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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장차올 심판을 피하라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두 본문을 함께 제시하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구약 성도들이 요한복음 서문의 이 영광스러운 진술을 이해하고 우리 것으로 삼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우리는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 그 앞에 나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자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벧후 1:4). 그리스도인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실히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확신하며 자신해야 합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이 이것입니다.
제가 이 점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모르면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신분을 확신하지 못하는 자는 다른 이들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주님도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눅6:39). 이처럼 긴급하고 실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자신과확신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관련 교리는 살펴보았으니, 이제부터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실례들을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편지를 쓴 것은 확신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이것이 새로운 원리가 아니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항상 작동했던 원리라고 말합니다. 그들 모두 믿음으로 살았다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히 11:1), 믿음에는 확신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점을 실증하기 위해 연달아 예를 듭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인물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 모두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앞서 나온 표현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히 2:11).
히브리서 기자는 "선진들이 이로써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느니라"라고 하면서, 아벨의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히 11:4). 다시 말해서, 아벨의 비결은 하나님이 친히 그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신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 확신과 자신을 주신 데 있었습니다.
에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녹의 사례에서 중요한 점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 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하나님은 그를 데려가시기 전에 이미 그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신분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알았습니다(히 11:6).
이처럼 그들의 비결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확신한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한 세상에 살면서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12-13을 자기 것으로 삼고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이제 노아의 사례를 살펴봅시다. 그의 중대한 특징도 이 복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 장차 무슨 일이 생길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 사실을 믿고 자기 것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노아의 삶과 행보는 특히 지금 이 시점에 유익하고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홍수 이전과 놀라울 만큼 비슷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세상을 믿음으로 헤쳐 나간 인물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노아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 모든 나라에 가장 필요한 존재가 바로 노아 같은 사람입니다.
노아의 비결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한 데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7절과 8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5-8). 그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은혜를 입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9절도 보십시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앞장에는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창 5:22,24).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고,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행실이 의로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라는 9절 전반절을 보면 행실도 의로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단지 그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친구가 되는 특권을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무나 그와 동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한 점 의심 없이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와 친밀히 대해 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창 6:14-15에서 방주를 지으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리고 13절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반복하십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창 6:17-18).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궁극적인 증거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이 임박했다고 경고하시면서 "그러나 너는 아니다. 너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은 사람은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확실한 지식에 따라 움직입니다.
노아의 사례는 하나님이 친히 확신을 주시면 어떻게 되는지 풍성히 보여줍니다. 이런 확신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이것은 최고의 확신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확신을 얻을 수 있으며,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 3:18). 요한1서에 나오는 시금석ㅡ“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요일 3:14)을 비롯한 여러 시금석을 통해서도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을 훨씬 뛰어넘는 확신이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너와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고 하신 것처럼, 성령이 친히 주시는 확신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다른 모든 인물이 그렇듯이, 노아의 비결 또한 이 복된 확신을 얻은 데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노아는 사방에서 몰아치는 악의 폭풍 한복판에서도 마음과 양심의 안식을 누리는 삶, 평안의 삶, 기쁨의 삶,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바른 사람"a just man '이었습니다. 더 좋은 번역은 "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가 하나님의 의, "믿음을 따르는 의"에 관심을 쏟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사례에 한층 더 분명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다른 이들도 다 똑같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의에 관심을 쏟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주님의 권면을 따르는 사람입니다(마 6:33). 우리는 아벨의 사례와 에녹의 사례에서 이 특징을 보았습니다. 노아도 그들과 같았습니다.
또한 성경은 그가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죄가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담의 타락 이래 세상에서 무죄한 사람은 주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그가 올바르고 진실했다는 뜻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불순하거나 혼잡하지 않은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전심을 바쳤습니다.
