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태국 군사쿠테타 (제4편)
2006 Thai coup d'état
제3부 : 국내외의 반응
1. 국내의 반응
이 쿠테타는 사전에 2년 정도의 반 탁신 정서가 고조되는 기간을 가진 후 진행된 것이다. 특히 반 탁신 정서는 방콕에서 강했다. 심지어는 "2005-2006년 태국 정치소요" 시기에는 탁신에 대한 오랜 지지층인 농촌주민들까지도 불만이 증가됐다고 보고되기도 했다.(주135)
쿠테타를 지지하는 대중 여론에 관한 내용이 광범위하게 방송되고 출판되었지만, 언론을 장악한 군사정권은 쿠테타에 비판적인 여론을 제한시켰다. 또한 시위와 집회를 금지했고, 일부 각료들을 구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 탁신 및 반 탁신 세력 양쪽 모두에서 시위도 발생했고, 이들은 정치적 교착상태를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쿠테타를 승인하여 군사정권이 국왕령을 자신들의 적법성의 근거로 사용하면서 시위는 금지되었다.
(주135)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Thai coup uproots a thin democracy", 2006-9-21. |
1.1. "타이락타이 당" 및 그 지지자들의 반응
탁신 친나왓 전 총리 및 "타이락타이 당"(TRT)의 주요 지도자들이 런던으로 망명하고, 일부 지도부가 구속상태로 들어가자,(주136)(주137) TRT의 저항은 미미했다. 여러 전직 당료들은 자신들의 정당이 해산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컨깬(Khon Kaen) 도 출신의 전직 국회의원 빠짝 깨우까한(Prajak Kaewklaharn)은 "지도자와 당직자가 없다면 우리 당이 지속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우돈타니(Udon Thani) 출신으로 TRT 소속인 전직 국회의원 티라차이 샌깨우(Thirachai Saenkaew)는 군사정권에 대해 탁신 전 총리가 다음 총선에 나설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티라차이는 TRT 지지자들이 정치개혁이 이뤄진 이후 탁신이 정계로 복귀하길 원한다고 말했다.(주138) 그는 자신의 지역구 유권자들은 다음 선거에서도 여전히 탁신 및 그의 정당에 투표할 것이라 말했다. 그는 "정치적 상황이 정상화되면, 민주적 통치가 국민들의 목소리에 부합해서 진전되야만 할 것"이라 말했다.(주139)
TRT의 핵심 인사인 수찻 딴쩨른(Suchart Tancharoen, สุชาติ ตันเจริญ) 계파로, 전직 사콘나콘(Sakon Nakhon) 도 국회의원이었던 찰렘차이 울란꾼(Chalermchai Ulankul)은 자파 소속 인사들이 2006년 선거에는 나서지 않겠지만, 1년 뒤의 선거에는 나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TRT가 해산되지 않는 한 다른 당으로 이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아직까지 TRT에 계속 남을 사람들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주137)
쿠테타가 발발하고 약 2주가 지나자 TRT 부총재인 손타야 끈쁨(Sonthaya Kuenpluem)이 20명의 자파 국회의원을 이끌고 탈당했다. 또다른 부총재인 솜삭 텝수틴(Somsak Thepsuthin)도 80명 정도의 의원으로 구성된 자신의 완남욤 계파(Wan Nam Yom faction)를 이끌고 탈당계를 제출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군부의 집행체인 "입헌군주제 하의 민주개혁평의회"(CDR)이 해산된 정당의 당직자들에 대해 5년간 정치활동을 금지한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에 이뤄진 것이다. 당시 TRT는 조사를 받고 있었고, 2006년 4월 선거에서 군소정당을 매수한 혐의로 해산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주140) 10월 2일(화)에는 실각한 탁신 총리가 부총리였던 솜낏 짜뚜시삐딱(Somkid Jatusipitak)과 함께 TRT를 탈당했다.(주141)(주142)
정치적 조직을 갖고 있지 않던 풀뿌리로부터의 반응은 침묵에 휩싸였다. 탁신의 대중주의적 정책에 혜택을 입었던 한 여성은 "탁신 총리가 내 딸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는 우리가 필요한 식량을 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쫒겨났으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것"이라 말했다.(주143)
(주136) The Nation, Where are they?.
(주137) The Nation, 2006-9-23, Stunned Thaksin followers mull options.
(주138) Thaksin should be allowed to contest election: Thai Rak Thai member, 2006-9-30.
