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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크메르의 세계"가 작성한 가장 최근의 태국 역사이다. |
태국 역사 제9장
태국 현대사 (하) : 2009-2010
History of Thailand 2009-2010
부제 : 레드셔츠 세력의 성장과 기로에 선 태국의 갈 길
1. 배경상황
일명 "레드셔츠"로 통칭되는 "반독재 국가민주 연합전선"(UDD)은 근년에 이르러 양분화된 태국 사회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레드셔츠"는 좁게는 UDD라는 운동 연합체를 의미하지만, 이 연합체 자체도 구체적인 상설조직을 가진 강고한 제도적 장치가 아니다. 넓은 의미로 "레드셔츠"라고 할 때는 태국의 전통적 보수 기득권층이 주도해온 현상유지 체제를 탈피하여, 보다 폭넓은 민주적 제도와 전반적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여, 극우 왕당파 세력인 "옐로우셔츠"(PAD: 태국 국민민주주의 연대)의 대립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레드셔츠"는 최초 "2006년 9월 쿠테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2009년 12월경에 반대집회를 하면서 붉은 셔츠들을 상징적 패션으로 착용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들의 최초 주장은 쿠테타로 인한 군부통치를 신속히 종료하고, 망명 중인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전 총리 등에 대한 사면 요구 같은 것이었다. 태국 군부와 기득권층이 정치적 소요의 원인을 탁신이라는 한 개인에 집중시키는 전략을 취했던만큼, 초창기의 레드셔츠 운동 역시 주로 탁신에 대한 지지표명과 옹호 같은 이슈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이 세력에게는 언제나 "친 탁신파"란 이름이 따라다녔다. 또한 그 참가자들 역시 처음에는 주로 북부 및 북동부 지역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따라서 태국 보수층과 언론의 선전전략에 따라, "부패한 탁신"과 "그의 선심성 정책에 속아서 놀아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가난한 농민 지지층"이란 이미지가 드리워졌다.

(사진)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그는 태국 사회를 되돌아올 수 없는 하나의 흐름에 몰아넣은 인물인 동시에, 태국사회 여론의 극단적 양분화에서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006년 9월 쿠테타의 목표는 기존의 태국사회가 지녔던 사회경제적 구조를 상당한 정도로 뒤흔들어버린 탁신의 정권과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쿠테타는 보수층의 입장에서도 그다지 만족할만한 성공, 즉 영속적인 체제안정의 보장은 가져다주지 못했다. 아울러 이 쿠테타에 대한 왕실의 개입 의혹만 불거짐으로써, 이후의 태국 정치에서 왕실이 담당할 정치적 행보의 폭도 거의 없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과도체제는 2007년 12월의 총선을 통해 민주체제로 돌아와야만 했다. 하지만 이 선거에서 또다시 친 탁신계 정권인 사막 순타라웻(Samak Sundaravej) 총리가 이끄는 "국민의 힘 당"(PPP)이 다수당을 차지했다. 이에 따라 보수층의 "옐로우셔츠" 시위대는 2008년의 상당한 기간을 정권퇴진 요구시위에 집중했다. 이들이 정권퇴진 요구의 이유로 든 것은 부정부패와 같은 상투적 이유들이었지만, 그 투쟁강도는 상당히 과격한 것이었다.
최초 이들이 몇달 간의 시위를 하며 여론을 조성하자, "태국 헌법재판소"는 9월 9일 사막 총리가 TV 요리쇼 사회자를 계속 맡은 일이 공직자 이권개입 금지조항에 위배된다며 총리직 사임을 결정했다. 이후 집권여당은 야당인 "민주당" 대표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후보도 경선에 나선 가운데 국회 내 투표를 치뤘고, 이 투표에서 탁신 전 총리의 매제이자 사막 총리 해임결정 후 선임 부총리로서 총리직을 임시로 승계하고 있던 솜차이 웡사왓(Somchai Wongsawat) 교육부장관을 다시금 총리에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자 "옐로우셔츠" 시위대가 또다시 과격한 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2008년 12월 방콕국제공항 점거농성 테러"를 일으켰고, 이것을 예비적 여론의 발판으로 삼은 가운데 또다시 "헌법재판소"가 개입했다. "헌법재판소"는 12월 12일 판결을 통해, 2007년 12월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다면서 3개의 연립여당들에 대해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후 국회의원들의 이합집산을 통한 정계개편이 진행된 후, "민주당"의 아피싯 당수가 2008년 12월 15일 국회의 투표를 통해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이러한 진행과정에 대해 "레드셔츠" 세력은 2006년 쿠테타에 이은 또 하나의 권력찬탈 과정으로 파악했고, 자신들의 권리인 투표에 대한 결과가 왜곡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상실감을 맛봐야만 했다. 결국 "레드셔츠들"도 거리로 몰려나왔다.
