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 송규의 장녀 승타원 송영봉
내가 뵌 소태산 대종사
저희 원로원에는 저보다 훌륭한 분이 많이 계시는데 제가 서울과 인연이 깊어서 오늘 이렇게 불러와서 여러분들을 만나려 온 것 같아요. 아는 분 만나려 왔다고 생각하면서 편히 들어주세요. 제가 86세를 먹다보니까 가마타고 시집가는 것부터 비행기 타고 신혼여행을 세계로 가는 시대까지 살고 있으니 우리나라 과도기 시대를 겪으면서 살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기12년 영산 성지에서 출생한 후 원불교 속에서 86년을 살아서 원불교화 되어 세상을 모릅니다. 백발가를 보면 ‘새벽같이 밝던 눈이 간장 눈이 되어 버렸네’ 가 있는데 이제 저도 눈도 어둡고 귀도 어둡습니다. 오늘 설법 잘 생각해서 들으세요.
제가 성지에 때어났을 때는 영산성지는 아주 산골로 쌀밥도 구경도 못하고 동네 한가운데 서면 산과 파란 하늘만 보였다. 그런데 최근에 가보니 밤 세도록 차가 돌아 왕래하여 마치 영산이 명동네거리가 된 것 같다. 그런 변화 속에서 우리는 지내왔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는 어두운 시대에 나셔서 공부안하는 촌락 여성을 일으켜 세워 글을 가르키고 주판을 가르켰다. 주판을 가르키는 것은 예산 속 있게 살아라 는 뜻이다. 당시 시골사람들은 먹을 것이 생기면 술과 떡을 해서 한때에 다 해 먹어버린다. 그리고 나중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 있는 사람들 집으로 품을 팔려 다닌다. 그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살았다.
대종사님은 7세부터 공부를 안하셨다. 그런 어른이 어떻게 세계를 보시고, 또 미래를 보셨는지, 만인들에게 해당하는 법을 만들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감개무량하다. 저희 할머니, 어머니가 일기법을 30계문, 탐진치, 좌선한 것까지 기록하도록 가르켰다. 그리고 매일 저녁에 일기를 체크했다. 그때 쓴 일기책이 6.25때 없어졌지만 성장할 때까지 모은 것이 고리짝으로 가득했다.
원불교는 초창기에 원불교란 이름 내놓지 않고 상조조합이라고 설립했다. 당시 조합 취지문‘혼몽에 있던 우리, 취중에 있던 우리’ 란 것이 생각이 난다. 우리가 진리를 모르고 살면 혼몽 중에 사는 것과 같아 무엇이 복이지 무엇이 죄이니 어째서 고통이 오는 것인지 밝아지는 것인지 부딪히는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 혼몽 중에 있는 사람들을 다 일으켜서 불법연구회를 만들었고 8,15해방 후에 원불교라는 교명을 정식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대종사님은 저희 여성들을 단상에 내놓아 강연 하게 하셨다. 그때 저희 여자들이 강연을 연습하는데 대중 앞에서 한 번도 서보지 못해서 자기도 모르게 치마를 걷어 올리고 옷고름을 손으로 돌리고 앞섶을 뜨는 등 자기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여성 교역자를 양성했다. 지금생각하니 이는 여성 교역자들의 역할을 미리 내다보고 하신 것이었다.
대종사님이 짜 놓으신 교리는 십상을 통해 여러분들도 알 수 있듯이 처음에 하늘보고 의문내신 관청기의상, 부모님이 사는 모습을 복 삼밭재에서 인간관계를 의심하면서 기원하신 삼령기원상, 알고 싶은 것을 해결하기 위한 스승 찾아 고행하신 구사고행상, 그래도 안되니 알고 싶은 것을 못 알며 어떻게 하나 가슴에 적이 되어 시장에 간다고 가서 하루 종일 선진포구 강변에서 입정하신 강변입정상, 그러다가 노루목에서 대각하신 장항대각상, 대각을 얻은 후에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겠다 생각하여 도문을 열었다. 그리고 먼저 8분을 선택했는데 한자리를 남겨놓고 나중에 올 사람이 있다 하면서 기달렸다. 대중들은 올 사람이 누구인가 참 궁금해 했다.