“그 세대 중에 "(in his generations)라는 말은 "당대인들 중에"라고 옮기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가 아는 당대인들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실 정도로 그들은 악했습니다(창 6:6). 당대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시대 중 하나로서, 끔찍할 정도로 죄와 불법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당시 땅에는 "네피림"이라는 거인들이 있었습니다(창 6:4). 이 말은 온갖 가증한 짓을 저지르며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무서운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당대인들 중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물리적으로는 그들과 동시대에 살았지만, 실제로는 홀로 우뚝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다음으로 하는 말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중대한 열망이자 최고의 소원이었으며 무엇보다 앞서 추구한 목적이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 사귀며 그가 자신을 기뻐하심을 아는 것이었고, 그의 소원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4:26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공적인 예배를 마음껏 드리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도 틀림없이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배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노아는 당시 세상 및 당대인들과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세상의 형편은 두말할 필요 없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이 멸망을 작정하실 만큼 처참했습니다. 그런데 해석하기 어려운 탓에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창 6:2).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여 천사와 여자들이 섞여서 낳은 괴물이 네피림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자들이 있는데, 제가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설명입니다. 그보다는 아벨과 가인 사이의 구분이 이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벨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벨이 죽은 후 아담과 하와가 낳은 아들 셋의 후손이었습니다. 경건한 계보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은 달랐습니다. 인류는 이처럼 두 무리로-"하나님의 아들들과 가인의 후손들, 경건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로 갈라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섞여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이 시기에는 그 구분이 흐릿해지면서 경건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의 차이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코 섞이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한데 섞여 버렸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관통하는 큰 주제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 6:14). 그런데 그들은 성경이 금하는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 가인의 후손 및 세속성과 죄와 악을 멀리하기는커녕 한데 섞여 버린 것입니다. 경건한 계보에 속한 자들까지 길을 잃고 변절하여 악을 행하는 무서운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세상의 정신에 지배당하지 않았고 그것을 본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홍수 이전 시대의 특징이 점점 더 많이 나타나는 추악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도덕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느냐는 질문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제각기 정한 상대적 기준이 도덕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없다고,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회조차 대변인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의구심을 표시하며 혼외정사를 정당화하려 드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전의 모습, 본연의 모습을 잃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아벨과 가인의 무서운 혼합에 잇따른 참상을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신문을 보면서 내리게 되는 결론도 이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뿐 아니라 이런 삶을 흡족히 여깁니다! 그런데 노아는 이런 사람들 틈에 홀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도덕관념을 바꾼다고 해서 자신도 따라 바꾸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지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바르고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악과 방종과 죄 한복판에서 자신의 완전함을 지켰습니다. 성경은 그가 당시의 "세상을 정죄했다고 말합니다(히 11:7). 그는 우리의 세상도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시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노아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무엇이 그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만들었을까요? "믿음으로 노아는……………."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전부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비결이었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비결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우리가 여기에서 보는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진리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역사의 윤곽을 보이시고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장차 이루실 구원의 방법, 우리가 믿음으로 따라야 할 구원의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노아는 그것을 믿었습니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살지 않았습니다. 홍수 이전 시대 똑똑한 자들의 최신 발언을 자기 신분의 토대로 삼지 않았습니다. 당대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을 비웃으며 쾌락에 탐닉하는 삶을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삶의 토대로 삼았습니다.
특히 그가 믿은 것은 홍수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였으며 …………." 혹시 요즘 사람들의 말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구식이라거나 근본주의자라거나 그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까? 성경과 하나님과 기적과 속죄를 비롯한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현대인이 되고 싶은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노아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노아는 임박한 멸망을 경고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으며 여전히 장악하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피조물이라고,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주변 상황은 잘못된 것이며 그런 상황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그를 조롱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옵니다. 120년간 방주를 만들며 의에 대해 설교했지만,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하! 멸망이 곧 온다더니, 어디 멸망이 왔지? 그토록 오랫동안 멸망한다고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오늘날 우리도 같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설교자들이 하나님과 심판을 설교하면서 겁을 주면 벌벌 떨며 교인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 말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지. 하나님을 아무리 부인해도 우리는 복을 받고 세상은 잘 굴러가며 번영한다니까"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노아 때 사람들도 비웃었습니다. "넌 우리더러 죄의 삶을 산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진짜 계신다면 왜 우리를 막지 않는 거지?