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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써 월드컵이 끝이 났다.
엄청난 사건! 프랑스에서 본 월드컵은 내게 그렇게 보였었다. 히딩크 감독의 말처럼 세계도 깜짝 놀랐던... 물론 프랑스라는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 TV와 라디오, 신문에서 한 달 내내 한국을 이야기하고, 한국 선수들의 환호하는 모습이 프랑스 일간지 전면에 실리고…
스페인과의 8강전이 끝나고, 신문 가판대를 찾아가 스포츠 신문을 사들고 돈을 지불할 때 느꼈던 묘한 아쉬움. 나 한국인인데… 물어도 안보네…
프랑스팀은 예선전이 한국에서 열릴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6강 이후의 경기, 그리고 결승이 일본에서 열린다는 이유만으로도 월드컵 개최국에 대한 모든 초점은 일본에 맞추어져 있었다. 물론 이러한 대중 매체들의 반응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프랑스인, 아니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을 알 수 없는 사대주의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신들이 세계 최강이라는 자만에 빠졌던 프랑스는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을 했고… 한국은 유럽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으면서 4강에 올랐다. 이러한 한국팀의 달라진 위상은 TV 중계를 보면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16강전 이후부터 교체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예선 경기에서는 우리 선수들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부르던 것이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계기로 선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설기현, 홍명보 선수와 같이 조금이라도 알려진 선수들 같은 경우에는 ‘세얼’, ‘옹그’ 이런 식으로 성(性)을 불렀지만, 대부분의 선수 이름을 자기들 식으로 편한데로 불렀었다. 예를 들어 이을용 선수 같은 경우에는 ‘이을’ 혹은 ‘이열’ 이라고 부르면서 중계를 했다. (사실 프랑스인들은 모든 고유 명사들을 자신들의 언어에 비추어서 발음을 한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점은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마이클 잭슨’이 ‘미카엘 작송’이 된지 오래 전 일이니… 나는 한국 인터넷에서 신문을 보기 전까지 미국전에서 득점을 기록한 선수가 ‘마티스’인줄만 알았다. ) 어제 있었던 터키전의 경우에는 물론 한 박자씩 늦기는 했지만, 선수들 이름을 호명하는 것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정확하게 발음을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두가 너무 길어 졌는데, 내가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축구 경기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프랑스 TV에서 해준 월드컵 중계를 보면서 느낀 점이다. 나의 짧은 상식으로 축구의 종주국은 영국이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용어가 영어로 만들어졌다. (태권도가 한국어로 만들어졌고, 유도가 일어로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실재로 우리 나라에서 본 축구 중계를 떠올려 보면, 대부분 영어로 된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 같다. 아마도 90분 동안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쓰는 용어를 분석해보면, 절반 가량이 영어로 만들어진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축구 중계는 달랐다. 거의 90% 이상의 축구 용어를 불어로 옮겨서 신조어를 만들었고, 그렇게 중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 들은 몇 가지 예를 들면, ‘골’은 ‘but’로 ‘골기퍼’는 ‘gardien’, ‘볼ball’은 ‘ballon’이고, ‘옐로 카드’는 ‘carton jaune’… 모든 용어들을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만들거나, 불어식으로 발음을 하면서 중계했다. 처음에는 몇 가지 그러한 사실에 놀랄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프랑스인들의 불어 사랑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의 불어 사랑은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파리에서는 영어를 알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 조차도 영어로 물었을 때, 불어로 대답한다는 얘기가 있을까… 사실 요즘도 간혹 이런 질문을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이 얘기에 대한 답은 결코 아니다라는 것. 프랑스인들이 자신의 언어에 대해서 엄청난 애착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데, 그들이 영어를 몰라서 안 하는 것이지, 일부로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요즘 같은 경우, 특히 파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자신의 영어 실력을 테스트라도 해보고 싶은 맘인지, 아니면 과시하고 싶은 맘인지, 불어로 물어도 영어로 대답하는 프랑스인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프랑스인들도 영어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또 영어의 침투를 당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최소한 무분별하게 외래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이번에는 축구 용어 말고 다른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자. 지금 내가 두드리고 있는 컴퓨터…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용어들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말로 바꿀 생각조차 안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불어는 영어와 분명히 다르다. Odinateur, écran, clavier, imprimeur… 가장 재미있는 것은 역시 ‘마우스’를 뜻하는 ‘souris’라는 단어다. ‘souris’는 쥐새끼라는 뜻이다. ‘마우스’가 ‘쥐새끼’라는 뜻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우리는 ‘마우스’를 ‘쥐새끼’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우스라고 하지… ‘쥐새끼’, 혹은 ‘생쥐’, ‘쥐’ 이런 걸로 ‘마우스’를 지칭하면 왠지 촌스러워 보여서 일까? 그랬다면 적어도 신조어를 만들 노력은 했었어야 했을 텐데…
여기서 잠깐, 예전에 소설가이면서 번역가로 알려진 안정효씨의 강연을 들은 얘기를 잠깐 했으면 한다. 벌써 몇 년 전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날 안정효씨가 했던 말들은 내게 엄청난 반감을 만들었기에… 자세한 내용들은 솔직히 기억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파트’를 ‘아파트먼트’로 부르고, ‘오토바이’를 ‘오토바이시클’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 그리고 ‘베스트 5’와 같이 영어 ‘best’의 본래의 의미에 맞게 사용을 해야 한다는 것. 또 한가지, ‘에버렌드’라는 단어는 영어 사전에 존재하지 않으니 ‘네버랜드’로 고쳐야 한다는 것…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임에는 틀림없겠지만,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언어의 기능에 대한 몰이해와 영어 사대주의에 대한 단면처럼 보였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고…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서구의 새로운 이론이나, 용어, 사물들을 들여오는 사람들의 역할은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에 바탕을 둔 적확한 언어의 선택!
예전에 학교에서 자유 주제로 발표할 일이 있어서, 나는 한글에 대해서 준비를 한 경험이 있다. 인터넷 여기 저기서 얻어낸 정보들을 보면서, 우리 글의 우수성에 대해서 또 한 번 놀랐었고, 또 우리 글이 파손되어가는 것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펐고, 모자라는 한글 맞춤법 실력에 나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 뭐 여전히 한글 프로그램들의 빨간 줄에 의지해서 글을 쓰고 있지만, 나름대로 우리 말을 사랑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용은 없는데 말들이 뒤엉켜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찌보면 이 또한 우리 말 실력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딱딱한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무분별한 외래어의 수용을 피했으면 하는 것이다. 사실 한글 만큼 우수한 언어는 없을 것이다. 이점은 모든 한국인들이 동감을 하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우수한 언어를 더 발전시키고, 세계에 알리는 일에 너무 소홀하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이다. 이미 인터넷의 도입으로 우리 언어가 심하게 상처입었고, 그러한 글읽기와 글쓰기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더 고민하면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낼 수 있도록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다시 월드컵 얘기로 돌아와서, 붉은 악마는 매경기 관중석에서 인상적인 문구들을 그려냈었다. ‘Again 1966’, ‘Pride of Asia’…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구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순 우리말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빨강과 하얀 색의 조화가 마치 북한의 행사 장면을 연상시키는 듯 했지만, 상암 구장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한 문장은 내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