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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마음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烘雲托月
百石토피아 백산솔안마을考
2010년 태백시청 윤순석
1. 들어가는 말
옛날에 황지로 들어오는 소금길 중 최단거리는 어딜까?
동해바닷가 호산에서 황지로 들어가는 소금 길은 어디였을까?
호산 바닷가에서 월천상류를 향해 물길따라 올라오다 보면 풍곡마을에서 남쪽물과 북쪽물이 합쳐진다. 남쪽물은 덕풍계곡과 가곡휴양림, 그리고 석포 석개재 방향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여서 내려온 것이고,
북쪽계곡은 동활계곡이라고 통칭하고는 있지만 계곡 상류로 좀 더 올라가면, 북쪽에서 남향하여 내려오는 신리쪽 물과 백병산에서 동쪽에서 내려오는 동활 계곡물이 합쳐진 것이다. 서쪽의 원조 동활계곡으로 향해야 태백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월천하류에서 태백시까지 올라가는 경유지역 명칭이 묘하다. 옛날 얼음 빙자 빙곡氷谷이라고 하던 마을은 음운변화로 덕풍계곡德風溪谷이 있는『풍곡』이 되었고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도원桃源이라고 하던 곳은 지금은 발음이 와전되어『동활』이라고 변했다.
빙곡이라 함은『우거진 원시림속이여서 시원하기가 얼음 같다』는 과장법인 것 같고, 동활계곡은『무릉도원처럼 풍요롭게 살지만 길이 험해 외지인 출입이 어렵다』는 뜻이라 생각된다. 동활계곡의 횡계재를 서쪽으로 넘으면 오십천 발원지인 백병산 구사리 백산이 나온다. 횡계재는 명칭만 봐도 『남북선상 백두대간 분수령 경계를 동서 횡으로 관통하는 고개임』을 알 수 있다.
계속 직진하여 고비덕재를 넘으면 태백시 통리지역 원통골이 나오고, 원통골 입구를 빠져 나오면 우보산 느릅령 산자락이 끝나는 부분으로 바로 솔안 백산의 동구洞口다.
<원조 동활계곡과 신리계곡의 갈림길. 안내도에서는 “현위치”로 표기되었음>
2. 백석평 위치에 있는 백산
백산이란 지명은 유래가 여러 가지다.
하나는 흰백자 백산白山이다. 백병산의 절벽이 흰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산 이름이 마을이름이 되어 백산이라고 한다는 설이 있다. 철암출신 조기현씨의 말을 빌면 어릴 때 동네에서 백병산을 『흰백산』이라고 불렀다한다. 또 하나는 일백백자 백산百産이다. 쌀 백가마니나 거둘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백산이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말이 제일 유력하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가지를 더 들면, 잣나무백자 백산栢産이라고 하는 것도 있다. 서기1736년 능호 이인상이 태백산을 여행하고 지은 ≪유태백산기遊太白山記≫에서는
20리를 가서 작은 돌산봉우리를 지나는데 우뚝 솟은 것이 수십장 높이이고 투구모양과 같이 생겼는데 이것을 철암이라고 한다. 또 10리를 가서 방허마을(方墟村 : 방터골)에서 잤다. 가는 동안 길옆은 대부분 잣나무였는데 대나무처럼 죽죽 뻗어 있었다. 잣나무 가지는 무성한 잎으로 푸른 모양의 덮개가 되었는데 사이에 둔 흐르는 계곡물을 양쪽에서 다 덮었다.
<원문중 해당구절>
行二十里過小石峰 孤起數十丈 如冑鍪狀者曰鐵巖 又行十里宿方墟村 路邊皆五鬣松 其直如筠 上枝葱然成蓋 夾水兩崖而立。
라고 되어있었는데 조선시대 가로수는 대부분 관청에서 지정하여 심는데 잣나무가 주를 이루었다한다. 잣나무는 잣나무 백자柏字로도 표기되어 잣의 생산지 즉, 백산柏産으로 불리어 졌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전의 기록중 일백백자론의 근거가 될 기록이 있다.
1664년에 황지지역을 여행한 노서 윤선거의 ≪파동기행≫란 기록이다.
