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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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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 총서〔東國輿地志總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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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한 방면이 대륙과 이어지고 삼면은 바다로 막혀 있는데 동서가 1000리이고 남북이 2300리이다. 바로 중국의 옛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동쪽이다. 단군(檀君)이 처음 나라를 열었을 때부터 우리나라는 애초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요(堯) 임금 무진년(기원전 2333)에 신인(神人)이 태백산(太伯山)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들이 옹립하여 임금으로 삼았다.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단군이라 호칭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기자(箕子)가 책봉받을 때까지 모두 평양에 도읍하였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주 무왕(周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나서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기자가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나라를 전하여 40세손인 조선후(朝鮮侯) 비(否)에 이르렀을 때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탄하자 비는 진나라에 복속하였다. 그 아들 준(準)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의 습격을 받아 찬탈당하였다. ○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簒要)》 〈지지〉에 “요하(遼河) 이동과 한수(漢水) 이북 지역은 모두 기씨(箕氏)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살펴보건대 함허자(涵虛子)가 이르기를 “《주사(周史)》에 ‘옛날에 기자가 중국인 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갔으니, 그 시서예악(詩書禮樂), 의무(醫巫), 음양(陰陽), 복서(卜筮)의 무리와 온갖 공인, 기술자들이 모두 따라갔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5000명의 은인(殷人)들이 요수(遼水)를 건너갔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또 《위략(魏略)》에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나라가 쇠퇴하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을 칭하고서 동쪽으로 영토를 경략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후는 군대를 일으켜 연나라를 맞아 공격해서 주나라를 높이고자 하였는데, 그 대부(大夫)인 예(禮)가 간언하자 그만두고 대부 예로 하여금 서쪽으로 가서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가 이에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어 그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2000여 리의 땅을 취하고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마침내 약화되었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탄하고 장성(長城)을 요동(遼東)까지 쌓자 조선왕 비(否)는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진에 복속하였다. 비가 죽고 아들 기준(箕準)이 즉위한 지 10여 년 만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한(漢)나라 초기에 노관(盧綰)이 연왕(燕王)이 되었을 때, 조선과 연나라는 패수(浿水)를-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다.- 경계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패수를 건너와서 서계(西界) 지역에 거처하기를 요구하더니 기준을 습격하고 그 땅을 차지하였다.” 하였다.
《한서(漢書)》에서 반고(班固)가 이르기를 “현도(玄菟)와 낙랑(樂浪)은 본래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라고 하였고, 《신당서(新唐書)》 〈동이전(東夷傳)〉에서 배구(裴矩)와 온언박(溫彦博)이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기자국이다.”라고 하였으며, 《요사(遼史)》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요동은 본래 조선 땅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갇혀 있던 기자를 풀어 주었는데 기자가 조선으로 떠났으므로 그곳에 봉해 주었다.”라고 하였다. 또 《요동지(遼東志)》에도 “요동은 기자가 책봉받은 땅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요하(遼河) 이동(以東)은 기씨(箕氏)의 땅임이 분명하다.
위씨(衛氏)가 조선을 훔쳐 차지하고 나서 한나라가 그 땅을 개발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합쳐서 두 개의 군으로 만들었다. 위만이 기준을 쫓아낸 뒤에 그 땅을 차지하고 왕을 칭하였으니 이것이 위조선(衛朝鮮)이다. 마침 한 혜제(漢惠帝)와 여후(呂后) 시기여서 중국이 막 안정되었을 때이므로 위만이 병력과 재물로 이웃 고을을 침략해 항복시켰는데 그 땅의 면적이 수천 리나 되었다. 나라를 전하여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 끌어들인 한나라 망명객들이 점점 더 많아졌고, 진국(辰國)이 상서(上書)하여 천자를 뵙고자 하였는데 우거왕이 또 이를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신을 보내어 우거왕에게 유시를 내렸으나 우거왕은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양복(楊僕)과 순체(荀彘) 등을 보내어 우거를 멸하고 마침내 조선 땅을 평정한 뒤에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芚郡),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眞蕃郡)의 사군을 두었다. 낙랑군은 조선현(朝鮮縣)을 다스렸으니 바로 지금의 평양(平壤)이다. 임둔군은 동이현(東暆縣)을 다스렸으니 바로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현도군은 옥저성(沃沮城)을 다스렸으니 지금의 함경도(咸鏡道)이다. 진번군은 삽현(霅縣)을 다스렸으니 지금의 요동 지경 내에 있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을 낙랑에 병합하고 진번을 현도에 병합하여 낙랑, 현도 두 군으로 만들었다. 현도는 다시 고구려의 서북 지역으로 옮겨 처하게 하고, 다시 옥저와 예맥(濊貊)을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으니, 두 군에 소속되거나 병합된 현이 모두 28개 현이다. ○ 《동국사략(東國史略)》에 이르기를 “소제 시원 5년에 낙랑군과 임둔군을 동부도독부(東府都督府)로 삼고, 현도군과 평나군(平那郡)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았다.” 하였으니, 동부도독부가 바로 낙랑군이고, 평주도독부가 바로 현도군이며 평나가 바로 진번이다.
