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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건대항쟁 애학투 원문보기 글쓴이: 이상근
한총련 사건 변론 평가 일 시: 1997년 4월 18일 오후 6시 장 소: 민변 사무실 참 석: 이석태, 윤기원, 조광희(사회), 김도형 회원, 정은경 간사 조: 한총련 사건이 지난 8월 중순에 시작되어 1심 재판이 얼마 전에 끝나고 2심 재판도 며칠전 첫 기일이 시작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숫자나 여러 가지 규모 등의 측면에서 예전 변론과는 다른 형식이 필요했고, 또 실제로 다르게
진행된 것 같은데 아직 완전히 마무리는 안됐지만 지금까지의 문제점등을 짚어보고 논의하기 위하여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선 김도형 변호사께서 한총련 사건 변론 진행 경과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김: 전체적으로 구속 기소된 학생이 약 430여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 민변에 배당된 학생수는 256명입니다. 1심 재판 결과
실형선고율이 40%를 넘어 거의 50%에 육박하였고, 물론 무죄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재판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8월 20일에 구속되어 추석이 지난 후 기소되어서 1심 재판이 서울지법 형사합의부 재판부 세 군데와 각 지원
형사합의부에서 작년 10월경부터 시작되었고, 치사사건을 제외한 다른 사건은 10월말~11월 초 사이에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그후 올해 2월경에 항소심이 진행되었는데, 그 결과 상당수 학생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총학생회
회장이라든지 한총련 및 남총련 핵심 간부들에게는 항소심에서도 징역 1년6월에서 많게는 3년까지 실형이
선고되었습니다. 현재 치사사건 항소심 재판은 지난 주에 시작되었고, 올 6월경에는 마무리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 사건이 발생한 후, 학생들이 구속되면서 접견 및 선임 단계에서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접견 및 선임
단계에서의 문제점이나 어려운 점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윤: 민변에서 이 사건을 맡게 된 특별한 경위나 과정은 없고 보통의 시국사건이 민변에 의뢰가 들어오듯이 한총련 사건도
일반 시국사건과 마찬가지로 변론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워낙 구속자 수가 많았고, 또 그러다 보니
민변에 의뢰하는 형태가 개인이 의뢰하는 형태, 소속학교 또는 각 인권단체에서 변론을 의뢰하는 형태 등 3가지 정도로
나누어졌습니다. 배당 문제에 있어서도 배당 이전에 과연 이 사건을 민변에서 수행할 필요가 있느냐에 대하여 약간의 논란이 있었습니다.
즉 그 당시 한총련에 대해 파괴적이고 공작적인 언론 조작과 수사기관의 공격적인 대응이 있는 상황인데 과연 민변이
단체의 명의로 한총련 사건을 맡을 명분이 있느냐에 대한 논란이었으나, 한총련 사건을 다른 시국사건과 달리 취급할
이유가 없으며 구속자의 수가 엄청나기 때문에 회원 개인이 맡는다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판단 하에 민변이 단체 명의로
수임하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대량의 구속사태를 야기한 한총련사건을 민변이 일시에 수임하는 경우 과연 현재 민변의 변론 역량에
비추어(실제로 변론에 참여하는 민변 회원의 수에 비추어) 250명 이상의 구속자가 변론을 의뢰할 경우 충실한 변론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을 배당하면서 회원들에게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당하느냐에 대한
고심 끝에 우선은 유치 장소와 회원의 사무실 위치 등을 고려하여 한 가능한 한 사무실이 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구속자들을 접견하고 변론하는 방향으로 배당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건에 대해서 구치소별로 배당하다 보니
배당시 의정부교도소나 성동구치소 등의 경우는 동부지원에 계신 변호사님들이나 의정부지원에 계신 민변 변호사분들이
사실상 다 맡을 수 없는 상황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 모든 회원들이 최종적으로 각자가 맡은 피고인에 대하여 변론을 진행하는 것과는 별개로 구속자가 긴급히
접견을 요하는데 최초 접견한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론까지 계속해서 진행할 수 있는가, 또 자신이 접견한 피의자가
일건으로 기소될 것인지 또는 다른 피의자와 함께 병합하여 기소될 것인지 확정되지 않은 점도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일단은 나중에 법정에서 변론을 맡을 변호인을 조정하기로 하고 우선은 접견을 할 변호사를 개인 사무실별로
배당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무실의 위치와 구치소 등을 고려해서 변론과 접견을 분리시키고 그 후에 원칙적으로는 접견한
변호인이 변론을 맡되 그렇지 않은 경우, 예를 들면 어떤 변호사가 a를 접견하고 다른 변호사가 b를 접견했는데 나중에
a와 b가 같이 기소됐을 때에는 a의 변호사가 혼자서 법정변론을 진행하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변론비용 부분에서도 기존 방식과 달랐습니다. 지금까지는 민변에서 일괄적으로 선임료를 받아서 각 개인 변호사에게
주거나 또는 선임한 각 변호사가 직접 선임료를 받아 민변에 통지하는 두 가지 경우가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모든 사람이 선임료를 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선임료는 원칙적으로 100만원을 기준으로 했으나
