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조선건국: 기원전 2333년-기원전108년 고조선 멸망
■ 조선 왕조 ■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간도)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고 아들 행리,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를 얻었다. 그러나 원이 고려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원주민과의 대우를 달리하기 위해 차별호적을 만들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한다.
● 위화도회군과 4대 불가론 ● 4대불가론
■ 제1대왕 :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기간: 1392.7-1398.9. 집권 6년2개월 76세) 이성계는 마침내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로 고려 국왕으로 등극하고, 1393년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또 무학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수도를 물색 케 하고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는다. 이성계는 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법전이 편찬되었다. 또 숭유 억불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다. ● 새 도읍지 한양
정도전 : 이성계를 통해 성리학적 이상국가 건설을 꿈꿈. (1341년 경북 영주출생, 62세)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무 학 : 이성계에게 군왕이 될수있다는 확신을 심어 줌. 1327년 경남 합천 출생. 79세. 정종은 원래 왕위에 뜻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그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방원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수있느냐"?고 반문 하며 세자 되기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방원의 양보와 권유로 세자로 짹봉되었고, 1개월 후 태조가 물러나면서 왕위에 올랐다. 비록 왕좌에 있긴 하였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정종 때의 정치는 거의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 되었다. 그는 수도를 개경으로 옮기고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 이 일어나자 방원을 세제에 책봉했고, 재위시에는 정무 보다는 격구 등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 이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났다.
제1차 왕자의 난 : 1396년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배후세력인 신덕왕후 강씨가 병으로 죽자, 방원의 정계복귀노력은 한층 가속화 되었고,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 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태상왕이 된 태조 이성계는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흥에 머물렀다. 이때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남. 태조가 물러난 것은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중 이라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 제3대왕 : 태종 이방원 1367년-1422년. 재위 : 1400년11월-1418년 8월. 17년10개월.
방원은 세제로 책봉되자 병권을 장악하고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 나갔다.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 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윈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게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 그리고 1400년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왕으로 등극 했다. 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겼으며 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 와 인구를 파악했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자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한층 박차를 가했고,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고려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제정을 안장시켰다. 노비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자유롭게 청원케 하는 등 새로운 사회 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태종은 교육과 과거제도 정착에도 역점을 두어 귀족위주의 관리 등용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주력했다. 태종은 이처럼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 정치는 그가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러한 개혁에 힘입어 세종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 양녕대군 : 자유분방. 사냥과 풍류를 좋아함.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 원경왕후 민씨 :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1365년에 태어났다. 태종보다 두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었고, 1398년 8월 그녀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함께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 시켰고 방원은 그녀의 정보 덕분에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태종은 외척세력의 권력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 나갔고 민씨는 이에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이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 되자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 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 태종시대의 주요 5대사건
육조조직 단행 - 태종은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의 품위를 정3품에서 정2품으로 높였다.
거북선의 개발 - 태종실록의 태종 13년에 보면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태종15년에는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 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일종의 장갑선으로 짐작된다. 거북선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문고 설치 -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한양으로 다시 천도 -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개경으로 옮겨갔다. 태종은 등극 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5년 창덕궁이 준공되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태종 대에는 이 사건들 외에도 호구법을 제정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포백세와 호포세를 폐지했고, 환자치료를 위해 처음으로 동녀를 선발하여 부인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1402년 보헤미아의 프라하대학 총장이 된 후스는 로마교회의 부패상을 고발하며 종교개혁을 시도하려다가 발각되어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쫓겨난다. 이후 후스는 1412년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비판하고 이 때문에 그는 파문당하고 1414년 콘수탄츠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선고받고 이듬해 화형당한다.
■ 제4대왕 : 세종 충녕대군 : 1397년-1450년 재위:1418년 8월-1450년 2월. 집권31년6개월.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세자 사건이 네 번째 선위파동으로 이때 황희 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 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 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 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켜야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 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 아들 충녕대군 도가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4대왕인 세종이다. 태종은 충녕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등도 잘 안다 면서 세자에 책봉했다.이처럼 태종은 충녕의 학문과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기에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휼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세종 시대의 권력 구조나 정치적 양상은 세종 19년을 분수령으로 두 시기로 구분된다. 세종은 이 때를 전후하여 국가 기강의 중심이었던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변혁하여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의정부로 넘기는 한편,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결제하도록 하는 등 이전에 비해 더욱 유연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집현전은 고려시대에 이미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정종 시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지만 세종초에 이르러 기능이 대폭 확대되었다. 세종은 명과의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기위해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 그리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 집현전은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채용되었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천체관측기구인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옥루, 세계뢰초의 강우량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국토의 개척과 영토의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했다. 박연을 통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다. 소현왕후심씨(1395-1446년 / 세종의정비)심씨의 아버지 심온이 세종 즉위초에 영의정에 올라 사헌사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정이 군국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을 했다가 옥사가 일어 났다. 심온은 이 사건의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賜死 됨.이 때문에 심씨를 폐하자는 논의 가 있었으나 그녀의 내조의 공이 인정 되어 폐비사태는 면하였다.
안평대군(1418 년-1453년 )세종의 셋째 아들.권신,황보인,김종서등 문신들과 긴밀 한 관계 를 유지하고 수양대군의 무신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인 "황표정사"를 장악하는 등 조정의 배후 신력자 로 부상.시.서.화.모두 능해 삼절이라 불리웠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임.
맹사성: 태조 때부터 예조의량직에 제수 사헌부 수장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역모사건을 치조하는 중에 태종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부마인 조 대림을 고문. 이 사건으로 그는 왕족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처형 직전 까지 간다.당시 영의정 이었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죽음 면함. 그는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 하여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함.예술가적임.
