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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 옆 나팔꽃
6
강일은 그날 이후 모든 일에 다소 의욕을 잃었다. 아파트의 이주도 거의 끝났고, 동네 사람들이 수거해 온 고철과 재활용 물건들을 사는 일만 겨우 지속하여 가고 있다. 여름철로 접어들면서 비가 자주 내려 일거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그래서 일하는 아주머니 한 사람을 쉬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가 수집소에 매달리는 시간이 늘어 강일은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도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8월로 접어들자 사흘이 멀다않고 비가 내리고, 어머니마저 시름시름 아프시기 시작했다. 병원을 가자고 해도 막무가내로 안 가시겠다는 어머니를 설득하던 중 어느 날 아침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어머니가 일어나시지 아니하고 있다. 불길한 마음이 들어 흔들어 보니 의식이 별로 없어 보였다.
급히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의 진찰결과 강일은 그 자리에 앉고 말았다. 간암 말기로 달리 손쓸 기회도 없고 왜 이제야 병원에 오게 되었느냐면서 강일에게 말하였다.
어머니는 중화자실로 옮겨졌다. 담당의사의 말에 의하면 며칠을 넘기기 힘들겠다는 이야기다. 강일은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어머니! 제발 돌아가시지만은 마세요. 힘들게 살아오신 세월 병만 나으면 정말 잘 모실게요.”
그러나 의식이 없는 어머니가 강일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강일은 병실을 나와 영덕의 누님과 부산에 사는 이모님, 그리고 고향의 삼촌댁에 전화를 하였다. 이제껏 바쁘게 사느라고 별로 왕래가 없었던 사이지만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에 알리는 것이 옳은 것 같았다.
그날 삼촌 내외가 다녀갔고, 누나도 밤늦게 도착하였다.
누나는 시집을 포항으로 그 뒤로 영덕에서 장사를 한다고 친정에도 거의 오지 않고 살았었다. 누나는 그런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내고 있다. 이모님은 딸의 집에 가셨다가 다음 날에야 오셨다. 눈물을 글썽이시며 강일의 손을 잡았다.
“너희 엄마 어떻게 되신 거냐?”
“간암 말기라고 그래요. 의사가 안 되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네요.”
“언니는 어떻게 자기 몸은 안 돌보고 살았다니 그래. 아이 불쌍해라.”
“제가 다 못난 탓이에요. 진작 억지로라도 병원에 모셔다 수술이라도 받게 하는 건데...”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하면 뭐한다니.”
“이모! 우리 집은 왜 이렇지요.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글쎄다. 낸들 아니. 요즘 같이 좋은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고?”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병원 중환자실에서 닷새를 넘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달리하고 말았다. 강일은 친척들의 도움으로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겨우 어머니의 장례를 끝내고 공원묘지에다 어머니를 모셨다. 동네 사람들이 장례기간 중 문병을 와 주었고, 수정엄마도 장례식 전날에 영안실을 찾아 왔었으나 상주와 조문객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별다른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강일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며칠을 집안에서만 지냈다. 수집소일은 아주머니에게 전적으로 맡기다시피 하여 제대로 장사가 될 수가 없었지만 강일이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누나는 혈혈단신인 강일이 혼자 남겨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영덕으로 올라와 대게장사를 같이 돕던지 아니면 바다일 이라도 하자고 하였으나 강일은 한사코 마다하고 말았다.
밥을 안 먹고 살수는 없으므로 마트에서 반찬거리 대충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두고 밥솥엔 밥을 한꺼번에 많이 해서 여러 끼를 나누어 먹고 있으나 매일 거의 누워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므로 입맛이 있을 턱이 없었다.
강일은 이 세상에 자신이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후 멀리 친척들이 있긴 하지만 서로 왕래도 별로 없고, 오로지 어머니와 강일 두 사람만이 가정을 이루고 살아왔었다. 사실 누나도 그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된 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애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친정엔 거의 오지를 않았던 것이었다.
강일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아 은수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한 번씩 찾아오고, 그리고 동네의 어머니 친구들이 지나다 현관문을 열어보곤 하였다. 옆집 미라도 쓸쓸할 것이라고 하면서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한 번 찾아 왔었지만 왠지 그녀와 술잔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고, 아래층에서 자고 가겠다는 그녀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강일은 은근히 수정엄마라도 한번 와 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 보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혼자 있는 남자의 집을 찾아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강일은 가끔 이층 창문을 통하여 미장원을 바라다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럭저럭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강일은 그래도 수집소일은 그대로 방치를 할 수가 없어서 몸을 추스르고 작업복을 갈아입고 나갔다. 물량 확보된 것이 얼마 안 되었지만 그래도 거래한 것이 오래되어 공장으로 물건을 넘겼다. 아주머니가 혼자서 그래도 일을 꾸려 나간다고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래서 강일은 아주머니더러 삼겹살집으로 가자고 해서 점심을 사 주었다. 오후 늦게까지 일을 거의 다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서 수정엄마를 만났다. 수정엄마는 밝은 얼굴로 강일을 바라다보며 인사를 하였다.
