슷할 것이고, 고통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라는 말의 경우를 변주해 보십시오. 이 세상이 그 말의 변주입니다. 어린 딸의 죽음도 변주해 보면 이 세상이 그 말의 어마어마한 스펙트럼입니다. 이것은 부자라고 해서 또는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겪지 않을 일이 아닙니다. 실은 많은 이들이 이와 같은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 있습니다.
그 여자 “산꿩도 섧게 울던 날” 머리를 깎습니다. 피난처에 든 것입니다.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이제 그녀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망념을 버리고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절하는 여승이 되었습니다. 세간의 욕망과 괴로움이 빠져나간 여승에게선 가지취 산나물 냄새가 났습니다. 설핏 보면 삶의 파란이 만들어내던 욕망의 움직임이 사라진 얼굴이어서 쓸쓸해 보입니다. 욕망의 색이 빠져나가 옛날같이 늙어 보입니다. 생에 대한 망념이 빠져나가 이제 불경(佛經)처럼 되어가는 여승입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그 여승의 얼굴에 나를 비춰보면 내 삶이 서럽습니다.
-오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