그때 정산종사님은 경상북도 초전에서 살았으며 스승을 찾아서 헤매고 있었다. 당시 경상도에서 도를 찾아 전라도로 간다면 재산 망치는 불우한 가정으로 생각했다. 저희가정이 전라도 올라오니 저희 집이 빨갱이 났다할 만큼 진해에서 비난이 심했다한다. 그런 가운데 정산종사님은 전라도에 올라와 스승 찾아 저기 저기를 돌아다니던 중에 어떤 할머니를 만났다. 그 할머니는 자기 집에 가자고 했는데 그곳이 정읍 화해리였다. 할머니는 당신 집이 가난하지만 정산종사를 너무 좋아해 자기 집에 모시고 방 가운데 포장을 치고 윗목에 할머니가 아랫목에 정산종사를 묵게 했다.
그런 가운데 대종사님은 별을 쳐다보며 때가 되었다며 사람 찾으려 정읍으로 쏟살 같이 오셔서 화해리 둘려보시고 정산종사님이 묵고 계시는 집을 가르키며 바로 저 집이다. 하시면서 제자들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은 초면인데도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 녁에는 형제하자고 하고 대종사님은 이다음에 사람을 보낼 테니 따라 오너라 하시고 떠나셨다. 그때 할머니는 정산종사의 신통을 믿었고 좋아해 정산종사가 떠날까봐 벌벌 하셨다한다. 하지만 정산종사는 대종사님의 부름을 받고 대종사님의 제자를 따라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대종사님의 제자가 되었고 정산종사를 중앙에 앉혔다. 지금 같으면 부단장이다. 당시 원로 8인 선배들이 나이는 20세인데 중앙 자리에 앉히니 거북하고 낮 꼬시럽다 하였지만 이것을 생각하면‘정산종사와 인연이 한생의 일이 아니고 과거생애부터 이루어진 것이니’ 대종사 말씀을 받들게 된 것이다. 정산종사는 조부가 학자이셔 사서삼경을 다 읽고, 모든 원리를 다 알았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모든 조직을 맡길 수 있었다.
우리교리 같이 간단명료하고 중생이 부처되고, 어느 나라에 갔다 뿌려 놓아도 맞도록 교리가 짜여져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맞지 않는 것이 없다. 왜냐면 보통사람이 사는 세계는 집착의 세계이다. 정치인은 정치인 나름대로, 권력을 가지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 재산이 많은 사람은 집착 속에서 살면서 원, 애, 탐착 속에서 허덕이며 산다. 그것을 벗어나야 활발한 세상이 돌아온다. 대종사님 교리는 탐 진 치 모든 것을 용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은 우리를 복아 먹기로 유명하다. 법회를 보면 출석 제일 잘 하는 사람이 순경이다. 단서를 잡기위해서 맨 앞에서 앉아서 법회를 보았다. 법회를 빠지지 않고 출석해 그들에게는 곱상이지만 우리들에는 밉상이었다. 그리고 우리 여자청년들이 문을 열고 자는데 수시로 드나들며 우리를 주시하고 못살게 했다. 그런 세상에서 사시면서 법은 영생을 건질 수 있도록 하나도 구애됨 없이 짜 맞춘 것이 삼학팔조 사은사은이다. 삼학은 나를 다스리고 사은은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대종사님은 미국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우리는 미국을 알지도 못했지만 비행기가 하늘에 날아가면 대종사님 법설은 귀에 안 들어오고 그것을 구경을 하려고 모두 하늘을 쳐다보면 대종사님은 혀를 차면서 당신 설법 속에 천지육지가 다 들어있는데 참 저것들이 언제 철이 들까하면서‘내가 비단옷입고 밤길 간다.’하셨다. 그 말씀이 귀에 쨍쨍하다.