“큰일 치르신다고 힘 드셨죠? 이웃에 살면서 제대로 도와 드리지도 못하고.”
“아닙니다. 장례식에도 와 주셨잖아요.”
“힘내서 사세요. 시간이 가면 조금씩 나아질 거여요.”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강일은 집안으로 들어와서 마루에 벌렁 누웠다. 무언가 집안을 정리를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쓰시던 물건들을 조금 정리하고 아무래도 자신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생활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튿날 강일은 수집소에 나가 트럭을 끌고 시내 변두리를 돌아보고 있었다. 어느 변두리에 가니 이층집을 허물고 있었는데 상당량의 철근과 철대문과 쇠붙이들이 나왔다. 양해를 구하고 그것들을 싣고 돌라왔다. 아주머니도 동네 노인들이 모아 온 폐휴지들을 저울에 달아 가격을 매기고 있었다.
오후 늦게 쯤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강일은 집으로 돌아오며 은수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어디세요?”
“왜 그러는데?”
“저 일 좀 도와주세요.”
“무슨 일인데 그래?”
“이사 좀 하려고요.”
“뭐? 어디로 가는데?
“와 보시면 압니다. 기다릴게요.”
은수 아버지가 강일이 이사를 한다는 소리에 놀라서 급히 달려왔다.
“너 나하고 상의도 없이 어디로 가는데?”
“아 그냥 집안에 짐들 옮기려고요.”
“자식! 난 또 깜짝 놀랐네. 너 가버리면 난 허전해서 어떻게 사노. 이젠 동네 친구들도 몇 안 남았는데.”
“걱정 마쇼. 내 형님 돌아가실 때까지 곁에 살아 줄 테니.”
“그래. 없어도 우리 동네가 좋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해요. 좀 마음이 안 잡혀서 그렇지만.”
“너 수정엄마 잡으라니까.”
“그게 마음대로 돼요. 본인이 싫다는데.”
“네가 직접 이야기를 해 봤나?”
“그럼요. 쪽 팔려서 어굴 보기도 겁나네요.”
“그 여자 왜 그러지? 외로운 사람끼리 의지하며 살면 좋을 텐데. 자기도 빼고 자시고 할 형편은 아닌데.”
“어째든 내가 싫은 게 아니고 혼자 사실 거랍니다. 수정이 데리고.”
“임마! 네가 분위기 좀 잡고 해서 이야기를 잘 해야지!”
“형님도 본인이 재혼 안 하겠다는데 내가 억지로 데리고 살 수가 있어요? 안 그래요.”
“누가 당장 데리고 살래. 자주 만나 밥도 먹고 술도 한잔 하면서 데이트를 즐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낚아채라는 거지.”
“자존심 상해서 더 이야기를 할런지 모르겠네. 아무튼 말이라도 고마워요, 자 이젠 짐이나 좀 옮겨 줘요.”
강일은 어머니가 쓰시던 물건들은 이층 방구석으로 모우고 자신이 쓰던 가구들을 아래층으로 옮겨왔다. 아래층이 조금 갑갑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래층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짐을 다 옮기고 난 두 사람은 우산을 들고 굴다리 밑으로 향했다. 일을 시켰으니 그 대가로 소주라도 한잔 받아 줄 요량이었다.
굴다리 입구 포장마차엔 미라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미라는 반가운 듯 인사를 한다.
“오빠들 웬일이야. 나랑 한잔 할까?”
“이 아가씨 네 옆집 사는 사람 맞지?”
“그래요. 나 잘 몰라요. 그 옆에 오빠는?”
“대충은 알지. 그런데 혼자 소주 한 병을 다 먹었네. 벌써부터.”
“미라 너 저녁에 일하려 안 나가? 낮부터 술 먹으면 어쩌려고?”
“걱정은 붙들어 매쇼. 이 샌님 오빠야. 나 싫다면서 웬 걱정이야 오지랖 넓게도 안 그래 오빠!”
“걱정 돼서 그러지. 됐다.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혼자 먹어라.”
“뭘 비밀스런 이야기를 한다고 그래. 그냥 합석을 하시지 그래도 내가 여잔데 술맛이 더 안 날까 봐.”
“칫! 잘들 해 보시지.”
강일은 은수아버지와 포장마차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라가 있는 것이 마음에 갈리지만 그렇다고 장소를 옮겨 갈 수도 없는 실정이다.
막걸리와 안주로 서대 구이를 시켰다. 매캐한 연기가 포장마차 안을 가득 채운다. 눈이 조금 따가웠지만 원래 포장마차가 다 이런 것이다.
서대구이가 오자 막걸리 잔이 오고 간다. 은수아버지가 수정엄마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수정엄마 그 여자 상당히 괜찮아 보이더라. 어째든 네가 잡아라. 젊은 여자가 끝까지 혼자서 살기야 하겠나.”
“글쎄 용기가 잘 나지만 다시 시작해 볼게.”