100만원의 선임료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므로, 한총련 사건의 경우 민변에서 총괄하여 선임료를 받고
추후에 정산하는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만약 기존의 방식을 취할 경우에는 어떤 회원은 20명을 맡았는데 일부 선임비를
못내는 경우나 선임비를 100만원 이하로 내는 경우가 있어 선임비가 천만원 들어오고, 어떤 사람은 10명을 맡았는데
천만원이 들어왔다고 하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우선 모든 선임비는 민변에서 총괄하고 나중에 각
변호사에게 전체 피고인 수 대비 자신이 수행한 피고인 수에 대하여 총선임비에서 그 비율 만큼 선임비를 정산하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산 과정에서 일부 사무실에선 직접 당사자로부터 받은 선임료가 자신이 받을
선임료를 초과하여 민변에 반환하는 아픔(?)이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민변 회원들 중 일부에서는 민변의 기금모금 차원에서 한총련 사건의 전체 선임료를 민변에 출연하자는 의견도
제시되었습니다. 즉 민변이 만약 250명을 선임하여 비용을 백만원으로 정하면 총액이 금 이억오천만원인데 이것을
민변의 기금화하면 민변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는, 민변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고 있는 젊은 회원들의 주장이었지요.
이에 대하여 일부 변호사들은 그러면 일도 하고 또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돈도 더 내게 되는 것은 부당하지 않느냐, 민변
회원들의 사무실 사정도 좋지 않은데 전액을 기금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아 결국 총액의 10%를
민변에 적립하고 나머지 90%는 각 수행 건수의 비율에 의해 각 변호사님들에게 정산하였습니다. 정: 총 수령한 변론비용은 1억9천만원인데 여기서 10%를 기금으로 빼고 각 변호사에게 6십3만4천원씩 지급했으며
추가로 1천만원이 들어와 총 3천만원 정도가 민변 수입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조: 과거에도 이 정도 규모의 사건이 있었습니까? 예를 들어 건국대 사태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이석태 변호사님께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5공 말기인 1986. 10.에 발생한 이른바 건대 사태는 연행학생 수 1,500명에 구속학생 수가 1,200여명에 달한,
당시로서는 이번 한총련 사건 못지 않은 규모의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물론 민변과 같은 변호사 조직이
없었고 인권 변론을 해온 선배 변호사도 소수였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 이 분들과 연결되어 변론을 의뢰했고, 나머지
일부가 일반 변호사를 선임한 외에 대부분의 구속 학생들은 변호사 없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중형을
선고받은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학생들 숫자가 많았음에도 대부분, 그것도 민변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변론의 내용과
방향을 공유해온 변호사들이 변론을 맡아 하였다는 데서 중요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을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변론을 한총련 집행부에서 민변에 조직적으로 의뢰한 것인지
아니면 학교 또는 지역별로 학생회 또는 학생들 대표가 의뢰했는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조: 일부는 학교 학생회에서 모아서 의뢰했지만 대다수는 개인적으로, 가족이나 친구들을 통하여 의뢰했습니다. 그당시
한총련 집행부가 다 도피한 상태여서 집행부가 총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윤: 한총련 사건의 수임에서 재미있는 것이 사실 변호사 비용이 싸다고 해서 민변에 온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반
변호사의 경우 시국사건이기 때문에 일반 사건보다 위험 부담이 크다며 변호사비용을 더 받는 경향이 있어, 주위의
구속학생이 700만원에서 1,000만원 정도의 변호사비용을 지출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그 정도의 자력이 없거나 그러한
돈을 지출하기 싫은 경우는 민변에 가면 100만원이면 변론을 하여준다는 말을 듣고- 또 돈이 없으면 안내기도 하고 - 온
경우, 즉 비용이 싸서 온 경우도 30%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보통 사건 발생 후 열흘에서 일주일이면 민변에 변호인 선임 의뢰가 거의 확정되는데 이 사건의 경우 선임 절차가
구속 때부터 재판시까지 약 두 달 정도 계속되었습니다. 재판이 시작되고도 선임 의뢰가 계속 들어와 배당에 어려움이
많았던 사건입니다. 조: 선임 관계는 그 정도로 하고요, 재판 진행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일단 한총련 사건에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당시 언론이나 정부의 태도가 저희 변호사들의 생각과 상당히 달랐고 또한 일반 국민들의 인식도 좋지 않았는데, 그런
것들이 판사들에게도 일정한 선입견으로 작용했던 것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즉, 한총련의 폭력성, 친북성이 강조되고,
주사파들이 이 사태를 주도했다 하여 지금까지도 학생운동에 타격이 큽니다. 이 점에 관해서 한총련 사태를 어떻게 보고
규정해야 되겠는지 김도형 변호사님께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김: 통일축전 행사는 그 전부터 해마다 개최되어온 연례행사였습니다. 물론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는 통일축전 행사를
불허하고 탄압하여왔습니다. 94년도의 경우 서울대에서 개최되었는데, 그때도 경찰과의 충돌은 이번 연세대 사태와
