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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온천 글방 원문보기 글쓴이: 온천-김길수
<단편소설>
영도다리, 다시들다
길 길 수
올렸다. 이십여 년 전에, 단 한 번 스쳐지나갔던 기억까지 되살려보지만, 생소함은 마찬가지다.
무작정 승객들의 뒤꽁무니를 따라 역 광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으로 다가가는데 머리가 희끗한 사내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성님! 현수 성님? 맞지예?”
“민우…씨?” 현수가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성님! 이기 얼마 만입니꺼?” 민우는 서둘러 현수의 손을 맞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잘 오셨습니다. 성님. 정말 뵙고 싶었심더.” 민우는 다시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별 일 없으신가…?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맙네.”
“아이고 성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여튼 오시느라 고생 많았심더.”
민우는 현수의 손에 들린 조그만 손가방을 가로채고는 현수를 부축하듯 에워싸며 걷기 시작했다. 민우는 현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광장모퉁이의 택시 승강장 앞에 가 멈췄다.
“어디를 가려고?” 현수가 묻자, 민우가 약간 머뭇하다가 답했다.
“영도다리 드는 것부터 구경하는 기 좋지 않겠심니꺼?”
“다리는 열두시에 든다며? 아직 여유시간이 있는 듯한데…? 그 사이 새 엄마, 아니 어머니 묘소부터 갔다 오는 게…!” 현수가 손목시계를 보며 이야기했다.
“네? 성님, 지금 어머니 묘소라 했습니꺼?”
“……! 그래. 시간이 된다면…, 어머니 아버지 묘소부터 먼저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현수의 대답에, 민우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성님! 고맙심더. 전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 미처 몰랐심더. 우쨌든 시간이 약간 어중간하니까 영도다리 구경부터 하러 가입시더”
민우는 택시 문을 열고 현수를 뒷좌석에 앉히고는, 앞좌석으로 가 앉으며 기사에게 말했다.
“영도다리 입구에 가입시더”
현수는 자신이 금방 한 말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를 머금었다. 스스로 ‘참 잘했구나!’ 싶다. 말이 제대로 나올까? 고심했었는데 평생 처음 해 본 ‘어머니’란 말이 타이밍에 잘 맞춰 나온 거 같아서다. 민우에게 체면이 서는 일인데다, 스스로에게도 약간이나마 용서가 되는 일이 아닌가!
“성님. 다 왔심더. 영도다리 입굽니다.” 택시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민우가 또 얼른 뒷문을 열어주며 차에서 내리는 현수를 부축했다. 차에서 내려서자 소금기 가득한 해풍이 코끝을 스쳤다. 이게 얼마만인가?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눈앞이 영도(影島)다.
“저기가 영도? 영도 맞지?”
현수가 감격한 듯 성급하게 물었다.
“예, 성님! 맞심더. 그라고 오른쪽 편이 남항동이라예. 옛날 우리가 살았던 동네 아입니꺼?”
현수는 허리를 쭉 펴며 천천히, 그리고 하얗게 펼쳐진 도시의 모습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기억속의 도시와는 너무도 변해버린 느낌이다.
“성님, 시간이 넉넉한 께 저쪽까지 한번 걸어 가 보입시더.”
민우의 안내대로 다리입구로 들어섰다. 영도대교(影島大橋)라 쓰인 표지석을 어루만져보고는 몇 걸음 옮기자, 곧바로 시퍼런 바다가 양쪽으로 열려있었고 다리 난간 아래에는 햇볕에 가려 시커멓게 보이는 바닷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아! 여기구나! 내가 다시 이곳에 왔구나!’ 현수는 수십 년의 감회가 응축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색빛의 낡고 우중충했던 옛 기억 대신 너무도 밝고 환하게 보이는 게 신기했다.
현수는 잠시 옛 기억의 조각들을 꿰맞춰보려 하지만, 아귀가 제대로 맞지 않았다. ‘부산’하면 으레 떠올렸던, 영도다리 아래쪽 갯바위가 있던 어름을 바라봤지만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이 다리 새로 만든 거라면서…?”
옛 기억을 더듬으며 현수가 물었다.
“네. 성님. 옛날 다리는 철거하고 새로 더 넓게 만들었다 아입니꺼. 성님도 옛날 기억 많이 나시지예?”
“나다마다. 옛날 생각은 많이 나는 데, 너무 많이 변해,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지예. 성님! 세월이 얼마나 마이 흘러갔심니꺼?”
“오십년도 넘었나보네.”
