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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二王 및 魏晉 草書
魏晉은 중국역사상 중대한 변환기 이며, 예술의 자각이 일어난 시기이다. 바로 李澤厚의『美的歷程』에서 "문화의 자각......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기타 예술 특히 회화와 서예인데, 상술한 바와 같이 위진시기부터 이런 자각이 표현되어 왔다.1)"고 언급한바와 같다. 王羲之와 王獻之는 "매우 우아한 선조의 형식으로써 인간의 여러 가지 풍채와 용모를 표현하였다.2)"고 하였으며, 게다가 "여전히 대부분 이런 나부끼는 듯 수려하고 비양하며, 자유분방하고 질서 있으며 뛰어난 위진 풍모였다.3)"라고 언급하였다. 이 말은 당시의 풍조와 서예 특히 초서와의 관계이고, 초서의 발전이 이 시기에 이르러 역시 자연스럽게 새로운 경향과 새로운 시장이 출현하였음을 설명한다.
만약『非草書』에서 초서 서사에 사로잡힌 사람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자라고 칭하였거나 질책성의 말을 하였다면, 위진 시기에 이르러서는 서예에 사로잡혀 감정을 나타내고 흥을 돋게 하였으며, 조야여론의 지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위진 시기 더욱더 자각하여 추구하게 된 서예가들 및 감상자들이 바로 출현하였는데, 이 역시 위진 시기 인물을 품평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 단계에서 가장 대표성이 있는 인물은 왕씨 부자를 마땅히 추거해야 할 것이다.
왕희지는 중국서예사상 영향이 가장 큰 서예가여서 예로부터 "書聖"으로 존경받았으며, 楷行草 모든 서체에서 모두 독특한 발전이 있었다. 초서 역사상에서 그의 출현은 이전의 초서 서예가에게 모두 암담하고 생기 없게 하였다.
왕희지, 字는 逸少이고 山東 臨沂 사람이며, 일찍이 右將軍으로서 會稽內吏에 임관하였다. 때문에 또 王右軍이라고 칭한다. 왕희지는 명문귀족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서예를 잘하였고, 게다가 "흩날리기가 유동하는 구름 같다.4)"고 한 것 및 "용맹스럽기가 놀란 용과 같다.5)"고 한 미칭이 있다. 퇴관 후 山陰에 머물면서 여러 명사와 자연에서 노닐며, 세속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永和九年(353년)에 쓴 저명한〈蘭亭序〉이다. 그는 東晉 시기 전형적인 명사의 한 명으로 신분상에서 魏晉 명사의 풍도를 체현하였으며, 그의 소탈하고 비범한 기질이 자신의 붓 끝에서 융합되었다. 唐 太宗은 그의 글을 논하길 "더할 수 없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은 오직 왕일사이다.6)"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진선진미의 추구는 바로 晉시기 문인이 추구한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왕희지는 서예사에서 중요하게 공헌한 것은 行書와 楷書이다. 초서에 대해서 그의 공헌은 오히려 평범하고 온화한 정신을 표현하여 今草의 寫法을 정련하였다. 魏晉 시기 예술 관념은 "예술을 위한 예술7)"이어서 예술상의 이런 추구는 왕희지의 초서에 반영되었고, 바로 형식 상 완전하여 결함이 없으며, 기백 상 典雅하고 飄逸하게 표현하였다. 이런 요구 하에서 왕희지는 필연적으로 기백의 특징에 적합한 今草(小草)로써 중요한 서사대상으로 삼았으며, 今草의 진행과정상 지극히 큰 촉진작용을 일으켰다. 결체와 선조 상 확실하고 세밀하게 표현하였으며, 각 방면 모두 위진 시기 추구한 "純粹美"를 체현하였다. 그의 小草는 神韻, 線條, 結構, 章法 중에서 확실히 完美한 결합에 도달하였으며, 飄逸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정취 하에서 그의 선조와 결자형식은 사람들에게 동요케 할 수 없는 느낌을 주었는데, 바로 이른바 "增減不得(증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금초는 고대 초서 발전사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초서는〈十七帖〉이 가장 저명하며, 그 밖의〈初月帖〉,〈寒切帖〉,〈行穰帖〉등의 行草도 비교적 저명하다.