“수정이 한 테 잘 해줘라. 그래야 감동을 받는다.”
“알고 있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리가 다가왔다. 그리고 의자를 당겨 강일의 곁에 앉더니 강일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 강일 오빠 이제 보니 수정엄마 좋아 하는구나. 그래서 내 같은 사람은 피하는 구나. 이제 알았다.”
“미라 네가 왜 나서. 우리 이야기 하는데.”
“나도 왜 나설 만하니까 나서지. 전번에 나 한 테 뭐라고 했는데. 수정엄마 좋아 하느냐고 말했더니 아니라고 했잖아 분명하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하고. 그리고 네가 나 하고는 결혼 같은 거 안 한다고 했잖아.”
“결혼을 안 한다고 했지. 연애를 안 한다고 했어?”
“우리가 옆집에 살면서 결혼도 안 하고 연애를 어떻게 하니?”
“못 할게 뭐 있어?”
“야! 그런 골치 아픈 소리 하지마라. 안 그래도 사는 게 힘들다.”
“내가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왜 엉뚱한 소릴 해서 빠져 나가려고 그래.”
“내가 너 한 테 잘 못한 게 뭔데 그래?”
“왜 내 자존심을 건드려?”
“나 참! 미치겠네. 형님 내가 뭘 잘못 한 거 같아요?”
“아닌데. 아가씨! 왜 강일이 한 테 그러는지 모르겠네.”
“아저씬 빠지고. 아 되겠네. 미장원 아줌마 불러야겠네.”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엉뚱하게 그 사람은 왜 불러?”
“부르고 안 부르고는 내 소관이고. 가만 있어봐라. 전화번호가...그렇지 여기 있다.”
미라가 수정엄마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자 강일이 만류를 하고 나섰지만 그녀에게 접근을 하다가 불상사가 생길까 염려되어 막지를 못하였고, 미라가 결국에는 미장원에다 전화를 하여 급한 일이 있으니 다녀가라고 하고 말았다.
10여 분이 지나자 수정엄마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떤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강일이 먼저 이야기를 했다.
“수정 어머니 미안합니다.”
“무슨 일 이신가요? 제가 무슨 일이라도...”
“미장원 언니! 언니도 강일 오빠 좋아해?”
“아니 왜 나 한 테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미라씨!”
“강일 오빠가 아줌마를 좋아 한다고 하잖아요.”
“아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이거 완전히 생사람을 잡는 거구만.”
“오빠가 그랬잖아요? 이 아줌마 좋아한다고. 꼭 직접 그 말을 해야 그런가? 표현방법이 그러니까 내가 말을 하는 거지.”
“나 미치고 환장하겠네. 형님! 내가 정말 그랬어요? 말 좀 해 주세요.”
“아줌마! 강일인 아무 소리도 안 했어요. 우리끼리 애기 하는데 끼어들어서 난리를 피우고 그러네.”
“아저씨도 말 똑 바로 하세요. 뭐? 아저씨가 오빠더러 아줌마가 혼자 못 사니까 잡으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그거야 내가 그냥 해 본 소리지 강일이가 한 소리가 아니잖아.”
“그게 그 소리고, 오빠도 그 말을 묵인 했으니까 아줌마를 좋아 한다는 소리지 뭐가 달라요.”
“하 정말 창피스러워서 수정 어머니 미안해요. 괜히 우리 땜에.”
강일은 수정엄마를 쳐다 볼 용기도 없고 해서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고, 수정엄마도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 은수아버지가 나서서 사태를 해결지우기 시작했다.
“자 자! 동네 사람들끼리 좋지 않은 이야기 나면 안 되고, 제가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오늘 이야기는 사실 내가 강일이 더러 수정이 엄마와 사귀어 보라고 이야기를 하였고, 강일이 동생도 싫다는 소리는 안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마 강일이 하고 저 아가씨 사이에 그 전부터 무슨 오해가 있는 듯 해 보이는데, 그건 본인들 간에 해결할 일이지 여기서 수정이 엄마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니 수정이 엄마는 그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끼리 이야기 하다 그만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이만 가세요.”
강일도 정중하게 수정엄마에게 사과를 하였다.
“어째든 저도 수정 어머니와 연관이 있었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가만히 계시는 분을 오라고 해서 이렇게까지...”
“참 다들 잘 났어. 나만 나쁜 년이고.”
“미라야! 나쁘고 안 나쁜 것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가만있는 수정 어머니를 끌어 들인 게 잘못이란 거야.”
“그 말이 그 말이지.”
“수정 어머니! 어서 가세요. 정말 미안합니다.”
“전 이만 가볼게요. 미라씨! 나 먼저 간다.”
강일은 씩씩거리는 미라를 앉게 하고 술을 한잔 권하며 그녀를 달랬다.
“미리야!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자. 나도 요즘 너무 힘들거든. 여기 형님도 계시고 조용히 술이나 한잔 하고 가자. 응!”
“나 누구 없으면 못 살아서 이런 거 아니다. 나도 너무 외로운 때가 많거든. 그런데 요즘 오빤 나 쳐다보지도 않거든. 그래서 화가 나서 그래.”