(주139) The Nation, TRT plans poll to test Thaksin's popularity, 1 October 2006-10-1.
(주140) The Nation, Sonthaya and Chonburi faction resign from TRT, 2006-10-2.
(주141) The Nation, Thaksin resigns from Thai Rak Thai, 2006-10-2.
(주142) The Nation, Somkid resigns from Thai Rak Thai Party, 2006-10-2.
(주143) The Washington Post, Thai Coup Highlights Struggles Over Democracy, 2006-9-24. |
1.2. 대중적 지지
2006년 9월 20일(수) "수완두싯 대학"(Suan Dusit Rajabhat University, มหาวิทยาลัยราชภัฏสวนดุสิต)은 2,019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84%의 사람들이 쿠테타를 지지한다고 대답했고, 75%의 사람들이 "정치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라 대답했다. 그리고 정치적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 대답한 사람들은 5%밖에 되지 않았다.(주144)(주145) 하지만 이러한 조사결과는 7월달에 조사된 전국적인 여론조사와는 차이가 많은 것이었다. 당시 조사에서는 취소된 10월 총선에서 탁신의 정당에 투표할 예정이라는 사람들이 49%에 달했다.(주146) 군사정권은 언론에 대해, 9월 21일(목)을 기점으로 여론조사를 포함하여 쿠테타에 반하는 여론의 공표를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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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월 24일 국왕을 상징하는 색깔인 노란셔츠를 입은 방콕 보수층 시민들이 쿠테타 출동 병력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자, 한 군인이 질서유지를 당부하고 있다. |
방콕에 진입한 병사들은 시민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쿠테타에 가담한 한 군인은 비록 그것이 민주적인 방식은 아니란 점은 인정하면서도 "나는 무언가를 도모하여 국민들의 목숨을 빼앗았을지도 모를 탁신 친나왓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참여했다고 말해주었다. 만일 무언가 발생한다면 장교들은 혼돈을 방지해야만 한다. 더욱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장교는 또한 "우리는 우리식 민주주의를 갖고 있다. 우리는 모두 국왕폐하와 국민들에 복종하고 있으며, 여전히 군주제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다. 군대는 국가와 종교, 국왕을 수호할 의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주147)
"라차몽콘 공과대학"(Rajamangala University of Technology Phra Nakhon, มหาวิทยาลัยเทคโนโลยีราชมงคลพระนคร) 강사와 학생들이 육군본부 앞에서 "쭐라롱꼰 대학"과 "탐마삿 대학" 구성원들이 쿠테타에 반대하지 말라고 촉구하면서 잠시 시위를 하기도 했다.(주148) "쭐라롱꼰 대학"과 "탐마삿 대학"에서 온 여러 학생들도 쿠테타를 지지했다.(주149)
32개 시민사회단체와 6개 대학, 169개 NGO들로 구성된 "대중 민주주의 운동"(Campaign for Popular Democracy) 역시, 끄라이삭 춘하완(Kraisak Choonhavan, ไกรศักดิ์ ชุณหะวัณ) 전 상원의원 같은 몇몇 정치인들을 뒤따라 쿠테타 지지 시위에 나섰다. 1991년 쿠테타로 실각한 찻차이 춘하완(Chatichai Choonhavan) 전 총리의 아들이기도 한 끄라이삭은, "이것은 내가 등을 돌릴 수 없는 첫번째 쿠테타"라고 말했다.(주150)(주151)(주152) 쿠테타를 지지하는 시위는 뉴욕의 UN 본부 앞에서 벌어지기도 했다.(주153)
(주144) Suan Dusit's publication of poll on public support.
(주145) Bangkok Post, English publication about the poll.
(주146) July 2006 election poll results.
(주147) The Nation, Soldiers heartened by warm public response, 2006-9-22.
(주148) The Nation, Nationalmultimedia.com, Phra Nakhon university rally in support of coup makers.
(주149) Inter Press Service News Agency, Thaksin Removed in Silken Coup, 2006-9-20.
(주150) Interview in The Age, Melbourne, 2006-9-23.
(주151) The Nation, Military has until October 1', 2006-9-25.
(주152) National Democratic Institute, NDI Programs.