맞먹을 정도로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토끼몰이식의 진압은 없었습니다. 당시 경찰에서는 관악산이라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산으로 도망간 학생들을 일일이 모두 체포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고 하고 있지만 말도 안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이번 연세대에서 개최된 통일축전 행사가 종전과는 달리 대량구속사태를 낳게 된 데는 당시의 정치적 국면과 사건
전후에 벌어진 정세와도 상당한 관련이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김영삼 정권이 스스로를 문민정부라고
칭하며 개혁의 성과물로 자부하던 5, 6공 비리세력에 대한 구속과 처벌이, 당시 단행된 8. 15 대량 사면으로 개혁이라는
이름을 빛바래게 했고, 또한 기존의 통일논의 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태도에 비추어볼 때 아마도 새로운 방향 설정을
위하여 공안정국을 조성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총련의 통일축전 행사를 이용하고자
했을 터이고, 여기에 학생들 또한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지 못함으로써 정부의 유인책에 빠져들어, 정부는 의도적으로
공안정국 형성을 위해 언론플레이를 벌여나갔고, 결국 학생들을 학교 건물 안에 가둔 후 종합관에 있던 학생들을 전원
체포하였습니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정부측에서 대량 구속사태는 사전에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즉
학생들이 연세대에 들어가기 전에 학교 주변을 원천봉쇄하여 통일축전 행사가 열리는 것 자체를 능히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상당수 학생들을 학교 안으로 들여보낸 후 학교를 봉쇄하고 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학생들의 폭력성을 편파적으로 왜곡하여 극도로 부각시켰습니다. 그 후 발생한 잠수함 사건이나 이후에 나타난 김영삼
정부 후반기의 양상을 놓고 봤을 때 사전에 다분히 의도적인 측면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언하자면, 김변호사님 말씀대로 이번에 한총련이 연 통일축전 행사가 과거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행사 자체도 대학 내에서 있었고, 행사의 성격도 대정부 또는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하기보다는 내부적으로
의견을 결집하는 자축 행사의 성격을 띄었기에, 예년의 통일축전 행사하고 큰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정부와 언론이 보여준 대응은 과거와 비교하여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뒤에 경찰이 한 물리적 진압 과정에서도
나타났지만 사전에 언론에 의해서 행사 자체를 불법 불온시하고 이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해냈죠. 학생들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기 이전에 이미 여론에 의하여 엄청난 범법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년 해온 한총련 행사에 대하여 무슨
이유로 이번에는 그렇게 강경하게 대응했을까 하는 것이 우리가 검토해야 할 점인데, 일단은 아까 말씀하신 공안정국의
조성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작년 말 문제가 된 안기부법 및 노동법 개정 파동과 일정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공포 분위기를 만들고 여론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린 가운데 연말의
안기부법과 노동법 개정 문제를 집권세력의 의도대로 용이하게 끌고 가기 위한 장기적 전략 내지 포석에서 이루어진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 그러니까 안기부법, 노동법 개정을 의한 일종의 사전 정지작업이었다는 말씀이시죠. 결국 김영삼 정부는 법 개정과
관련하여 국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에 부딪혔고, 그 후 한보사태, 김현철 사건 등으로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을 정도로
추락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탄압으로 학생들만 정치적 희생물처럼 됐는데, 여기서 왜 정부가 만들어가는 모양에
따라 이 사건의 성격이 변질되고 인식의 틀이 만들어졌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한국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독특한 문제점, 즉 과도한 영향력이나 장악력, 동시에 비민주적이고 부적절한 사실보도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처방과 보안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시는지 윤기원 변호사님께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윤: 공안정국 조성, 그 뒤의 안기부법, 노동법 파동 등 그전의 총선에서의 패배로 의석과반수를 얻지 못한 조급함 및
불안감 , 또 항상 여당에 비판적인 세력이고 정부에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는 결집력 있는 한총련 와해의 필요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그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언론이 너무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매도했고, 그러한 분위기 때문에 민변에서 성명을 내는 것조차