“미안하다. 내가 요즘 좀 그렇잖니. 네가 이해를 해야지.”
“내가 오빠가 수정엄마와 결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야. 알아? 그냥 예전처럼 나하고 술도 한잔하고 그렇게 지내자는 거지.”
“그래 고맙다.”
“이 사람들 나 앉혀 놓고 자기들끼리 놀고 있네.”
“에이 형님 자 술이나 한잔 더 받으세요. 미안 합니다.”
“저들끼리 사랑싸움 하는 것도 아니고 나 원 참!”
이야기는 순조롭게 풀려 나가고 있었다. 미라는 저녁에 업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세 사람은 거나하게 술자리를 이어갔다.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가려다 미장원에 불이 켜져 있어 그 곳으로 발길이 향해졌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앉아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던 그녀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미안해요. 자나가다가 불이 켜져 있어서.”
“괜찮아요. 어때서요.”
“사실 술자리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 중에 미라가 갑자기 수정 어머니 이야기를 들고 나와서 저랑 한바탕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됐어요.”
“전 머리에 안 담기로 했어요. 강일씨도 없었던 일로 하세요.”
“고마워요. 이젠 마음이 편하네. 수정인 자요?”
“아니요. 텔레비젼을 보고 있나 봐요.”
“주무세요. 갈게요.”
“예!”
강일은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그래도 소득이 있다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수정엄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라와의 관계도 제대로 복원이 된 것 같았다.
술을 먹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생각났다. 아직 자신에 대한 삶의 의미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세상을 갈팡질팡하며 살아가고 있는 마당에 갑자기 가셔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에 사무쳐왔다.
강일은 베개에다 얼굴을 묻었다. 그 어느 하나 넉넉한 것이 없었던 어린 시절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에는 마음이나마 여유가 있었지만,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가정생활. 누나와 자신을 데리고 가정을 꾸려 가시는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바라다 본 세상은 강일에게는 차라리 포기라도 해 버리고 싶은 고난의 세월들 이었다.
그러나 모처럼 마음을 잡고 들어선 직업군이의 길. 그 길마저 비참하게 중도하차하게 만드는 자신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방황 중에 이젠 마음잡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각오를 하였는데 이 또 무슨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시련을 안겨주는 것인지? 강일은 베개 끝을 잡고 흐느끼고 있다.
어머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밤은 깊어가도 강일의 서러움은 가시지 않는다. 강일은 일어나서 2층으로 올라갔다. 열두시가 가까워 졌는데도 수정이네 방엔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수정이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장래, 아니면 수정의 장래?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요즘은 미라의 방에 대한 관심은 가져지지 않았다. 자신이 아래층에서 주로 생활을 하고 잘 때도 아래층에서 자기 때문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데 미라가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술에 찌들어 겨우 겨우 몸을 가누며 피곤한 모습으로 몸을 지탱하는 그녀의 모습. 보이지 않아도 눈에 선한 모습이었다. 강일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7시가 넘어 잠이 깨었다. 어제 밤늦게까지 잠을 못 이룬 탓에 몸이 개운하지 못하고 몹시도 무겁다. 아침밥을 먹을까 말까 하며 망설이다가 라면으로 때우기로 했다. 육체노동을 하기 때문에 밥맛이 없어도 굶고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누구?”
“야! 강일아! 나 진순데 너 요즘 고물 한다며?”
“그렇기는 한데 너 오랜만이다. 지금도 시골에 사니?”
“응! 나야 뭐 그렇지.”
“그런데 아침부터 웬일이니?”
“다름이 아니고 우리 마을에 비닐하우스 하고 버려진 철근이 제법 많이 있는데, 그 것 좀 처분해 줄래? 돈은 뭐 줄 거 없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도 그냥 있어서 되냐?”
“시골 사람들 그런 거 별로 안 쳐다본다. 정 서운하면 막걸리라도 한 턱 내든지?”
“알았다. 고맙다. 너희 마을로 조금 있다 가면되지?”
“그래라. 와서 전화하고.”
“고맙다. 나중에 보자.”
고철 사업이란 게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찾아다니거나 개인들에게 사들이기도 하지만, 때론 아는 사람에 의하여 일감이 생기는 경우도 많은 법이었다.
강일은 오랜만에 옥심을 내어 고철 몇 트럭분을 싣고 왔다. 비닐하우스를 하고 강변에 쌓아 두었다가 세월이 많이 흘러 부식이 많이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고철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을 듯하였다.
하루 종일 욕심을 내어 일을 한 탓인지 저녁부터 몸살이 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프고 허리가 쑤시면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어머니라도 계시면 죽이라도 쑤어 주시고 약이라도 사다 주시련만 지금은 자신을 보살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루 밤을 끙끙거리며 방구석을 돌았지만 통증은 가시지를 않는다. 일어나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어서 기운을 차릴까 생각도 했었지만 그것마저도 힘이 들어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가 되자 전화통화를 한 수집소 아주머니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다면서 달려왔다. 혼자서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있는 강일을 보자 서둘러 죽을 끓인다는 것을 근처 마트에 가면 죽 비슷한 것을 팔 테니 사다주고 가라고 하였다.