현수는 대답을 하면서 ‘정말 언제 그 긴 세월이 흘러가버렸나!’ 싶다. 민우는 다리 가운데로 현수를 인도해가며,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는 듯 연신 이것저것 설명을 했다. 부산대교, 부산항대교, 자갈치시장, 용두산 공원 등 보이는 것마다 가이드처럼 설명을 이어갔다. 현수는 민우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옛 기억 더듬기에 분주했다.
‘여기였나? 저기였나? 그래, 어쨌든 중간쯤이었지. 다리가 변해버린 탓일까?‘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피난 온 지 2년가량은, 쉬는 날이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현수와 현진이를 데리고 영도다리께로 나왔다. 어떤 날은 저녁나절까지 다리위에서 시간을 보내며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곤 했다. 집에서 나올 때는 엄마를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떴지만, 결과는 언제나 허탕이었다. 철이 들면서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엄마를 만난다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인지라, 어쩌다 월남한 고향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틈만 나면 나오셨으리라 이해했지만, 그 당시야 오지 않는 엄마생각에다 배까지 고파 많이도 칭얼거렸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났다.
“엄마가 현수야! 하며 오실 텐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현수의 짜증에 아버지는 씁쓰레한 표정으로 애써 현수를 달래곤 했다.
“현수야! 우리 노래 부르기 하자. 응?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셋이서 반짝이다가…!”
처음엔 노래가 안 나오다가도 아버지의 선창이 반복되면 어느새 따라 불렀다. 현진이도 따라 흥얼거렸고…. 그러다가 아버지는 부르던 노래는 잊은 채,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놀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었다.
“현수야 늦었다. 이제 집으로 가자!”
아버지는 짧게 이 한마디를 하며 현진이를 목말태우고는 앞서 걸었다. 현수는 아버지를 뒤따라 걸으면서도 ‘오늘도 엄마는 왜 안 오는 거야!’ 혼자 심통을 부리곤 했었다.
어느새 영도쪽 다리 입구에 다다랐다. 현수는 다리 끄트머리에 세워진 가수 현인의 노래비를 남다른 감회로 꼼꼼히 훑어보았다. 계단으로 다리 밑까지 내려가 보기도 했다. 옛날 갯바위가 돌출해있던 부분과 여름날 친구들과 멱 감던 곳을 가늠해보았다. 커다란 바위사이를 건너뛰며 여름날 오후 내내 해수욕을 했던 곳이다. 다리 위에서 바다 속으로 다이빙하던 어른들의 모습도 생각났다. 그 때를 생각하며 다리난간을 바라보니 지금도 아찔한 기분이다.
민우는 자신의 제의에 응해준 형님이 고마운 듯, 현수를 마치 유치원생 돌보듯 정성을 다했다. 민우가 그럴수록 현수는 ‘그저 남남이거니…!’ 하며 살아온 자신의 지난 행동이 새삼 부끄럽고 미안했다.
“성님. 인자 열두시가 다 돼 갑니더. 보이소! 사람들이 저쪽에 모여들고 있지예? 우리도 가 보입시더.”
민우의 말대로 사람들이 육지쪽 다리가 들릴 지점 가까이로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가 간혹 귓등으로 들려오기도 했다.
어디선가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현인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잇따라 부산과 바다를 주제로 하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시간이 임박했는지 교통경찰관이 다리 가운데로 나서며 오가는 차량을 정지시키기 시작했다.
시간에 맞춰 관람객들에게 주의사항을 안내하는 방송멘트가 끝나자, 육지 쪽에서 다리길이의 1/7정도 되는 부분의 다리상판이 뚝 잘리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다리는 빨갛게 칠해 진 뱃살을 드러내며 영화 속의 킹콩처럼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자신과 부산을 찾아준 사람들에게 환영한다며 거수경례라도 올리듯이.
“거 참! 실제로 많이 커졌다는 데도 옛날보다 훨씬 작아 보이네. 그때는 아이 눈이라 그랬나?”
현수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꼼짝없이 서서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영도다리가 드는 시간에 울리던 요란한 사이렌소리가 생각났다. 그때는 하루에 몇 번씩 울렸는데, 정신없이 놀다가 그 소리에 귀가시간을 맞추기도 했었지!
“저, 혹시 강현수씨 전화 아입니꺼?”
“맞는데요. 누구세요? 제가 강현숩니다.”
“아! 성님! 저, 민웁니다. 기억 나시지예. 부산에 살고 있는 동생 말입니더.”