장영실 : 김종서: 문신출신으로 태종신록 편찬주관 1433년 함길도 관찰사. 육진개척에 투입 두만강을 국경 으로 확정지음.
문종은 세종 즉위3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에 머물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역수 및 산술에도 뛰어났고 서예 에도 능했다.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었고 6품 이하의 신하에 대해서는 윤대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렇듯 유연함과 강인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제위 2년3개월만에 39세 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 문종의 첫째.둘째는 다 과실이 있어 폐위되었다. ■ 제6대왕: 단종(1441년-1457년. 재위 : 1452년 5월-1455년 윤6월. 집권 3년 2개월)
현덕왕후 권씨는 26세에 단종을 낳고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에 혜빈 양씨는 세손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르케 양육된 홍위는 8살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하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유성윈,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이는 세종자신 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 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세종이 이런 간곡한 부탁을 한 것은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 이었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 하자 홍위는 세자로 책봉된다. 문종은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 한다는 고명을 남기고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세자 나이 12세임. 단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 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는데,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왕비도 없었다.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았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데 그쳤다. “황표정사” - 대신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하는 방식. 따라서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들인 황보인, 김종서 등 에게 집중됨. 이후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 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 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賜死됨.
※ 단종복위사건(1455년) : 1455년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신하들을 귀양 보내고 왕으로 등극하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자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의 문관들은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들과 모의하여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 되었다. 당시 세조는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해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바로 이 순간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게획 이었다.하지만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살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사실을 알려 단종복위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붙잡힌다. 김질이 고발할 때 성삼문에게 들은 말이라 했고 성삼문은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과 같이 모이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더 추궁하자 유응부와 박정도 등도 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육신 :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중종 때 사림파들이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남효은이 사육신이라는 말을 처음 씀 생육신 :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은 . 세조 때 한평생 벼슬을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킴.
계유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서운관사 . [겸판]이병조, 내외병마 도통사.등 여러 중직을 겸하여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 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승정원(비서실) 중심의 국사를 운영함. 신숙주 - 예조판서(외교통)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강화 정책에 착수 했다. 내각제인 의정부서 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 제에 가까운 육조 직계제를 단행했고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개편과 관리들의 기강확립을 통해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 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운영 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중심이 아닌 측근 중심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켜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 들이기도 했다. 그의 불교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 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파란 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묻힌 광릉은 세조가 석실의 유해 무익함을 강조하면서 석실과 병석을 쓰지 말라고 한 유명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십이지상을 난간동자석주에 옮겨 새겼다. ※ 의경세자(1438-1457) :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 지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잔병이 잦았으며 그 때문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함. 의경세자 ※ 한명회(1415-1487년.73세) 수양의 장량, 수양의 최고 책사임. 계유정난 1등공신. 조선개국 당시 명 나라에 파견돼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 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부모를 여윈 탓에 소년시절을 불우하게 보냄. 과거시험에 번번이 실패했고 38세에 겨우 음문으로 경덕 궁지기가 됨. 권람에 의해 천거 되어 수양의 책사로써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된다. 좌부승지, 좌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병조판서, 4도 제찰사, 좌의정, 영의정까지 오름. 일개 궁 직이었던 그가 불과 13년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둘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2대에 걸쳐 왕후를 내게 했다. 신숙주와도 인척이며 권람과도 사돈 이 된다. ※ 신숙주(1417-1475년.59세) : 정난1등 공신, 도승지, 병판,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집현전 학자출신이며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 생육신 등을 좇는 도학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기회에 능한 변절자 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 제8대왕 : 예종(1450-1469년. 재위:1468.9윌-1469.11월. 집권 1년2개월. 21세 사망)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57년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즉위했으나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데다가 건강 마져 좋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섭정과 원상제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행사해야 했다. 섭정은 모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루어졌다. 원상제도 : 세조가 죽기 전에 예종의 원만한 정사 운영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제도 였다. 왕이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원에 항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제만 하는 제도였다. ※ 제안대군(1466-1525년) : 예종의 둘째 아들이며 인순황후 한씨 소생이다. 세조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에 오름.이듬해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세조가 죽자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음. 예종은 남이를 싫어했다. 무예가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 할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나 예종은 그 반대였다. 남이가 병판에서 겸사복장직으로 물러날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 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유자광 (당시 병조참지)이 이 말을 였 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해 그를 역신으로 몰아 버렸다.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써 이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 남이와 함께 겸사복장으로 있던 문효량이 역모시인. 이로써 영의정 강순, 조경치, 변영수,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등으로 모두 처형됐다. 남이의 기질과 경력으로 볼 때 역모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 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임진왜란 이후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무오사화,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이 강한 조선 사학도 들은 유자광을 참사를 획책하는 극악 간신 배로 인식 단지 간신 배 유자광의 날조 극 으로 믿고 싶었던 것이었다.
■ 제9대왕 :성종(1457-1494년.재위 : 1469-1494.12월. 집권25년 1개월) 38세까지 삶.
