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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시학』이 주목하는 이 계절의 시인 / 대담 임애월 편집주간
산에 드니 산이 보이지 않았다
김 우 영 시인
- 강추위도 누그러진 무술년 2월 어느 날
수원시의 중앙에 위치한 팔달산 자락에서 김우영 시인을 기다렸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흰 머리카락을 슬쩍 가린
챙이 넓은 검은 모자가 먼저 산을 올라 왔다
시인의 큰 키와 휘적거리는 걸음걸이가 화성성곽과 왠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
임애월 : 김우영 선생님, 안녕하세요?
참 오랜만이십니다. 같은 ‘지역구’인데... 뵙기가 쉽지 않아서요.(웃음)
김우영 : 이 ‘잘난 사람’을 이웃으로 둔 임 주간님 잘못이에요. 하하. 잘난 사람이란 건 하찮은 사람의 역설이란 건 아시죠? 옛날에 문덕수 선생이 나한테 그러시더라고요. 사람이 왜 그렇게 ‘암되냐’라고요. 제 생각에 암수의 개념으로 숫놈처럼 활발하게 나대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는 뜻인 것 같은데, 좀 자주 찾아오고 만나자는 말씀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어쩌겠어요. 제 천성이 남 앞에 나서는 거 싫어하고 귀찮은 건 질색인데요. 아, 그렇다고 임 선생이 귀찮다는 건 절대 아니고요... 흐흐흐.
그런 저런 이유로 문학단체엔 나가질 않고 있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 한국경기시인협회 행사에 얼굴 비추는 것만 빼고요.
임애월 : 아이구~ 감사합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라도 나와 주셔서요. 지난겨울 강추위 속에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근황 좀 알려주세요.
김우영 : 제가 지난 연말로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이제 정치 참여도 할 수 있는 신분이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어디 출마하겠다는 건 아니고. 아무튼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었는데 이제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거죠. 문제는 수입이 대폭 줄어들었다는 건데, 세상에서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잖아요? 만족합니다. 그런데 한가하지는 않네요. 이런 저런 원고를 쓰는데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요.
지방신문에 매일 사설 한 꼭지씩 쓰고, 일주일에 두 번 원고지로 따지면 16~18매쯤 되는 수원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어요. 또 한 달에 한번 월간지에 수원의 핫 플레이스를 소개하는 글도 쓰고요.
임애월 : 능력 있는 분들은 한가하게 놔두지를 않나봅니다.
화성성곽을 돌아 이렇게 팔달산 정상에 오르니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서 수원 시내가 환하게 보이네요. 화성연구회 회원이시라 수원화성에 대한 생각도 남다르실 텐데요. 수원 사랑에 관련된 노래도 여러 곡 작사하셨고 공무원교육원 등에서 수원·화성에 대한 강의도 자주 하셨다고 들었어요.
김우영 : 21년 전 창립할 때부터 사단법인 <화성연구회>에 참여하고 있어요. 지금은 상임이사를 맡고 있고요. 수원화성은 중학교 때부터 관심이 많았었는데 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게 된 거죠.
임애월 : <화성연구회>에 대해 잠깐 소개 좀 해주시죠.
김우영 : ‘화성에 미친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화성연구회예요. 이 사람들을 만나고 싶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막론하고 화성을 걸으면 돼요. 화성행궁에 가도 되고요. 뭐, 항상 끝마무리는 막걸리랍니다.
그래서 어느 단체보다 사람들의 관계가 따듯하고 끈끈해요. 구성원도 다양한데 역사 학자, 언론인, 교수, 교사, 관련 공직자, 고건축을 포함한 건축전문가, 정조시대 무예연구가와 일반시민들도 있고요. 나와 몇 사람 빼놓고는 모두 박사나 무슨 ‘사’ ‘가’ 자가 들어간 분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 나는 ‘인’자가 들어가는구나. 하하하.
임애월 : 모두 좋아서 스스로 참여하는 일이고 보니 회원들끼리 더 끈끈하게 뭉치시나 봅니다.
김우영 : 그렇지요. 그렇게 활동을 하다 보니 수원사랑이 더 깊어지고 1990년부터 「수원사랑의 노래」를 비롯한 몇 편의 노랫말을 짓게 됐어요. 「수원사랑의 노래」는 심재덕 시장 재임 7년간 수원시청 공무원 월례조회 때나 신년회 때마다 불려지기도 했답니다. 수원시립교향악단과 합창단이 초연한 「수원판타지」 노랫말도 만들었고, 2002년 월드컵 땐 「저 작은 공 하나가」란 노랫말도 만들어 유명한 가수가 부르기도 했었죠. 월드컵 행사만 하면 그 노래를 틀어주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임애월 : 아하, 대단한 수원 사랑이십니다. 수원과 수원화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니 여기저기서 수원화성에 대한 강의 요청을 받는 건 당연하셨겠네요.