“민우…? 그래, 어떤 일인가요?”
“아, 성님, 맞네예. 저…!, 부산에 놀러 한 번 오시라고예. 영도다리를 다시 든다 아입니꺼.”
“뭐? 영도다리를 다시 든다고…?”
뜻밖에 걸려온 민우의 전화는, 반가움과 동시에 오랫동안 무심하게 살아온 자괴감도 고개를 내밀었다.
‘영도다리를 다시 든다고…?’ 금방이라도 달려 가보고 싶었다. 소식 듣자마자 온갖 옛 생각이 다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나이 탓인지? 희한하게도 전과 달리 조바심까지 일었다. 칠십 나이를 생각하라며 아내가 만류했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이 모습을 보러왔지. 여기에 어릴 때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네….’
뒤이어 아버지와 새엄마의 모습이 생각났고 죄책감도 뒤따랐다. 그러자 기세 좋게 고개를 쳐드는 다리와는 달리 자신의 고개는 점차 수그러지는 기분이었다. 다리는 58도의 경사까지 들렸다가 제자리로 내려왔는데 15분이 소요되었다.
“성님! 인자 식사하러 가입시더. 오랜만에 구경도 할 겸 저쪽 자갈치 시장이 좋겠심더.”
현수가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니, 좁다란 마루에는 아버지와 낯익은 동네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아빠를 따라 가끔 밥이나 국수를 사먹으러 갔던 해주식당 아주머니였다. 현수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려하자 아버지가 현수를 불렀다.
“현수야 여기 와서 인사해라. 앞으로 함께 살 새엄마다.”
“예? 새엄마라고요?”
아버지의 엉뚱한 얘기에 현수는 멍한 눈으로 아버지와 아주머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앞으로 함께 살 새엄마라니까. 이북에 있는 너의 엄마는 이제 잊어야겠다.”
아버지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현수지? 이제 중학 1학년이라고? 앞으로 잘 지내자!”
아주머니가 현수에게 밝게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빠! 엄마는 서울에 있잖아요?” 현수가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야, 네 엄만 이북에서 다시 못 나온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연락이 없을 리가 없잖아?” 아버지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 굳은 표정이 현수를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현진이한테도 얘기 잘해라. 알았지? 오빠인 네가 얘길 잘 해야 한다. 왜 대답이 없노?”
아버지는 계면쩍은 듯, 아니면 화가 나는 듯, 눈을 씀벅하며 큰소리로 말했다.
“엄마한테서 연락 오면 우짤라꼬예?” 현수의 퉁명스런 얘기에, 아버지는 해주식당 아주머니를 힐끗 쳐다보고는 잠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말은 역시 침착하게 단정적으로 말했다.
“네 엄마는 너의 형 데리러 외할머니 댁에 갔다가 못나온 게 확실하다니까.”
현수는 아버지의 말에 머릿속이 뿌예지며 가뜩이나 가물가물하던 엄마의 모습이 더욱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아빠! 그러면 엄마 죽었나?”
불쑥 나온 현수의 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가 절대 그럴 리 없다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아버지는 잠깐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평온한 얼굴로 되돌아오며 착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아냐. 그런 건 아니야. 엄마는 틀림없이 이북에서 못 나온 거라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아버지는 말끝을 흐렸다. 해주식당 아주머니도 말없이 현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현수는 맥이 탁 풀렸다. 틀림없이 엄마가 죽었기에 아빠가 저러시겠지? 현수는 아버지를 외면하고 마루 곁으로 붙여 만든 쪽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버지는 현수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평소의 무뚝뚝한 성격 그대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른 일어나 학교 안 가나?”
이튿날 아침, 문밖에서 내지르는 아버지의 호통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밤새 뒤척이다 늦잠을 잤나보다. 책보를 주섬주섬 챙겨 쪽마루로 나갔다. 마루에는 아버지와 아주머니, 그리고 현진이가 작은 두레상에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현수는 밥 먹을 생각도 않고 마루 아래 봉당으로 내려섰다.
“밥 안 먹고 가는 거야?” 아버지의 화난 듯 퉁명스런 소리였다.
“밥 묵기 싫어예. 학교시간도 늦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삽작문을 나서는 현수의 뒤통수에 아주머니와 아버지의 얘기가 들려왔다.
“……? 식사도 안 하고 가면 어쩌나?”
“저러다가 맘이 풀리겠지…?”