예종이 죽자 왕위계승은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으로(당시4세) 이어져야 하나, 정희왕후와 한명회 등이 결탁하여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성종(13세)을 예종이 죽는 날 왕에 앉힌다. 첫째인 월산군이 당시 16세였으나 둘째인 자을산군으로 왕통이 이어진다. 이는 자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였기에 정희왕후와 서로 결탁함. 당시 한명회는 최대 권력가였다. 성종은 태어 난지 2달만에 아버지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射藝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뇌우가 몰아치던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 했는데도 그는 얼굴빛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이를 보고 태조를 닳았다고 하면서 기상과 학식이 뛰어 날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성년의 나이인 20살 까지 7년 동안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1476년 섭정이 끝나자 원상제도 를 폐지하여 왕명출납과 서무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과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 했다. 임사홍, 유자광 등 공신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출신 신진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사림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숭유억불 정책실시.하고, 변방을 위협 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조선 백성들은 개국이래 가장 태평성대 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 정현왕후 윤씨(자순대비:1462-1530) -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친모이다. ※ 폐비윤씨(? -1482년) -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 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 되었다. 1479년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된다. 이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가 되고 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성종은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윤씨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게 하여 사약 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賜死 하였다. ※ 김종직(1431-1492년) : 밀양 출신으로 1453년 진사가 되고 1459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하여 1462년 에는 승문원 박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오른 김종직은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 김굉필, 유호인, 김일손 등도 등용 되기에 이른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김종직은 단종을 폐위,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를 비판 하였으며 세조의 불의에 동조 한 신숙주,정인지 등의 공신들을 멸시하였다. ■ 제10대왕 : 연산군(1476-1506년.재위:1494.12월-1506.9월. 집권11년9개월. 31세 생을 마감)
연산은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 연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을 흥청이라 했 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 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같은 사치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들 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생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 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윤씨 사건을 연산군 에게 밀고하게 된다. 내막을 자세히 모르던 연산은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하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그는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 과 사간원,홍문관,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 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 용을 금지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 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중종반정」. 「조이제문」- 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 「화술주시」- 세조비 정희왕후 喪 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 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임.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이때 유자광을 찾아갔고,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부관 참시형이 가해졌고 김일손,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했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정여창, 이수공, 정희량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양보냈고, 김굉필, 강혼 등은 김종직의 문도로써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판하고 [조의제문] 의 삽입 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 보내 관청의 봉수를 짓게 하였다. 이극돈도 修史官으로써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됐다. 이 사건으로 신진사림이 죽거나 유배당 하고 이극돈까지 파면 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 연산군의 폐출과 진성대군의 등극. 중종은 등극한 뒤 가장 먼저 나라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홍문관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시과, 사가독서,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세가들을 견제하려 했다. 중종 즉위 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던 박원종이 죽어 공신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개혁적인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가고있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 해서 훈구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나라의 민심이 조광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하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라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주초는 조 趙를 분리한 글자 이므로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비록 미신에 불과했지만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몹시 불쾌 해했다.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다 훈구파가 영의정, 좌이정, 우이정 등에 임명되자 곧 사사 되었다. 이 사건은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세력이 지나친 도학적 요구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모의하고 벌인 일종의 친위 쿠테타적 성격이 짙다. 중종의 정치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것은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렸한 정치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 단경왕후 신씨(1487 -1557년) :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다.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 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 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식은 無 71세 일기. ● 장경왕후 윤씨(1491-1515년) :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 문정왕후 윤씨(1501-1565년) :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 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했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 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 들의 불만을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지나친 정권 욕에 불만을 품고, 신진사림 세력들을 등용시켜 외 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히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조정을 패권다툼의 장 으로 몰아갔던 그녀는 희대의 악후였다. 그녀는 1남4녀 를 낳았으며 35세에 명종을 낳았다. 첫째 : 향약의실시.향약은 성리학적 이상사회. 즉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 시켜 왕도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 현량과의 도입.(인제 천거제도)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훈구파의 엄청난 반대가 있었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이 곳을 통하여 등장한 인물은 신진사림파가 많았는데, 그들은 조광조 의 추종학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 서경덕(1489-1546년) : 호는 화담. 그는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 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학문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6세에 세자에 책봉되어 25년간 세자로 있다가 1544년 중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6일만에 25세를 일기로 죽었다.그래서 그는 문정왕후 윤씨 손에서 자랐다. 윤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이기 때문에 전실 부인의 아들인 인종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이 깊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3세 때부터 글을 읽었고 8살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철처한 금욕생할을 추구했고,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이는 그가 도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슬하 의 자녀는 없었다. 귀인 정씨는 정철의 큰누이이다. 인종은 30세에 즉위하여 31세에 죽음.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병사하자, 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대윤 -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 ● 을사사화- 1545년 윤원형 일파는 윤임일파 등을 제거하기 위해 윤임이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 이를 구실로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세력들을 유배시켰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윤원형 일파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 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시대'가 도래 했고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 작서의 변
● 인순왕후 심씨(1532-1575년) - 1551년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3세의 나이로 요절 했고 더 이상 후사를 잇지 못했다.