2. 2009년 송깐소요
| * 제2장의 내용은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내용 중, 관련 내용만 발췌, 번역한 것이다. |
2.1. 새로운 집회
2009년 4월 초, 레드셔츠(UDD)의 시위가 시작됐다. UDD 및 친-탁신계 정당 "프어타이 당"(Puea Thai Party)은 4월 8일에 주요한 집회를 개최했다. 이 집회에서 이들은 아피싯 총리의 사임, 국회해산, 새로운 총선 실시를 주장했다. 또한 자신들이 "아마따야티빠따이"(Amatayathipatai)라 부르는 "배후에 숨은" 권력자들을 공격해댔다. 이러한 이들 중에는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국왕의 복심으로 통하는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추밀원 의장과 군부 내의 인사들이 포함된다.
UDD는 또한 탁신 친나왓 전 총리에 대해 국왕의 사면령을 요구했다. 이후 시위가 "승리 기념탑" 같은 시내 중심가로 퍼져나가면서, 근처 주요 병원들의 출입이 봉쇄됐다. 또한 택시 기사들이 교통정체를 유발하기 위해 주요 대로변에 차량들을 방치함으로써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2. 파타야 아세안정상회담장 난입
2009년 3월 탁신 전 총리는 비디오 방송을 통해, 추밀원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이 2006년 쿠테타를 입안했고, 여타 "추밀원" 위원들인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전 과도총리 및 찬차이 리킷찟타(Chanchai Likhitjittha)가 군부 및 PAD와 공모해 아피싯 웻차치와를 총리에 앉히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아피싯은 이를 부인했지만, 4월 초가 되자 수많은 시위대가 방콕에서 쏟아져나와 아피싯의 사임를 요구했고, 쁘렘 띠나술라논과 수라윳 쭐라논, 그리고 찬차이 리킷찟타에 대해서는 "추밀원"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했다.(주1) 탁신은 종종 "전화연설을 통해" 등장하여, 아피싯 내각을 지탱해주는 이 명백한 귀족주의적 압력 --- "코네 암맛"(Khone Ammat): 귀족적인 배후 --- 을 "분쇄할 국민혁명"을 주창했다.
붉은셔츠를 입은 UDD가 주도한 이 시위는 아세안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던 파타야(Pattaya)까지 확산됐다. 여명이 오기 전에 택시 기사들이 자신의 차량을 몰고 UDD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파타야를 향했다. 주요 도로들은 차단됐고, 곳곳에서 UDD와 진한 파랑 셔츠를 입은 친정부 시위대가 충돌했다. 오후가 되자 시위대는 정상회담장으로 향했다. 푸른셔츠들이 UDD 시위대에 폭탄을 투척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주2) 보안군이 시위대 저지에 실패하면서, 결국 시위대가 회담장인 호텔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 시위로 결국 아세안 정상회담은 취소됐고, 보안군은 해군 함정과 헬기를 동원해 각국 지도자들을 호텔로부터 피신시켰다. 4월 11일 아피싯 총리는 파타야 및 촌부리(Chonburi)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마침내 오후부터 시위는 중단되었다.
2.3. 방콕의 송깐 소요
2009년 4월 8일 집회에는 UDD 회원과 탁신 전 총리 지지자 등 10만명이 운집했다. 이들은 처음에 정부청사로 모였고, 밤이 되면서 "로얄플라자"(Royal Plaza) 주변으로 몰려들었다.(주3)
파타야 소요사태 이후 정부는 방콕과 수도권에도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아피싯 총리가 비상사태 선포 연설문을 준비 중이던 내무부 청사 앞에서 최초의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UDD 지지자들은 내무부 입구를 봉쇄하고 청사 안으로 몰려들었다. 수백명의 시위대가 총리와 그 장관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아피싯 총리의 비서진 및 경호원들이 부상했다. 오후 늦게 군 장갑차들이 방콕 시내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시위대들은 장갑차를 탈취하거나 분산시키려 시도했다. 하지만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보다 많은 군 병력이 시내로 들어왔다.