하지만, 현수는 개의치 않고 도망치듯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학교에서도 하루 종일 엄마생각만 했다. ‘엄마는 정말 이북에서 못 내려오신 걸까? 아니야! 그렇다면 왜 안 와? 진짜 죽었을지도 몰라. 혹시 아빠만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온갖 상상으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거기다 이상하게도 엄마 얼굴을 해주식당 아주머니가 자꾸 덮어 가리는 것 같아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 이래서는 안 되지? 엄마는 정말로 이북에서 못 내려왔는지도 몰라…?‘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형만 외할머니 댁에 잠시 맡겨둔 채 현수와 현진이만 데리고 서울까지 피난을 왔던 엄마아빠였다. 전황이 더욱 나빠져 1.4후퇴라는 상황이 닥치자, 서울도 위험하다며 다시 부산까지 피난을 가기로 했다. 현수와 현진이가 아버지를 따라 먼저 피난을 떠난 후, 엄마는 이북에 남겨두었던 형을 데리러 갔다. 이북이긴 하지만, 임진강만 건너면 곧장 닿을 수 있는 마을이었다. 길만 잘 잡으면 한나절이면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고 엄마가 얘기한 걸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벌써 8년이나 지났는데…!’
현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 부산에 먼저 내려가 있으면, 곧 뒤따라온다고 했잖은가! 엄마 때문에 아버지가 새엄마를 데려왔다 생각하니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엄마가 그지없이 미웠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분명 서울에 있다. 어떻게 하면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이 온통 머릿속에 가득했다.
학교를 파했으나 곧장 집에는 가기 싫었다. 새엄마가 혼자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학교에서 집과는 반대방향인 영도다리 쪽으로 걸었다. 영도다리를 왔다 갔다 하다가 어둑해서야 집으로 향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 배고플 텐데 밥 먹어야지”
삽작문을 들어서자,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현진이와 마루에 앉아있던 새엄마가 웃으며 반갑게 맞았다. 아주머니 곁에는 현진이보다도 어린 사내아이가 앉아있었다. 현수는 의아한 눈빛으로 현진이와 사내아이를 바라보다가 책보를 마루에다 휙 던졌다.
“아빠는?” 현수가 힘 빠진 음성으로 현진이에게 물었다.
“아빠는 같이 일하시는 아저씨 만나러 나가셨는데, 금방 오실거야” 새엄마가 현진이 대신 대답했다.
현수의 대답이 없자, 새엄마는 걸레로 좁은 마룻바닥을 훔치며 말했다.
“현수야! 얘는 네 동생인 민우다. 앞으로 너희들이 우애 있게 잘 지내야 한다.”
현수가 민우를 바라보자, 민우도 현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민우야 형아에게 인사해야지. 형아와 누나 말 잘 들어야한다. 알겠지”
“오빠. 그럼 우리 엄마는 안 오는 거야?”
시무룩하게 앉아있던 현진이가 현수에게 새엄마의 눈치를 보듯 핼끔거리고는 물었다. 현수도 갑작스런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핏 새엄마를 바라보곤 고개를 돌려버렸다.
“현수 왔나?”
아버지가 삽작문을 들어와 마루에 걸터앉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얼굴이 불콰하고 술 냄새가 확 풍겼다.
“현수야, 현진아! 얘는 새엄마가 데리고 온 동생이야. 이름이…? 그래 민우라 했지. 너희들 이제 모두 형제다. 잘 지내야 한다. 싸우면 안 돼. 특히 맏형인 현수 네가 동생들을 잘 돌보고 챙겨야한다. 알겠지”
“……!”
“왜 대답이 없어? 현수야 내 말 알아 들었지?”
“……? 그러면 장수 형아는 어떡해요?” 현수가 아버지에게 이제야 생각난 듯 장수형을 들먹였다.
“이놈 자식. 이제 엄마나 형님생각은 하지 말라니까” 아버지는 성난 목소리로 눈을 부릅떴다. 현수가 대답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아버지는 허탈한 듯 큰 소리로 허허 웃었다.
“그래. 현수야 조금만 지나면 모두 괜찮아질 거다. 허허! 우리 열심히 살아보자. 당신도 잘 아시겠죠? 이 아이들 참 순하고 말 잘 들어요.”
“…! 잘 알지요. 이미 이웃에 소문도 많이 났던데요. 뭘”
아주머니도 밝게 웃으며 아이들을 바라보았으나 현수는 앵한 기분을 삭일 수 없었다.