강일은 아주머니 더러 자신은 걱정 말고 수집소 일을 당분간 좀 맡아서 처리해 달라고 당부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다녀 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식을 들었다며 쌀집 아주머니가 달려왔다.
“강일이 너 많이 아프다면서?”
“이젠 조금 살만해요.”
“이게 무슨 꼴이고? 너희 엄마가 살아 계시면 이러고 살겠나?”
“죄송해요. 염려 끼쳐서.”
“나한테 미안해할 것이 아니고 네 엄마가 살아계시면 이래 놔두겠나.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라. 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죽 좀 끓여가지고 올까?”
“아니요. 수집소 아주머니가 사다 놓은 게 있어요.”
“아무렴 사 온 게 직접 만든 건만 하라고.”
“괜찮아요. 그냥 일 보세요. 괜히 저 땜에.”
“그래. 난 그냥 가마. 몸 아프면 나한테라도 알려라. 알았나?”
“예! 그럴게요. 안 나가요.”
“그래. 몸 조리 잘 해라.”
강일은 쌀집 아주머니가 거시자 어제 아주머니가 사다 준 죽을 전자렌지에 데워서 먹었다. 마치 쓴 약을 먹는 것처럼 목구멍에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도 먹어야 산다는 생각으로 억지로 입에다 넣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둔 소주병을 찾아 마셔댔다. 강일의 눈 가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이 순간의 서러움과 육신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싶어졌다.
얼마나 잤는지 모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깨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7시를 가리키고 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를 판단하기도 어렵고 몸은 욱신대고 머리는 술기운이 남아 어지러웠다. 간신히 몸을 의지하여 현관문을 열고는 마루에 풀 석 쓰러졌다.
“이를 어째. 강일씨! 정신 차려요.”
수정엄마의 목소리였다. 강일은 희미하게 눈을 떴다. 눈앞엔 수정의 초랑 초랑한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아파?”
“으 응. 조금.”
“강일씨 왜 이래요? 몸이 아픈데 술까지 마시면 어떡해요.”
“미안합니다. 어떻게 알고...”
“어제 수집소 아줌마가 지나가며 미장원에 들렀다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어요. 사람들 눈도 있고 해서 와 보기도 그래서 망설였는데 이럴 줄 몰랐네요. 약은 먹었어요?”
“예! 어제 아줌마가 사다 준 게 있어요.”
“아프면 약 먹고 낳아야지 술을 왜 드세요?”
“그냥 마음이 아파서요. 고맙습니다.”
“아프면 전화라도 하세요. 남들 눈 무섭다고 아픈 사람 모른 체하지는 않을 거니까요. 그리고 힘내세요. 이젠 혼잔데 열심히 살아야 하잖아요. 이 거 죽 조금 쑤어왔는데 두고 드세요. 그래야 힘이 나지요.”
“고맙습니다. 은혜 잊지 않을게요.”
“은혜랄 건 없고요. 저도 도움을 받잖아요.”
“아무튼 고마워요. 수정아 너도 고마워 아저씨 보러 와서.”
“아저씨 빨리 나아요.”
“응! 그래야지. 수정 어머니! 그만 가보세요.”
“그럴게요. 모 조리 잘하세요. 가자! 수정아!”
“수정아 잘 가!”
강일은 현관문을 나가는 두 모녀를 쳐다보았다. 저들이 자신의 가족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수집소에다 전화를 걸었다. 다행인지 어쩐지 몰라도 요즘은 동네 사람들이 가져오는 고철도 그리 많지 않고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와서 별로 일거리가 많지는 않다고 하면서 수집소 일은 걱정을 말라는 것이었다.
한나절을 더 누웠다. 간신히 몸을 추슬러서 밖으로 나왔다. 비는 오지 않고 서쪽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언제 빗방울이 쏟아질지 모를 지경이었다. 철길 건널목을 건너 철조망을 따라 서너 걸음 걸어가니 근처 누군가의 집에서 놓아둔 화분에선 봉선화가 가지를 번지며 통통하게 자라가고 있고, 철길 사이에다 팥을 심었었는지 제법 넝쿨을 틀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보이는 건 강일이 보아왔던 나팔꽃들이다. 1미터쯤 간격을 두고 피어오른 나팔꽃들은 제법 철조망을 따라 넝쿨을 뻗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요 며칠사이에 그랬는지 나팔꽃 줄기를 걷어내려고 중간 중간 뜯어 낸 흔적이 보였다. 강일은 가슴이 아팠다. 나팔꽃도 자신처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으니 서러움을 당하는 것 같았다.
강일은 집으로 돌아와 노끈을 찾아서 집을 나섰다. 수정이가 집 앞에 있더니 강일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어딜 가세요?”
“응! 나팔꽃 보려고.”