김우영 : 파장동 공무원교육원에서도 한 1년간 현장 위주의 강의를 했었는데 강의료는 연구회 회원들을 불러 마시느라 술값으로 모두 날아갔지요.(웃음) 그렇게 퍼마시고는 화성성벽 아래에 누웠다가 아침을 맞은 적도 있습니다. 화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달호 선생과 함께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어요. 수원천에서 세수를 하고 출근했던 그 여름의 기억이 생생해요. 어이구.
임애월 : 저런... 참말로 김우영 선생님답습니다.(웃음)
거기서 사람들이
걸어 나와 손을 잡는다
성(城)을 쌓는다
마을을 이루고 삶이 시작된다
거기서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깨를 끌어안고 노래 부른다
오, 경계(境界)가 사라진다
여기에서 그 소리 다시 듣는다
너
나
우리 있음으로
그 소리 우리에게 다시 온다
오늘 새로운 성이 쌓인다
경계 허물어지고
자유의 성이 쌓인다.
- 「오늘 새로운 城이 쌓인다」 전문
‘성(城)을 쌓고’ 나서 비로소 거기서 ‘삶이 시작되’는군요.
성은 기대어 쉴 수 있는 안식처이면서 외세의 침략에 미리 대비하는 공간이기도 하죠.
수원은 정조대왕이 계획한 도시라고 들었어요.
수원화성의 특징이랄까요? 다른 성들과는 어떤 점이 다른가요? 수원화성만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것들을 알려주세요.
김우영 : 뭐, 이건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다 나오는 거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지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은 다산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설’을, 정조대왕이 ‘성화주략’(1793년)이라는 이름으로 발행한 책을 지침서로 하여 축성됐습니다.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습니다.
화성은 보시다시피 참 아름다운 성입니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그리고 우리가 현재 있는 서북각루 같은 곳은 군사시설이라기보다는 경승지에 가까워요. 그러나 정조대왕은 그 아름다움도 적군에게 두려움을 주는 무기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임애월 : 네, 아름다운 무기(?)인 셈이군요. 공격 위주가 아닌 방어 위주라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김우영 : 맞아요. 성이란 시설은 어차피 지키는 기능이 위주니까요. 당시 정치상황이니, 실학자 다산의 이야기 등 다 아는 얘기는 뺄게요. 다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화성에는 정조임금의 지극한 애민정신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뭔 얘기냐 하면 축성 공사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임금을 지급했거든요. 그 당시에는 축성 등 대규모 공사에 대부분 백성들이 강제로 동원되었었잖아요?
임애월 : 네, 그 시대에는 그게 어쩌면 당연시되었을 것 같은데요.
김우영 : 그런데 정조대왕은 화성 축성공사에 참여한 장인과 노무자들에게 노임을 지급한 거예요. 축성 공사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를 꼼꼼히 살펴본 적이 있는데 일반 노무자의 경우 하루에 2전 5푼을 지급했던 사실을 알 수 있었지요. 이것을 두 달(60일) 모으면 15냥이 되는데, 이는 당시 작은 마당이 딸린 5칸짜리 초가집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지요. 당시의 물가 체계가 지금과 달랐다고 하더라도 고임금이 지급됐던 셈이지요?
임애월 : 네, 대단합니다. 역시 정조대왕은 시대를 앞서간 훌륭한 군주가 맞네요.
방향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이 일대가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정조대왕 능행차는 연례행사로 요즘 관광객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요. 수원화성을 보러 오실 분들을 위해... 관람 포인트를 어디에 두고 보면 좋은지 알려주세요.
김우영 : 국방과 효심, 백성을 위한 정치 개혁을 목적으로 축성된 수원화성의 한 가운데는 화성행궁이 자리 잡고 있지요. 화성이 화성행궁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형세입니다. 실제로 화성행궁은 수원화성의 모태이자 성내의 중심시설이므로 마땅히 이곳부터 보시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 행궁 뒤 팔달산 중턱 성신사, 아, 성신사는 정조의 명으로 지어진 성신을 모시는 사당인데요. 일제강점기 때 철거한 것을 화성연구회 회원들이 고유제를 지내며 복원(사실은 중건) 운동을 펼친 끝에 다시 세워졌죠.
임애월 : 네, <화성연구회>가 큰일을 하셨네요.