(주153) Short news item about Thai people supporting the coup from CNN. |
1.3. 공개적인 반대의견
추안 릭파이(Chuan Leekpai) 전 총리는 이 쿠테타에 대해, "정치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 쿠테타도 지지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난 5년간 탁신 행정부가 군부로 하여금 쿠테타를 기도하게 만들 몇몇 환경을 조성했다. 따라서 국내의 정치위기는 모두 탁신이 만든 것"이라 말했다.(주154)
태국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지식인 중 한사람이었던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전 총리는 <1997년 헌법> 초안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1991년 쿠테타 세력이 임명한 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적 견해를 제시했다.(주155)
1992년 이래로 우리가 네 번의 총선을 치뤘다는 점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점, 그리고 4년 임기를 모두 채운 정부를 가지게 됐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1992년 이래로 군대는 병영으로 돌아갔고, 몇달 전만 해도 쿠테타 가능성에 대한 사색은 고려되지 않았다. 군대, 특히 육군은 병영으로 돌아가 진정한 프로페셔날한 군인들이 되었었다. [과거 내가 총리로 재직할 당시] 일어났던 일은 극도로 불행한 가두의 유혈사태로 끝났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새로운 민간정부가 출현하기를 바라며, 그 정부가 현행 헌법을 포함하여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길 바란다.(주156) |
하지만 아난 총리는 후에 "하나의 쿠테타는 태국적인 맥락에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하고, "지난 5년간 탁신과 그의 정부는 너무 강했다. 그들은 정부와 군대의 특정 부분, 그리고 국회에서 자신들의 지분을 너무 강하게 응축했다. 따라서 나는 보다 불확실한 상황으로 생각했다"고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발언을 한계지웠다.(주157)
파숙 퐁파이찟(Pasuk Pongpaijitr, ผาสุก พงษ์ไพจิตร), 차이왓 사타아난(Chaiwat Satha-anand), 짜이 응파꼰(Giles Ji Ungpakorn) 같은 여타 저명한 학자들 역시 이 쿠테타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냈다.
"민주당"의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당수는 모든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활동이 금지되기 직전인 쿠테타 초기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는 어떠한 초 헌법적 변화도 지지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이미 발생했다. 태국은 진보해왔고, 이제 쿠테타 지도자들이 전진적인 방향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은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국민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스스로 약속한 개혁조치들을 이행하는 것 뿐이다. 그 점을 몸소 보여주어야만 한다. 나는 모든 제한조치들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해제되길 바란다. 새로운 헌법을 작성할 필요는 없으며, 필요할 경우 1997년 헌법을 수정하면 되는 것이다. 1년이나 걸릴 이유가 없다. 6개월이면 좋다고 생각한다.(주158) |

(사진) "아시아인권위원회" 회원들을 주축으로 9월 29일 주한 태국대사관 앞에서 쿠테타 규탄시위가 있었다.
추완 릭파이(Chuan Leekpai) 전 총리나 꼰 짜띠꽈닛(Korn Chatikavanij, กรณ์ จาติกวณิช) 같은 "민주당" 소속의 또다른 지도자들 역시 이 쿠테타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들은 탁신 전 총리에 대해서는 비난했다.(주159)(주160)
몇몇 학생단체들 역시 이 쿠테타에 대한 반대를 발표했다. 그리고 반대 시위와 저항을 조직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대학 연합 조직이 반대성명을 발표한 사례는 없었다.
쿠테타와 군사정권에 대해 반대하는 규모있는 대중집회에 관한 보도가 종종 우발적으로 보도되기도 했지만, CDR이 부과한 검열 때문에 자유로운 발언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군사정권은 5인 이상의 집회를 금지함으로써, 쿠테타를 반대하는 국내의 시위는 분산이 되면서 발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쿠테타 시위는 뉴욕과 서울의 태국대사관 앞에서는 발생했다.(주161)(주162)
(주154) Fox News: Thai Military Leader Pledges Elections by 2007 Day After Coup, 2006-9-20.
(주155) Suchart Sriyaranya, Leading Thai Intellectuals :Role and Influence in the Public Sphere of Bangkok, Universität Bielefeld: Forschungsschwerpunkt Entwicklungssoziologie Working Paper No. 329, 2000.
(주156) The Far Eastern Economic Review, Interview with former Prime Minister Anand Panyarachun on the coup, 2006-9-20.
(주157) The Nation, Our coup is different: Anand, 2006-9-29.
(주158) The Nation, Abhisit criticises, then politics banned, 2006-9-21.
(주159) Lateline, Tony Jones speaks with Korn Chatikavanij, 2006-9-20.
(주160) CNN, Coup chief cites intense conflicts, 2006-9-19.