“저도 같이 가도 돼요.”
“그래라. 바로 저 앞이다.”
강일은 흐트러진 나팔꽃 줄기를 철조망 사이사이에다 끼워 넣고 노끈으로 정성스레 묶어 주었다. 이젠 사람들이 묶어둔 나팔꽃을 보고선 철조망에서 뜯어내려고 하진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강일은 이틀을 계속 집에서 죽을 먹으며 누워있었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먹을 것을 먹으니 몸이 한결 나아졌다. 약간은 다리가 후들 거렸지만 수집소엘 나갔다. 아주머니가 혼자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있었다. 강일은 아주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양하는 아주머니더러 오후 한나절은 자기가 있을 테니 집안일이라도 좀 보도록 하였다.
여름이 무르익어 가는 8월 중순 건너 올려다 보이는 산에는 짙은 녹음이 깔려있고, 어느새 왔는지 울타리가의 플라타너스 나무에선 매미가 세차게 울음을 울어댄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울음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울음인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쌓아놓은 고철더미에선 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흡수하여 후덥지근한 열을 발산하고 있다.
그래도 열을 식히려고 부지런히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 바람을 쏘이며 쌓여오는 졸음을 참으려 애쓰고 있으려니 은수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강일이냐? 어디냐?”
“응! 수집소.”
“더운데 일하냐?”
“아니 그냥 나와 앉아만 있어.”
“나중에 7시 쯤 고수부지 나무 밑으로 와라.”
“형! 무슨 일 있나?”
“응! 오늘이 아버지 칠순인데 날도 덥고 그냥 넘기려다가 그래도 서운해서 가까운 동네사람들 모여서 간단하게 저녁이라도 대접 하려고.”
“오늘이 아저씨 칠순이시구나! 난 항상 젊으셔서 그런 생각도 못했네.”
“이따 올 거지?”
“그럼 당연히 가야지.”
“그럼 나중에 보자. 일찍 와라.”
“알았어.”
강일은 순간 자신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아 하실까? 친구 분 생신이라고 기뻐하실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강일은 중국집에다 전화를 하여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자장면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졸음이 쏟아져 왔다. 이처럼 더운 날씨에는 이러한 일은 한다는 건 무리이다. 강일은 아예 탁자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매미소리가 더 없이 크게 들려왔다.
어릴 적 아버지와 은수할아버지와 함께 천렵을 갔던 생각이 떠올랐다. 두 분은 각기 자전거에다 자신들의 아들들을 태우시고 작은 거물을 싣고 강 상류로 올라가 나무 그늘에다 자리를 잡고 그물을 대고 아이들이 상류에 가서 고기를 좆아내려 오도록 해서 고기를 잡아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고 멱을 감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땐 두 사람이 막걸리라도 한잔 하면 흥겨운 소리를 내면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강일은 가볍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 온 강일은 옷을 갈아입고 고수부지로 향했다. 여름철이라 해가 길어 아직 해가 서편 하늘에 걸려있다. 고수부지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데 그 곳은 마치 마을 사람들의 공동 모임 장소처럼 동네의 큰일이 있을 때면 모여드는 곳이다. 벌써부터 그늘에다 자리를 깔고 푸짐한 잔치 상을 차려 놓았고 벌써부터 할머니 몇 분이 먼저와 계셨다.
강일은 은수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인사를 올렸다.
“아저씨! 축하드립니다. 두 분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십시오."
"그래! 고맙다. 몸이 아프다더니 좀 나으냐?“
“예!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강일은 은수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좌석은 다 준비되어 있고 음식을 조금씩 접시에 담는다고 바쁘다.
“형! 내가 뭐 좀 도울꼬?”
“넌 할 거 없다. 앉아서 먹기나 해라. 참 그러면 사람들 오면 자리나 안내 하든지.”
“알았다.”
7시가 조금 넘으니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그냥 동네 사람들을 위한 잔치라 처음부터 봉투를 받거나 하는 일 없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소박한 자리였다. 거의 3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즈음 통장님이 일어서서 은수할아버지께 인사말을 하시라고 하였다. 은수 할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이시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시고 말문을 열었다.
“에 오늘 이렇게 저를 위하여 와 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리고 적은 음식이나마 맛있게 잡수시고 즐겁게 계시다가 가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부탁합니다.”
말씀이 끝나자 통장님의 말씀과 함께 박수가 이어졌다. 강일은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져 옴을 느꼈다. 강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정이네가 보이지를 않는다. 미장원에 손님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이런 곳에 오기가 불편한 것인가? 강일은 수정이네가 오지 않은 것이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강일은 제법 술을 많이 마셨다. 처음엔 컨디션이 조금 좋지 않았으나 술이 조금 들어가고 나니 그런대로 견딜 것 같았다. 동네 어른들에게도 술을 한잔씩 권하고, 젊은 사람들과도 술잔을 기우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며, 마을의 일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나는 건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지금 살아 계셨으면 단연히 은수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나이인데 두 분 다 강일을 남겨둔 채 이 세상을 일찍 떠나고 없다는 사실이었다.