어려웠던 그런 상황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자칫하면 언론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오도된 여론이나 국민 정서로 볼 때
민변이 일방적으로 한총련을 두둔한다는 인상을 줄 경우 민변 역시 한총련이 갖고 있는 친북성과 같은 문제에 휘말릴
수도 있고, 그렇다면 민변의 입지가 어려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성명을 내면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따라서 민변은 나중에 성명을 내면서 학생에 대한 비인도적인 처사, 즉 음식물, 의료품 등의 반입이 철저히 차단되는
것이나, 경찰의 시위학생에 대한 탄압, 연세대 봉쇄가 정당하다는 정부 여당이나 언론의 관점 등에 대해서
비판하였습니다. 이번 한총련 사건이 과연 누가 폭력을 주도했는가에 대해서 정부와 한총련 사이의 입장이 다를 수 있고 각 단체마다
입장은 다르겠지만, 경찰이 매년 있어왔던 한총련 행사에 종전과 달리 과격하게 대응함으로써 대량의 구속사태와
부상자를 내고 언론이 일방적인 한총련 매도로 치달은 배후에는, 그후 안기부법, 노동법 개정 문제 등에서 드러났지만
무엇인가 정부 여당이 다른 목적과 저의를 갖고 공작적인 차원에서 대응한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이: 일반적으로 변호사가 사회에 큰 해를 끼친 사형수도 얼마든지 변론을 할 수 있고 민변 소속 변호사도 개인적으로는
사건 유형에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민변이 단체의 입장에서 변론을 맡는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인권이란
범주 속에 들어 가는 사건을 선임해왔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변론을 의뢰한 경우에도 사건의 성격이 인권과 관련이
있는가 평가를 해본 후 선임하는 것이 원칙일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힘들게 변론을 하면서도 재판 과정에서 의뢰인과
호흡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인권 문제라는 기본 바탕을 서로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번 한총련 사건은 변론 수임단계에서도 판단이 쉽지 않았고, 변론 과정에서도 학생들과의 일체감을 얻는 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조: 실제 구속돼서 기소된 사람이 상당수였으므로 재판 진행에 있어서도 통상과 달리 여러 가지 자료와 변호사들의
의견을 모아서 한총련 변론지침서를 작성, 배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재판에 그것을 참고하여 가능하면 통일적인 재판을
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심의 경과나 내용을 본다면 실제로 여러 변호사들의 변론 수위나 정도에 많은 차이가 있어
통일적이지 못한 변론 결과가 나왔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아쉬워하는 목소리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점에
대해서도 말씀을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김: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단순 가담자인 학생들에 대한 공소장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학생도 기소했는가 했을 정도로
오히려 허탈해 하였을 것입니다. 공소장의 내용도 함께 범행을 하였다는 공범이 단지 ‘성명 불상자 백여명과
공동하여’라는 식으로 전혀 특정되어 있지 않고 막연하였으며, 검찰의 논리는 공모공동정범이론을 한도 끝도 없이
무한정 확대 적용하여 참여한 것은 맞으니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너는 그곳에 있었으니까, 또한
거기서 전경이 다쳤으니까 특수공무방해치상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 형사사건과
비교해볼 때 공소사실의 불특정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들이 일반 형사사건과 마찬가지로 생각하여 그냥 집행유예로 나올 사안이다라고 안일하게 판단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일반사건이라면 당연히 집행유예로 나올 사안이었습니다. 초범에다가, 가담 정도는 경미하죠,
게다가 반성하고 있죠. 그래서 변호사들의 변론 초점은 무더운 한여름부터 고생한 어린 학생들이 되도록이면 빨리
풀려날 수 있도록 하는 데 맞춰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역시 변호사들이 응당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률적으로 다툴만한 쟁점이 많고 따지면 끝이 없는 내용인 줄 알지만, 그렇다고 무죄 선고는 날 리 만무한
상황에서 일일이 증거를 부동의하고 증인을 부르고 해서 두기일, 세기일 속행하느니 어차피 집행유예로 나갈 사안이라면
차라리 조기에 종결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크다는 판단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핵심적으로 다투어야 할 사안은
종합관에 있었던 한총련 간부들에 대한 치사사건에서 주력적으로 다투기로 결정하고, 수많은 학생들이 다 같이 갈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변론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정말 특별하게 학생 스스로 공소사실이 억울하다면서 다투겠다는
경우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 이외에는 모두 1회 공판기일에 결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검찰도
놀랐을 정도로 50%에 가까운 실형률이 나왔다는 거죠. 제가 들은 바로는 검찰 스스로도 적어도 20% 이상은 실형이
나와야 체면이 설 텐데 하면서 걱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이번 한총련 사건은 애초에 구속시킨 경찰보다 검찰이 더 했고 검찰보다 법원이 더 했다는 것입니다.