4학년인 현진이와 2학년인 민우는 친 오누이처럼 어울렸다. 현진이는 의외다 싶을 만치 새엄마를 잘 따랐다. 현수의 눈에는 현진이의 행동이 신기해 보이기도 하고, 멍청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현수는 도무지 엄마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새엄마가 부르거나 무슨 일을 시켜도 그저 묵묵히 따르기만 했다. 거절할 일도 없었다. 거절할만한 일은 새엄마가 아예 시키지도 않았다. 새엄마도 현진이와 달리 현수에게는 별 말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현수의 가슴속은 텅~ 비어갔다. 아니 뭐가 뭔지 정리도 되지 않았고, 아버지 말대로 엄마를 잊으려 해도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이 생각났다. 꿈속에서도 자주 만났다. 하지만 이런 얘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나 현진이에게는 물론, 새엄마나 민우에게는 더더욱 할 수가 없었다.
새엄마가 오고부터 현수의 생활도 많이 바뀌었다. 새엄마가 오기 전에는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대신해 밥을 짓거나 빨래를 하는 등 집안일도 했었다. 하지만 새엄마가 오고부터 그런 일은 모두 새엄마 몫이었다. 민우가 가끔 말을 걸어오곤 했지만 2학년짜리 꼬맹이와는 대화꺼리도 별로 없었다. 자연히 시무룩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학교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방학은 현수를 더욱 지루하게 만들었다. 영도다리께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게 여름 내내 일과였다. 바닷가 옆 공터에서 친구들과 공차기를 하거나 멱 감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또래 친구들은 물론이고, 아버지를 닮아 유난히 키가 큰 현수는 한 두 해 상급생들과도 친구처럼 지냈다. 자연히 동네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거의 모두 친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부터 서울로 유학을 갔다가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온 영식이도 함께 어울리는 절친한 친구였다.
영도다리 밑 갯바위에서 바다 속으로 다이빙을 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송도나 멀리 해운대까지 해수욕을 가자는 친구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현수에게는 너무 먼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어울려 정신없이 놀다가, 영도다리를 든다는 사이렌소리에 정신을 차리기도 했고, 문득문득 집안 일 걱정이 스쳤지만, 이내 그런 걱정은 아예 필요 없다는 안도감에 느긋해지기도 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그 해 8월 말쯤이었던가. 그날은 영식이가 내일은 서울로 올라갈 거라면서 친구들에게 아이스케이크 하나씩을 샀다. 다음 겨울방학 때, 또 내려올 때까지, 잘 있으라며 친구들과 헤어지기를 못내 아쉬워했다.
“야! 서울은 이곳보다 훨씬 넓지?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그야 말해 뭣해? 아마 이곳의 배도 넘을 걸…! 그리고 사람을 찾다니? 주소가 있다면야…!”
“그래. 그렇지” 현수가 실망한 듯 대답하자 영식이 되물었다.
“왜? 너희 엄마 때문에?”
“주소 같은 거, 아무것도 몰라. 동대문 근처였는데…, 가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아. 언젠가 아버지가 괴뢰군들 폭격으로 동네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럼 당연히 찾을 수 없는 거지…뭐.” 문득 현수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영식이 네 주소는 어디야?” 현수의 입에서는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 주소? 내 주소는 우리 고모 댁이야. 미아리 쪽이지. 주소는 잘 모르겠어. 그저 동신중학교 1학년 5반이 주소 아니겠나?” 영식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버지의 퇴근시간은 거의 매일 늦었다. 그리고 자주 술을 마시고 왔다. 피난 오기 전 이북에서 읍내 중학교에서 목공일을 했던 특기를 살려, 주로 피난민들의 판잣집을 수리하거나 문짝을 만드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다보니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자연히 동료들 아니면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술을 마셨다고 해서 술주정을 부린다거나 누구네 집 아저씨들처럼 고함을 치거나 싸우지도 않았다. 특이하게도 술만 마시면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엔 그저 말없이 조용하다가, 술을 마셨다하면 기분이 고조되어 말도 많아지고, 넉넉해지는 스타일이었다. 이를테면 귀가할 때 어쩌다 거지 빵이라 불리는 국화빵이라도 한 봉지 사 오는 날은 어김없이 술이 취했을 때였다.
하지만 현수는 요즘 들어 아버지의 이런 모습이 싫었다. 전에는 가끔씩 엄마나 형아 이야기를 했었는데, 요즘은 그런 말은 거의 하지 않았고, 술만 마시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풀어져버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수는 지금이라도 엄마만 찾아오면 자연히 옛날상태로 되돌아가겠지? 하는 기대감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곧 지나가버릴 일시적인 현상이란 생각이 늘 머릿속에 가득했다.