김우영 : 그렇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갈게요. 성신사를 거쳐 팔달산 꼭대기 서장대에서 수원 구시가지와 화성 전경을 바라본 후 산 남쪽 끝에 있는 화양루를 거쳐 팔달문 쪽으로 내려와 시장을 지나 성의 동쪽구간을 보고 동장대-방화수류정과 화홍문-장안문-화서문과 서북공심돈-서북각루 순으로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사전에 충분히 공부를 하고 돌아본다면 더 좋겠지요. 화성전문가를 모시고 함께 돌아본다면 감동이 더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임애월 : 말씀 감사합니다. 수원을 기억하시고 또 앞으로 방문하실 분들께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화성 성곽길에 서있다 보니 <수원화성>에 대한 이야기가 좀 길어졌네요.(웃음)
이제 선생님의 등단 관련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중학교 때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읽고 그에 홀려서 시인이 되고 싶었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김우영 : 맞아요, 그 ‘홀린다’는 표현.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수업 첫 시간에 칠판에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냅다 쓰시곤 아무 말 없이 곧바로 지워버리곤 수업에 들어갔어요. 그 시에 대한 수업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사춘기 소년이었던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니...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니... 아아, 이거 단순한 언어의 연결이 아니고 뭔가가 있구나, 이게 뭐지?
임애월 :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충격이었겠지요.
김우영 : 까까머리 소년에게 내린 시(詩의) 강신(降神)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처 옮겨 적을 시간도 없었던 그 짧은 시간, 시를 모두 외워버렸지요. 그날 저녁 잠이 오지 않았어요. 며칠 후 돈이 없어 새 책을 살 엄두는 나지 않았으니 매향여중·고 잎 수원천변 헌책방을 뒤져 윤동주 시집을 구하려 했는데 구하지는 못하고 대신 내손엔 김소월의 시집이 쥐어지게 됐지요.
이 까까머리 소년에게 제2차 강신이 왔어요. 김소월의 ‘초혼’을 읽고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붉은 해는 서산에 걸리었다... 떨어져 나가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하아, 이건 또 뭐냐. 어린 영혼을 모두 털어버린 윤동주와 김소월은 그래서 내게는 무당들이 신 내림을 받을 때의 신아버지 같은 존재들이에요. 같은 시공(時空)이 아니어서 비록 한 번도 만난 일은 없지만... 그래서 한중 수교전인 1991년 중국에 갈 때 일부러 용정에 가서 고생고생 끝에 윤동주 묘소를 찾아 참배하기도 했지요.
임애월 : 네, 그 전율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습니다.
1970년대 고교생들의 로망이었던 잡지 <학원>에도 작품이 자주 실렸었다고 들었어요.
김우영 : 그랬었죠. 1970년대 <학원>이란 잡지에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고등학교 학생문사들이 작품을 발표했고 그 친구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곤 했지요. 당시 박정만 시인이 거기에서 시를 선정하고 성의 있는 작품평을 해주곤 했는데 고3 때 ‘나무들이 쓰러지며’란 내 시에 대해 과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 이후 그분과의 인연이 이어졌는데, ‘한수산 필화사건’으로 끌려가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야만적인 군사독재 정권이 한 천재 시인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이지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쯤엔가 서울에서 박정만 시인을 만났는데 이미 죽음의 그늘이 그를 덮고 있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얘기가 좀 빗나갔는데 당시 학원지의 ‘학원문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전국의 청년 문사들은 제주 오승철, 부산 최영철, 광주 김미구, 안동 김승종, 대전 최봉섭, 서울 문창갑, 그리고 수원의 나와 산문을 썼던 박민순 등이었어요. 나는 그 후 ‘학원문학상’도 받았으니 당시로서는 그들 사이에서 제일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셈이네요.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요.(웃음)
임애월 : 네, 지금 문단에서 문명을 날리고 계신 분들이 많네요.
고등학생 때(1975년) 첫 시집을 묶었다면서요?
김우영 : 『당신이 외치는 문』이란 책인데 지금은 내게도 한권 남아 있지 않답니다. 이사를 하도 많이 다녀서 그래요. 젊었을 때 이사하면 후배들이 와서 도와주곤 했는데 그, 때마다 책이 몇 뭉치씩은 사라져요. 다 읽고 돌려달라고 했는데 돌아온 것은 한권도 없었지요. 하하. 뭐 그땐 다 그랬어요.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나 뭐라나...
그때 그 시집... 누구 가지고 계신 분 있으면 잠깐 빌려주시면 좋겠네요. 복사하고 돌려 드릴 테니.
임애월 : 와우~ 그 귀한 시집, 저도 꼭 한번 보고 싶네요.
혹시 모르죠, 이 글을 읽은 어느 분이 갖고 계신 걸 잠깐 빌려주실지...(웃음)
김우영 : 암튼 그 책을 안양에 계신 김대규 시인께도 보내드렸는데 재학 중이었던 수성고등학교로 전화를 하셨어요. 그분은 당시에 덕성여대인가 연세대인가 거기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업시간에 한번 와서 학생들에게 얘기를 해주라는 거였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남 앞에 나서는 거 싫어서 고사했더니 안양으로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담임 선생님(시조시인 유선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임병호 회장님과 함께 안양에 갔더니 허름했지만 안양의 문화예술인들의 명소였던, 지금으로 말하자면 실내포장마차에 안양 문화예술인들이 한 30명쯤 앉아있었네요.