조선의 남쪽은 바로 삼한의 땅이다. 마한(馬韓)에는 54개국이 있고, 진한(辰韓), 변한(弁韓)에는 각각 12개국이 있었는데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기준이 위만의 공격을 받아 빼앗긴 뒤에 그 좌우를 이끌고 남쪽으로 달아나 한(韓)의 땅인 금마군(金馬郡)에 이르러 마한의 왕이 되었다. 진한은 진(秦)나라에서 도망한 사람들이 부역을 피해 한(韓) 땅으로 들어왔는데 마한이 동쪽 경계를 떼어 그들에게 주니 항상 마한 사람을 주군으로 삼았으며, 비록 대대로 이어 오기는 하였지만 자립하지 못하고 마한에게 통제받았다. 변한은 변진(弁辰)이라고도 하는데 진한에 속하여 진한과 뒤섞여 거주하였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면서 54개의 나라를 두었는데 그 북쪽으로 낙랑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하였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면서 12개의 나라를 두었는데 그 북쪽으로 예맥과 접하였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면서 역시 12개의 나라를 두었는데 그 남쪽으로 역시 왜와 접하였다. 모두 78개국이, 큰 곳은 만여 호이고 작은 곳은 수천 가인데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있으면서 동서로 바다를 한계로 삼았으니, 모두 옛날 진국이다. 그러나 모두 국사(國史)에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고찰할 길이 없다.
삼국(三國)이 점차 커져서 세 세력이 영토를 나누어 가지고 대치해 있을 때에, 고구려(高句麗) 땅은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 한수(漢水)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하(遼河)를 넘어갔다. 신라(新羅) 땅은 동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 지리산(智異山)에 이르고 북쪽으로 한수에 이르렀다. 백제(百濟) 땅은 동쪽으로 지리산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북쪽으로 한수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주몽(朱蒙)이 한 원제(漢元帝)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졸본(卒本)에서 일어나 처음에는 현도에 속하였다가 점차 행인국(荇人國), 개마국(蓋馬國), 옥저국(沃沮國) 등을 병합하였으며 후에 낙랑, 현도, 요동 지역을 차지하였다. 신라는 혁거세(赫居世)가 한 선제(漢宣帝) 오봉(五鳳) 1년(기원전 57)에 처음 일어나서 누차 서라벌(徐羅伐), 사로(斯盧), 사라(斯羅) 등으로 불리다가 후에 신라로 정해졌다. 진한에서 시작하여 또 변한을 병합하고 점차 실직국(悉直國), 사벌국(沙伐國) 등을 수합하였다. 백제는 온조(溫祚)가 한 성제(漢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처음 일어나 초기에는 마한에 속해 있다가 점차 영토를 개척하여 마한을 멸망시키고 여러 읍을 병합하였다. 이에 삼국이 강대해져 세 세력이 대치하였는데 고구려의 땅은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 한수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요하를 넘어 나갔으며, 신라의 땅은 동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 지리산에 이르고 북쪽으로 한수에 이르렀으며, 백제의 땅은 동쪽으로 지리산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북쪽으로 한수에 이르렀다. ○ 신라가 변한, 실직, 사벌을 병합하고, 고구려가 행인국, 개마국, 옥저국을 병합하고,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것 같은 경우는 《삼국사》에서 모두 시대를 조사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낙랑군이 고구려에 병합된 것은 어느 시대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건무(建武) 연간에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낙랑을 습격해 멸하니, 건무 20년(44)에 황제가 군대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서 낙랑을 치게 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이후로는 고구려가 낙랑을 취한 일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살펴보건대 《한서》, 《후한서》의 사지(史志)와 위진(魏晉) 시대의 사서(史書)에서 낙랑은 서한이 끝날 때부터 동한(東漢), 위(魏) 시대까지 여전히 중국의 군이었다. 대개 진 회제(晉懷帝)와 민제(愍帝) 즈음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에 대한 여러 설은 평안도 서문 아래에 갖추어 실었다. 현도군와 요동군은 한나라 때부터 위진 시대와 모용연(慕容燕) 때까지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는데, 후위(後魏) 말엽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 대개 고구려 전성기에는 조선의 옛 영토를 다 차지하고 요하 너머까지 경계로 삼았으니, 바로 지금의 요주(遼州), 심주(瀋州), 금주(金州), 복주(復州), 해주(海州), 개주(蓋州) 등의 지역이 모두 고구려 땅이었다.