(주161) New York City Network for the Defence of the People's Constitution.
(주162) 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Protests against coup in Korea & Thailand. |
1.4. 9월20일 민주기념탐 앞 시위

(사진) 9월 20일 민주기념탑 앞에서 단식투쟁 중인 타위 까이꿉의 체포 직전 모습.
사회운동가 찰랏 워라찻(Chalard Worachat)과 전직 국회의원 타위 까이꿉(Thawee Kraikup)은 쿠테타 발생 다음날 민주기념탑 앞에서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타위 씨는 "민주주의의 파괴자에 반대하는 단식투쟁"이라고 적은 피켓을 들었다. 하지만 곧 군병력이 당도했고, 12시 30분경 찰랏 씨를 체포했다.(주163) 타위 씨 역시 시위 중단을 거절하다가 그보다 3시간 뒤에 체포됐다. 이후 그들의 신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1.5. 9월 22일 시암 센터 시위
2006년 9월 22일(금) 밤, 쇼핑몰인 "시암센터"(Siam Center) 앞에서 벌어진 대중적인 쿠테타 반대 시위에는 20명에서 100명 사이의 사람들이 모였다.(주164)(주165)(주166)(주167)(주168)(주169) 체포된 사람들은 없었지만, 경찰이 비디오로 시위 참가자들을 촬영했고, 시위대가 계엄법을 위반했는지 조사할 것임을 알렸다. 경찰이나 군사정권이 나중에 녹화된 시위참가자들을 체포했는지 여부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주112) 이들 시위대는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검은 옷을 입었다. 시위에 참가한 짜이 응파꼰 교수는 "우리는 상당수의 태국인들이 너무 겁을 먹어서 침묵하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 시위는 태국의 TV에 보도되지 않았다.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지는 보도를 통해, 첫번째 시위자인 한 여학생이 성명서를 낭독하자 무장 경찰이 군중 사이로 밀고들어가 그녀를 붙잡았다고 전했다. 한 경찰관은 그녀의 복부에 총을 들이대고 "함께 가자"고 말했다. 시위대는 그녀를 지키려 했지만, 이후 그녀의 행방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다.(주170)
(주164) Associated Press, Protesters Gather to Denounce Thai Coup, AP claims over 100 protesters.
(주165) "Democracy", Wordpress.com, (Thai language blog), Claims 30 protesters and over 200 observers.
(주166) The Bangkok Post, Rally draws 20 anti-coup protesters, Claims 20 protesters.
(주167) The Nation, Public stages its first protest, Claims nearly 100 protesters, 2006-9-22.
(주168) The Nation, Ten academic protest against coup, Claims 10 protesters, 2006-9-22.
(주169) CNN's states more than 100 protesters, Mybangkokpost.com.
(주170) The Independent, Thai students defy protest ban to demand the return of democracy, 2006-9-23. |
1.6. 9월 25일 탐마삿 대학의 시위
2번째로 열린 공개적인 쿠테타 반대 시위는 9월 25일(월)에 발생했고, 50-60명 규모의 시위대에 200명 정도의 감시자들이 있었다. 이 시위는 "탐마삿 대학"(Thammasat University)에서 오후 5시에 열렸다. 이 시위에는 <우리는 어찌하여 쿠테타에 저항해야 하는가>란 주제의 정치적 토론회 순서도 포함됐고, 탐마삿 대학 내의 학생조직들인 "덤댕"(Dome Daeng), "자유를 위한 쭐라롱꼰 대학 학생들"(Chula Students for Liberty), 그리고 마히돈 대학(Mahidol University), 람캄행 대학(Ramkhamhaeng University), "까세삿 대학"(Kasetsart University), "몽꿋국왕 공과대학"(King Mongkut'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온 학생들도 참여했다.