그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거랍니다. 수원에서 ‘천재 시인’이 온다니 얼굴 좀 보자고 말입니다. 아이고 낯부끄러워라.
뭐, 암튼 책가방 들고 교복 단정하게 입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우영.
그분들에게 모두 한 잔씩 받아 마시곤 대취했더랬습니다.(웃음)
임애월 : 저도 몇 작품들을 찾아서 읽어봤는데요, 정말 타고난 천재성이 보입니다. 대단하셨네요.
김우영 : 천재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아마 시의 신(神)이 실수로 잠시 접신했던 모양이지요.
임애월 : ‘접신’과 ‘천재’는 같은 레벨입니다. 하하
1978년 약관의 나이에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셔서 수원문단의 전설이 되셨다고 들었는데 당시 분위기가 궁금합니다.
김우영 : 아이고, 제발 천재라느니, 전설이라느니 그런 말씀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잘 쓰고 계신 분들이 천재고 전설이지요.
제가 등단할 당시 수원엔 임병호 시인과 박석수 시인, 백도기 소설가, 오영일 소설가, 윤수천 아동문학가 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요 햇병아리 같은 스물 한 살짜리가 등단이랍시고 했으니 얼마나 대견했겠어요? 시인됐다는 그게 무슨 벼슬이라고... 암튼 기고만장했었답니다. 그리고 선배들이 사주는 술에 행복했어요. 그런데 정식 등단은 1978년이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월간문학에 보낸 작품이 가작으로 입선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당선작이 없었나?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얼핏 등만 보이고 사라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
지순(至純)한 은빛 날개를 털며
어느 날은 노을 근처, 서성이는
몇 마리 새를 보았다.
겨울 저녁
스산한 몇 자락의 바람이
전신을 스쳐지나
그대 고운 사랑 근처
더러는 하늘, 구름이나 흩어놓고 나면
어떤 내용으로
그대는 천천히 내게서 떠나가고 있는가.
눈 먼 자들의 긴 긴 잠 속에서
진홍으로 피어나는 꽃.
아아, 내밀한 가슴을 보이지만
관습이여 소스라쳐 돌아눕는
아픈 기억이여
오늘 우리의 주제는
시선 밖으로 달아나는 사랑과
꽃잎의 대위(對位).
눈이 내리고 있었다.
- 「회귀사(回歸詞) 30」 전문 / 1978년 『월간문학』 당선작
임애월 : 이 시를 읽으면서 ‘스물한 살에 정신연령이 정말 원숙하셨구나’... 생각합니다.
두 번째 시집 『겨울 수영리』는 몇 년도에 상재하셨나요? 수영리는 선생님의 고향이신가요?
김우영 : 1989년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활력이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 주변의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간신히 펴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첫돌 전인 것 같은데, 영등포 한강변 다리가 배경으로 보이는 사진이 한 장 있더라고요. 거기서 태어나 곧바로 수영리로 왔으니 수영리가 고향이지요. 선대들은 북한 평안북도 선천이고요.
임애월 : 네, 그러시군요. 김대규 시인은 그 시집의 작품해설에서 ‘김우영 시인은 비, 눈물, 술, 강, 바다, 안개 등 물과 깊게 관련되는 水性分의 動因을 거느리고 있다’ 그것들은 ‘직접적인 수성의 소재에서 착안된 것이지만, 그러한 즉물적인 제재들이 가난이나 현실적인 비애감으로 전이되면서 다시 (물)의 원형적 상징질료인 여성성과 사랑, 성과 죽음의 본류로 자연스럽게 유입되고 있음에 유의된’ 것이라고 했는데, 이후의 작품에서도 그 水性의 시어들이 자주 등장하거든요. 고향 ‘水營里’가 주는 ‘물’의 이미지가 아직도 작품의 배경으로 있는 스며있는 걸까요?
김우영 : 아마 누구나 그럴 거예요. 고향에 대한 추억은 각자 다르겠지만 결국은 그리움의 대상이겠죠. 그런데 제 고향 수영리는 이제 사라졌어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점령하고 있죠. 어렸을 때 초등학교 동창이지만 두 살 많은 이웃집 동창 원순이와 소꿉장난을 놀던 돼지우리 아래 언덕과, 청동기 창 같은 걸 주워 엿 바꿔 먹었던 야산은 이제 콘크리트 숲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끔 술 취해서 그곳에 갈 때가 있는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참 많이 변했습니다.
수영리와 수성시(水性詩)의 연관성에 대해선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어쩌면 그럴 지도 몰라요. 태생적으로 물과 연관돼 있거든요. 이름 좀 보세요. 우(禹)는 우나라 임금을 뜻하는데 정사는 안 돌보고 헤엄(泳)이나 치고 있으니... 거기다가 수영리가 고향이고, 노자의 상선약수(상선약수)를 지구상에서의 최고 진리로 알고 있으니 수성시가 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아 참 빼먹었네. 출신 고등학교 이름도 수성(水城)이고 사는 곳도 수원(水原)이구나. 거참 우연의 일치이긴 해도 그럴듯하네요.