현수는 민우가 이끄는 대로 자갈치시장 쪽으로 걸었다. 영도다리 밑에서부터 건어물가게골목을 지나 현대식대형건물인 자갈치시장 쪽으로 걸었다. 시장 앞바다에 넓게 만들어진 광장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바다구경을 하고 있었고, 머리위로는 갈매기들이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저기에도 큰 다리가 있네?”
자갈치시장 회 센터 2층에서 확 트인 창문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현수가 물었다.
“아, 저 다리 말입니꺼? 저게 바로 남항대굡니다. 송도 쪽에서 영도로 연결 된다 아입니꺼.”
“송도? 그래, 해수욕장으로 유명했지? 그리고 아까 다리위에서 본 것은 북항대교라고 했던가?”
“예. 금년 봄에 개통됐는데, 첨에는 북항대교라 부르다가 지금은 부산항 대교라고 이름이 바뀠다 카네예.”
“정말! 너무도 많이 변해,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다. 서울보다 더 많이 바뀐 거 같다.”
횟집주인이 싱싱한 회가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왔다.
“형님, 이기 도다리라 카는 깁니더.“
“도다리?”
“예 도다립니다. 봄철에는 이게 최고라고 안 합니꺼?”
“그래. 봄 도다리 가을전어란 말이 있지. 이게 도다리구나!”
현수는 도다리라는 민우의 말에 아버지가 생각났다. 언젠가 아버지가 물고기를 사와서는 손수 회를 쳐서 먹었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는 도다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라고 했었다.
“이게 도다리야. 엄청 귀하고 맛있는 고기다. 현수야, 현진아 먹어봐라”
‘세 식구가 얼마나 오순도순 했었던가?’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다.
나이 들어가면서 아버지께 너무 철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거기다 새엄마에게도 얼마나 못된 짓을 했고, 또 지금 앞에 앉은 민우에게도 뭣 하나 잘한 게 없구나! 싶었다.
여름방학 내내 친구들과 쏘다니기만 했다. 개학이 며칠 안 남았던 어느 날, 아버지는 잔뜩 술에 취해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전에 없이 현수를 불러 앉히고는 큰 소리로 꾸짖었다.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녀석이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지. 여름 내내 너 뭐했어?”
“……?”
현수는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왠 잔소린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표정 보게. 뭘 잘했다고 눈을 똑바로 떠?”
현수는 아버지의 표정이 하도 화난 표정인지라 고개를 떨어뜨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현수가 묵묵부답으로 가만있자, 이번에는 새엄마에게 화풀이 하듯 고함을 질렀다.
“당신도 참! 아이 단속 좀 안하고…? 공부도 좀 챙겨보고 해야지. 저래갖고 뭐가 되겠나?”
현수는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내 일을 갖고 새엄마한테 역정을 낼까? 싶었고…, 더구나 나하고는 별로 상관도 없다 싶은 사람에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고, 당신도 참! 방학인데 놀지 그럼? 공부야 개학해서 또 열심히 하면 되고…!”
새엄마는 예상 밖으로 현수를 변호하고 나섰다. 현수는 ‘이것도 괜히 속보이는 말! 내 일에 왜 관심이 많은 척 하지?’ 싶었다.
“그리고 현수 너 왜 엄마 말 안 들어? 점심때는 가게에 와서 밥 먹으라고 했는데, 한 번도 안 왔다며?”
“그건…?”
현수는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리듯 새엄마를 힐끔 쳐다봤다.
“그거야. 아직 쑥스러워 그랬겠지? 그렇지 현수야”
새엄마가 또 변명하듯 거들고 나섰다. 새엄마가 식당에 와서 점심밥을 먹으라는 얘길 자주했지만, 번번이 가지 않았던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현수는 배가 고픈 나머지 엄청 가고 싶기도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엄마라 부르지도 않았는데…! 만일 거기 가서 밥을 먹는다면 진짜엄마는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정 배가 고프면 집에 와서 식은 밥을 뒤져먹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굶어버리곤 했었다.
개학 이튿날이었던가! 학교를 마쳤는데도 일찍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 시간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도 퇴근이 늦었고, 새엄마도 가게에서 저녁때가 돼야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현수는 새삼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한번 이 생각이 들면 꼭 엄마가 서울에서 잠깐 피난살이했던 옛날 그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한참 걷다보니 집과는 반대방향인 영도다리 위를 걷고 있었다. 영도다리를 지나면 곧 용두산 공원 밑 부산역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부산역 광장까지 걸었는데, 문득 서울에 한번 가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기차에 오르면 곧장 서울까지 간다는 사실에 새로운 용기가 생겨났다.