1664년4월14일 .......... 느릅령 꼭대기에는 백석이라는 곳이 있는데 척주陟州 (삼척)옥원沃原(원덕옥원리)의 빙곡氷谷(풍곡)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난 길로 올라오면 이곳에 도달한다. 일찍이 안숙晏叔(鄭瀁.1600∼1668, 자를 안숙, 송강 정철의 손자)과 함께 빙곡氷谷을 보기로 약속했었던 것은 백석 땅을 보려는 이유에서였다. 백석이라고 명명한 것은 그 터가 평평하여 백석의 논을 일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지은 이름이지만 지금 지세를 보아하니 웅덩이 유구遺構는 있으나 관개灌漑할 물이 없다. 가물고 건조하고 물도 차서 부쳐 먹을 만한 좋은 땅이 아니다. 안숙이 잘못들은 것 같다.
<원본의 해당구절>
......... 楡峙之上有百石地者 沃原氷谷之上游路達于茲 曾與晏叔期觀氷谷者爲觀百石地故也 百石之名爲其平原可作水田百石地 而今觀地勢則有停瀦而無川源 旱則乾水則冷 非可食之良田也 晏聞似錯歟
라는 내용이다. 이글에서 노서 윤선거는 느릅령 꼭대기에 백석 땅이 있다고 믿고 온 것 같다. 하지만 이보다 2년 전인 1662년에 삼척부사 허목이 편찬된 ≪척주지≫에는
느릅령에서 서쪽으로 십리를 가면 황지가 있고 서남쪽으로 오리를 가면 백석평이다. 또 서남쪽으로 20리를 가면 천천(뚜르내)이다.
<원본의 해당구절>
自楡峴西十里黃池 西南五里 百石坪 又西南二十里穿川
라고 하여 백석평은 느릎령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오리거리에 있다고 하였고, 현재 그 거리정도에 솔안 백산이라는 태백에서는 드물게 넓은 농토의 마을이 있다. 따라서 백석평은 백산을 말하는 것이고 백산은 일백백자 백산이다.
3. 百石坪의 由來
여기서 나는 『산속의 백석지라는 곳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 당시 사람들이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을, 조선중기 집권노론의 중추세력들이 성지순례나 하는 듯 찾아보려는 이유가 무엇이고, 또 왜 그렇게 넓은 인지도와 깊은 관심을 보였을까』에 주목했다.
앞에 인용한 ≪파동기행≫에서 느릅령에 오기 3일전 삼척에서 출발할려고 할 때의 상황을 기록한 부분을 보자.
1664년4월11일
삼척사또 金建中이 일찍 나오고 안숙과 중연이 함께 왔다. 모여서 동헌에서 식사를 하려고 하는 데 중연이 먼저 들어왔다. 나와 안숙 정양은 함께 옥원역沃原驛(삼척원덕 옥원리)으로 갈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구생이 갑자기 간성에서 와서 관아에 있는 안숙에게 서부인께서 팔꿈치에 종기가 생겼다는 말을 전했다.
안숙이 이를 듣자 황망히 바로 말을 달려 북쪽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옥원으로 가는 것은 이룰 수가 없게 되었다.
옥원은 척주의 오지요 난리를 피하는 장소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옥원을 거쳐 빙곡을 찾아가자면, 더욱 깊고 깊은 계곡으로 더 들어가고 농토는 비옥하니 (비상시에) 거처할만한 곳이다. 그래서 안숙은 나에게 꼭 가봐야 한다고 했었다. 깊은 뜻이 있었지만 갑자기 헤어지게 되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원문중 해당구절>
十一日 建令早來晏衍偕來 將會食于衙軒仲衍先入 余與晏叔同治沃原驛之行 丘生忽自杆來傳衙內徐婦人之病 腫生肘上 晏叔聞卽慌忙卽定回鞭北歸之計 沃原之往遂不諧矣 蓋沃原乃陟州之奧區也 避地之所無過於此 由沃原而尋到氷谷則又更深邃土厚可居 故晏叔必要余行者 深有意焉而遽爾分携 悵然奈何
이 대목에서 잠깐 ≪파동기행≫의 저자와 등장인물을 살펴보자
저자인 노서 윤선거尹宣擧(광해2년1610-현종10년1669)는 서인의 조상이나 다름없는 성혼의 외손자이고, 소론의 영수 윤증의 아버지다. 金集의 門人으로 宋時烈, 尹鑴 등과는 동문수학한 동기동창이다. 인조반정 서인정권의 엘리트 지배층으로 배청척화파다. 1636년12월 병자호란으로 江華에 피난한 후 성이 함락당할 때 妻는 자결하였으나 혼자 평민의 복장으로 탈출하였다.