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보면 우리를 막고 싶지 않든지 막을 힘이 없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주장이었고, 오늘날도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과학의 진보와 발전을 자랑하며, 이처럼 대단한 인간이 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재능은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장차 한분을 세워 심판하신다는 말씀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지체하시는 이유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하나님으로서 온 우주의 보좌에 앉아 계신 것과 의로써 우리 모든 사람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상황이 정반대로 보이는데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노아 같은 사람이 되려면 노아처럼 믿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는 현대의 지식과 학식에 휩쓸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공평하고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죄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노라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묵살하는 것은 아닙니까?(롬 1:18)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공평과 의의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노아와 그 계보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땅에 나타나고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매일 발생하는 무서운 사건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발현임을 모르겠습니까? 롬 1:18-32을 보십시오.“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롬 1:26-27). 로마서 1:18-32에 나오는 무서운 일들을 오늘날 우리는 그대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사도에 따르면 이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일부 나타난 결과입니다. 일종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을 잊을 때 삶이 어떻게 되는지 현대인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구원도 믿지 않는 똑똑한 인간, 제 힘으로 완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때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기독교회에도 똑같이 말씀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19세기부터 성경의 권위와 심판의 사실성 및 지옥의 존재를 의심해왔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교회의 말을 믿었고, 그 결과가 지금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건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도덕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은 한 번도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노아는 홍수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경외함은 비겁한 두려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일 4:18). 올바른 두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경외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과 정결하심이 얼마나 큰지 희미하고 흐릿하게라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시편 기자도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라고 했습니다(시 36:1). 하나님은 죄를 차마 보지 못할 만큼 정결하신 분입니다. 노아에게 계시하신 사실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찾아와 “인간을 창조한 것이 한탄스럽구나. 저들이 얼마나 악해졌는지 보아라!"라고 하셨고, 그 영광과 거룩하심을 일부 본 노아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떨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얼핏 본 자들은 전부 이렇게 떨었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얼핏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사 6:5).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경외함으로 행했기에 경건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난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요"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합니다(빌 2:12). 무엇을 두려워하며 떨어야 합니까? 내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엄청난 죄와 악을 보고 두려워하며 떨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상상과 욕심과 욕망 속에 어떤 악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두렵지 않다면, 이제부터라도 두려워해야 합니다.
노아는 당대인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얼핏 보고 떨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말한 이유도 이것입니다(고전 2:3). 죄에 접근하려니 마음이 떨렸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9:31에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기독교는 "주를 경외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고후 5:11). 사도는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라는 것과 그 앞에서 자신이 몸으로 행한 일들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뵌 요한도 "그의 눈은 불꽃같고... •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라고 했습니다(계 1:14, 17). 왜 죽은 자같이 되었을까요?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의 영광과 위엄과 거룩하심과 광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보았습니까? 교회가 이토록 육신적이고 잘못된 의미에서 확신과 자신감에 넘치며 명랑하고 경박하게 등만 토닥여 주고 있으니,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주의 두려우심을 알아야 하며, 죄에 빠진 자들을 기다리는 무서운 운명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요점으로 연결됩니다.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의를 전파했습니다(벧후 2:5). 우리도 의를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은 도덕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를 전파하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저는 허다한 정치인들이나 신문이 취하는 태도를 옹호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은 의를 전파하는 자가 아닙니다. 의를 믿지도 않습니다. 본 적도 없고, 개념도 모릅니다. 그저 얄팍한 체면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를 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려 주어야 하며, 그의 거룩하심과 정의와 진리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가 장차 모든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우리를 비웃고 조롱하며 바보 취급 할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러라고 하십시오. 성경은 마지막 심판 날이 온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러니 죄의 결과로 닥칠 일들과 그 일들을 피할 유일한 길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믿고 그 방법을 따르라고, 그리스도께 달려가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 모습이 아무리 악해도 그를 믿고 의지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씻음받고 깨끗해질 수 있으며 거룩해질 수 있다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을 힘입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가증한 일들로 가득한 세상 한복판에서도 노아가 거룩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이 친히 "너는 심판을 면할 것이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을 것이다. 너는 내게 속한 내 백성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그의 자녀임을 알았기에 계속 자기 길을 간 것입니다. 세상의 맹목과 어리석음과 불신앙을 정한 것입니다. 그의 본보기는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이 홍수와 노아 가족의 구원에 대해 하신 말씀은 모든 면에서 사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이 악한 시대, 악한 때에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의에 관심을 쏟는 진실한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으며 그의 뜻과 길과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정죄할 것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복된 확신을 얻을 것이며, 장차 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시 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