변호사들이 법원에 대하여 일말의 합리적이고 공정한 재판을 기대했던 것은 순진한 착각이었을 따름이었구요. 만일
변호사들이 사건마다 일일이 제대로 다투었을 경우 그 많은 사람의 재판을 모두 구속기간 내에 끝내려면 매일 재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법원은 마비상태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조: 초유의 대량구속 사태라는 측면에서 민변 변호사들은 가능하면 통일적인 방식으로 변론을 진행하되 사안의 내용으로
봐서 상당수는 풀려나올 것에 중점을 두고 임했던 것이 사실인데, 민변 변호사의 입장하고 실제 언론이나 여러 가지
선입견에 빠져 있는 재판부의 견해는 상당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재판은 독립돼서 해야 하는데 가령 본원의 3개
재판부가 이미 사전에 여러 가지를 논의하고 서로가 보조를 맞춰 신속함을 중시하여 재판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1회 공판 이상을 진행하고자 하면 변호사들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주기도 하는등의 문제점도 있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죠. 이: 법원에선 이미 강한 의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사건을 재정합의사건으로 정한 것이 그렇고, 지원의 경우
서울지방법원의 재판 진행 및 선고 내용을 따라가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학생들이나 민변 변호사들의 노력
여하에 관계 없이 이미 유, 무죄와 형량의 선이 대강 정해져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재판 과정이 생각대로 되지 않은 점에 관하여는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할 것 같은데,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석방이
시급하게 요구되어졌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연세대학교에 들어갈 때 호기심으로 참여했거나 설사
나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훈방되겠지 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행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초범이고 경험이 없어서 빨리
나오고 싶은 생각이 강했는데 민변 변호사들이 그것을 뿌리치고 원칙에 입각한 재판을 하기가 처음부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예를 보면 학생들이 관계된 사건의 경우 형이야 어떻든 사실관계는 변호사, 학생, 재판부도
어느 정도 실체적 진실을 파악한 상태에서 선고가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번에는 고학년 학생들은 빠지고
저학년의 순진한 학생들이 대부분 붙잡힌 측면이 있어서, 어찌 보면 법원의 무거운 철퇴가 이들에게 도매금으로 전가된
느낌입니다. 제가 맡은 한 학생은 여러 차례 돌을 150개 가량 던졌다고 진술했는데, 그 와중에 돌을 그렇게 많이 던질 수 있느냐, 또
어떻게 숫자를 셀 수 있었느냐 하는 점에서 상식적으로 경찰의 위협에 못이긴 나머지 잘못 진술한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 학생이 경험이 있고 어리숙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돌을 던진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여 벌써 석방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많은 변호사들이 많은 학생들을 변론하다 보니 변론의 핵심을 잡기가 어려웠고, 또 석방을
탄원하다 보니 진실을 밝히는 재판보다는 학생이나 변호인도 용서를 비는 형식이 되어서, 만족스러운 변론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윤: 기본적으로 법원의 배당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주셨는데, 법원의 선고형량에서도 초범이고
1학년이냐, 사수대냐 아니냐, 학생회 간부냐 아니냐 등의 몇 가지 기준만으로 피고인에게 형량을 선고함으로써
자판기식으로 일률적인 형량을 부과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또 자기 사상과 양심에 따라 집회에 참가했고 그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하게 된 한총련 학생들에게까지 파렴치범에게나 내리는 사회봉사명령을 덧붙여 판결한 것도, 지나치게
사회의 여론을 의식한 것이었고, 또 법원이 보수화한 면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변호사님이 잘 지적하셨다시피 1, 2학년 등 시국사건으로 수사받은 경험도 없는 저학년이나 시위에 처음 관여한
학생들이 수사관들의 회유에 넘어가서 안한 일을 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의 시위 경력자는
일찍이 농성장을 이탈했는데 잡힌 학생들은 시위에 처음 참가했거나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하였다가 경찰의 봉쇄 조치로
연대에 남아있었다는 점만으로 처벌되는 불균형, 피고인에 대하여 제기된 공소사실 중에서 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은
피고인이 폭력을 행사하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연세대에 얼마동안 감금되어 있었느냐에 따라 치상의 피해자 수가
늘어나는 우스운 경우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하여 민변 변호사들이 느끼는 회의 중의 하나가, 누누히 지적하였다시피 피고인의 석방을 구하고
용서를 구하는 변론을 하면서 두 달 정도 민변의 업무가 거의 마비되었고 개인 변호사 사무실 역시 1인당 4∼5건 정도의
사건을 맡고 있어 업무에 막대한 지장이 있었던 데 반해서, 수입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변론 과정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없었던 사건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이 사건뿐 아니라 민변에 의뢰가 들어오는 사건 중 인권과
관계된 사건에 있어서 꼭 민변이 나서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민변 회원들 사이에서 어떤 통일된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이것은 앞으로도 민변의 숙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조: 이 사건 재판을 통하여 법원이 보여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지금 나온 이야기만 정리해도 재정합의사건으로
일률적으로 재판하고 재판부간의 의견을 미리 교환하여, 실체를 밝히기 위하여 주력하기보다는 이미 갖고 있는 심증에
맞춰 신속히 사건을 처리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하여 압수영장에 의해 한총련 통신망을 폐쇄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재판부는 학생들을 일정하게 분류해서 일정한 기준 이하의 학생에게는