태국 신년인 송깐(Songkran)을 맞이하여 일주일간의 연휴가 시작되자, 파타야 소요 및 UDD 지도자들의 구속 이후 최대의 시위가 방콕에서 벌어졌다. 시위대는 방콕 중심지 몇 곳에서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 차량과 버스를 배치했고, 한 곳에서는 가스 운반차를 배치하기도 했다. 시위대 본진은 "승리의 탑" 주변을 장악했고, 그외 시내 주요 도로를 이들이 차단했다.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시위대, 그리고 일반 시민들 간에도 싸움이 벌어졌다. 쁘렘 의장의 자택 근처에서 벌어진 시위에서는, PAD 지지자가 UPP 시위대 속으로 차량을 몰고 돌진했다 도망가기도 했다.(주4) 긴장이 고조되자 아피싯 총리는 방콕 및 수도권 인근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들 시위대를 "국가의 적"이라 비난했다.(주5) 아피싯 총리는 또한 정부가 텔레비전 방송을 검열하라는 총리령도 선포했다.(주6) 이 충돌이 있기 직전 탁신 전 총리는 "D-스테이션 텔레비전"(D-Station television broadcast)에 모습을 보이고, 푸미폰 국왕이 이 사태에 개입해 사건을 종식할 것을 요구했다.(주7)
4월 13일 월요일 여명을 기해, 완전무장을 한 태국 군대가 자동소총으로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방콕 중심지 "승리의 탑" 근처의 딘댕(Din Daeng) 교차로에서부터 진압을 시작했다. 이 진압작전으로 최소 70명 이상이 부상했다.(주8)(주9) 육군은 후에 실탄은 공중을 향해서만 발포했고, 시위대에는 고무탄 사격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군대의 사격이 시위대를 향해 직격탄을 발사한 몇몇 사례들이 있었음을 확인했다.(주10) UDD는 군대가 공격할 때 시위대들이 실탄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주11)(주12) 하지만 후에 군은 그 부상이 육군의 정규소총인 M-16에 의한 상처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월요일) 아피싯 총리는 UDD에 동조하는 위성뉴스 채널 "D-스테이션"을 차단하라고 명령했는데, 바로 그 시간에 D-스테이션은 이 날의 충돌을 방송하고 있었다. 몇몇 UDD 커뮤니티의 라디오 방송국들도 폐쇄됐고, UDD 지지자가 아닌가 하는 혐의로 조사도 받았다.(주13) 탁신 전 총리 및 13인의 시위 지도부에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됐고, 방콕 시내 곳곳에서 폭력적 충돌이 이어졌다. 2009년 4월 14일 시위 지도자 대부분이 경찰에 자진출두했고, 폭력은 종식되었다.(주14) 정부청사 주변의 주요 시위장소를 군대가 점거하자, 시위대는 시위 중단에 동의했다.
정부측은 시위대에 대해 평화적 대우를 할 것을 약속하고, 지방에서 상경한 이들의 귀향을 위해 무료 교통편도 제공했다. 정오 무렵에 이 시위는 "공식적이고" 평화적으로 종료됐다.
이후 얼마 안 있어 아피싯 총리는 탁신 전 총리의 일반여권을 말소시켰는데, 그가 가진 외교여권에 대해서는 이미 취임 직후에 말소시킨 바 있었다. 이와 함께 수십명의 시위 지도자들에 대해 구속영장도 발부했다.(주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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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Reuters, "UPDATE 4-Anti-govt rally in Bangkok, PM says Asia summit on", 2009-4-8.
(주4) MCOT, "Hit-and-run driver plunges car into UDD protesters", 2009-4-9.
(주5) The Age, "Sacrificing democracy won't end Thailand's chaos", 2009-4-15.
(주6) Committee to Protect Journalists, "Thai government issues censorship decree", 2009-4-14.
(주7) The Economist, "The trouble with the king", 2009-4-16.
(주8) The Times, "Abhisit Vejjajiva won the media battle but the hardest job is yet to come", 2009-4-14.
(주9) The Times, "Thai troops open fire on protesters in Bangkok", 2009-4-13.
(주10) The Telegraph, "Human Rights Watch calls for Thailand inquiry after riots", 2009-4-16.
(주11) Bangkok Post, "Reds in retreat", 2009-4-14.