수백 년 동안 번갈아 가며 서로 공략하다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게 되자 영역이 차츰 넓어졌다. 백제는 의자왕(義慈王) 때에 이르러 당 고종(唐高宗)이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신라 무열왕(武烈王)과 함께 공격해 멸망시켰다. 백제는 모두 5부(部) 37군(郡) 200성(城)이었는데, 당나라가 그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의 5개 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설치하였다. 얼마 뒤에 당나라 군대가 돌아가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하였다. 고구려는, 보장왕(寶藏王) 때에 이르러 당 고종이 총장(總章) 2년(669)에 이적(李勣)을 보내어 신라 문무왕(文武王)과 함께 공격해 멸망시켰다. 고구려는 모두 5부 176성이었는데 당나라가 그 지역을 신성(新城), 요성(遼城), 가물(哥勿), 위락(衛樂), 사리(舍利), 거소(居素), 월희(越喜), 거단(去旦), 건안(建安)의 9개 도독부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윽고 당나라 군대가 돌아가자 그 지역은 대부분 말갈(靺鞨)과 발해(渤海)로 편입되었고, 신라는 그 남쪽 지역을 얻었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전역에 9주(州)를 두었다. 신라 본국의 경계 내에 3주를 두었는데 왕성(王城) 동북쪽을 상주(尙州)라 하고, 왕성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을 강주(康州)라고 하였다. 옛 백제 지역에 3주를 두었는데 백제 고성 북쪽 웅진(熊津) 어귀를 웅주(熊州)라 하고, 그다음 남쪽을 전주(全州)라 하고, 더 남쪽을 무주(武州)라고 하였다. 옛 고구려 남쪽 지역에 3주를 두었는데 서쪽부터 첫 번째 지역을 한주(漢州)라 하고, 다음 동쪽을 삭주(朔州)라 하고, 또 더 동쪽을 명주(溟州)라고 하였다. 9주가 관할하는 군현이 450곳이었으니, 신라의 지리가 이때에 극도에 이르렀다.
신라 쇠퇴기에 이르자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점거해서 영토가 분열되었다. 궁예는 한수 이북을 점거하여 ‘후고려(後高麗)’라고 칭하였고, 견훤은 호남(湖南)을 점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고 칭하였다.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하나로 통합하였고, 성종(成宗) 때에 비로소 십도(十道)를 정하였다. 국내를 십도로 나누었으니, 관내도(關內道),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이다. 도가 관할하는 주현은 모두 580여 곳이었다. 현종(顯宗) 때에 이르러 또 주현을 가감하고, 3경(京), 4도호(都護), 8목(牧), 56지주(知州),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두었다. 이후에 오도(五道)와 양계(兩界)로 정해졌다. 오도는 양광도(楊廣道),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교주도(交州道), 서해도(西海道)이고, 양계는 동계(東界)와 북계(北界)이다. 그 서북쪽으로는 압록강과 도련포(都連浦)를 경계로 삼고 동남쪽으로는 바다를 한계로 삼았으니, 고려의 지리가 이때에 가장 극성하였다. 동남쪽으로는 신라와 백제의 땅을 모두 소유하였으나 서북쪽은 고구려의 땅에 미치지 못하였다.