반성문을 제출하게 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까 이야기한 일부 1심과 2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만 일종의
정치범이자 양심수인 학생들에게 사회봉사명령을 내리고 또 학생회 활동 중지의 조건을 다는 등의 일들도 있었습니다. 저의 견해로는 1심 재판에 있어서 변호인의 경우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이지만 판, 검사들은 더욱 이 사건의 실체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실체를 밝히는 작업은 대부분 한총련의 주요 간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치사사건에서 비로소 그나마 이루어진 것 같은데요, 치사사건을 담당했던 김도형 변호사께서 몇 가지
말씀해주십시오.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하는 점과, 현장검증, 증언 등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면서 느낀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김: 먼저 연세대 종합관 현장검증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자면, 현장검증 결과 당시 학생들의 폭력도 컸지만 공권력이
행사한 폭력 또한 거기에 못지 않게 상당히 컸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치사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들이 파악한 이번 한총련 사건의 실체관계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일단 발단은
경찰이 통일축전 행사가 열리기로 한 장소인 연세대를 일응 봉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각 지방에서 속속 상경하고 있던
통일선봉대의 행진을 저지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한총련 집행부에서는 통일선봉대 행진을 중단하고
조속히 연세대에 집결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학생들의 연세대 집결 과정에서 남총련 소속 학생들이 무학재에서 출입을
막고 있던 전경부대의 저지선을 허물고 4천명 이상의 학생들이 산을 넘어 연세대로 들어가는 등 경찰과의 충돌이 전혀
없었던 바는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경찰이 보인 태도는 일단 학생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쪽이었습니다. 일시적으로 시위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연세대 정문 앞 도로의 차량 통행은 전혀 제약을 받지 않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연세대 앞에서 하차한 후 아무런 제지 없이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학교 주변이 원천봉쇄된 후에 일부 간부급 학생들이 경찰의 저지선 틈새를 뚫고 몰래 학교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지만 말입니다. 즉, 경찰은 일정 정도 규모의 학생들이 연세대 안으로 들어가도록 한 다음 비로소 학교 주변을
철통같이 애워싸고 봉쇄를 하였던 것입니다. 연세대 안에 갇힌 학생들은 경찰과의 협상 과정에서 향후 모든 행사를 중지하고 안전귀가 보장을 요구하며 봉쇄 조치를
풀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경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8월 17일 새벽 학교 안에 들어와 있던
경찰병력이 일시 철수하였고, 이에 순진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안전귀가 보장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으로 착각하여 교내
곳곳에 설치하였던 바리케이트를 철거하고 그동안 시위로 어지럽혀진 교정을 청소하며 집에 돌아갈 마음에 들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학생들이 방심한 틈을 타 경찰은 학교 안으로 일시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였고, 바리케이트가
철거된 상황에서 학생들은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종합관과 과학관으로 도망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애초부터
학생들이 과학관과 종합관을 타겟으로 삼고 의도적으로 농성을 벌였던 것이 아니라 경찰에 쫓기면서 다급하게
도망가다가 들어간 곳이 과학관과 종합관이라는 것이 학생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어쨌든 경찰은 학생들을 과학관과 종합관 두 건물 안에 몰아넣고 철통같이 건물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고, 건물 내 진압이
있게 되면 엄청난 희생이 따를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8월 20일 새벽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종합관 진압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진압 과정에서의 학생들의 저항은 별 볼일 없었고 대테러진압요원의 투입까지 확인되었듯이 진압은
30분만에 끝나 1시간 후에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저항 과정에서 안타깝게 전경
한 명이 죽었으며 전경과 학생 양측 모두 상당수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종합관 건물은 피폐화하였습니다. 이상이
이번 한총련 사건의 개괄적인 전개 과정입니다. 조: 치사사건의 재판을 보면 학생들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즉 경찰에 의해 건물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고 거기에 관해 검찰이나 법원에서도 이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진압 당시의 상황도 학생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굴복당하는 모습이 다 드러났고 재판정에서도 그런 점등이 드러나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문, 구타, 심지어
여학생들은 성폭행을 당한 사례도 있어서 현재까지 재판이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점에 관해서 윤기원
변호사님께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윤: 이 건으로 국회에서도 논란이 있었고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폭로한 국회의원이 항의를 받고 여당 의원은 상임위에서
논의하는 것조차 문제로 삼는 언론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 건에 관해서는 현재, 연행·조사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한
