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일 - 부르고스에서 온타나스까지(7월 29일, 금)
연선생님,
부르고스 알베르게에서 뜬 눈으로 지새우고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나오니 5시 50분이었습니다.
걷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밤 8시가 되어도 대낮 같이 훤한 부르고스의 시간 때문인지
새벽 3시까지 대성당의 광장의 시끄러운 인파들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걷기에 어느 정도 익어서 힘이 남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어제 밤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물론 많이 걸어서 피곤한 날이면 어떤 상황에서든 단잠을 잘 수 있는데,
어제는 커피도 낮에 아침에 한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잠이 오지 않아 새벽까지 뒤척이다 새벽에 잠깐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그리 피곤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도보여행이 2주가 다 되어 가니 몸이 걷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모양입니다.
부르고스는 대학이 2개나 있을 정도로 큰 도시이고
특히 문화적 경제적으로 이곳 농촌지역의 중심지로
우리나라로 보면 수원 정도 되는 도시 같았습니다.
새벽 어스름인데도 시내의 가로 등불들이 다 켜져 있어서
길 안내 표지가 부실한 데도 길을 찾아 가는 데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산티아고 안내 표지가 너무 드물게 있어서 길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부르고스 도심을 빠져나오는 데만도 3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어렵게 부르고스 도심을 빠져나오니 넓은 평원이 몸과 마음을 반겼습니다.
평원의 평탄한 길을 한참 걷다보니
지도에 나오는 길과는 다르게 매우 구불거렸습니다.
부르고스에서 타르하도스까지 가는 길은 구불거려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니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타르하도스까지 길은 내내 주변 농가에서 퇴비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향기로운 밀짚 냄새를 즐기며 걸었는데 말입니다.
가는 길목에 있는 푸에르 타로메로스에 마침 카페가 열려 있어서
향기 좋은 카페라떼와 빵으로 아침을 먹었습니다.
아침을 먹으니 힘이 솟았습니다.
멀리 메세타 능선을 바라보면서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두 시간도 안 되었는데도 10키로 이상을 걸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다리의 힘은 팔팔했습니다.
그동안 다리가 많이 달련된 모양이었습니다.
다른 운동과 달리 걷기는 시간이 계속될수록
더 힘이 생기고 다리도 강해진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메세타 고원의 넓은 평원을 지나면서는 많이 지쳤습니다.
메세타 고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큰 평원이었습니다.
처음에 지평선이 보이는 큰 평원을 네 활개를 치며 걷는 것은 행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평원이라도 끝이 없이
계속되는 길에는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폭양(曝陽) 속에서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길을,
끝없이 걸어가는 것은 정말 정신의 한계를 느끼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평원은 여전히 평원의 아름다움을 즐겼습니다.
고통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쾌감이었습니다.
정말 죽을 만큼 힘들게 걸으면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제가 다시 한 번 더 산타아고 순례를 하게 된다면,
이 메세타 고원을 다시 걷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꼭 다시 한 번 더 이 고통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걷다보니 평원이 끝나면서 내리막길이 나타났습니다.
지도에 보니 ‘노새를 죽이는 내리막길’이었습니다.
언덕 길 바로 아래쪽에 작고 아담한 마을이 보였습니다.
바로 오르니요스였습니다.
오르니요스는 집이 몇 가구밖에 없는 곳으로 전통적인 순례자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마침 슈퍼가 있어서 과일과 빵 등을 사서 들고
동네 성당 그늘에서 신발 벗고 발 주무르면서 점심을 천천히 먹었습니다.
걷기에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쉴 때에는 신발과 양발을 벗고
다리와 발을 충분히 주물러서 풀어주어야 하며,
최소한 20분 이상 쉬어야 다리의 피로가 풀린다는 것입니다.
오르니요스에서 출발할 때 시간을 보니 12시 30분이었습니다.
오늘 숙박 장소인 온타나스까지는 약 11키로 정도를 더 가야 했습니다.
아마 3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았습니다.
점심을 잘 먹었기 때문에 다시 힘이 솟았습니다.
힘차게 광활한 평원의 능선인 두 번째 메세타 봉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고원도 나무 하나 없는 평원이 가도 가도 끝이 없었습니다.
불볕 더위 속에서 2시간 이상 걷고 있자니 정신이 이상해질 지경이었습니다.
중간에 산볼이라는 곳에 큰 나무가 있어서 20분 정도 쉬었습니다.
다시 세 번째 메세타 평원을 완전히 지칠 때까지 걷고 있으니
갑자기 평원에 움푹 들어간 골짜기가 나타났습니다.
아주 작은 골짜기에 온타나스라는 그림처럼 예쁜 마을이 있었습니다.
온타나스의 알베르게의 카페에는 순례자 메뉴도 있어서
지치고 배고픈 순례자들을 위해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기분 좋은 저녁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하얗게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온타나스의 알베르게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연선생님께서도 이곳에 오시면 정말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오늘 밤에는 이곳에서 포도주나 즐기면서 며칠 쉬어 가는 꿈이라도 꾸려고 합니다.
소진 올림.
첫댓글 사진만 봐도 이국적인 풍경에 답답한 마음이 풀리네요. 오랫동안 여행을 통~~~ 못 떠났더니...푸헤~~~^^
아 저 골목...힘을 얻으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