며칠 후 학교 가는 척, 집을 나와서는 부산역으로 나갔다. 엊저녁에 ‘서울에 가서 엄마 찾아오겠습니다.’ 라는 쪽지를 책상위에 남겨두었고, 학교에 내라는 공납금으로 기차표를 샀다.
그리고는 물어물어 동대문 근처까지 갔었지. 하지만 옛날의 그 집도 엄마도 찾을 수가 없었지. 그리고 반세기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노숙에다 굶기를 밥 먹듯 하다가 우연히, 정말 운 좋게도, 큰 키와 덩치 때문에 중학졸업 정도로 본 어느 가구점 주인의 눈에 들어 점원이 되었다. 결국 ‘미워하며 닮아 간다,’ 듯이, 아버지와 비슷한 목공일을 해오며 오직 엄마를 만날 일념으로 지금까지 동대문 근처에서 살아오지 않았는가!
지금 생각해도 왜 그렇게 철이 없었을까? 싶다. 중학 1학년이면 알건 다 알 나이가 아닌가! 아무리 천둥벌거숭이라도 설마 현수 자신처럼 행동하지는 않았겠지? 싶은 생각이 다시 든다.
그나마 잘 했다싶은 단 한 가지 일은, 서울에서 친구 영식이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동신중학교를 찾아가 겨우겨우 만난 영식이가 방학 때 내려가 아버지께 현수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영식이로부터 현수얘기를 들은 아버지와 새엄마의 반응도 의외로 차분했다고 한다.
“몸은 괜찮던가?”
아버지의 반응이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현수하고 잘 지내라는 말 이외에는 더 이상 말이 없더라고 했다. 현수는 그 말이 엄청 서운했다. 은연중에 아버지가 서울까지 찾아오시지 않을까? 하는 기다림과 혼이 날 두려움이 있었는데…, 영식이가 전해주는 그 이야기는 한 번 더 현수를 오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현수는 내가 아니고 장수 형이었다면…? 그리고 새엄마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결코 그냥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들로 머리가 아팠다.
피난오기 전부터 아버지는 형이 최고였다. 형제간에 사소한 다툼이라도 할라치면 언제나 동생인 현수 자신을 나무라셨다. 형님한테 대든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미취학상태인 어린아이를 마치 큰아이처럼 꾸짖기도 했다. 그럴 때 현수를 달래는 건 당연히 엄마 몫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때의 기분은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그런데 처음 며칠간은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형에 대한 시기심으로 안절부절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홀가분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외톨이로 살아간다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거기다 틀림없이 서울까지 찾으러가려는 아버지의 행동을 막아섰을 새엄마가 더욱 원망스러웠다. 때문에 부산에는 아예 가기도 싫었고, 관심마저 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철없었던 자신의 행동을 사죄드려야지!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행동은 차일피일 미적대기만 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아버지가 간경화라는 쉽지 않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현진이로부터 듣고서야 현수는 아차! 했다.
‘내가 너무 늦어버렸구나! 마흔아홉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다니…?’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망소식은, 지금까지 뭉그적거리기만 해왔던 자신에게 아버지가 주신 최대의 형벌이구나! 싶었다.
‘말씀드려야 할 얘기들이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 있는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새엄마와 민우를 만났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반갑게 대해주는 새엄마에게도 현수는 무뚝뚝하게 대했고, 왠지 한 방울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현수는 장례가 끝나자,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기차를 타면서부터 상주노릇이나마 제대로 하고, 새엄마도 어머니라 부르며 지난 일에 용서를 구하려고 했지만, 막상 새엄마를 대하자, 마음과는 달리 행동은 전혀 딴판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리고는 또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한 현진이도 아버지의 사망 후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되면서부터 민우와는 더욱 남과 같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작년에는 새엄마마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현진이로부터 들었다. 얼마나 무심했으면 ‘처음엔 누구?’ 했을 정도였다. ‘오빠도 정말 너무한다!’는 현진이의 질책을 받고서야 아득한 옛날 일을 떠올렸다. 그동안 민우와 현진이는 서로 연락처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장례식에 함께 가보자는 현진이의 제의에도 ‘평생 남남으로 살아왔는데…! 새삼 장례식에는 무슨?’ 하며 거절하고 말았다.