왕희지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飄逸한 서신 중에 공교롭게 끊이지 않은 필세가 있다. 예를 들면 "頓首"의 寫法 및〈十七帖〉 중 일부분의 사법이다. 그러나 이런 공교롭게 나타난 사법도 결코 大草처럼 분방하여 구속받지 않는 느낌은 없으나, 균형 있는 今草(小草)와 융화되어 일체를 이루었다. 15-16세 쯤 된 아들 왕헌지는 그 부모에게 "초서와 행서 사이만 못하다"고 하여 "서체를 바꿀 것8)"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왕희지는 초서 창작 중에서 결코 그의 아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진정한 "改體"는 후대 사람들에게 남겨주었다.
王獻之, 字는 子敬이고, 왕희지의 일곱째 아들이며, 그의 부친과 함께 "二王"으로 칭송된다. 어려서부터 그의 부친으로부터 서예를 배웠고, 뒤에 따로 학습방법을 세웠다. 張懷瓘은『書議』에서 "子敬이 15-16세 즈음에 그의 부친에게 말하여 이르길 `옛날 장초는 매우 훌륭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은 변화된 간략한 도리를 다하고, 초서의 방종한 정취를 절정에 이르렀는데, 고( 확장한자, 草초자와 통용)行之間(초서와 행서 사이보다 못하고, 지난 법도보다 진실로 다르니, 대인께서 마땅히 양식과 풍격을 고쳐야 될 줄 믿습니다.`9)"라고 언급하였다. 이 한 단락의 비평은 子敬이 초서 사에서의 위치를 말해주는데, 오늘날 그의 작품을 보면 바로 이와 같다. 예를 들면〈送梨帖〉,〈鵝群帖〉이며, 특히〈鴨頭丸帖〉은 그가 가장 저명하게 된 행초서이다. 그의 이러한 행초서는 일사천리의 기세가 행초를 기묘하게 결합시켰으며, 자형이 비록 기울고 자유분방하나, 다만 이어져 자유자재하며, 서로 조영되었기 때문에 천진하고 시원한 기백을 드러냈다. 그의 작품은 왕왕 행초가 서로 섞여있는 동시에, 행초서의 대비 상에서 때때로 行과 行사이 비교적 커서, 자신이 부친에게 권고한 "초서와 행서 사이10)"의 관념을 체현하였다. 행서사이에서 연이어져 끊어지지 않은 草勢를 더하여 서작 중에 독특한 풍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사법 또한 후세에 이른바 "비에 눈을 더하였다.11)"고 한 창작 방법이다. 張懷瓘은『書斷』에서 왕헌지의 풍격은 바로 "고봉이 굽어진 절경 하늘 저 쪽 멀리 나타난 듯하니, 그 험준함은 헤아릴 수 없다.12)"고 찬양하였다. 반면에 唐 太宗은『王羲之傳記』에서 "그 글씨의 형세를 보니 거칠고 여위어 마치 겨울에 왕성한 마른나무인 듯하고; 그 붓의 흔적을 보니 구속되어 엄한가정의 굶주린 종과 같다.13)"고 그를 혹평하였다. 찬성과 질책에도 불구하고, 그 선조의 강한 힘과 姿態의 성김은 즉 왕희지와 구별이 있는 그 밖에 다른 풍모를 대표하고 있다. 그 자신도 매우 자신의 돌파를 좋다고 여겼기 때문에, 謝安이 그의 서작과 왕희지의 서작 중에서 누구의 것이 좋으냐고 질문하였을 때, 왕헌지는 자신 있게 "본래 낫다고 생각한다.14)"고 말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가정의 모범을 엄수하였다면, 아마도 그의 초서는 이미 초서발전의 긴 과정 중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그의 이런 독특한 초서 풍격은 오히려 그의 부친과 같이 공통적으로 후세의 초서가에게 깨우쳐주고 있다.