1651년(효종2)이래 사헌부지평, 장령등이 제수되었으나‚ 강화도에서 대의를 지키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역학과 예론에 정통하였다.
송시열과는 평소 친했으나 송시열과 윤휴가 학문적으로 대립하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관계로 송시열이 섭하게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윤선거가 죽은 후, 아들 윤증이 스승이자 아버지의 동창인 송시열에게 망자에 대한 의례적인 덕담을 적는 묘갈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송시열이 『훌륭하다고 하는데 나는 모르겠고 남들이 그러더라』라는 정도의 글을 썼고 윤증이 기가막혀 고쳐달라고 애원하니 『..바닷가에 가서 물어봐라』라고 강화에서 훼절한 일을 꼬집기까지 하여 노론과 소론이 분화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안숙 정양은 송강 정철의 손자다. 원래 정철의 둘째아들은 광해군 동인득세 시대에서 겨우 살아남아 인조반정후에 강원도 강릉도호부사를 하다가 수명을 다한다. 그 첫째 아들은 기호학파로 병자호란중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전사하고, 셋째 아들이 바로 안숙 정양인데 강화도 함락시에 화살을 맞고 가족들과 자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살아남아 태백산 주변인 영월 상동 내리와 봉화춘양등지를 은거하며 태백 5현이라고 불려지다가 50이 넘어서야 벼슬길에 들어 1664년 이 글 당시에는 강원도 간성군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서울도성 창의문 문루에 걸린 인조반정 공신록≫
※일등공신 첫 번째가 김류, 이등공신 첫줄이 김경징임
삼척사또 김건중 또한 인조반정 일등공신 김류의 손자다. 아버지 김경징도 반정이등공신이지만 병자호란 당시 검찰사의 총책을 맡았으면서 황당 무대책으로 강화도를 적에게 내준 죄가 커서 죽여야 한다는 들끓는 상소 끝에 사사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었일까?
살펴본 것과 같이 다들 인종반정을 통한 집권세력으로 배청척화정책을 주창하다가 청나라의 청룡도 맛을 실감한 사람들이다.
이 당시, 왜란과 호란, 양란의 혹독한 피해를 입은 조선민중의 생활은 피폐할 대로 피해해져 파탄 그 자체였다.
특히 병자호란은 권력욕만으로 어설픈 쿠테타를 성공시킨 서인중심의 인조반정 집권공신세력들이 명분론에만 사로잡혀 전화戰禍를 자초해놓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한 무능의 극치를 보인 너무나 한심스런 전란이였다.
이런 정권 탓에 50만명의 조선백성이 전쟁포로로 잡혀가 이국땅의 노예로 처참한 생활을 겪었고, 그나마 많은 돈을 치르고 귀국시킨, 누이들과 생모들을 사회적 차별감 때문에 환향녀라는 이름으로 집에 들여놓지 못하고 자괴감과 집단스트레스를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평소 여진족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만은 남아있어서 상처 난 자존심을 치유하려는 ≪박씨부인전≫같은 카타르시스적 문학작품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각 개개인은, 씨족마을 단위를 넘어 고을전체가 아니 수십 고을이 일거에 몰살당하는 가공할 전대미문의 파괴력을 양란을 통해 보고, 듣고, 겪고 난 후였기에, 국가의 자존심의 회복이나 북벌을 통한 보복 보다는 전쟁의 공포와 위해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하여 종족의 안전보장을 확고히 하면서도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는 땅 즉, 『먹고 살만한 농토가 있으면서도 전화부지처戰禍不至處(전쟁의 참화가 이르지못하는 곳)인』깊은 산속 아지트를 동경하게 되었다.
