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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인의 혼 찾기 -13
호남 인물들의 맥이 끊어지는 사건 기축옥사와 곤제(困齊) 정개청(鄭介淸)과 호남 유림과의 관계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호남 인물은 어느 왕조시대나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두 번에 걸쳐 호남 인물이 맥이 끊길 정도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기축옥사 사건이며 또 하나는 임진왜란 때 많은 문관 출신의 의병들이 구국전투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서 발단이 되지만 그 위관(委官)이 송강 정철이 되면서 곤제 정개청을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연루 시켜 거의 1천여 명의 유림들을 처형함으로서 호남 인물의 맥을 끊은 것이다. 정개청의 호는 곤제,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이며 1529년(중종24년) 현재의 나주시 금성산 밑 대곡동(현재 경현동)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고려 말 때 선대에서 나주로 귀양 와 대대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중년에는 나주 동강면에서 살았고 1570년경에 함평군 엄다면에 정착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선생의 강의가 가깝고 먼 곳에까지 알려져 수많은 선비들이 제자로서 선생을 받들었으며 현달한 제자로는 나덕준(나주인 현감) 나덕윤(나주인 감찰), 나덕현(나주인), 나덕수(나주인), 나덕원(금성인 현감), 정지함(예조좌랑), 안중묵(보성, 직장), 최홍우(화순, 별좌), 남이공(좌의정) 등 헤아릴 수 없는데, 선생의 저서인 우득록(愚得錄)에는 나덕준 등과의 서답 내용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어 그 당시의 정개청과 호남 유림과의 인간관계를 우득록과 조선왕조실록에 기초하여 소개하고자한다. 선생이 1590년 4월 기축옥사에 연루되었을 때 저서를 포함한 1천 여 권의 책을 압수당하였는데 선조가 우득록을 읽어 보고 「이 책은 옛글을 읽은 사람의 저술이로다. 모두 본가에 돌려주도록 하라」하여 되돌려 보냈으나 우득록만 본가에 돌아오고 나머지는 분실하였다. 본가에 돌려보내진 우득록은 후일을 염려하여 땅속에 묻었다가 선생이 신원(伸寃)된 후 증손 대에 꺼냈는데 빗물이 스며들어 글씨를 알아 볼 수 없는 곳이 많았다. 1650년대에 해옹 윤선도(海翁 尹善道)와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고정(考訂)을 끝냈으나 1657년 9월에 선생의 사우가 훼철되자 숨겨져 버렸다. 1689년 자산서원이 복설되자 왕께 발간을 건의하여 특명을 받았으며 1688년부터 나두동(덕준의 증손)과 나만성(덕준의 현손)이 우득록을 고정(考正) 하였고 1691년 나두춘(덕준의 증손)이 판재를 협찬함으로서 무안 등 여러 곳에서 목판에 글을 쓰고 여러 읍에서 판에 글씨를 새겼다. 그 후 1692년 숙종의 명에 의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3권을 간행하였다. 우득록은 전3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에는 논학(論學), 제2권에는 논학, 석의(釋義), 논예(論禮), 논리(論理), 서기(序記)가 있고 제3권에는 상소, 제문, 서가 있는데 이 서부분에 나덕준에게 보낸 서답 45편이 있고 나덕윤과 서답 1편이 있다. 미수 허목은 서문에서 「우득록은 선조 때의 호남 징사 곤제 정씨의 저서다. 그 기, 논, 서, 설, 잡저, 경학, 상소, 서와 또 짧은 구절과 한두 줄 되는 소소한 작품까지 심심풀이로 하는 말이 아니요 유교학문에 유익되니 대소 합쳐 334편으로 정말로 백대의 탁월한 글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우득록 부록 상권에는 선생의 사실이 연대별로 기록되었고 하권에는 선생의 행장이 있는바 정랑 나의소(正郞 羅宜素)가 지은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선생의 사실 편에 나덕준에게 글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바 곤제선생이 나덕준과의 학문적 친밀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선생의 마지막 일생은 이렇게 진행된다. 1589년 10월2일 정여립의 기축옥사가 발생하자 선생은 1590년 4월에 나주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처음에 위원으로 유배되었는데 정철이 다시 아뢰어 경원의 아산보(함북 아오지)로 배소를 고쳤다. 1590년 6월 아산보에 도착한다. 1590년 나덕명은 경성에 유배되고 나덕준은 부녕에 유배되었으며, 나덕윤은 회령에 유배되어 선생보다 먼저 도착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아산보로 가는 길목에서 이들 제자들을 상봉하였으나 조금도 난색한 기미가 없이 다만 주역을 강론하는 것에 힘쓰라 하였다. 1590년 7월 선생이 고문의 상처가 깊어져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덕윤 등이 가서 구호하였으나 7월27일 애석하게도 돌아가셨다. 