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군(咸平君 諱 克明) 할아버님 존위전(尊位前)에 삼가 告하나이다
서기(西紀) 2024 갑진년(甲辰年) 스무이튿 날,14代 방손(傍孫) 영서(瑛緖)는 함평이씨종친회(咸平李氏宗親會) 대표(代表)카페 후손들과 함께 찬란한 영산강 문화를 꽃피운 '천년고도' 역사길을 따라 초하(初夏)의 신록(新綠)이 온 산야(山野)를 푸르게 물들이는 이곳 나주시(羅州市) 다시면(多侍面) 백룡산(白龍山)자락 길지(吉地)에 560여(餘) 성상(星霜) 잠들어계신 咸平君 할아버님 할머님유택(幽宅)을 찾아 尊位前에 엎드려 참배(參拜)드리며 삼가 고(告)하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고려 말 창왕(高麗 末 昌王) 1年(1388年) 모평감무(牟平監務)를 지내시고 후에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증직(贈職)이 되신 휘 자보(諱 自寶)할아버님과 여미곽씨(余美郭氏)할머님 사이에 셋째 아드님으로 이곳 나주 회진(羅州 會津)에서 태어나시어 무과(武科)에 입문(入門) 선략장군(宣略將軍) 호분위호군(虎賁衛護軍)으로 크게 활약(活躍)하시면서 명성(名聲)과 선덕(善德)을 쌓아 당시(當時) 명맥(命脈)만 유지(維持)한 채 한미(寒微)하기 그지없던 함이사(咸李史)를 몸소 일으키고 일약(一躍) 명문(名門)으로 승화(昇華) 발전(發展)시킨 위대(偉大)하신 선조(先祖)이십니다.
슬하(膝下)에 2男을 두셨는데 장남(長男)이신 휘 종생(從生)은 벼슬길에 올라 상경(上京)하여 무관(武官)으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1467年 위장(衛將)으로 이시애난(李施愛亂)을 평정(平定)하고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함성군(咸城君)에 봉군(封君)이 되셨으며, 이후에도 수차(數次)의 건주(建州) 여진족(女眞賊) 정벌(征伐)과 각도(各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總管)과 사복장(司僕將) 등(等) 문무관직(文武官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시면서 탁월(卓越)하신 공로(功勞)를 인정(認定)받아 두 계급(階級)이 오른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시고 돌아가신 후(後) “장양(莊襄)”의 시호(諡號)와 함께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 받으셨습니다.
차남(次男)이신 휘 종수(諱 從遂)는 벼슬길에 나간 兄님을 대신(代身)하여 양친(兩親)을 극진(極盡)이 모시면서 향리(鄕里)에서 충좌위부사정(忠佐衛副司正)과 호국목민관(護國牧民官)으로 나라와 백성(百姓)을 위해 헌신(獻身)하시어 돌아가신 後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직(贈職) 받으셨습니다. 이곳 " 蓮花倒水에 萬年香火”의 吉地인 분토동에 부모님의 묘역을 조성하였고, 슬하에는 4男을 두셨는데 아들이름에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넣어 참판공파 자손들에게 큰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할아버님의 공덕(功德)이 두 형제문중(兄弟門中) 후손(後孫)에게도 크게 미치어 그 後孫들이 하나같이 번족(蕃族)하고 줄줄이 문무음관생진(文武蔭官生進)에다 명현(名賢) 유학(儒學) 효자(孝子) 열부(烈夫) 等을 배출(輩出)하여 나라와 사회(社會)에 모본(模本)이 되어오고 있습니다.
양 형제문중(兩 兄弟門中)이 오백수십여년(5百數十餘年)동안 비록 천리(千里)길의 거리를 두고 이어오고 있지만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한 3만여(萬餘) 형제(兄弟)의 돈독(敦篤)한 우애(友愛)는 예나 지금이나 추호(秋毫)도 변(變)함이 없음을 묘하(墓下)에 엄존(儼存)하는 “돈목재(敦睦齋)”의 건실(健實)함을 보고 새삼 실감(實感)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곧 할아버님의 숭고(崇高)하신 가르침에 힘입은 이 문중(門中) 특유(特有)의 충(忠)과 효(孝)를 바탕으로 다져진 남다른 형제애(兄弟愛)의 표상이요 이것이 곧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의 산 증거(證據)라 생각됩니다.