■ 제13대왕 : 선조(1552-1608년. 재위:1567- 1608년. 집권 40년 7개월. 59세.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그의 부인 인순왕후 심씨는 명종의 유명과 종실의 천거에 의해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인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수렴 청정했다. 이때 하성군의 나이는 16세였는데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선조가 정사처리에 능숙하고 친정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듬해 17세가 되던 해에 편전을 넘겨주었다. 그는 즉위 초에는 학문에 증진하고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신봉자가 됐으며 훈구,척신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으며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
● 붕당정치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을 모함 ·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이 입상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 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전환되면서 양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상을 당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 ·탁남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1689년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되는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 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 ·이건명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로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 ·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 임오사건, 즉 사도세자사건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 중심의 시파와 세자의 실덕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중심의 벽파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 ·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 ·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 ·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가톨릭을 믿는 신서교파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 ·신장되어 이가환 ·정약용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 진출하여 1801년 신유사옥을 일으켜 사학일소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 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연출되었다. 특히 시 ·벽의 대립으로 인한 가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 내지는 실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인을 말살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 서학이나 실학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의 갑술환국 이래 남인은 대개 폐족원국의 무리가 되어 과거를 위한 유학이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조선 중 ·후기 정치의 큰 특징이 붕단간의 대립에 있었으므로 붕당정치는 그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국왕의 위상과 역할을 깊이 이해하려는 연구 흐름도 나타나고 있으며, 붕당정치 대신 ‘사림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 ·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 서인: 이이,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주기철학을 주장. 이이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1591년 세자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한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 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 곳 동향을 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동인인 통신부사 김성일은 토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 것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하게 할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 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 의 주장과는 달리 이듬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 해 왔으니 이것이『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13일). 7년 동안 지속된 임란이 끝나자 선조는 전란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민심을 안정 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스스로 음식과 의복을 절제하여 사치를 배격 하는 한편 농토를 개간하고 양식을 절약하는 정책 을 실시해 민간경제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또한 민간의 사기를 돋우고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전란 중 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공신을 녹훈하였다. 하지만 선조의 전란 복구 노력은 거듭 되 는 흉년으로 쉽게 효과를 볼 수 없었으며 조정은 당쟁이 더욱 악화되어 혼란이 점차 가속화 되었다. 결국 선조는 전란의 뒷수습을 채 마무리 짓지도 못한 채 1608년 59세를 일기로 41년 동안의 치세를 마감해야 했다. 의인왕후를 비롯해 8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14남 11녀 의 자녀를 얻었다. ● 인목왕후 김씨(1584-1632) :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 당시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은 적통론에 입각해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 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들은 임해군을 제거하고 영창대군을 폐서 시켜 강화도에 유배하고 '7서의 옥' 이 발생하자 영창대군을 증살(烝殺)함. 또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인목왕후로 폐비시킨 뒤 서궁으로 유폐시켰다. 대북파의 의견에 따라 저지른 광해군의 이같은 패륜행위는 인조반정의 구실이 됐으며, 이에 따라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목왕후 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 영창대군(1606-1614년) : 왕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적출이고 선조가 늦은 나이에 낳은 까닭에 부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1613년 서양갑, 박응서 등 권력가의 7명의 서출들이 역모 꾸몄다 하혀 옥에 갇힌 이른바 '7서의 옥'이 발생했다. 이때 이이첨 등은 그들이 역모를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 하고 김제남이 이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한 후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증살시킴.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들은 선조의 유교를 염두에 두고 영창대군을 경계하였다. (선조는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 을 잘봐달라는 유교를 남김).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 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 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었다. 대신들은 암암리에 영창대군 지지파와 광해군 지지파로 분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추어 버린다. 이후 이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 하지만 선조는 미쳐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 고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고, 유영경은 인목대비 에게 영창대군을 즉위 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교지 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 임해군(1574-1609년) : 선조의 서출. 장남으로 광해군의 친형이다. ● 정철(1536-1593): 그의 큰누이는 인종의 귀인 정씨였으며 둘째 누이는 계림군 유부인임. 이 때문에 그는 어릴 적부터 궁중 출입을 자주 하였으며, 명종과도 어릴 적부터 벗으로 지냄. 그가 27세에 별시문 과에 장원급제하자 명종이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좌의정 이었던 정철은 세자 책봉에 관 한 문제를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 등과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 할 것을 주청하려 했다. 또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도 상의했다. 그러나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김씨 소생인 신성군을(임란 피난중 사망) 총애하는 것을 알고 인빈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결탁하여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 로 올리고 그들 모자를 죽이려고 한다고 무고했다. 그러자 인빈김씨는 선조에게 이 내용을 전했고 선조 는 매우 진노했다. 이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정철은 경연장에서 건져 문제를 주청하자, 선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대노 하였다. 유성룡,이산해 등은 침묵을 지켰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등은 모두 강등 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정철이 실각하자 동인은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인은 이때부터 인조 반정이 있기까지 30여 년을 집권하게 된다. 그의 첫 벼슬은 사헌부지평이었는데 그가 이때 처음으로 다룬 일은 국왕의 사촌동생이 저지른 살인사건 이었다. 명종은 정철을 따로 불러 그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부탁 하였지만, 그는 왕의 부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를 사형에 처해버렸다. 이일에 화가 난 명종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그의 강직한 성격 은 가는 곳마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곧 당쟁의 불씨가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이이로부터 조정 을 혼란 시키는 정쟁을 일삼치 말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하여 낙향했던 것이다. 그는 중앙 관직에 머물 때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며 격렬한 논쟁을 일삼는 파당적인 인물로 낙인이 찍히곤 했다. 하지만 그는 지방 수령으로써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뛰어난 관리적 기질을 발휘하곤 하였다 .