선생은 벼슬보다는 학문을 중히 여기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강학에 노력한 결과 많은 제자를 둘 수 있었고 선생의 경력을 살펴보아도 선생은 당인은 아니라고 단정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은 서인의 총수라 할 수 있는 정철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서인의 모함에 의해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자 제자들의 신원운동이 일어났고 제자들은 주로 남인이 많아, 선생은 사후에도 남인이 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하여 선생의 사우인 자산서원(紫山書院)이 당파싸움으로 인해 다섯 번 헐리고 한번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6차에 걸쳐 복설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철의 문학가적 기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1인자이다. 반면에 개인적인 생활이 주색에 빠지는 방탕의 면이 있어서 뜻있는 자가 정철의 미래를 걱정해 주는 충고가 있는데 이러한 충고를 오히려 반 감정으로 가슴에 새기어 복수의 칼을 갈았다. 담양에 내려온 정철의 습속이 방탕하다고 느낀 정곤제는 「사람이 주색처럼 빠지기 쉬운데 철(澈)이 후배들을 이에 유인하여 습속이 무너지면 장차 구하기가 힘들 터인데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닌가」라고 한숨을 쉬며 탄식한 적이 있는데 이 애기가 정철에게 전해지자 충고로 받기보다는 앙심을 갖는 원인이 되며 정철이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관장하는 위관(委官)이 되면서 정철의 복수심은 정곤제에게 미친다. 사실 정철은 그때까지 창평에 은거해 있었는데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서울로 올라가 왕께 이번 기회에 반역자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고 진언하자 왕은 정철을 반역 사건을 조사하는 총책을 주었다. 정철은 서인의 총수 격이요 정여립은 동인이다. 그러므로 서인인 정철은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담당하는 계기로 동인을 뿌리 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사건을 확대해 나간다. 정철은 각 고을에 역적과 친한 사람을 수색하라는 명을 내리고 동인세력을 역모로 몰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여립과 친한 사람은 물론 편지를 왕래한 사람까지 물고를 내었다. 정철은 정곤제에 대한 앙갚음으로 정곤제를 역모에 연루시키도록 나주 선비들에게 상소를 올리도록 조정하여 결국 정곤제가 정여립의 집터를 잡아준 것에 연루 시켰으나 무혐의로 풀려나자 정곤제의 저서인 우득록(愚得錄) 제1권에 동한절의진송청담설서(東漢節義晉宋淸談說書)가 있는데 이 논설이 배절의(排節義) 즉 「절의(節義)를 배제(排除)한다」는 이론이라고 억지 주장하여 형벌을 주도록 주창한다. 선조대왕 수정실록 제24권(선조23년 1590년) 2월 1일편에 「개청은 일찍이‘절의 청담변(淸談辨)’이라는 글을 지었다. 그 내용은 대개 동한(東漢) 서진(西晉)의 선비들은 성현의 학문에 종사할 줄 모르고 의리의 대요를 따르지 않으면서 의견만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나라를 망하게까지 했으면서도 잘못을 몰랐으니 또한 세교(世敎)에 아무 보탬이 없음이 명백하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본래 주자의 설이었는데, 개청은 글이 부족해 절의지사를 나라 망치는 사람이라고 한 것 같은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그 문도들은 ‘우리 스승이 이런 논을 한 것은 정철이 호남의 사습을 잘못되게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에 하신 것이다.’고 칭하였다. 정철이 절의를 숭상하면서도 방탕한 기질이 있어 조정을 오만하게 대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비판하는 자들은 개청이 절의를 배척하는 논을 지었다고들 하였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정철은 ‘절의 청담변’이 자신을 지칭할 것이라는 오해와 감정 때문에 곤제와 호남 인사들에 대해 악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정철은 정개청을 직접 심문하였다. 이로 하여 뒷사람들은 정개청이 정철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하였다. 결국 정곤제는 함북 아오지로 유배되고 거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와 같은 역모의 사건과 관련하여 정철은 무려 호남 유림 1천여 명을 처단하였다. 