바다와 그리 멀지 않고
산은 그저 고만고만한
여기에서 어느 날쯤
마른 풀잎을 밟고 서서 보면
한평생 저리 실하게 갖고 죽어갈 수 있던
수명이의 철 지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서로 낯이 익은 우리들 중의 하나였던
그 사람
눈발 속에서 기침처럼 돋는 솔잎을 보며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 「겨울 수영리에서」 전문
임애월 : 작품의 분위기가 가슴을 참 먹먹하게 만드네요. 그래도 한겨울 속의 푸른 솔은 결국 거친 눈보라를 이겨내겠지요.
김우영 : 이 시는 군대 가기 전 그러니까 1976년도나 77년도쯤에 썼을 거예요. 이 시에 등장하는 수명이란 사람은 내 친구 수만이의 형입니다. 술을 좋아하고 가끔 남과 시비도 잘 붙는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수만이란 친구는 대학에서 운동권에 속해서 도피하다가 잡혀 옥살이도 했고...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그 친구를 빨갱이니 뭐니 접근하지 않았고... 아마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겁니다. 내가 그 친구와 술 한 잔 하고 온 날 어느새 소식을 들었는지 우리 어머니가 절대로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셔서 웃은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 시절은 죄를 지었건 안 지었건 끌려가면 고문당해 빨갱이가 되던 시절이었지요.
임애월 : 혼란스런 시대를 건너오면서 많은 분들이 고통을 받기도 했지요.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입니다.
올해가 선생님 등단 40주년이 되는 해잖아요. 수원문단에서는 사실 원로급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요, 소회가 어떠신지요?
김우영 : 원로는 무슨... 등단 햇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좋은 작품’을 ‘오래’ 썼고 자연연령이 한 80은 돼야 원로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나이만 많다고 원로는 아니죠. 방금 전 얘기했듯이 좋은 작품을 오래 쓴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인품이 훌륭하다면 더 바랄 것 없는 원로가 되겠지만요.
그러니 나 같은 경우는 이제 겨우 60을 넘어섰고, 작품도 훌륭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쓰지도 않았고, 인품도 최하층이니 원로란 말은 당치 않아요.
그건 그렇고 정말 등단 40년이 됐네요. 후배들을 위해 한 일도 없는데.
임애월 : 아무튼 1970년대 수원문단을 단단하게 만든 몇 분들 중의 한분인 건 맞습니다.(웃음)
2003년에 출간한 두 번째 시집에서 ‘詩에 인생을 걸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시에 끌려 다니지도 않겠다’라고 하셨는데 아직도 그러신가요?
김우영 : 그래요. 시 뿐만 아니고 종교니 이념이니,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도 끌려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임애월 : ‘시인’이라는 호칭마저도 버리겠다‘라고 하셨는데 뭐가 그렇게 많이 무거우셨는지요?
김우영 : 버린다는 말은 앞세우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완성을 시키지 않고 발표에 신경 쓰지 않아서 그렇지 쓰는 행위는 여전합니다. 여전히 제 서재 책상에는 취재수첩으로 사용하는 메모지가 항상 있고 시의 초고들이 콩나물처럼 물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지요. 그걸 바라보고 씩 웃는 재미도 꽤 괜찮아요.
그러니 무거워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거워지지 않으려고 비우는 거지요. 내 작은 그릇에 넘치지 않게.
임애월 : 진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더 움켜쥐려고 야단인데, 버릴 것이 없는 분들이 자꾸만 비운다고 하니 참 묘한 기분이 듭니다.
김우영 : 하하하. 정곡을 꼭 찔러 치고 들어오시는구먼. 그래요 나 가난뱅이예요. 그러니 버릴 것 없어요.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내 마음과 오고감도 명확하지 않은 저 생각에서 비워야 할 것들은 여전히 보이더라고요.
임애월 : 저도 눈에 보이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랍니다.
시인들은 등단 후에 대부분 치열하게 문학에, 시에 미쳐서(?) 사는 게 일반적인데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시가 스스로 내게 걸어와야’만 시를 쓰시나요? 혹시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은 아니신가요?(웃음)
김우영 : 앞에서도 고백했지만 난 시에 미쳐봤잖아요? 그러니 됐어요. 이제 그만 미쳐도 돼요. 그리고 굳이 오지 않겠다는 놈을 억지로 붙잡아 놓고 거기다 시라고 이름 붙여주면 모두 시가 되나요? 적어도 시인이라면 말년의 박정만 시인처럼 시가 분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 되는 단어를 억지로 끼워 맞춰 만든, 또는 이게 구호인지 설명문인지, 유행가 중에서도 저급한 수준의 가사와 같은 글들을 시라고 내놓기 보다는 게으름 부리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솔직히 고백할게요. 시가 내게 걸어오기 위해서는 무협지에 나오는 절정이나, 현경의 경지는 돼야 하는데, 난 아직 멀었어요. 그 경지가 올 것 같지 않으니 일부러 한번 건방 떨고 배짱부려보는 거예요.