할아버님께서 그 옛날 회진(會津)집 소실(燒失)로 막막(漠漠)한 지경(地境)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초동(草洞)에 벌사정기(伐莎定基)하여 새집짓고 자녀(子女)들 정성(精誠)스레 훈육(訓育)하신 보람이라 생각할 때 우매(愚妹)한 저희 후손(後孫)들 가슴 뜨겁고 숙연(肅然)한 깨우침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자식(子息)낳아 아버지 할아버지가 될 수는 있지만, 진정(眞正)한 아버지 할아버지 다운 존재(存在)가 되기는 어렵다는 큰 가르침을 주셨고, 참다운 숭조(崇祖)와 돈목(敦睦)의 덕목(德目)이 무엇이며, 시대사조(時代思潮)가 아무리 변(變)해도 왜 강조(强調)되어야만 하는가를 진지(眞摯)하게 생각하고 새롭게 다짐하는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이곳에 530여 성상을 함께 잠들어 계신 차자 휘 종수의 4男을 살펴보면, 휘 종수의 장자 절도공 휘종인께서는 나주 다시면 초동에서 태어 나셨고 지혜비범하여 성종 25년(1494년)에 무과에 급제하시어 연산군2년(1496년)에 대마도치위사장정의 통사관이 되시고, 6년(1500년)6월 해랑도척 부사 전여림의 종사관으로 갔다 오셔서 함경도우후 만포진첨사,10년(1504년)에 경상우수사, 중종3년(1508년)에 전라우수사,7년(1512년)오위도총부 부총관,8년 (1513년)에 함경도북병사를 지내시고 16년(1521년)에 장흥부사가 되셨다가 그이듬해 5월 추자도에 왜변이 있을때 다시 전라좌수사가 되시어 왜병을 격퇴 시킨후에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오셔서 다시면 죽지에 소요정을 짓고 여생을 보내셨습니다. 오늘 직계 17대손 재영, 재혁,18대손 강복(행)이 삼가 예를 올립니다. 휘 종수의 차자 양익공 휘 종의께서는 세조6년(1462년) 나주 다시면 초풍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안주목사를 지내고 중종반정때(1506년) 정국4등공신이 되어 함풍군 작위를 받았고. 중종5년(1510년) 4월 경상우수사때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토평하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이르렀습니다.오늘 직계 17대손 재철이 삼가 예를 올립니다.
휘 종수의 삼자 종례 황주공께서는 나주 다시면 초포에서 태어나 성종때 무과에 급제하시어 황주목사를 지냈습니다. 직계손이 절손되어 외손이 봉제를 모시던중 200여년전에 이곳 나주로 이장하여 봉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방계 12대손 영서이하 여러 후손들이 삼가 예를 올립니다.
휘 종수의 사자 종지 만호공께서는 벼슬길에 나간 兄님을 代身하여 兩親을 極盡이 모시면서, 鄕里에 살고 있는 일가 친족은 물론 주위 양민들에게도 어질고 의롭고 예절을 갖춰 지혜롭게 선덕을 베풀며 할아버님의 유훈을 몸소 실천하시던중 조정에서 평산만호로 제수되었지만 할아버님마저 부모님곁을 떠날수 없다하시며 벼슬도 극구사양 하셨고, 형님되시는 할아버님들과 달리 생전에 나라를 위해 한일이 없다 하시며 비문을 새기지 말라는 백비유언을 남기신 시대적 소명을 다한 자랑스런 선조님이셨습니다. 오늘 직계 14대손 근헌, 대헌이 삼가 예를 올립니다. 오늘 할아버님의 거룩하신 음덕(蔭德)과 “연화도수(蓮花倒水)에 만년향화(萬年香火)”의 길지(吉地)라는 이곳 지세(地勢)의 힘을 빌어 우리 咸平李氏가 앞으로 한층 더 우뚝한 망족(望族)으로 당당(堂堂)히 설 수 있도록 계속(繼續)된 번족(蕃族)과 영화(榮華)가 이루어지기를 간절(懇切)히 축원(祝願)하면서 이를 위해 우매(愚昧)한 저희 후손(後孫)들 심기일전(心機一轉) 깨우쳐 분발(奮發)하는 모습 지켜 보살펴 주시옵소서. 여기 미거(未擧)한 저희 후손(後孫)들 할아버님의 거룩하신 유덕(遺德)과 유훈(遺訓)이 만년향화(萬年香火)로 피어 나는 이곳 성지(聖地)에 와서 가없는 은혜(恩惠)에 감사(感謝)드리오며 조촐한 주과(酒果)와 포혜(脯醯)로 잔(盞)부어 올리오니 허물치마시고 나주정씨(羅州鄭氏) 할머님, 자부 손부할머님과 기쁘게 흠향(歆饗)하시옵고 영생복록(永生福樂) 누리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