뭣 한 가지도 제대로 된 일이 없었다. 어머니와 형의 소식은 그동안 방송국의 이산가족 찾기에도, 부지런히 신청해보았지만 단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고는 했지만, ‘겨우 이따위로 살아 올 걸 부모형제까지 외면했나?’ 하는 회한(悔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튿날! 현수는 영락공원묘원 영안실에 놓인 아버지와 새엄마의 영정 앞에 한참동안 고개를 숙였다. 살아생전의 불효를 용서받을 수야 없겠지만.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참배를 마친 후 도착한 부산역 대합실! 곧 출발할 KTX 탑승을 기다리며 현수가 말했다.
“내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못된 짓 많이 했네. 살아계실 때 사죄를 드려야 하는 건데…”
“성님! 고맙심더.”
“영도다리가 우릴 다시 연결해주었네. 누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 하나?”
“정말 그렇네예. 영도다리가 다시 들리면서, 이산가족이었던 우리를 상봉시켜주신 것 같심더.”
“자네도 서울 아들한테 다니러 오거든, 꼭 날 찾아와야 하네…!”
“그럼예. 성님! 여부가 있겠어예? 그보다 먼저 아이가 성님 찾아뵙고 인사 올리라고 하겠심더.”
엊저녁에 민우 아들이 서울에서 직장에 다닌다고 했던 말을 상기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싶겠지만, 자네도 못된 이 형 용서하시게나. 47년 만에 영도다리가, 다시 들게 된 것 같이 우리도, 이제부터라도 서로 연락하며 지내도록 하세. 시간나면 자주 내려 올 게. 진짜 고향으로 생각하고.” 현수는 착 가라않은 음성으로 말하며 민우의 어깨를 안았다.
“성님! 고맙심더. 그라고, 꼭 드릴 말씀이 하나 있어 예. 사실 이 말씀 전해드리려고 지가 형님께 영도다리가 다시 들리는 걸 구실삼아 내려오시라고 했거든 예.”
“…무슨?”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형님 생각 많이 했심더. 당신 때문에 형님이 가출하셨고. 아버지와도 의를 끊다시피 살아오셨다고…! 그래서 평생 큰 죄를 지었다 했심더. 하지만 당신께서는 절대로 형님을 미워한 일이 없다면서 언젠가 만나게 되면 이 말 꼭 전해드리라는 유언과 함께 아버지의 유품인 이것을…?”
민우가 전해주는 얇은 봉투 안에는 누렇게 빛이 바랜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피난 오기 전 이북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다섯 식구가 찍은 사진이었다. 뚫어지게 사진을 바라보던 현수의 눈에 회한과 부끄러움의 눈물이 왈칵 솟았다.
때마침 구내방송에서는 서울행 KTX 승객들의 탑승이 시작되었다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수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개찰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끝.
<부산소설 11집, 2014. 12월>
첫댓글 온천은 퇴직후의 인생이 더욱 멋져 보인다. 언제 이리 예리한 문장력을 갈아 두었던고. 분명 퇴직후 갈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된다. 나도 퇴직후의 새로운 인생을 고대한다.
재미없는 글이라 보여드리기가 계면쩍구만. 풍백선생처람 재미있고, 예리한 글을 좀 쓸줄 알아야 하는 데 말씀이야.
지금까지 소설책을 완독한 것이 다섯 손가락안에 들까 말까 ....책 읽기를 어릴 때 부터 별로 안 좋아 했는 데,
이 글을 읽어니 흥미를 자아내어 끝까지 읽었네. 마지막 결론이 명쾌하니 읽고 난 후의 기분이 끝까지 잘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짓는 다는 것, 항상 나에게는 부러운 일이다. 잘 짓고 잘 쓰고 잘 그려야 진정한
예술가라 할 수 있는 데 자네는 내가 평생 노력해도 불가능의 재주를 가졌고,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게 참 좋다.
과찬의 말씀이라 많이 부끄럽구만. 좋게 봐주시니 고맙기도 하고. 이런 일로 시간 많이 보낸다네.
잘 읽었소이다. 영도다리가 들리면 끊어진 친구들의 소식을 더 많이 들을 수 있을까. 풍백 다리가까이 있으니 들릴때마다 자주 가보시게나. 지나간 인간관계를 되돌이켜보게하는 온천, 고맙소이다. 내 그대들을 좋아한다고 왜 일찍 말하지 못했을까. 동기들아 모두 사랑한다.
시덥잖은 내용이라 많이 미안! 잘 봐주시니 엄청 고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