임애월 : 뭐 그 고집도 김우영 선생님답네요.(웃음)
선생님께서는 여행을 유독 자주 다니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곳과 인상적이었던 곳은 어디인가요?
김우영 : 지난여름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지방의 세계문화유산 답사를 다닐 때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런 건배사를 했어요. “여행은 낯선 것들과의 만남이고 가까워지는 과정이다”라고요.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주장했어요. ‘그곳에서는 문명의 이기를 쓰지 않고 무기도 내버려지고, 배나 수레 같은 교통수단도 쓸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안한(安閒)하게 자기 고장에서 살다가 자기 고장에서 조용히 죽는다’ 이런 생활을 노자는 이상적인 나라라고 했지요. 항상 전쟁이 벌어지고 굶어죽는 일이 흔했던 당시엔 그랬겠지요. 낯선 군대, 낯선 권력자, 낯선 나라는 곧 생명의 위협처럼 인식될 때였으니까.
그러나 난 우물 안 개구리로 안한(安閒)하게 살다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다른 나라의 풍경이 궁금하고 그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생각을 알고 싶어요. 호기심이 많죠. 어릴 때부터 같은 길을 피하고 다른 길로 일부터 돌아다닌 것도 그 때문일 거예요.
지금까지 다녀온 나라는 중국과 일본 각각 스물 대여섯 번에다가 러시아, 몽골, 미국, 캐나다, 멕시코, 오스트리아, 그리스, 이탈리아, 호주,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인데요, 가만 어디 빠진 곳 없나? 모두 만족한 여행이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지는 지난해에 다녀온 실크로드와 몇 해 전 갔었던 러시아 연해주 빨치산스크 숲속과 독립운동 거점지, 몽골 초원 등이었어요. 지중해를 보며 양고기와 맛좋은 와인을 먹었던 기억도 새롭고요.
임애월 : 정말 부럽네요. 몽골과 실크로드는 정말 저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랍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막혀있던 시야를 틔워주기도 하고, 직접 체험을 통해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기도 하지요. 물론 여행 후에는 시가 몇 편쯤 스스로 걸어 나오기도 했겠네요?
김우영 : 지난해 실크로드 여행 때엔 한 10여 편 썼는데 아직까지도 초고상태입니다. 제 놈들이 콩나물 대가리처럼 고개를 밀고 나올 때까지 둘 참입니다. 그리고 로마에 갔을 때도 한 열편 정도 써서 간간히 여기저기에 발표하기도 했어요.
잘 있거라
호텔 밖에서
새벽부터 울던 새야
투명한 바람이며
살며 고생 많았던
모든 우스들과 투스 놈들
기원전후의 시간들도
이젠 안녕
참 공손하게 손 벌리던 거지들과
늙어서 더 당당했던 성당, 옛 골목
거기 사는
이번 세상의 그대들도 반가웠다
그러므로
동행한 나의 생각도 이만 안녕.
- 「로마를 떠나며」 전문
임애월 : 앞에서 잠깐 노자를 말씀하셨는데, 선생님의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무위자연이나 상선약수... 등 노·장자의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르는데, 특히 「山吟」, 「寂滅」 등의 작품은 무슨 고승의 선문답을 보는 것 같거든요. 젊었을 때부터 노·장자의 사상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계셨는지요?
김우영 : 젊었을 때야 뭐 노자 장자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그저 그건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래야 남들과 대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교양도서’로 읽은 거지요. 근데 장자를 읽다가, 그 왜 유명한 ‘호접몽’ 이야기 있잖아요.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문득 무릎을 쳤어요. 그래,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나는 나다’라는 확신이 무너질 수 있겠구나, ‘지금 보이는, 생각하는 내가 허상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알음알이가 시작된 거죠. 그러면서 반야심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어요. 반야심경, 그렇잖아요? ‘그게’ 들어올 듯 하다가 나가버리고 겨우 붙잡아 놓으면 또 사라지고... 허긴 산중에서 화두만 붙잡고 있는 선승들도 깨우치기 힘든 그것을 딴 짓 하느라 바쁜 내가 쉽게 얻을 수 있겠어요?
「적멸」처럼 산에 들어도 산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산에 드니
산이 보이지 않았다
삶이여
자네도 혹 이럴 것인가
사랑
그대 역시
품에 드는 날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인가
만유(萬有)가 내 안에 들어 천지(天地) 그윽하던 날
산 속에서 산이 걸어나왔다.