관동별곡, 훈민가,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한문과 한글로 된 가사와 수많은 시조와 한시를 창작 하여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 임진왜란 (1592.4월-1597.11월) ● 이순신 (1545-1598년. 서울 건천동 출생)
우여곡절 끝에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 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 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이 된다. 그의15년 재위 기간동안 정권을 장악한 것은 대북파였다. 대북파는 정권유지를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과 서인들은 광해군 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623년 김류 ,이귀,김자점 등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인조)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된 후 광해군은 강화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 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었다. 이기간 동안 그는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 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쳐 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 김직재의 옥(1612년) :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 하기위해 어보,관인을 위조한 사건으로 대북파는 고문 과정에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 했다고 허위 자백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소북파 인사 100여 명이 대거숙청 당했다. ● 허균 (1568-1618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 그는 26세 때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 급제함. 1613년 '칠서의 옥' 란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에 가담했으며, 이이첨의 주선으로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1615년 승문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 군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으로부터 '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 처럼 빛나고 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해 성사시킨다. 그러나 그는 그 즈음 역모를 꿈꾸고 있었다. 서얼차별을 없앨 뿐 아니라, 신분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현실화 시키기 위해 혁명을 꿈꾸었다. 그는 또 '북방에 오랑캐가 쳐들어왔고, 남쪽에서 왜구가 쳐들어와 남쪽 섬을 점령하고 대군을 상륙시키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이 소문이 점차 미간 속으로 파고들어 효력을 발휘하자 그는 남대문에 이내용을 붙이게 하였다. 방이 나붙자 장안은 온통 전쟁 분위기에 사로잡혀 도성민들 중 에는 황급히 피난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 현응민이 도성을 출입하다 불심 검문에 걸려 거사 계획을 발설 한 것이다. 현응민으로 부터 모반계획을 파악한 이이첨은 군사를 이끌고 허균집을 내사하여 그와 반란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허균을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에 처했다. 이로써 20년 가까이 준비해온 혁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50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에 대해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칭찬을 아끼 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인격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며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다섯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게 그러한 부정적인 소견 을 대변해 주고있다. 『홍길동전』『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등 을 남겼다.
■ 제16대왕 :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1649년.5월. 집권 26년2개월.55세를 일기)
● 인조 반정의 명분 ● 소현세자(1612-1645년) : 인조의 맏아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 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 갔다. 그는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도 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짖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 를 그와 해결 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 봉림대군 : 그는 청나라에 머물면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지내면서 그를 적극 보호 하였으며,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렬 반대하고 자신이 대신 가게 해 달라고 고집 하여 청의 요구를 막았다. 8여 년의 볼모생활 동안 많은 고통과 고생을 격으면서 반청사상을 정립시킨 그는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그해 9월 세자에 책봉되고,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31세의 나이로 조선 제17대 왕으로 등극했다. ● 병자호란(1636년) : 1636년부터 정묘조약 때 맺은 '형제의 맹약' 을 군신관계로 개악하고자 하면서 황금과 백금일백냥,전마 3천필,정병3만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후금의 요구사항이 터무니없이 늘 어나자 조선은 화의조약을 깨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해 12월1일 청태종은 청군7만,몽고군3만,한 2만 등 12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쳐내려 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한편 청군은 12 월16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청 태종은 1월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고 있었다.이후 별다른 싸움없이 40여일이 경과하자 성안의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그러는 사이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고 인조는 별수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의 요구사항은 총11 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고,명 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 할 것, 청에 적대 하 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곡물을 보낼 것 등이었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30일 인조는 세 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릅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 로 되돌아 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병자호란을 통해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문론이고 그 동안 중국과 맺어 오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 할 수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제17대왕 : 효종(1619-1659년.재위 : 1649-1659년 5월. 집권 10년.41세를 일기.)
소현세자와 함께 오랫동안 볼모 생활을 하며 반청 감정을 강하게 키웠던 효종은 왕으로 등극하자 곧 친 청세력을 몰아내고 척화론자들 을 중용하여 북벌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 하였다. 이같은 계획은 끝내 실 행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그 덕택으로 국력이 강해져서 사회 안정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제1차 나선 정벌 : 1654년 6월 청은 조선 조총군사를 뽑아 영고 탑에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 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후퇴시켰다. 제2차 나선(러시아)정벌 : 1658년 청은나선군이 10여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다가왔는데 청군은 겁을 먹고 감히 그들에게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 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후 흑룡강 부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됐다. 두 번의 나선 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후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북벌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들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 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생산에 매진 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의 안정 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 제18대왕 : 현종(1641-1674년.재위 : 1659년-1674년. 집권 15년 3개월.34세 일기.) 현종 시대는 밖으로부터 외침이 일체 없었고 내적으로는 사회가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 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집권 15년 동안 예론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정쟁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예송(禮訟)론쟁 : 현종, 숙종 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 대비(인조의계비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을 둘러 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임 간의 논쟁을 말한다.이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 문제인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 문제이다. 율곡학파인 서 인과 퇴계 학파인 남인간의 정권주도권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었다. 이것은 표면적으론 단순한 학 문적 언쟁인 것 같지만 파고들면 효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것이었다. 당시 선비들에게는 목숨 을 걸만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자 그의 아들인 석철이 왕위를 이어야 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세손이 아닌 둘째 아들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
● 남인과 서인의 예론정쟁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쟁화 되었다. 이 무렵 조선 조정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세력과 인조의 중립에 정책으로 기용된 남인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인조, 효종 대에 남인은 주로 영남학파의 주리론을 주장하고 서인은 기호학파의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문적인 대립을 벌였으나, 현종 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일삼곤 했다. 예론 역시 처음에는 학문적인 대립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정쟁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일반 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도화 된 '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 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기년상(1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 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서인과 남인의 이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 싸움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 되었 다. 결국 효종의 상중에 일어난 이 논쟁에서 서인의 기년상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남인의 반발이 심상치 않자 1666년 현종은 기년상을 확정 지으며 더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고,만약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그러나 복상 문제는 1673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쟁점으로 부각 되었다. 이번에도 서인측은 효종이 차남이 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공설(9개월)을 내세웠고, 남인측은 그녀가 비록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긴 하나 중전을 지 냈으므로 큰 며느리나 다름없다면서 기년설(1년)을 내세웠다.현종은 이때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남인측의 기년설을 받아들여 자의대비로 하여금 기년 복상을 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서인은 실각하였고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그 런데 1674년 8 월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의 종래 주장이 옳았음을 피력하다가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 후 서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 예론 정쟁 의 파장은 '현종실록'에 까지 영향을 미쳐 숙종 대의 경신대출척(1680년)이후 다시 집권한 서인에 의해 실록이 개수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 제19대왕 : 숙종(1661-1720.