강일은 강가로 내려갔다. 요즈음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강물이 수량이 많았다. 생각 같아선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어 시원하게 멱이라도 감고 싶었다.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일부러 멀기는 하지만 고수부지를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고수부지엔 그래도 부지런한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여자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여자들이 부지런한 것은 사실이고, 이 시간에 남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술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친구들과 고스톱이라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동네로 접어드니 후덥지근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여 삼삼오오 골목길에 나 앉았다. 집으로 들어가려다 미장원을 바라다보았다. 문을 열렸는데 불이 꺼져있다. 조심스레 다가가 안을 들어다 보았다. 아무도 없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 이렇게 미장원 문을 열어놓고 불이 꺼져있지를 않아서였다.
“수정아!”
강일은 나지막이 수정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 조금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수정아! 수정이 있니?”
그러자 이층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 아저씨네.”
“수정아! 엄마 어디 갔어?”
“아저씨! 엄마 울고 있어.”
“뭐라고? 밥은 먹었나?”
“예! 먹었어요.”
강일은 잠시 망설였다. 올라가 보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강일은 용기를 내어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 2층으로 올라가니 방구석 창문아래에서 수정엄마가 엎드려 있다. 강일이 다가가며 말했다.
“수정 어머니! 수정 어머니!”
강일이 부르는 소리에 수정엄마는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손으로 얼굴을 훔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웬일이세요? 이 시간에?”
“예! 은수할아버지 칠순잔치 갔다가 집에 들어가는데 미장원 문이 안 잠기어져 있어서요.”
“아 예! 제가 깜빡...”
“왜 그러세요? 잔치도 안 오시고.”
“그냥 집에 있고 싶어서요.”
“수정 어머니! 무슨 일 있지요?”
“아니에요. 그냥...”
“그냥이 아닌데요. 제가 알면 안돼요?”
“별 것 아니에요. 신경 쓰시지 마세요.”
“그래도 아는 이상...수정 어머니!”
“........”
“수정 어머니! 저도 이젠 혼자잖아요. 힘들면 이야기 하세요. 어려운 사람끼리 서로 도우며 살기로 해요.”
“고맙긴 한데요. 저어...맥주 한 병만 사다주실래요.”
“알았습니다. 기다리세요.”
강일은 미장원을 나오며 그래도 어려운 과정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던 수정엄마 마저도 이젠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씁쓸하였다.
강일은 대여섯 병의 맥주와 마른안주를 사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수정엄마는 옷매무새를 고쳐 앉아있었다.
“제가 괜히 술을 사오시라고 했나 봐요. 제 진심이 아닌데.”
“괜찮습니다. 저도 세상 풍파를 좀 겪은 편인데요. 이래도 알고 저래도 압니다. 세상사는 거 별거 있겠습니까?”
“그래도 여기서 이러는 게.”
“편하게 생각하세요. 저 의식마시고.”
“그럴게요. 수정아! 넌 여기로 앉아라.”
“알았어. 엄마!”
“수정인 언제 봐도 예쁘네. 자 여기 과자 먹어라.”
‘예! 아저씨!“
강일은 수정엄마와 마주 앉았다. 참으로 순수해 보이는 여인이다. 강일은 맥주병 뚜껑을 따서 그녀에게 권했다.
“한잔 드세요. 마음 울적할 땐 한잔 하는 것도 괜찮아요.”
“조금만 할게요.”
술잔이 몇 차례 오갔다. 처음엔 얼굴을 찡그리며 술잔을 입에 대던 수정엄마는 몇 차례 술잔이 계소되자 처음보다는 쉽게 술잔을 비워낸다. 수정엄마는 말이 없고, 강일이 오늘 저녁의 잔치 이야기를 주제로 해서 이야기를 주로 하였다. 수정은 옆에서 과자를 가지고 놀기도 하며 두 사람의 화제에서는 예외다.
“수정 어머니! 술은 조금 마시네요.”
“전 술 맛은 몰라요. 그냥 뭔가 술기운을 빌려 잊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무슨 일인지 말하면 안돼요?”
수정엄마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맥주를 벌써 서너 잔이나 마셨고, 강일과는 격이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서는 듯 드디어 속에 있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어 사실은 오늘이 수정아빠 돌아가신 날이에요.”
“아 그랬었구나! 몰랐네요.”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 갈수록 사는 게 서글퍼져요.”
“그렇겠죠. 저도 그런 걸요. 그래도 용기를 내세요. 애를 생각해서라도.”
“전번에 뒷집 아저씨하고 다툰 것도 사실은 애 아빠 죽고 나서 얼마 안 되어서거든요. 아빠가 역에 근무 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있다가 갑자기 나가더니...결국 시신으로 돌아 왔어요.”
“아니 어떻게 되어서요?”
“아빠가 꽃을 좋아 했어요. 그래서 역 안에다 이곳저곳에 화단을 만들어 놓았었는데, 결국 그것 때문에...흐흑..”
“수정 어머니!”