魏晉시기 장초는 여전히 서사의 중요한 서체이고, 이 시기 장초 창작 중에서 비교적 저명한 작가는 索靖, 陸機 등이 있다.
索靖, 字는 幼安이고, 敦煌 사람이며, 漢 張芝 누나의 손자이다. 灑泉 太守를 지냈으며, 西司馬를 정벌하여 후세사람들이 索征西라고 칭하였다. 張懷瓘은『書斷』에서 삭정의 장초를 神品에 나열하고, 그가 "장초와 초서에 뛰어났다.15)"고 하였으며, "장지의 초법을 전수받았으나, 그 형식을 변화 시켰다.16)"고 칭송하였다. 삭정은 서예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초서 이론에도 연구하여 일찍이 저명한『草書狀』을 지었다. 그의 대표적인 장초작품은〈月儀帖〉이다. 그 밖에〈出師頌〉,〈急就章〉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초서는 당시 영향이 매우 커서, 王隱은 칭송하여 말하길 "색정의 초서는 세상에 비교할 데 없으니, 배우는 자들이 구름같이 많았다.17)"고 하였다. 그 장초서풍의 특징은 변화가 비교적 많고, 용필은 강인하다. 王僧虔은『論書』에서 색정은 일찍이 자신의 장초를 일컬어 "기교 있고 힘이 있는 배의 뒷부분이다.18)"라고 말한 것을 기록하였다.『宣和書譜』에서도 그를 "숙련됨이 지극함은 색정이 장지에 못 미치고; 오묘한 여운이 있는 자태는 장지가 색정에 미치지 못한다.19)"고 칭송하였고, 歐陽詢 역시 일찍이 그의 비문을 여러 차례 보았다고 하였다.
陸機, 字는 士衡 이고, 陸遜의 손자이며, 晉 나라의 저명한 문학자이다. 현존하는〈平復帖〉이 바로 陸機 작품이다.『宣和書譜』에서〈平復帖〉을 "장초가 기이하고 순박하다.20)"고 칭송하였는데, 이 한마디로 이 작품의 진수를 갈파하였다. 작품의 전체 면모를 보면,〈平復帖〉은 기법이 서툴러 소박하나 화려하지 않으며, 兩漢 木竹簡과 한 계통으로 이어져 있고, 동시대의 樓蘭殘紙의 풍격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붓 끝이 다단 모지랑붓으로 서사한 듯 하여 필획이 말랐으며, 기법이 서툴러 소박하나 자유자재하다. 그리고 그다지 명확히 드러낸 波折이 없다. 결자는 간략하고 평범하며 질박하나, "형체가 실한 경향은 없다.21)" 때문에 "기법이 기이하고 서투르다.22)"고 하는 평가는 확실히 육기의 추구 및 작품면모와 가치를 정확히 말한 듯하다.
晉시기 또한 이름 없는 작품이 매우 많다. 그중 매우 진귀한 것은 樓蘭殘紙이다. 행초서가 서로 섞인 서체이며, 예술풍격 상 육기의〈平復帖〉과 같은 솜씨이다. 그 밖에 또 대량의 晉簡이 전해지고 있는데, 다소의 晉簡은 초법이 바탕이 되어 구속되지 않았고, 후세 광초의 풍모가 있다. 비록 용필 역시 이전의 簡書 그림자가 있으나, 眞·行의 書體가 발전한 晉나라 시기에 있어서 이와 같은 서체는 이미 성숙한 초서였다. 왕희지와 다른 그 밖의 풍격면모를 표현해 냈다. 魏晉 시기 특히 二王은 중국 초서사에서의 영향은 거대했다. 魏晉 시기 "예술을 위한 예술의 순수미 추구23)"로 인하여 二王 및 여러사람들이 초서사상과 서예 발전사상에서 "오늘날은 화려하다.24)"고한 풍모를 창조하였다. 당연히 여기서는 주로 행초와 소초를 가리킨다. 二王 이후 가장 먼저 출현한 소초 서예가는 智永이다.