재위 : 1674년8월-1720년6월. 집권 45년10개월.60세일기)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로 명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고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숙종 시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으나,숙종은 비상한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1688년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장희빈)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를 서둘러 원자에 정하려 했는데, 서인측이 정비 인현황후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만에 왕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 인 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은 사사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가 폐위 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1694년 노론계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폐비 복위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 이 악화 되어 있었고 민씨를 폐위 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 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 시키고 폐비민씨를 복위시켰다. 민씨가 복원되고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에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었고, 이사실을 안 숙종은 진노 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사약을 내렸다.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이 사건은 무속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옥’이라고 한다. 숙종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폐위 사건에서 보듯이 애정의 편향이 심하여 그 것을 정치쟁점화 시켜 당쟁 을 격화시키는 흠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통치 전반을 평가해 볼 때 왕권 강화를 위해 고의적으로 반복하던 환국정치의 일면으로 해석 될수있다. 그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 권을 교체하면서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 급부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 했다. 숙종은 용사축척권을(왕이 정계를 대개편 하는 권한)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했다. 붕당의 한계성 은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시 몰락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점을 적절히 이용하여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환국(換局)’ : 정국 전환을 뜻함. 이같은 환국정치로 왕권을 강화시키며 조선을 안정시켰던 숙종은 1720년 약46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 숙종의 업적
이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되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이 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와 국경 분 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 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 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렸다. 뿐 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면희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 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00여 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 중에 131 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원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신 전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숙종의 용사출척권 ● 인현왕후 민씨(1667-1701년) :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써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하지만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며 당시 소의였던 희빈 장씨가 왕자 균을 출산하자 정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움을 당해야 했다. 1701년 소생없이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한 궁녀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다. ● 인원왕후 김씨(1687-1757년) :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다음해에 왕비로 책봉.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에 올랐고 경종이 죽은 뒤 대왕대비. ● 희빈 장씨(1659-1701년) :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시종으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1686년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왕자 균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된다. 궁녀에서 후궁생활을 거쳐 왕비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후로는 빈이 후비로 승격 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 버리기까지 했다.
■ 제20대왕 : 경종(1688-1724년. 재위 : 1720년 6월-1724년8월. 집권 4년2개월. 37세일기.)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희빈장씨 소생이다. 이름은 균이었다. 왕자 균은 생후2개월이 될무 렵 숙종의 정비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자 정호를 받았으며 3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노론계는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태어 난지 두 달밖에 안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부당 하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서인 노론측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일만에 왕자 균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 를 빈으로 격상시켰다. 이에 송시열의 반대 상소가 올라오자 숙종은 이미 종묘사직에 고하여 원자로 확정 했는데도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지적하며 심하게 분노했다. 이 때문 에 송시열이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 균은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경종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없었다. 이에 당시 집권당 이었던 노론측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세제책봉이 거의확실 했지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는 왕위를 탐하고 있지 않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연잉군 나름의 자구책 이었을 것이다. 선뜻 왕세제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면 그것은 왕위 를 넘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경종 시대는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 다툼으로 조정이 항상 피바람에 휩싸였고 이 때문에 경종은 재위 4년간 뚜렷한 치 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경종은 재위4년2개월 만에 37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했다.
노.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 마져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 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 정국을 열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탕평 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 적인 사건이「사도세자사건」이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로 하여금 대리 청정을 하게한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소론,소북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김씨,수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사이를 벌여 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 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 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하였다. 이후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켰으며, 1772년에는 과거 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균역법을 시행하고,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 하도록 해 탈세를 방지했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 이 고 구마를 가져와 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 리며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슬기롭게 극복 하고 정국을 탕평책으로 주도하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 를 마련하였으며 1776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 27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 정순왕후 김씨(1745-1805) :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소생은 없고 영빈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 죽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4년간 한다.(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함.) ● 혜빈 홍씨(1735-1815년)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 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 켜볼 수 밖에 없었다.「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 사도세자(1735-1762년) :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영조가 40세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세 때 혜빈홍씨와 가례. 15세 때 서정을 대리함.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정순왕후 김씨, 숙의문씨 등이 그를 무고했다.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다.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의 일종인 조울증에 시달린 듯함.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 하자 영조는 분개했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령하나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그 때 세자의 나이는 28세임.
■ 제22대왕 : 정조(1752-1800년. 재위:1776.3월-1800.6월. 집권 24년 3개월. 49세일기).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빈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 로 입적되어 제왕수업에 들어갔다.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이후 1775년 82세의 연로한 영조 가 대리청정을 시켰고 이듬해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다.
정조는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야 했고 이 기간 동안「홍국영」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 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 하는 한편,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해 친위세력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 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팔도의 장첩,묘염,전랑 직의 인사권을 모두 총괄하였고,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 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 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 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 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다.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 되었다. 정조시대는 양반,중인,서얼,평민 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 실학 : 조선 후기에 대두된 일련의 현실 개혁적 사상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정주 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회 체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현실 속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구현하려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이수광,유형원 등을 선구로 시작된 이같은 실학은 이익, 안정복,박세당, 홍대용을 거쳐 박지원,정약용, 이덕무, 박제가에 이르러 집대성 되고 19세기 말의 개화 사상가들에 의해 재발견된다.