경우, 부상을 당한 학생, 성추행당한 여학생, 불법체포·감금·가혹행위를 당한 학생 별로 재판을 진행중인데 현재
증인신문절차등이 진행되고 있고 아직 결심에 이른 것은 없습니다. 어쨌든 한총련 사태는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을 놓고 볼 때 한총련이 의도했다기보다는 강요된 측면이 강하다 하는
것이 재판 과정에서 어느 정도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더욱이 동료 의경이 사망한 것, 부상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로
연행 및 조사과정에서 구타가 거침없이 행해졌는데, 그런 행위가 경찰서 내 간부들의 묵인 하에 집단적이고 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러한 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이 현재 피의자
신분이라는 이유로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꺼리는 등 인권 보호의 사각지대 현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또한 이번
한총련 사건은 같은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끼리 자신이 처한 입장으로 인하여 진압과 이에 맞서 폭력을 행사하는 적대
관계가 되어 싸워야 했던, 다시 있어서는 안될 90년대 중반의 불행한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조: 다음은 과거 학생운동의 변론에 대해서 이석태 변호사님께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크게 70, 80년대에 한 시국사건 변론과 최근의 한총련 사건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 사건의 변론을 비교해보면 일정한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시종일관 재판에서 당당했고 법원은 중형을 선고하면서도 늘 죄를 짓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변론에 참여하는 변호사도 변론비를 포함하여 어려움이 많았지만 언제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명예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언론 또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실상 보도에 노력한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있어온 광범위한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앞서도 말씀드린
변호사와 학생들 간에 있어온 일체감,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은 이제는 쉽사리 공유하기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예컨대
이번 재판에서 학생들은 대체로 당당하지 못했고, 최근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나 한총련 사건에서는 옛날과 다르게
신명을 느끼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들 합니다. 이런 사정들이 법원에게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하고 학생들에게 반성을 요구하며 마치 파렴치범인 것처럼
사회봉사명령을 부과하는 빌미를 주었다고 생각되며,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의 명분과 설득력을 되찾아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고 봅니다. 윤: 과거에는 학생들의 재판을 변론하다 보면 민주주의와 정의에 대한 열정과 믿음 같은 것을 볼 수 있었지만 9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러한 열정과 믿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운동의 영역에서 독재, 반독재의 틀이 무너져간 데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보다는 학생들의 시위에 과거와는 달리 폭력성이 따름으로 인하여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더우기 언론에서는 그것을 부각시키고 과장했기에 한총련 사건의 재판이 좀 더 어려웠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조: 검찰의 공소 제기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되며 특히 한총련 사건의 결정판인 치사사건에서 여러 가지
법률적인 문제가 발견되고 논의되었습니다. 거론된 죄만 해도 건조물침입, 집시법,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치사 등
국가보안법은 논외로 하더라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치사사건을 주로 많이 담당하셨던 김도형 변호사께 판결문에
대한 논평을 부탁드립니다. 김: 진압 과정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기에 대하여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실제로 투석하였던 행위자를 밝혀 책임을 물으면 법적으로 별반 하자가 없겠지만, 문제는 실제 투석한
행위자가 누구였는지를 밝힌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도망간 사람은 잡을 수 없고 일단 잡힌
사람 중에서 그럴 듯하게 골라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과거 전과 있는 한총련 간부, 충청총련 의장단, 사수대 대장 등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었고, 이를 나름대로 합리화한다는 것이 바로 공모공동정범이론과 결과적
가중범에 있어서 예견 가능성의 무분별한 확장이이었습니다. 치사사건에서 변호인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다툰 부분은 실제 하지 않은 행위- 즉, 옥상에서 던진 돌에 의하여 전경 한
명이 사망했는데 옥상에는 올라가지도 않고, 투석 과정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에 대해서 단지 그들의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책임을 묻는 것의 부당성에 대한 것입니다. 실제로 변호인들의 접견 결과 나타난 사실관계에서는
공소사실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종합관 자체 내의 지휘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에
변호인들은 확신을 가지고 노력했고 검찰측 증거 또한 객관적으로 불충분했고 공소사실관계 자체가 모순이며 의문
투성이임이 공판 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종합관 지휘 체계에 관하여는 일부 피고인들의 검찰 진술 외에는 증거가 전혀 없었는데 공판 과정에서 왜 일부
피고인들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사실과는 다른 진술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피고인신문과 증인신문을 통하여 합리적이고