智永, 永禪師로 불린다. 이름은 法極이고, 속성은 王이다. 吳興 永欣寺의 스님이었으며, 왕희지의 7대손이다. 王徽之의 자손이며, 南朝 晉 나라에서 때어났다. 아마 조상의 원인 때문에 그는 먼저 집안 법도의 전수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른바 "서예는 왕희지로서 사법을 삼았고, 필력이 자유자재하며, 진초를 겸비하였고, 맵시도 조상의 풍모가 있다.25)"고 말하였다. 전설에 그는 永欣寺에서 40년 동안 내려오지 않고 오랜 세월〈千字文〉을 임서하여 얻은 800권을 江南의 寺院에 각각 1권씩 보시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글을 찾는 자가 많아 문과 정원은 시장과 같으며, 문지방이 구멍이 나게 되어, 후에 철로써 쌓아 철문지방이라고 불렸다.26)"고 한다. 또 그는 글을 써서 못 쓰게 되는 붓이 많아 후에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 때문에 智永은 "철문지방27)", "붓 무덤28)"이라는 명성이 있다. 그의 초서작품은 묵적〈千字文〉이 전해오고 있는데, 바로 "八百本" 중의 한권이다. 현재의 묵적은 일찍이 唐 시기에 있었던 것으로 바로 일본의 遣唐使와 長安의 歸化寺 스님이 왕희지의 묵적과 함께 모두 휴대하여 일본에 건너간 것이며, 현재 일본 京都에 있다. 그의 "철문지방29)", "붓 무덤30)" 이든지 또는 "四十年", "八百本"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단지〈千字文〉을 보더라도 묵적의 정확하고 적절함, 결체의 부드럽고 자연스러움, 기법의 능숙함 등을 볼 수 있다. 왕희지의 자연스럽고 대범하며, 飄逸한 기개, 마음 대로한 용필구도는〈千字文〉에서 매우 적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四十年" 동안 "八百本"이나 만든 바일 것이다. 단지 그의 특수한 가정의 서학 근원이라면, 특수한 "철문지방", "붓 무덤", "四十年", "八百本ꡓ의 이러한 노력의 기록은 그로 하여금 二王과 唐朝의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량을 가설하였다.
魏晉 시기 추구한 "純粹美"의 시대적 풍격은 章草 상에서도 장초의 심미관이 변환하였고, 위진 이후의 장초에도 "오늘날이 화려하다.31)"고한 색채를 띠게 되었으며, 용필상에서 역시 점점 고풍에서 벗어나 "오늘날이 화려하다.32)"고 한 행렬에 참가하였다. 隋나라 사람들의 묵적인〈出師頌〉은 이러한 종류의 대표작이다. 수나라 사람의〈出師頌〉은 漢代 및 陸機〈平復帖〉등의 수수하면서 고풍스럽고, 간략한 서풍과 서로 다른 풍모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는데, 이것 또한 "오늘날이 화려하다.33)"고 한 필연적 풍모이다. 필법은 이미 질박하고 너그러우며 서투른 의취가 결핍되었고, 결체도 천연스럽고 마음 대로한 구상이 희미해졌으며, 아름답고 소탈함을 드러낸 것은 대폭적인 提按의 용필 및 구도 상에서 정성들여 구상한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이런 면모는 비록 漢代 장초의 풍모를 떠났으나, 오히려 동시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대의 서풍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바로 이런 면모는 후세 章草작가의 장초 창작에 영향을 미쳤다.
요컨대 隋代의 초서예술은 선인들의 뒤를 이어받아 계속 발전시켰고, 짧은 30년간 각양각색의 초서 양식에 대해 선택적 계승을 하였으며, 왕희지의 풍모가 주류가 되었고, 계승과 발전을 하면서 唐의 초서 서풍을 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이왕과 그들의 초서에 대한 소개, 잘 읽었습니다.
좋은자료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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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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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