탐마삿 대학의 학생기자인 아룬와나 사닛까와티(Arunwana Sanitkawathee)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단순히 탁신 아니면 탱크라는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주171) 한시간 정도 진행된 이 시위에서는 군사정권 지도부인 "입헌군주제 하의 민주개혁평의회"(Democratic Reform under the Constitutional Monarchy: CDRM)를 풍자한 "미치고 터무니없는 군사위원회"(Council of Demented and Ridiculous Military)란 현수막이 내걸리기도 했다. 이 시위 현장에 정복 경찰관은 배치되지 않았지만, 몇몇 정보요원들이 나타나 이 행사를 비디오로 촬영했다.(주172)(주173)
1.7. 이어지는 시위들
9월 27일에는 "쭐라롱꼰 대학"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주174) 9월 28일에는 치앙마이(Chiang Mai)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이 시위에서는 수십명의 학생들과 노조 대표들이 군사령부 앞에서 집회를 했고, 군사정권이 공표한 <잠정 헌법>을 불태웠다.(주175) 10월 6일에는 "탐마삿 대학"에서 집회가 있었고, 10월 14일에는 민주기념탑 앞에 수백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다.(주176)
1.8. 2006년 12월 10일 민주기념탑
2006년 12월 10일 제헌절을 맞이하여, 2천명 정도의 시위대가 민주기념탑 앞에서 검은옷을 입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1997년 헌법>의 즉각적인 복원과 새로운 총선실시를 요구했다. 이 시위에는 웽 또찌라깐(Weng Tojirakarn), 산 하티랏(Sant Hathirat), 그리고 전직 상원의원 빠텝 웅송탐 하타(Prateep Ungsongtham-Hata) 등이 참여했다. 당국은 이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방콕으로 가는 주요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했다. 41명으로 구성된 한 시위대는 경찰에 가로막힌 후 귀가하도록 "장려"받기도 했다. 또한 "탐마삿 대학"에서도 쿠테타와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소규모 시위가 있었다.(주177)(주178)
1.9. 폭력시위
2006년 9월 20일(토) "[CDR이] 나라를 망친다" 및 "목숨을 걸리라"라고 스프레이로 구호를 적은 한대의 택시가 "로얄플라자"(Royal Plaza) 앞에 서있던 탱크에 의도적으로 달려들어 충돌했다. 운전기사인 누암텅 빠이완(Nuamthong Praiwan)은 심하게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근처의 경찰서로 이송됐다. 그는 후에 병실 침상에서 행한 인터뷰를 통해, 나라를 망치는 군사정권에 항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주179)(주180) 나중에 그는 한 구름다리에서 강보에 덮여 매달린 채로 발견됐다. 관계 당국은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발표했다.(주181)
1.10. 청 원
"윈스콘신 대학"(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의 교수 통차이 위니차꾼(Thongchai Winichakul)이 주도한 온라인 청원운동이 "페티션 온라인"(PetitionOnline)에 개설되어 군사정부가 시위대를 구속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이 청원운동에는 여러 저명인사들도 서명을 하여, "탐마삿 대학" 소속의 까시안 떼자삐라(Kasian Tejapira), "태국개발연구원"(TDRI)의 위럿 나 라농(Viroj Na Ranong), 영국 "리즈 대학"(University of Leeds) 소속의 던칸 맥카고(Duncan McCargo) 등이 참가했다.(주182)
1.11. 언론 및 매체
방콕의 영자지 <네이션>(The Nation) 지는 한 논설을 통해 쿠테타를 지지했다. 이 논설은 "탁신 및 그 동조세력은 투표함 혹은 대중적 시위를 통해 제거됐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쿠테타는 "필요악"이었다고 말했다.(주183)
탁신 행정부 시절 검열을 받기도 했던 <파 디으 깐>(Fah Diew Kan) 잡지의 편집인 타나폰 에이사꾼(Thanaphol Eiwsakul)은 대중들에 대해, <1997년 헌법> 제65조에 규정된 정항의 권리를 행사하여 쿠테타에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9월 21일(목)에 시위를 주최하겠다고 공언했다.(주163)
"대중매체 개혁운동"(Campaign for Popular Media Reform)은 군부가 미디어 단지에 군인들을 배치하여 언론검열을 실시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우리의 입장은 군부는 권리가 없기 때문에, 언론사 폐쇄조치를 내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심지어 지방의 군소 라디오 방송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라 말했다.(주184)
"태국 언론인협회"와 "방송언론인 협회"가 9월 25일 발표한 성명서는 쿠테타를 비난하거나 표현의 자유 침해에 대해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들은 조속한 시일 안에 민간정부로 권력을 이양하라고 촉구하고, 과도정부가 자유롭게 국가를 통치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잠정적으로 공표할 헌법이 <1997년 헌법>에 보장된 권리들과 유사한 수준을 보장하라고 했고, <1997년 헌법> 제정 당시와 마찬가지로 대중들이 헌법안 초안 작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라고 촉구했다.(주185)
1.12. 인권단체
"국가인권위원회"(National Human Rights Commission: NHRC) 의장 사네 짜마릭(Saneh Chamarik, เสน่ห์ จามริก)은 한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쿠테타가 민주주의의] 진보냐 후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문제해결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
이러한 발언에 대해, "쿠테타 반대 9월 19일 네트워크"의 조직자였던 수윗 렛까이멧(Suwit Lertkraimethi)은, "그의 임무는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인권침해를 승인해주는 입장임을 보여줬다"고 지적하면서, 사네 의장의 사임을 촉구했다.(주186)