■ 제23대왕 :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년. 집권 34년.)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수빈박씨 소생이다. 1800년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 해 6월에 정조가 죽자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하게 되었다. 그는 순조1년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위해「오가작통법」을 썼다.정순왕후는 근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앉은 뒤 1년만에 죽는데 벽파의 기둥이었던 그가 죽 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는다. 1802년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인다. 이때부터 영안 부 원군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간 이어진다. 순조 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 에게로 넘으가고 ,철종 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 정권의 특징 이라면 당쟁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 버리는 세도 정권의 전횡을 가능 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사회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과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 홍경래의난 : 세도정권에 의한 과거제도와 국가기강의 문란, 삼정을 통한 관리들의 횡포 등에 대항 하여 몰락한 양반과 지식인 등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새로 등장한 부농과 사상인 들의 물력과 조직 력 등을 결합하여 10여 년간의 준비 끝에 일어난 것이다.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는 본디 양반 출신 으로 과거에서 수 차례 떨어지면서 그것이 서북인 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대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과거를 포기한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성공 하지는 못했지만 이씨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체제를 표방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하여 그 붕괴를 가속화 시켰다. ● 순원왕후 김씨(1789-1857) :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 이다. ● 효명세자(1809-1830) :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3세에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구현에 노력 했으나 대리청정 4년 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 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 제24대왕 : 헌종(1827-1849. 재위:1834-1849. 집권 14년7개월. 23세일기)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 이다. ● 신정왕후 조씨(1808-1890) [조대비]: 효명세자의 비이며 헌종의 어머니로서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857년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이 재위 13년만에 후사없이 죽자 왕실의 권한을 쥐게 되었다. 이때 조대비는 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못마땅해 하던 흥성군 이하응과 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성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효명세자의 뒤를 잇게 하였다. ● 효현왕후김씨(1828-1843) : 김조근의 딸로써 헌종3년 왕비에 책봉.16세에 죽음. ● 효정왕후홍씨(1831-1903) :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
■ 제25대왕 : 철종(1831-1863년.재위:1849-1863년. 집권 14년6개월.33세일기.)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이 철종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이다. 1844년 헌종10년에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철종의 아버지)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 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여기에 연루되어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아들 원경이 사사 되고 둘째아들 경응과 셋째아들 원범은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리하여 천애 고아가 된 두 사람은 강화도 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원범에게 왕통을 이어라 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바로 철종이며 그 때 그의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 였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헌종의 6촌 이내에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849년 왕위 즉위식을 올렸고 나이가 어리고 학문 을 연마 한 바없다는 이유로 1851년까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21세 되던 1851년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되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나 정치의 실권 은 여전히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1851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철종을 보필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국사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의 조카인 김병학이 대제학을 맡고 김병국이 훈련대장 김병기가 좌찬성을 차지함으로써 조정을 장악한다. 안동김씨 일문은 왕족 중에서도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 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자가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에 서슴치 않았다. 대원군의 형 이하전의 죽음이 그 예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당시 철종은 이미 세도가의 첩자 등이 온 궁중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믿었고, 자칫하면 임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철종은 이렇듯 계속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시하고 술과 궁녀들을 가까이 했다. 이렇게 되자 본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1863년 재위 14년만에 33 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혈육으로는 숙의범씨 소생의 영혜옹주 하나있음. 이렇듯 왕권을 배제시킨 세도정권은 정치적 견제없는 조건 하에서 삼정문란으로 나타나는 수탈정책의 극에 달함. 모든 법도가 안동 김씨에 의해 좌우되고 뇌물이 성행함은 물론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 매직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을 착취하여 그것을 벌충 하였고 이같은 수령의 부정에 편승한 아전들의 횡포 또한 백성 들의 고혈을 짜는 것이었다. ● 철인왕후 김씨(1837-1878) : 1851년 15세의 나이에 왕비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와 1858년 원자 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아버지 김문근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고종은 1852년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2세임. 대원군은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 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 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 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고종이 즉위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 시켰다. 이로써 대원군은 고종을 대신하여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그는 우선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 오는 외 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한다. 우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재정을 충당했다. 민간의 부담을 줄이고자 무명잡세를 없애고,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 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토록 했다. 한편「대전회통」「육전조례」「양전편고」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 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대원군은 더욱 쇄국정책을 펴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다. 그러나 12세 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이 어느새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입궁한 민씨가 노대신들과 유림을[최익현의 상소] 앞세워 대원군 하야 공세를 벌렸다. 그래서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서무를 친히 결재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통치대권을 장악 하게 되자 대원군은 정계 일선 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병인양요-1766년. 신미양요-1771년 ● 병자수호조약(1876): 고종13년에 일본과 맺어진 외국과의 최초의 수호조약. 부산.인천.원산 등 3개항 을 개항하도록 규정하는등 우리나라만이 갖는 일방적인 조약 이었다.