지금은 총부가 이리시로 통합되어 있지만 당시는 이리시와 부일면 사이는 먼 거리었고 중간에는 꽃밭이 있는데 강도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뒤쪽에는 도치재가 있어 일년에 이리시에한 번 갈 정도로 대종사님 슬하에서 살았지 다른 세계를 모르고 살았다. 대종사님은 오직 저희를 키워서 쓸려고 했고 잘 키워낸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큰 복이고 홍복인지 모른다. 그래서 삼학팔조 사은사요가 나를 건지 세계를 건지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한번은 대종사님께서는 일본사람들이 불법연구회를 없애려고 하고 이리경찰서에 불려가서 당하시고 간섭이 심해 한계에 부딪쳐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머니들에게‘내가 너무 피로하니 쉬려가야 겠다.’하면 많이 하셨다. 할머니들은 턱 앞에 앉자 대종사님 따라 가겠다. 해 ‘그래 내가 가면 따라 올수 있나’ 하니 모두 ‘예’하고 대답하였다. 대종사님께서는 열반을 생각했는데 그것을 모르고 따라간다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대종사님이 열반하셨는데 나는 산천이 우는 것 같았다. 비오는 소리도 울는 소리로, 기차 떠나는 것도 우는 소리로 곳곳마다 우는 소리가 귀에 배겨 천지가 반년동안 우는 것 같았다. 나중에 일본인들은 대종사님이 떠났으니 원불교 불법연구회가 없어질 것이다. 생각했다. 그리고 저희 큰 형님들도 큰일났다. 저희들을 보시고 저것들이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염려했지만 우리 굳건히 진리를 지켰다. 원불교가 없어지지 않으니 새눈으로 보고 일본인들은 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정산종사가 부산으로 피신 가tu서 거기에서 기도를 올리고 올라오시는 기차 속에서 해방 됐다.
그 뒤 우리는 전쟁동포들이 와서 구호사업을 했다. 지금 한남동 미국지기 정각사 일본사람 절이 있는데 향나무로 집을 접수해 총부 출장소 간판을 붙이고 팔타원 황은순님이 고아원을 시작 해 나는 양쪽으로 문서를 보면서 있었다. 그때 고아원에 대산상사님이 계실 때 8군에서는 고아들을 주려고 헌옷과 쵸코렛 등 먹을 것을 주었다. 한번은 대산상사님이 시내 볼일 있어 나아갔는데 김구선생이 아무도 데리고 오지 않고 비서1명과 아침 일찍 오셨다. 너무 가난해 대접할 것이 없어 얼룩 어룩한 우유를 차를 대접 받고는 안가시고 하루 종일 굵고 대산종사님을 기달렸다. 해가 서룩하니 대산상님이 오셨다. 그날이 김구선생이 생일날로 당신 과부된 며느리가 있었는데 여성회를 처음 조직해 시아버지 생일잔치하려고 장면하는 것을 눈치를 채고 집을 빠져나와 종일 굵고 대산상사님과 재미났게 이야기 하시고 만나고 가셨다. 그것을 보고 애국자나 종교인이나 간절하고 순결한 마음이 가슴에 닿았는데 그해 김구선생이 저격을 당해 죽어서 많이 울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원불교가 성장해 왔다.
지금 오대양 육대주에 원불교가 다 가 있다. 국내에서 교화가 안 된다고 하지만 세계 밖으로 원불교가 나아가 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은 아니다. 그동안 유럽에 불교가 동양에서 성양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많이 전했지만 일치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종사님의 법 ‘삼학팔조 사은사요’은 모든 것이 일치된다. 그래서 다 통한다.
대종사님께서 원기100년 안에 모인 분들은 회상의 주인이다 하셨다. 여기모인 분들은 대종사님께 직접 배운 사람들로부터 구도로 진실을 들으니 우리와 같다 하셨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복이 많은 사람들이다. 말은 많이 발전하지만 진실을 전하기 쉽지 않다. 복 많아 다 좋지만 이 진리를 연마하고 일원세상의 진리를 큰 서원을 영생을 향으로 나아가니 복중에 복인들이 여러분이다. 더 말할 것이 없이 복중에 복을 받아서 자유인 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복이 많아 이생에서 만났으니 내생도 또 만납시다. 너무 반갑고 감사해요.
영산앞에서 방언하신 영산 방언상, 혈인으로 법인받은 혈인법인상, 봉래산에서 제법하신 봉래제법상, 신룡리로 전법하신 신룡전법상, 계미년에 열반하신 계미열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