한편 홍콩에 본부를 둔 "아시아인권위원회"(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AHRC)는 쿠테타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시아인권위원회"는 이러한 권력찬탈에 비애와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비록 어려움은 있지만 태국에서 의회 민주주의가 성숙되며 정착되려는 단계에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다. |
"아시아인권위원회"(AHRC)는 군부가 조속히 민간정부로 정권을 이양토록 촉구하고, 유엔총회에 대해서는 이 쿠테타를 규탄해주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AHRC는 군사정권에 대해 태국 계엄법에서 규정한 임의구속 시한인 7일을 넘기면서 특별한 혐의도 없이 수감중인 4명의 이전 내각 각료들을 석방하라고 촉구했다.(주187) AHRC는 10월달에 쿠테타의 진상을 알리는 웹페이지를 개설했다.(주188)
한편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 감시기구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 HRW) 역시 쿠테타에 비판적이었다. HRW의 지부장인 브래드 아담스(Brad Adam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탁신의 통치가 태국의 인권을 심각하게 잠식한 바 있다. 하지만 헌법에 규정된 권리들을 보류시킨 것은 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태국은 법치주의와 국민들 스스로 선택한 지도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주189) |
"태국 시민자유연맹"(Thailand Union for Civil Liberty) 또한 쿠테타에 비판적이었다. 이 단체는 공식적인 성명을 통해, 이번 쿠테타는 민주주의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며 심각한 인권침해를 초래할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군사정권에 대해 인권을 존중할 것을 촉구하고, 헌법제정에 민간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최소한 <1997년 헌법>과 동일한 수준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조속한 총선실시도 요구했다.(주190)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군사정권이 인권을 존중하라고 촉구했다. 런던에 본부를 둔 이 기구는 성명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를 평화적으로 실천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법처리되어선 안된다. [군사정부는] 국제 인권법률에 대한 태국의 의무를 준수해야 할 것이다.(주191) |
2006년 9월 25일(월) 학자 및 인권운동가 20명이 군사정권에 대해 기본권을 유보시킨 것을 취소토록 하는 청원을 제기했다. 이들은 또한 모든 공공부문에서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촉구했다.(주192)
(주186) The Nation, Activists to hold anti-coup gathering, 2006-9-22.
(주187) The Nation, Rights group calls for release of four ex-ministers, 30 September 2006-9-30.
(주188) Thailand Military Coup 2006: Fiction vs. Fact .
(주189) The Bangkok Post, Human rights groups weigh in against coup, 2006-9-20.
(주190) Formal statement from the Association for People's Rights (สมาคมสิทธิเสรีภาพของประชาชน).
(주191) The Nation, Rights protections must be upheld by Thai junta: Amnesty, 2006-9-22.
(주192) The Nation, CDRM called on to scrap decrees that inhibit rights, 2006-9-25. |
1.13. 남부 접경 지역들
태국 남부의 무슬림들은 전반적으로 탁신 친나왓 총리를 경멸했다. 이들은 육군사령관인 동시에 군사정권 수반인 손티 분냐랏낀(Sonthi Boonyaratglin)(역주)장군이 남부 분리주의 반군과 평화적 교섭을 해주길 기대했다. 손티 장군은 쿠테타를 실행하기 전부터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에 대해 협상을 시사한 바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9월 16일 이전까지 육군은 누구와 협상에 나설 것인지 확정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주193)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남부지방의 폭력은 쿠테타 이틀 후부터 다시 재개되면서, 얄라(Yala) 도에 거주하던 2명의 주민들이 총격으로 사망했다. 9월 23일에는 그날 오후 와치라롱꼰(Vajiralongkorn) 왕세자가 통과할 예정이던 도로에서, 정차해있던 버스에서 폭탄이 폭발하면서 4명의 경찰관이 부상했다. 9월 25일에는 30명 정도의 무장괴한들이 2곳의 경찰서와 1곳의 군 주둔지를 공격하는 등 일련의 공격을 펼쳤다.(주194)(주195)(주196)(주197)
1.14. 태국-미얀마 국경의 카렌족 난민들
미얀마 반정부 성향의 "카렌민족연맹"(Karen Nation Union)의 만샤(Mahn Sha) 사무총장은 <이라왓디>(The Irrawaddy) 지와의 인터뷰에서, 과도정부의 총리로 임명된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장군이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국가를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할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버어마에서 피난온 많은 난민들은 수라윳 총리가 1998년 추완 릭파이(Chuan Leekpai) 총리 정부 당시 육군사령관으로 재직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수라윳 장군은 버어마의 정쟁과 처형을 피해 태국으로 들어온 난민들을 강제송환하지 않는 정책을 펼친 바 있다.