응당 수긍이 가는 이유와 동기가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법정에서 판사 앞에서 선서하고 증언하는
내용은 믿을 수 없고 검찰과 수사기관에서 한 진술이 더 신빙성 있다고 판단함으로써 법원의 권위를 판사들 스스로
부정하는, 어떻게 보면 자기 모순에 빠지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쨌든간에 유죄를 내려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한데 검찰에서의 피의자신문조서 밖에는 증거가 없으니 판사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검사
앞에서는 결코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치사사건의 1심 판결에 대한 평가를 매듭 짓자면 변호인들이 노력한 결과 그동안의 왜곡된 언론보도와는
달리 상당부분에서 많은 사실관계의 실체가 제대로 밝혀졌고 또한 재판부도 일부 변호인의 주장에는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론은 유죄였습니다. 그리고 형량 또한 최고 5년 최하 2년 6월이라는 이례적인 중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보여지는 것은 검찰이나 법원이 종합관에 피신한 학생들 사이에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가
성립되었던 것으로 본 거죠. 아까 김변호사님 말씀대로 8월 17일 무렵 돌아가려고 준비하다가 갑자기 경찰이 들어오니까
엉겹결에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대로 들어간 것이 종합관이나 과학관 아닙니까?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파악된 바에
의하면, 각 지역이나 대학별로 종합관 내에서 자리를 잡고 진압시까지 굶어가며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공소장이나
판결문을 보면 지역총련이나 지구총련 의장 등이 공모해서 지휘부를 구성하고 각종 시위를 열었다고 했는데 재판 전까지
그들 대부분이 서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법정에 와서 처음 본 사람들이 미리
공모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굳이 말한다면, 옥상에 있는 학생들 정도가 이른바 사수대라고 하는 편성의
목적상 최소한의 지침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고, 다른 곳에 있던 학생들은 이렇다 할 대책이나 방침없이 기진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 1심 재판이 끝난 후의 결론은 결국 재판이 한총련 사건 당시에 만들어진 이미지에 의해 이끌어진 것이 아닌가, 즉
진실을 발견하려는 고민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학생운동에 있어 하나의 전기가 된
한총련 사건은 민변의 사업 방향, 변론 내용이나 질에 있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는데, 이 사건을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변론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고, 변론을 포함하여 민변 사업이 어떤 식으로 개편되면 좋을지 각자 한 말씀 하시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윤: 이 사건에 비추어 보아 시국사건 변론 방식의 문제점 중 하나가 시국사건을 변론하면서 변호인 개개인이 느끼는
회의, 즉 과연 민변이 이 사건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 결국 사건 수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건 수임을 결정하는 데
일률적으로 기준을 정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이며, 또한 각 회원별로 변론의 진행방식과 이에 따라
의뢰인이 느끼는 만족도에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사건의 경우 변론의 방침에 대하여 민변에서 지침서를
만들어 회원들에게 보내주었지만 그 활용도는 그리 높지 않았는데, 이는 처음 생각보다 피고인들의 법정 태도가
지나치게 유약했으며 석방 위주의 변론을 요구한 측면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대형 구속사건이 없으면 좋겠지만 또다시 발생했을 때 우리가 과연 어떤 식으로 대응할 것인가
생각해본다면 아마 이번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역시 이번처럼 변호인이 있으나마나 한 결과가
나올 것이 예상되는데 굳이 민변이 회원들의 모든 역량을 투입해서 변론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인권 보호 차원에서 민변이 또 다시 나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문제의 가장 좋은 개선책으로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구속자가 없는 사회가 빨리 오기만이 기다려질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번 한총련 사건에 대한 민변의 대응방법에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지만,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면
민변은 이번 사건의 경험을 거울 삼아 자신이 처한 열악한 조건 하에서 최선을 다하리라 믿습니다. 김: 무엇보다도 이번 한총련 사건으로 인해 집단변론 사건에 관하여 민변 내에 많은 노하우가 축적되었다고 보여지지만,
앞으로는 그와 같은 노하우가 발휘될 기회 자체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만약 앞으로 또다시 이와
같은 대량구속사태가 발생한다면 시니어 회원과 주니어 회원 간의 유기적인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젊은
변호사들은 접견, 변론 등 현장에서 발로 뛰면서 시니어 변호사들로부터 축적된 경험을 지도받아 경험 부족에서 나오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체계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 한총련 사건은 민변으로서도 경험하지 못한 규모와 성격의 사건이었습니다. 두 분 말씀대로 이 사건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유사한 사건이 오면 좀더 효과적인 변론을 하였으면 합니다. 변론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회원들
간의 경험과 지식에서 오는 차이점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는지, 회원 각자가 변론을 담당하는 학생들이나 가족들의
의견을 어떻게 수렴하고 적절하게 조화하여 재판에 반영할 수 있는지 충분히 검토하여 시금석으로 삼기를 기대합니다. 조: 식사도 미루시고 장시간 논의에 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한총련 사건 변론 평가 간담회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