(주12) Bangkok Post, "Red revolt", 2009-4-14.
(주13) MCOT, "Community radio stations ordered to close temporarily", 2009-4-16.
(주14) The Guardian, "Thailand issues Thaksin arrest warrant over Bangkok violence", 2009-4-14.
(주15) Bell, Thomas, "Thailand revokes passport of ex-PM Thaksin Shinawatra", The Telegraph. 2009-4-15. |
3. 새로운 긴장의 고조
3.1. 캄보디아-태국의 국경분쟁
2008년 7월 "유네스코"(UNESCO)가 11세기경에 축조된 캄보디아-태국 국경지역에 위치한 쁘레아위히어(Preah Vihear) 사원을 캄보디아 소유로 인정하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이후 이 문제는 양국간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고조시키면서, 사원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양국 군대가 몇차례 우발적 교전을 벌이기도 했고, 그러한 현상은 2010년 현재까지도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원래 쁘레아위히어 사원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태국의 친 탁신계 정부 하에서 양국간에 물밑 의견조율을 거친 것이었다. 즉 사막 순타라웻 총리 집권기인 2008년 6월 17일 태국 국무회의는 캄보디아와의 공동성명서를 추인한 바 있었다. 이 추인을 통해 태국의 노파돈 빠타마(นพดล ปัทมะ, Noppadon Pattama) 외무부장관과 캄보디아 부총리인 속 안(Sok An) 관방부장관이 6월 18일에 공동성명서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캄보디아가 이 사원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데 있어서, 태국 정부도 외교적 지원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 사원의 주요한 접근로는 태국쪽 영토를 통하게 되어 있어서, 태국으로서도 관광객 증대 등 실질적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국에서 아피싯 정부가 2008년 12월 출범하게 되자, 양국의 협력적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극우파인 옐로우셔츠 세력이 이 문제에 정치적 공세를 집중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하지만 이미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가 이 사원이 캄보디아 영토라고 판결한 바도 있는 상태에서, 캄보디아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또한 캄보디아의 훈 센(Hun Sen) 정권은 전통적으로 베트남과의 지원과 협력이 주요한 정치적 지반이기도 하다. 특히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2005년 협정을 통해, 동쪽의 캄보디아-국경선 국경선 표식설치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야당 등 비판세력이 캄보디아의 영토 이익이 훼손당하고 있다고 줄기차게 의혹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태국과의 서쪽 국경에서는 더욱 더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주16)
결국 캄보디아 정부는 아피싯 정부의 아킬레스 건을 건들어, 이에 국경분쟁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다. 그것은 바로 탁신 전 총리를 캄보디아 정부 및 총리 개인의 경제자문위원으로 영입하는 것으로, 이는 태국의 현 정권을 극도로 불쾌하게 만드는 동시에, 자극하기도 하는 외교적 도발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캄보디아 정부는 탁신 전 총리에게 캄보디아 내 망명처 제공까지도 제안함으로써, 최악의 경우 망명 상태인 탁신 전 총리가 캄보디아 북서부 지방을 통해 그의 지지기반인 태국 북동부 지방 유권자들과 대중적 접촉을 할 가능성까지도 열어둔 것이었다.
3.2. 탁신의 캄보디아 방문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2009년 10월 21일, 태국의 친 탁신계 야당 "프어타이 당"의 차왈릿 용짜이윳(Chavalit Yongchaiyudh) 의장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자신이 "탁신 전 총리가 거주할 주택을 마련해두었고, 그에게 언제든 정치적 망명처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탁신 전 총리는 이후 3차례에 걸쳐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2009년 11월 5일 캄보디아 정부가 탁신 전 태국 총리를 정식으로 경제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 11월 10일 그의 캄보디아 방문이 현실화되자, 11월 12일 양국은 앞다퉈 자국 대사들을 소환했다. 또한 캄보디아는 탁신 전 총리 비행일정 정보를 태국 정부에 넘겨준 "캄보디아 항공교통서비스"(CATS) 사 소속 태국인 직원을 간첩혐의로 체포하기도 했다. 탁신 전 총리는 프놈펜에서 캄보디아의 경제 관료 및 전문가, 그리고 재계인사 400여명을 상대로 강연하기도 했고, 앙코르와트를 관광한 후 11월 14일 거주지인 두바이로 떠났다. 이후 그는 12월 13일에 2번째로 캄보디아를 방문했고, 구속 중이던 간첩용의자의 석방에 앞서 공개적으로 그를 면회하기도 했다. 탁신은 이후 12월 21일 캄보디아를 떠났다. 이 2차례의 방문에서 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만났다.