- 「적멸」 전문
임애월 : 김대규 선생님 말씀처럼 인간과 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조숙함으로, 생각이 너무 앞서갔거나 아니면 정신세계가 너무 빨리 늙어(?)버린 게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하
김우영 : 아, 김대규 선생님이 무슨 예언가나 무당이에요?(웃음) 그런데 그 말씀대로 일찍 노화해 버린 건 맞는 것 같네요. 부정하진 않을게요.
임애월 : 신문사 재직 중에 노조운동으로 해직되기도 하셨고...
선생님의 과거가 파란만장했던 부분도 많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현실에 대한 실망(?)의 반동으로 현실도피적인 면이 문학작품에 스며든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김우영 : 과거 《중부일보》 문화체육부장 때 노조가 생겼어요. 젊은 후배기자들이 언론인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겠다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해요? 그래서 술값도 좀 내주고 어깨도 툭툭 쳐주고 했는데 윗선들이 그걸 아니꼽게 생각했다고 해요. 중국 연변 조선족 동포들의 생활을 취재해서 20일 만에 돌아온 다음날 해고 발령이 났더라고요.
그래서 직장을 잃은 백수들의 따듯한 품, 광교산에 다녔지요. 분노를 가득 안고 말입니다. 어느 날 옛 절터 나무 밑에 앉았다가 문득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고 난 뒤 분노를 흐르는 물에다 나뭇잎과 함께 띄워버리고 무심해졌어요.
그때 쓴 시가 「산음(山吟)」입니다.
조락(凋落)의 햇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광교산자락 오래된 절터
상수리나무 밑에 앉아 있는데
바람 속에서
산이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던졌다
나무가 잘 물든 나뭇잎 몇 개를
떨어트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자기들끼리 소리 내며 흐르던 물이
나뭇잎을 데리고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 「산음(山吟)」 전문
아래로 흘러내리지만,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물. 그때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작은 깨달음을 얻고 마음이 편안해졌지요. 그때부터 광교산은 나에게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수행처가 됐습니다.
그러니 내 시가 현실도피처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임애월 : 아, 네... 작은 깨달음의 동기가, 실직이 가져다준 절망이 그 토대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하하. 웃으면 안 되는 대목인데 웃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시에 끌려 다니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혹시 변할 수도 있을까요?
김우영 : 절대로 없습니다. 안 쓰면 안 썼지...
임애월 : 정말 단호하시네요.
사실 자꾸 고사하셔서 이 자리에 모시기도 힘들었는데요. 겸손도 지나치면 오만하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조금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요.(웃음)
김우영 : 그런가요? 그런데 오늘도 ‘대책 없는 떼쟁이’ 임애월 주간이 아니었으면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임 주간의 밀어 붙이기는 내 능력으론 피할 수 없는 수준이니까요. 하하하
임애월 : 뭐 저는 떼쟁이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세 번째 시집 『부석사 가는 길』을 발간한 지 15년이 됐잖아요. 첫 시집 빼고 등단 이후 40년 동안 시집이 2권이면 과작하시는 시인이라 치더라도, 사실 게을러도 너무 게으르신(?) 거 아니세요? 아주 오래 전에, ‘김우영 시인은 천부적인 조숙함(인간적·예술적)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앞날이 불안하다’는 그분의 말씀이 왠지 들어맞는 것 같네요.(웃음)
네 번째 시집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김우영 : 어쩌면 죽기 전에 딱 한번 쯤?
임애월 : 그건 여쭤보지 않은 걸로 하겠습니다.(웃음)
김우영 : 사실 아깐 별별 핑계를 댔지만 게으른 거 맞아요. 근데 조급할 일이 없지 않아요? 앞으로 좀 더 게을러지려고요. 그동안 신문기자다, 시정 신문 주간이다, 바쁘게 살았더니 시간도 빨리 가버리더군요. 연세 많으신 분들께는 송구스러운 얘기지만 이제 내 의지대로 살날이 얼마나 되겠어요. 느릿느릿 살아 볼랍니다.
임애월 : 오늘도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김애자 시인님, 최영선 시인님과 수원화성 성곽도 부분적이긴 합니다만 함께 돌아보고... 참 좋네요.
이제 막걸리 한 사발 드시러 내려가시죠.
김우영 : 고맙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이렇게 찾아주셔서요. 그리고 과찬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취조 당한 것 같았는데, 막걸리 마시자는 소리가 제일 반갑군요. 하하.
- 한 시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 시인의 삶을 듣는 것이다.
바쁘지만 느리게
비울 게 없지만, 그 비운다는 생각마저도 비우며 살아가는
조금은 고집스럽고, 조금은 게으른(?)