1567년은 선조의 즉위로 대거 등장한 사림세력은 1575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율곡이 서인이 되면서 서인세력이 득세를 하였고 율곡이 죽자 동인세력이 정국를 주도할 때 서인 율곡이 천거하여 벼슬길에 오른 동인 정여립은 스승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전주로 쫓겨나자 이에 앙심을 먹고 대동계(大同契)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모역을 꾀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고 1589년 기축년 정여립의 역모사건으로 인한 옥사가 발생하는데 이때 정철 등 서인세력은 정권장악의 기회로 동인을 제거하고자 옥사를 확대하였던 것이다. 1590년 2월 정철이 위임받은 관리(委官)가 되면서 사건이 위와 같이 변색되는데 조정에서 각 고을에 역적과 친한 사람을 수색하라는 명이 있자 나주에서는 정여능, 홍천경, 유발 등 10여명이 나주목사에게 협박하여 선생을 역모에 연루 시켰다. 선생은 정여립과의 교분과 정여립의 집터를 잡아준 것에 연루시켰으나 무혐의로 되자 정철은 계속 집요하게 곤제선생을 모함하여 역모에 연루 시켰다. 1593년 정철이 죽었으며, 조선왕조 선조실록 제57권의 1594년 11월6일편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동보고로“고영돈영부사(故領敦寧府事) 정철은 본래 사갈(蛇蝎)같은 성품으로 음흉한 꾀를 품고서 독기로 풍쳐저 오직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만을 일삼았습니다. 전번 역변을 만났을 때 그는 들어와 조정의 권력을 쥐고서 나라의 화를 기화로 자기 일개인의 감정을 풀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당초 성상께서 그것이 파급될 것을 깊이 경계하였으나 정철은 감히 팔뚝을 휘두르고 수다를 떨며 죄를 얽을 꾀를 자행하였습니다. 아래로 빈천한 선비에 이르기까지 널리 부하들을 배치하여 많은 그들을 쳐서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일망 타진 하였습니다. 또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자창자화하면서 초야에 있는 선비들의 상소를 동원하기도 하고 대성(臺省)에 있는 관원들의 탄핵 소장을 유발하기도 하였습니다....(중략) 하찮은 감정으로 모함을 입은 자가 부지기수였습니다.....(중략)... 관작을 추탈하여 왕법을 바로 잡으소서」라고 보고서를 올리자 임진란의 혼란을 이유로 선조께서 윤허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정철의 품행이 옳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의 신원 상소문에는 수차례 정철을 독철(毒澈)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정철의 간사함과 포악성을 표현했다고 본다. 선생의 역모연루는 곧 그의 제자들 특히 호남 유림의 제자들이 화를 입게 되었고 선생의 사후에도 계속 선생의 신원운동을 하게 된다. 1592년 나덕준, 나덕윤, 나덕현이 사면되어 돌아왔으며 1595년(선조28년) 나덕윤이 상소하였고 1596년 12월 전 의금부도사 나덕명 등이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 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며(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 1월17일편에 기록되어 있음) 1599년(선조32년) 전별좌 나덕준이 선생의 신원을 상소하였으며 1608년(선조41년) 2월에 전의금부도사 나덕윤이 선생의 신원을 청하는 소를 올렸고 1611년 유생 나덕현 등이 신원을 상소하였으며 그 결과 1625년(인조3년) 2월에 선생의 관작이 복위되었다. 이상과 같이 우득록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곤제와 호남 유림간에는 사제로서 매우 끈끈한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조 시대는 당쟁의 희생물로서 많은 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당쟁의 모체가 되는 붕당(朋黨)의 본래 어의는 무엇인가. 주례(周禮)나 춘추(春秋)에서는 붕(朋)을 같은 스승 밑에서 도 또는 의리를 동문수학한 무리(벗)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문수학한 붕이 뭉쳐 당파를 만들어 서로 자기편이 아닌 당을 배척하는 것이 붕당이라 할 수 있는데, 학문적 붕의 무리들이 처음부터 붕당을 조성한 것은 아니었다. 서인의 이기일원론을 주장하는 기호학파나 동인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는 영남학파나 학문적 학파는 학문 발달에 있어서 순기능적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학파로 출발한 이들이 벼슬을 할 경우 결과적으로 관직의 자리다툼이 일어나고 같은 학풍의 무리들이 다툼의 당쟁으로 비화한 것이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으나 사관의 눈으로 역사를 직시하여 다시는 이러한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