운양호 사건으로 맺어짐. ● 임오군란(1882) : 구식 군졸에게 밀렸던 군량의 일부가 모래가 섞인 쌀로 주게 되자,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설치로 민씨일파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군졸들의 불평이 폭발하여 발생한 난으로 군졸 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민겸호 등 민씨 일파를 죽였다. 대원군은 왕명을 위임받아 난을 수습하고 재집권 하였다. 이때 그는 명성왕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다시 정국을 주도하려 했지만 명성왕후의 요청 으로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군이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청국으로 연행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그는 청에 연행되어 3년 동안 중국 바오딩에서 유수생활을 해야 했다. 임오군란으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이 맺어지고 이 조약으로 일본 경비군의 조선 내 주둔이 실현되어 그 세력 기반을 굳혔다. ● 갑신정변(1884) : 개화당의 김옥균.박영호. 등이 중심이 되어 사대당인 민씨일파를 몰아내고 개화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일본의 힘을 빌어 우정국 낙성식에서 일으킨 정변으로 신정부는 청나라의 간섭 으로 3일만에 실패하고 김옥균.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 동학혁명(1894) : 고종 31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불법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되어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혁명이다. 혁명은 확대되어 봉건사회의 압박에 대한 농민 운동으로 변하여 기세가 걷잡을 수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민씨세력들은 청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 갑오경장(1894) : 일본의 강압 아래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혁신 내각에서 재래의 정치 및 여러 문물제도를 근대적인 방식에 의해 실시한 개혁이다. ● 을미사변(1895) : 고종 32년에 미우라 일본공사가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민비를 시해한 사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간섭을 더욱 강화하고 승리의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 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다.이같은 정세를 감지한 조정은 배일 친러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 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친일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한다. ● 을사보호조약(1905) :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이겨 포츠머드 조약에서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있어 서의 일본의 특권을 승인케한후 이토 히로부미는 강압적으로 이 조약을 체결케 하여 한.일 합방의 기초 를 이루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주권을 잃고 외교권을 박탈 당했으며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두고 보호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을사오적 :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등을 일컫는다. ● 헤이그 밀사사건(1907) : 을사보호조약에 의하여 일본에게 모든 실권을 빼앗기고 백성들이 극심한 착취와 탄압에 시달리게 되자, 고종은 1907년 6월에 네들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상황을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이준.이위종.이상설)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상태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되던 1841년 흥선정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으며 1846년 수릉 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철종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며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 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이라고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 하정일,장순규, 안필규 등과 어울려 파락호생활을 하였다. 또 이때 그는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 다니며 구걸도 서섬 치 않았기에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는 1863년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고 신정왕후로부터 섭정의 대권 을 위임받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서원정리, 무명잡세 폐지, 법전편찬, 비변사 폐지 등을 시행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철저한 쇄국 정책 을 추진하였다.한편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지나친 쇄국정책으로 인한 천주교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안팎으로의 어려 움이 초래되기도 했다. ● 명성왕후 민씨(1851-1895)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며,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흥선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 하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왕실 정치에 관여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씨는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정적 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 난 왕자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 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하고 있었다. 1873년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하게 된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그녀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 이 정권을 장악하지만 민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3일만에 정권을 되찾는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그 녀는 시해됐고 시체를 불사르는 등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위 하여 서인으로 전락 시키도록 강요했다. ● 영왕 이은(1897-1970) : 고종의 넷째 아들이며 순종의 이복 동생이다.
■ 제27대왕 : 순종(1874-1926년. 재위:1907년3월-1910년. 집권 3년 53세일기.)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이후 일본은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고 순종을 등극 케 한다. 이후 순종은 일본의 탄압에 밀려 별다른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군대를 해산 당하고 사법권을 강탈당하는 등 숱한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일본은 친일세력 이완용,송병준,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매국단체인 일진회 를 앞세워 조선인이 원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이합병 한다는 논리로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케 했다. 순종은 황제의 위치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머물렀다. 일본은 그를 이 왕이라 불렀고 왕에 해당 하는 대우를 해주면서 왕위의 허호는 세습되도록 조처했다. 순종은 폐위된 후 16년 동안 창덕궁에서 머물다가 1926년 4월25일 53세 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두 명의 황후를 맞이했으나 슬하 에 자식은 없었다. 이로써 조선은 27왕조 519년 역사의 막을 내린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일 을 맞이하여 6.10만세운동이 일어난다. ● 순정효 황후 윤씨(1894-1966) :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이다. 조선의 26대 임금이자 초대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황제는 모두 6남 1녀의 자손을 둡니다. 먼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순종황제', 귀빈엄씨 사이에서 '영왕', 귀빈이씨 사이에서 '완왕'과 '육',귀빈장씨와의 사이에서 '의왕',귀빈정씨와의 사이에서 '우',귀빈양씨와의 사이에서 '덕혜옹주' 등, 총7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의 자손이 있었지만 무사히 성장하여 결혼까지 한 자식은 3남 1녀에 불과합니다. -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왕세제이자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비(妃)인 일본의 황족 이방자 (마사코) 여사 사이에는 '진(晉)'과'구(玖)' 2명의 왕자가 있었지만 첫째 왕자 '진'은 막 돌을 넘기던 때 죽고었다. 현재 둘째 왕자 '구'는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며 생활하고 있으며 한때 '줄리아 뮬럭'이라는 미국 여성과 결혼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내 이혼하였고 슬하에 자식은 없습니다. - 고종의 다섯째 왕자였던 의친왕의 자손은 매우 많았습니다. 의친왕이 워낙 활달한데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 가지 않았고 미국으로 유학까지 가셔서 외국인과의 사이에도 낳은 자손까지 있습니다.
좀 길지만 아무거나 골라서 하나만 하시면 될것 같아요 출처 : [기타] 인터넷 : 국사연구소 |
출처: 李正和 원문보기 글쓴이: 正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