2010년 1월 20일에 있었던 탁신의 제3차 캄보디아 방문은 불과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고, 훈센 총리와 만찬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이후 탁신과 캄보디아의 관계는 서서히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고, 이후로는 어떠한 새로운 일정도 진행되지 않았다.
3.3. 탁신 일가 재산몰수 재판
2010년 2월 26일 태국 대법원은 탁신 전 총리 일가의 동결자산 약 23억 달러 중 절반이 약간 넘는 14억 달러를 국고로 몰수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극도로 양극화된 태국 정치의 진행과정에서 큰 변수로 남아있는 문제였다.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까지 이 날을 고비로 레드셔츠(UDD) 시위대가 봉기하여 태국 사회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 것을 우려했다. 태국 정부 역시 2만명에 이르는 병력을 동원해 방콕 지역의 질서유지에 대비했다.
하지만 탁신 전 총리는 지지자들에게 침착하게 행동해줄 것을 당부했고, 레드셔츠 지도부 역시 판결 이전부터 전국적 봉기일을 3월 12일로 늦춘다고 발표하여, 우려했던 폭력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레드셔츠 시위대는 3월 12일 전국적으로 집회를 개시하여, 3월 14일 방콕으로 집결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들의 요구조건은 현 정부인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의 연립내각이 퇴진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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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태국 궁내청/The Bangkok Post) 아피싯 웻차치와 태국 총리는 2010년 3월 8일 발표를 통해, 3월 13-17일 사이의 호주방문 계획을 취소시켰다. 그는 그 직후 시리랏 병원에 입원 중인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국왕을 예방해 현안에 대한 보고를 했다. 아피싯 총리(좌)와 푸미폰 태국국왕(우)이 대화를 나누고 있고, 그 가운데는 국왕의 애견인 "텅뎅"이 앉아있다. |
4. 2010년 레드셔츠 70일 항쟁
4.1. 위대한 레드셔츠들의 70일 항쟁사
2010년 3월 12일(D-2일) 레드셔츠는 전국적인 봉기를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3월 14일(D데이) 방콕에서 개최될 "100만인 행진"을 위해 방콕을 향해 몰려들었다. 이들은 제한적 중산층 세력으로 구성된 "옐로우셔츠"(PAD) 시위대와는 달리, 주로 북부와 북동부 지방 농민들을 주축으로 하긴 했지만, 남부지방과 서부지방에서도 비교적 의미있는 숫자의 지지자들이 방콕을 향해 출발한 것으로 보고되면서, 동서남북에서 몰려들었다. 전국에서 방콕을 향하는 주요 고속도로와 심지어는 뱃길까지도 붉은색 물결이 출렁거렸다.

(사진: Nirmal Ghosh) 방콕을 향해 몰려오는 붉은 행렬. 수도권 인근 검문소에서 촬영된 것이다.
이 사태의 초기 아피싯 총리는 이들의 시위계획에 그다지 염려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세계 주요 언론들도 이들의 봉기를 과거 태국에서 발생했던 정치적 사건들처럼 하나의 과도기적 에피소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보와 교통의 급속한 보급 시대에 살고있는 레드셔츠는 불과 1년 전의 송깐소요와 비교해서도 그 규모가 몰라보게 성장했고, 더 이상 탁신 지지파 농민들이란 단순한 구성원만 가진 집단도 아니었다.
2010년 3월 14일(일) 정오, 관공서 거리 근처의 "판파다리"에 집결한 레드셔츠 지도부는 "24시간 이내에 국회를해산하라"고 요구하면서 평화적인 집회에 돌입했다. 이후 정부청사 점거 등을 하지 않는 대신, 비록 태국 전통적 관습에서 일종의 출정식에 해당하는 성격을 지녔긴 했지만, 혈액투척 시위를 하여 다소간 혐오감까지 불러일으키면서, 일반적 예측대로 역시 이 시위가 고립적 성격을 지닐 것으로 관측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추산 최대 10여만명에 달했던 이 시위대의 저력은, 집회 7일째인 3월 20일(토) 이들이 최초로 차량을 이용한 방콕 시내 가두행진에 나서면서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4일째인 3월 27일(토) 레드셔츠 시위대는 2번째 대규모 시가행진을 개시해, 시위진압을 위해 준비중이던 군병력의 주둔지로 향했다. 결국 군 병력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시위대 사이를 일렬로 통과하여 철수했고, 근처의 이동된 지역에 머물렀다. 태국 정부는 시위대와의 협상에 나섰다.