“엄마! 왜 울어? 응?”
“미안해요.”
수정엄마는 울먹이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수정아빠는 역사 안에다 많은 화단을 만들어서 꽃도 심고, 채소도 심었단다. 그 날은 비번인데 가물다가 갑자기 비가 와서 모종을 옮겨심기 위해서 나갔다가 달려오는 임시열차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그 날은 비번이고 개인적인 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는 이유로 공상처리도 받지 못하고 말았단다.
“안타깝네요.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제가 강일씨를 가까이 못하는 이유도 그래요. 그 후 기차라면 지긋 지긋하게 보기도 듣기도 싫었는데,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 왠지 애를 데리고 기차소리 나는 곳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동네로 이사를 왔어요. 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네요.”
“고마워요. 어려운 이야기를 하게 해서.”
“그래도 기분 울적할 땐 술이 최고네요. 전 사실 술 별로 안 마셔 보았는데, 저 실수 안했죠?”
“실수는요. 전혀 아닙니다. 이젠 수정이 열심히 키우세요. 혹시나 제가 도울 일 있으면 말씀드리고요.”
“감사해요. 든든한 이웃이 있어서요. 이젠 강일씨 하고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요.”
“그래요. 이젠 서로가 편하게 지내요. 남들 눈치 너무 많이 보지 말아요. 저도 수정이랑 친하게 지낼 테니까 그리 아세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이제 주무세요. 밤도 깊었는데.”
“그럴게요. 내려가세요. 저도 문을 닫아야겠네요. 아이 구!”
계단을 내려오다 뒤에서 따라오던 수정엄마가 발을 헛딛는 바람에 강일이 재빨리 몸으로 막았다. 수정엄마의 상반신이 강일에게 안기다시피 하여 하마터면 입술이 서로 맞닿을 뻔하였다. 수정엄마의 풍만한 가슴의 탄력을 느끼며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살결 냄새와 술 냄새가 강일의 후각을 자극했다. 강일은 순간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지만 재빨리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강일은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서 프로포즈 허락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속사정을 다 전해 듣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야 그녀와 결합을 하여 같이 살고 싶었지만 그녀 자신의 의지가 확고한 만큼 그 부분이 존중되어야 할 것이고, 다만 일상생활을 통하여 서로가 가까이 지내며 위하는 것도 그녀를 마음에 두는 의미가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아무튼 기분 좋은 하루였다 생각하며 강일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강일은 동네 사람이 경영하는 주택수리 센터로 갔다. 아무래도 자신의 집을 리모델링하여 아래층에다 가게를 넣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주변의 일부 다른 집들은 편의상 2층을 가건물로 올렸지만 자신의 집은 처음부터 2층으로 지어졌고, 집을 허름하지만 뒷마당도 조금 있고 기본적인 평수는 제법 넓은 편이다. 뒤편의 공간을 이용하여 출입구를 다시 내고, 아래층을 가계로 하고도 뒤편에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올라가면 될 것 같아서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만약의 경우 수정이네의 미장원이 이쪽으로 옮겨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장소로 만들고 싶었다.
견적을 내어 보니 그렇게 많은 돈이 들지를 않는다. 자신이 저축한 돈도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결혼자금 등으로 남긴 돈이 상당히 많았다.
공사는 당장 시작하기로 하였다. 여름동안엔 일손도 덜 바쁘고, 잠자리도 아무데서 잘 수도 있어서 공시가간 중은 수집소에서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동네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 통장님이 지나가며 물었다.
“김군! 집 고쳐서 가계 할라고 그래?”
‘예! 사무실이 필요해서요.“
“그래 돈 많이 벌게.”
“감사합니다.”
수정이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신기한 듯 쳐다보더니 말을 건다.
“아저씨! 집 다시 지어요?”
“그렇단다.”
“왜요?”
“응! 아저씨도 수정이네와 같이 만들려고.”
“아하 그렇구나!”
“강일씨! 무슨 가계 할 거여요?”
수정엄마도 언제 나왔는지 미장원 앞에 서서 공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궁금한 듯 강일에게 묻는다.
“나도 미용기술 배워 남자 미용실이나 차려 볼거나.”
“에이 미용실은 아무나 해요?”
“뭐 기술 배우면 예쁜 여자들은 다 우리 집으로 오겠지요.”
“그래 보시든지. 그럼 나는 뭐 하나? 고철 수집이나 할까.”
“수정 어머니도 농담이 많이 늘었네.”
“배 안 고파요. 라면이라도 하나 끊여 줄까요.”
“싫네요. 고맙긴 하지만 남들이 오해할라고.”
“그런 생각도 들어요. 많이 늘었네.”
“농담이에요. 좀 있다 공사하는 분들과 새참 먹어야 해요. 그때 같이 시켜 드릴게요.”
“안 그래도 돼요.”
“그러고 싶다는데 앞집 총각이.”
“하여간 공사감독이나 잘해요. 다른데 관심 끄고.”
강일은 그녀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수정을 높이 안아 올렸다가 내려 주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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