김우영(金禹泳) 시인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언저리에서도
이 봄, 다시 새닢들은 돋아나리라 -
■□ 시인의 자선시 5편
출토, 창성사지 외 4편
김 우 영
발굴단이 조심조심 파헤쳐 간
흙 속에는 돌멩이들 속에는
기와 조각도
깨진 사기그릇도
잠자러 들어간 애벌레들도 있지만
잠에서 아우웅 기지개 하며 깨어난
천 년 전의 바람과
그때 그 가을 햇살도 보였다
푸스스 머리칼 털며 고개 든
생각도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므로 내가 눈을 떴다
감았다
다시 천 년 전의 가을이었다
어머니의 바다
-종달리에서
어머니 내 어머니
저는 이제 당신의 짙푸른 가슴이 전해주는 하얀 말들을
기어이 다 듣고 말았습니다
지천명 나잇살 먹은 뒤
종달리 바닷가를 거닐면서
이렇게 유한한 흔적인
당신의 이름과 내 이름을 생각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당신 한생의 깊은 가슴 속에 던져 놓아
몸 불리거나
혹은 뼈를 남긴 언어들과
해초와 물고기들이
바라보았던 내 몸의 살을
나도 보고야 말았습니다
바람 속에서 절뚝거리며
오름을 오르다가
내려와서 해녀의 작은 무덤 앞에 섰다가
다시 내려오고 내려와서
나를 놓아버리고 싶었던
종달리 겨울바다
당신께서 제게 하고 싶어 했던 그 무수한 말을
이제야 겨우 알아차리고 말았습니다
아침, 함덕바다
지난밤 잘 잤는가 그대
그날 알몸 드러낸 채
사랑해요사랑해요 하얀 포말처럼 안겨오던
어느덧 아침이 되어
제일 먼저 매무새 가다듬고
심연(深淵)에서 초록 해초줄기 몇 개
모래위에 내어 놓던 여인아
해 떠오르고 구름 지나가고
다시 바람 불어오고 비 내리고 눈 내리고
이제 나 그 오래된 바다 떠나왔다
이번 생애의 생각도 그 바다에 두고 돌아왔다
활화산이었던 전생의 기억으로 굳은 현무암
거기 잠시 내려앉았다 날아간 바닷새들
함덕바다여
늘 떠나보내는 가슴
짙푸른 멍울 해저(海底)에 감추고
당신 사랑해요사랑해요 밤새 뒤척이던
그대 지난밤은 잘 지냈는가
길 위에서
그래 이것이 경계가 아니었으면
참 좋겠네
더 이상 전생과 후생
오거나 가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네
나 이 길 위에 서 있을 때
구름 편안히 모였다 흩어지고
바람은 선선히 몸을 투과해
허허 웃으며 걸을 수 있다면
기교가 다하고
생각의 뿌리가 모두 드러나
내게 순명(順命)하며
저 위대한 도랑물이나 풀잎처럼
낮아져
그저 흐르거나 흔들릴 수 있다면
아, 참 좋겠네
부석사(浮石寺) 가는 길
다시 길 위에 선다
다행이다 햇살들은 천지사방에 흩어져 있다
그리하여 헛제삿밥으로 산 자들 제사 지내고
돌아오기 위해 이 길을 간다
어디더라? 여기가
만났던 듯한 구름, 저 산꼭대기의 잘생긴 소나무
바람과 함께 산중에 들어
있는 듯 있는 듯 내 돌아갈 근원을 본다
가쁜 호흡 뒤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길들이 숨어 있지만
어쩔거나! 이 또렷한 경계(境界)들을
무량수전, 안양루 오르는 계단 가운데 앉아
나 아직 적멸을 생각하지 않는다
허나 오늘은 무애(無碍)
스스로의 빛남
막을 길 없다
■金禹泳 약력■
<문학경력>
○1957년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수영리 출생
○1975년부터 시문학 동인지 「시림」 창간 주재
○1975년 수성고교 재학 중 시집 『당신이 외치는 문』 발간
○1976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 입선
○1978년 건군 30주년 기념 현상문예 시 당선
○1978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 당선
○1981년 《시조문학》 시조추천
○1989년 시집 『겨울 수영리에서』 출간
○경기시인상, 경기문학상, 수원시인상, 수원문학상, 한하운문학상, 수원시문화상 등 수상
○시집 「당신이 외치는 문」「겨울 수영리에서」「부석사 가는 길」「젊은시 젊은 시인」(공저) 「그대 걸어갈 광야는 멀다」(공저)
<일반 경력>
○1983년 「수원시사」 편집실무 및 집필위원
○1987년 「화성군사」 집필위원 및 상임간사
○1988년 수원문화원 월간 「수원사랑」 주간
○1988년 수원시청 발행 월간 「우리수원」 주간
○1991년 중부일보 문화부 기자 입사
○1993년 중부일보 문화체육부장
○1995년 「수원시사」 편찬위원 및 집필위원
○1996년부터 2017년까지 수원시정신문 「늘푸른 수원」 및 수원시 인터넷신문 「e수원뉴스」주간
○수원의 민속 「길마재 줄다리기」(95년) 「못골 호신당제」(97년) 「원천 역말 서낭제 및 우물제사」(98년) 등 발굴 및 고증
○현 (사)화성연구회 상임이사, 경기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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