만샤 사무총장은 "수라윳 총리는 민주적 단체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샤 사무총장은 "수라윳 총리는 버어마 민주주의 진영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군 내에서 통합적이고 전문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버어마 난민들에 동정적인 휼륭한 군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수라윳 총리가 버어마 출신 난민들에 대해 사업적 관점에 입각한 "편향된 견해"를 갖지 않길 바란다는 점도 피력했다.(주198)
2. 국제적 반응
2.1. 외교적 반응
태국 쿠테타에 대한 해외의 반응들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여러 기구들과 국가들이 이 상황에 우려를 표명하고 평화적 해법을 찾기를 바랬다.(주199)(주200) 일부 국가들은 태국을 방문한 자국민들에 대해 안전상의 경고를 발령하기도 했다.(주201)(주202)(주203) 각국 정부들이 이 쿠테타와 관련해 발표한 입장들은 격한 반응에서부터 불간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이었다.(주204)(주205)(주206)
미국은 "태국이든 그밖의 지역이든간에 쿠테타는 정당화될 수 없으며, 미국은 이러한 행동에 대해 극도로 실망했다"고 말했다.(주207) 이후 미국은 군사정권 지도자들이 발표한 1년 뒤 총선거 일정이 보다 앞당겨지길 바란다는 점을 밝혔다.(주208) 미국은 인도주의적 원조제공은 지속하면서도, 2,400만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는 삭감시켰다.(주209)
코피 아난(Kofi Annan) 유엔 사무총장은 "상세한 사항은 알지 못하지만 이것이 그다지 권장할만한 일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예를 들어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의 경우에도 총구를 들이대고 권력을 잡은 이들을 지지하진 않는다"고도 덧붙였다.(주210)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은 후에 이 쿠테타가 인권헌장을 위배했다고 지적하고, 군사정부에 대해 "인권존중과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고, 국가인권위원회를 재구성하라"고 촉구했다.(주211)
[역주] 이하의 두 문단은 <위키피디아 영문판>이 최근 개정되면서 삭제된 부분이지만, 참고로 번역해두었다.
삭제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 의장인 마티 반하넨(Matti Vanhanen) 핀란드 총리는 자신의 "참담한 우려"를 표명한 후, "민주주의적 제도가 무력에 강점당하는 일은 대단히 유감스런 것"이라 첨언했다. 그는 지연되는 일 없이 민주주의로 복귀해야만 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중국은 태국이 "조화롭고 번영하길 바란다"고 한면서, "그것은 태국의 내정"이라고 말했다.
(주199) Khaleej Times Online (2006). Annan, world leaders urge return to democracy in Thailand.
(주200) The Nation, Moscow calls for a return to democracy in Thailand, 2006-9-22.
(주201) "S for S urges Hong Kong residents in Thailand to be careful", Hong Kong Government press release, 2006-9-20.
(주202) "Hong Kong residents reminded about situation in Thailand", Hong Kong Government press release, 2006-9-20.
(주203) Ministry of Foreign Affairs, Republic of China (Taiwan), 外交部提醒近日計畫赴泰國人注意安全.
(주204) The Australian, Thai coup 'assault on democracy': Labor, 2006-9-20.
(주205) Beehive - NZ condemns Thailand coup.
(주206) "Laos monitoring situation in Thailand", Haveeru Daily, 2006-9-20.
(주207) Bangkok Post, "United States: Thai coup 'unjustified'", 2006-9-21.
(주208) ChannelNewAsia.com, "US reviewing aid to Thailand due to coup", 2006-9-22.
(주209) The Nation, US cuts off millions in military aid to Thailand, 2006-9-29.
(주210) People's Daily Online (2006). UN chief discourages military coup in Thailand.