본조가 천명을 받고 대동 지역을 다스리게 되어서는 두만강(豆滿江)까지 땅을 개척하고, 서쪽은 여전히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지만 북쪽으로는 두만강까지 땅을 개척하였다. 전국을 경기도(京畿道), 충청도(忠淸道),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江原道), 황해도(黃海道), 함경도(咸鏡道), 평안도(平安道) 등 팔도(八道)로 정하여 부(府), 주(州), 군(郡), 현(縣)을 통괄하였다. 총괄하자면 경(京)이 2개이고, 부(府)가 4개이고, 대도호부(大都護府)가 4개이고, 목(牧)이 20개이고, 도호부(都護府)가 44개이며, 군(郡)이 83개, 현(縣)이 173개이다. 본조의 주현은, 중종(中宗) 이전에는 그 숫자가 이와 같았는데, 후대로 오면서 군읍의 승강(乘降)이 또 많아져서 지금은 부가 □□, 대도호부가 □□, 목이 □□, 도호부가 □□, 군이 □□, 현이 □□이다. 그리고 변방 지역에는 첨절제사진(僉節制使鎭), 만호진(萬戶鎭)을 섞어 설치하여서 방어소(防禦所)로 삼았으니, 험준한 산하와 표리가 되어 방어 체계가 더욱 견고해졌다.
[주-D001] 오운(吳澐) :
1540~1617.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대원(大源), 호는 백암(白巖)ㆍ죽유(竹牖)ㆍ율계(栗溪)이다.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경주(慶州), 청송(靑松) 등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동사찬요(東史簒要)》, 《주자문록(朱子文錄)》 등의 저술이 있으며, 저서로 《죽유집(竹牖集)》이 전한다.
[주-D002] 함허자(涵虛子) :
명 태종(明太宗) 영락(永樂) 연간의 도사(道士)인데, 역대 제왕의 연대수(年代數)를 기록한 《천운소통(天運紹統)》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조선 초기에 서거정(徐居正)이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천운소통》의 기자설을 인용하여 당시에 널리 알려졌는데, 남구만(南九萬)은 《약천집(藥泉集)》 권29 〈동사변증(東史辨證)〉에서 함허자의 설이 근거가 없고 역사서의 내용을 짜깁기해 모아 놓은 것이어서 황당하다고 비판하였다.
[주-D003] 만번한(滿潘汗) :
어느 지역을 지칭하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 《국역 성호사설 1》 제2권 〈천지문(天地門) 조선지방(朝鮮地方)〉에 “만번한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나, 연(燕)나라의 동쪽에는 이렇게 큰 땅이 없으니, 지금 의주(義州)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가 1400리에 불과하다. 생각건대 만(滿)은 지금의 만주(滿州)로 청(淸)의 왕업이 시작된 곳이고, 번(潘)은 심(瀋)의 잘못인 듯하다. 곧 우리나라의 강계(江界) 이북과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서쪽이 모두 연의 통치하에 들어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004] 소제 …… 삼았다 :
《동국사략》의 기술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한서》의 기사라고 인용하였으나, 실제 《한서》에는 이와 같은 기록이 없다.
[주-D005] 금마군(金馬郡) :
조선 시대 때 익산(益山)의 옛 지명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상 〈무신년 왕 준 28년〉에 “기준이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을 격파한 뒤 스스로 한왕이 되었으니 이가 곧 무강왕(武康王)이다.” 하고, 그 주에 “지금의 익산 오금사봉(五金寺峯) 서쪽에 쌍릉(雙陵)이 있는데 《고려사(高麗史)》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비(妃)의 능’이라 하였고, 세속에서는 영통대왕릉(永通大王陵)이라 부른다. 또 기준성(箕準城)이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하였다.
[주-D006] 진한은 …… 주니 :
《삼국유사》 권1 〈진한(辰韓)〉에 나온다.
[주-D007] 진 회제(晉懷帝)와 …… 되었으니 :
서진의 회제(懷帝)는 재위 기간이 307년부터 311년까지이고, 민제(愍帝)는 재위 기간이 313년부터 316년까지로 이후 진나라는 동진으로 넘어간다. 즉 307년부터 316년까지 서진 말기의 혼란하던 시기에 고구려가 낙랑 지역을 차지했다고 추정한 것이다.
[주-D008] □□ :
이하 결락 부분은 모두 해당 행정 구역의 변경된 숫자를 나중에 써넣으려고 유형원이 비워 둔 곳인데 보충이 안 되어 결자로 처리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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