3월 28일(일) 아피싯 총리등 태국 정부 대표 3인과 짜뚜뽄 뽐빤 등 시위대 지도자 3인이 국회 안에 마련된 협상 테이블에서 토론을 시작했고, TV로 중계된 이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이후 5월 19일 이 시위가 최종적으로 진압될 때까지 여러 차례 협상이 진행됐지만, 아피싯 정부는 적극적인 협상타결의 의지를 보이기보다는 진압명분을 축적하는 데 더 치중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시위 21일째인 4월 3일(토) 시위대는 제3차 가두행진에 나서 방콕 시내 상업중심가를 마비시켰다. 이제 시위대의 거점은 2군데가 되었고, 그 여파는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4월 8일 아피싯 총리는 방콕 인근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4월 9일 정부가 친 레드셔츠 성향의 "피플 TV"를 폐쇄시키자 시위대는 타이콤 위성기지국 진입을 시도하는 등 과격해지면서 진압군과의 최초 충돌이 발생했다.
4월 10일 판파다리의 메인 집회장에 대해 정부측의 대규모 강제진압이 시작됐다. 하지만 저녁 무렵에 발포가 시작되면서, 25명이 사망하고 800명 이상의 부상자만 발생시킨 채 진압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유혈사태 책임 공방과 시위대 중에 테러리스트가 발포했다는 정부측 주장 등 여러 혼란 속에서, 정부는 4월 18일을 기점으로 특수부대 등을 대거 중심가로 이동시키고, 실탄사용 경고도 하기 시작했다.
정부군의 실탄사용 위협으로 시위대는 4월 19일부터는 최후의 격전장인 "라차빠송 사거리"를 중심으로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시위대 지도부는 무기한 점거농성을 선언했고, 친 레드셔츠 성향의 현역 육군소장으로 특수전 전문가인 캇띠야 사왓디폰(Khattiya Sawasdipol: 별명-세댕) 장군이 사수대 지휘관을 자처하고 나서면서, 시위대 보호를 위한 상당한 규모의 바리케이트들이 사방의 주요 진입로에 설치됐다. 이후 북동부와 북부에서는 방콕으로 떠나는 진압병력의 발을 묶기 위한 주민들의 집단행동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4월 22일에는 진압군 병력이 장악하고 있던 금융중심가 실롬에서, 의문의 유탄 공격이 동시다발적으로 가해지면서, 지상철 승객 1명이 사망하고 70명 이상이 부상했다. 긴장이 고조되면서 태국 정부가 4월 26일(월) 아침을 강제진압의 최종 마감시한으로 잡고 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지만, 결국 그 시한은 넘고 말았다.
4월 26일, 푸미폰 국왕은 입원 중인 병원에서 신임판사들을 접견하면서 "정직하게 일하라. 정직하게 일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발언했고, 이 발언은 TV로도 중계됐다. 또한 "국제공항 점거농성 테러"를 저질렀던 "옐로우셔츠"(PAD) 대표자들도 기자회견을 열고, "무력진압을 지지한다"며 정부군에 힘을 실어줬다. 또한 이 무렵부터 공항점거 농성으로 나빠진 "노란색" 이미지를 대신하여, "멀티컬러셔츠"라는 새로운 형태로 변신한 관변 시위대도 활동을 시작했다. 4월 27일 정부의 "비상사태 대책본부"(CRES)는 야당과 시위대 지도자들이 포함된 도표를 제시하며, 군주제 전복음모가 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이제 상당한 유혈사태를 동반할 강제진압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4월 30일 "국제위기그룹"(ICG)은 태국시위가 무력진압될 경우 내전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발표했다. 5월 4일 아피싯 총리는 "국가화합 로드맵 5개항"을 발표하고, 11월 14일 조기총선안을 제시했다. 시위대도 이 제안을 환영했지만, 확실한 실천의지 보장을 위해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한 총선실시 일정 제시를 요구했고, 5월 10일에는 "4월 10일 유혈사태" 책임에 대해 수텝 트억수반(Suthep Thaugsuban) 안보담당 부총리가 경찰에 출두하는 순간 시위대도 해산할 것이라 발표했다. 이 날 집회장 인근의 군병력들에 대해 의문의 수류탄 공격과 총격이 가해져 사망자도 발생했다. 5월 12일 아피싯 총리는 시위대에 대해 최후통첩을 하고 진압을 시사했다.