(주211) The Bangkok Post, UN says Thai coup violating human rights, 2006-9-25. |
2.2. 해외 언론들의 반응
여러 해외 출판물들이 태국 쿠테타를 비난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지는 이 쿠테타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단순히 "타이락타이 당"(TRT)의 총선 승리를 막고자 한 목적을 지닌 것이라 지적하고, 지난 10년간의 민주적 발전을 원상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라 말했다. 이 저널은 또한 이 쿠테타에 대해 국제적 비난 여론이 부족한 것으로 인해, 군부 지도자들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어 이웃국가들에서도 권위주의적 경향이 강화될 우려가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주212)
미국의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지는 이 쿠테타를 비난하고, 이전에 민주주의의 선구적 모범이었던 태국이 정치적 목적을 성취할 초헌법적 상황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주213)
3.경제적 여파
3.1. 주식시장

쿠테타로 인해 탁신 친나왓 총리가 실각하자 주식시장은 첫날부터 요동을 치기 시작해 약 2달 후에야 회복했다. 탁신 총리와 관련이 있던 "친코프"(Shin Corp.) 주식은 하락했다. "태국 증권거래소"(SET) 지수는 오후 4시 30분 폐장을 했을 때 692.57로서 9.9~14%가 하락했다. 거래량은 430억 바트(11억 달러) 정도로, 이는 2006년 4월 5일 탁신 총리가 정치소요 종식을 위해 하야하겠다고 밝힌 다음날 510억 바트가 거래된 데 이어 최고치였다. 당시 SET 지수는 3.1%가 하락한 바 있다.
쿠테타 3일째인 9월 21일(목) 개장 직후 수분간 SET 지수는 29.64포인트(4.2%)가 하락하며 7월 21일 이래 최대 폭락을 기록했다.(주214) 하지만 쿠테타가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보이면서 주가는 곧 반등했다. "메릴린치"(Merrill Lynch) 사는 "작금의 투자자들은 탁신 총리가 실각한 상황이 주는 불확실성에 자극을 받아야 한다"면서, 태국 주가에 대해 "무게를 부여"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JPM"이 선도하는 "포린 인스티튜션즈"(Foreign Institutions)는 이날 하루동안 2억 달러 상당의 주식을 순매수했다. 1991년 2월 이전의 태국 쿠테타가 발생했을 당시에도, 주가지수가 첫날에는 2.3% 폭락했다가 이후 2단 동안 24%의 상승행진을 이어간 바 있었다.(주215)
3.2. 환 율
군부가 방콕을 장악하고 탁신 총리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자, 태국 바트화의 가치는 거의 3년만의 최대 하락폭을 보였다. 쿠테타 전날인 9월 18일 미화 1달러 당 37.29바트였던 환율은 37.77바트로 그 가치가 1.3% 하락하면서, 2003년 10월 14일 이래 최대 하락폭을 보였다. 하지만 푸미폰 국왕이 이 위기를 잘 조정할 것이란 기대감에서, 환율은 1.8% 하락한 상태로 조정됐다.(주216)

투자자들이 이 쿠테타가 정치적 교착상태를 해소시킬 것이란 기대감에서 베팅을 하면서, 태국 바트화는 쿠테타 다음날 반등을 했다. 육군사령관 손티 분냐랏낀 장군이 정권을 장악한 후 2007년 10월에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자, 환율 가치는 8개월만에 최대치까지 올라갔다. 오후 2시 30분경 환율은 1달러 당 37.38바트로 1% 가치 상승했다. "홍콩상하이은행"(HSBC)의 환율전략가인 리차드 옛셍아(Richard Yetsenga)는 "이번 사태가 경제에서 정치적 장벽을 제거했으므로 매수기회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쿠테타는 바라는 바만큼이나 조용하게 진행됐다"고 말했다.(주217)
3.3. 교 역
이 쿠테타가 "태국-미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단시간 안에 알 수 없었지만, 미국의 고위급 통상전문 관료는 민주주의가 복원되었을 때 조약이 보장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수전 슈워브(Susan Schwab) 미국 무역대표는 "금년 말에 열리려던 총선이 보류되었기 때문에 공식적 협상 역시 보류된다. 우리는 원래 12월에 협상을 시작하려 했다"고 말했다.(주218)
3.4. 신용도 평가
태국의 국가신용도는 변화되지 않았지만, 신용평가 기관들은 상황의 전개에 따라 신용도를 하향조정할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주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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