5월 13일 태국 정부는 조기총선안 철회를 발표하고, 가로 및 세로가 각각 약 2 km에 달하는 집회구역에 대해, 군대로 포위하는 배치를 시작했다. 저녘 8시경 집회구역 남쪽 바리케이트 부근에서 외신기자들과 회견중이던 세댕 장군이 저격을 당했고, 그는 사경을 헤매다 5월 17일에 사망했다. 세댕 장군이 저격당한 5월 13일 밤부터 시위대는 정부군과 충돌했고, 이후 꼬박 일주일간 정부군은 저격수를 동원한 "인간사냥"에 나섰고, 집회구역을 사수하려는 시위대는 저격을 피하기 위해, 사망한 세댕 장군의 조언으로 비축해두었던 고무 타이어들을 끊임없이 태워, 타이어에서 발생하는 검은 연기를 저격을 막는 방패로 삼아 죽음의 집회장 사수 투쟁을 벌였다.
레드셔츠 시위대는 이제 더 이상 "탁신 지지자"라는 좁은 범주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농민들뿐만 아니라 도시 서민층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신봉자들까지 가세한 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가치를 위해 행동하고 있는지 명료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점을, 여러 인터뷰와 행동들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들은 정부군의 인간사냥 작전에서 5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추가로 총격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총기를 집어들지 않고 새총을 무기삼아 집회구역 사수를 위해 안간 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탁신이란 촉매제를 통해 모여든 레드셔츠 시위대는, 시위 기간 중 탁신이라는 개인을 넘어서며, 지구상에서 가장 길고도 처절한 비폭력 민주화 시민항쟁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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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REUTERS/Adrees Latif) 정부군 저격수들의 인간사냥에서 피격 당한 동료를 시위대가 호송하고 있다. |
최후의 협상이 결렬되자, 5월 19일 장갑차를 앞세운 정부군은 최종적인 강제진압을 실시했다. 더 이상의 희생자 발생을 피하기 위해 레드셔츠 지도부는 투항했고, 대다수 시위대도 정부가 제공한 버스로 귀향했다. 하지만 극소수 과격파는 잔류하여 방콕의 빌딩 30여곳에 불을 질러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태국 정부는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시행하면서, 과격파들은 제압하기 위해 매우 살상적인 작전을 며칠간 더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시위대 지도부는 해산 당일 모두 경찰에 투항했다.
D-2일(3.12)부터 시작하여 총 69일에 걸친 레드셔츠 항쟁은 비록 강제진압으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태국사회가 이제 과거로 원상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모습들을 통해 이 사건이 끝이 아닐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4.2. 항쟁의 후폭풍
레드셔츠 시위대를 유혈을 동반한 무력으로 진압한 아피싯 총리의 태국 정부는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지속했다. 그리고 400명이 넘는 사람들을 특별한 재판절차 없이 구금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공안정국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친 레드셔츠 성향의 여러 방송국들과 언론들을 폐쇄됐고, 인터넷에 대한 검열도 강화시켜나갔다. "국경없는 기자회"의 평가에 따르면, 태국의 언론자유도는 2004년 세계 65위 수준에서 시위기간 중 나온 발표에서 이미 세계 135위로 떨어졌고, 최근 들어 더욱 악화되고 있다.
태국 정부는 한편으로 "국가화합 로드맵"을 실행하면서 그에 대한 홍보도 강화하고 있지만, 인구의 절반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레드셔츠 세력은 이 화합계획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상태이다. 2010년 7월 6일 태국 정부는 기한이 만료된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다시금 3개월 연장했고(일부지역 해제), 새로운 총선에 대한 어떠한 확정적 발표도 하지 않고 있다. 태국은 종래에 결코 보지 못했던 수준의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 하루 하루를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다시금 태풍 전야의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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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게시물 소개]
* 태국의 최근 정치에 관해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얻고자 한다면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발표한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태국의 '왕실모독 처벌법'을 무시하고 각종 중요한 자료들을 모두 소개하고 있는 이 논문은 이제까지 태국에 관해 나온 글이나 책 중에서 어떤 자료도 필적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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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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