<겸암 유운룡의 도심촌 유적비>
한 예로서 서애 유성룡 일가가 태백산으로 피난한 일화는 유명하다. 즉, 서애 유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의 ≪겸암집≫이란 문집에 의하면, 겸암 유운용이 54세 되던 해인 1592년 임진년 사복시첨정으로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했었다고 한다. 그해 4월에 왜란이 일어나니, 동생인 서애 유성룡이 선조왕에게 형은 모친을 모시고 낙향하여 살도록 해달라고 울면서 호소하였다고 한다. 선조의 윤허를 받은 후, 태백산 아래로 가서 일가를 보전한 일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적혀있다.
이 일이 실록에는 어찌 기록되었을까 궁금하여 선조실록 4~5월조를 모두 찾아봤으나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전쟁의 경황에 사초조차 관리가 안되었던 것 같다.
○1592년 임진년 4월 왜변이 일어나서 대부인을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대부인(겸암의 모친)은 1590년 경인년부터 서울집에 모셨다. 왜란으로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할 때, 문충공 유성룡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울면서 왕에게 고하길『신은 마땅히 죽든 살든 임금님 어가를 따르지만 집에는 노모가 계시니 형 유운룡의 벼슬을 해제시켜 어머니를 구완하게 하여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 불쌍히 여겨 허락했다. 겸암선생은 동생 문충공 유성룡과 손을 잡고 통곡을 한 뒤에 헤어져 모친을 등에 업고 한 집안 백여 식구를 거느리고 동대문을 나섰다. 풍양(남양주군 진접읍)에 가서 신문 밖에서 잠시 묵었다.
○5월에 현등사로 가서 잠시 묵었다. 현등사는 가평현에 있다. 1592년 6월 화악산에 들어갔다. 왜놈들의 주변에 출몰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조종사로 옮겨가서 머물렀다. 왜병이 주변사방에서 출몰했지만 다행히 산이 깊어 그곳까지 들어오지는 못했다. 미지산에 들어가서 소설사에 머물렀다. 절은 양근군(※양근군과 지평을 합하여 양평군이 됨)에 있다.
○7월에 용문산에 들어갔다.
○8월에 관동에서 죽령을 넘어 풍기로 들어갔다. 이렇게 주변을 경계하면서 위험하고 힘든 여정을 이어갔다. 경운스님은 시종 열심히 길을 안내해줬다. 부석사에 가서 머물렀다. 절은 순흥부에 있다. 용수사에 가서 머물렀다. 절은 예안에 있다. ○이때 왜놈들이 평창에서 구현을 넘어오니 겸암선생은 어둠을 타서 산 넘고 물 건너서 용수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신전촌으로 거쳐를 옮겼다. 촌은 안동부 서쪽 학가산 아래에 있다.
○9월에 하외마을로 돌아왔다. 며칠을 머물다가 다시 예안에서 봉화로 들어가 태백산아래 도심촌에 들어가 살았다. 그야말로 풍찬노숙風餐露宿, 들판에서 밥먹고 이슬 맞으며 자는 생활로 낮에는 쥐 죽은 듯 엎드려 있다가 밤에만 이동하면서 주요 길목 사이로 적을 피해서 깊은 골짜기로 들어왔기에 식구들을 온전하게 할 수 있었다.
※ 태백산아래 도심촌이란 곳은 지금의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현동골이다. 황지에서 태백산 사길령을 넘으면 천평공군부대이고 이곳에서 곰넘이재만 넘어 참새골 물길 따라 내려가면 도심촌이다.
<원문 해당구절>
萬曆二十年壬辰 ○四月 倭變起 奉大夫人南下 大夫人 自庚寅就養京第 至是大駕將西巡 文忠公在相位 泣白於上曰 臣當死生從 羈絏 家有老母 願解兄職 使救母 上憐而許之 先生與文忠公 握手慟哭而別 負大夫人 率一家百口 東出國門. 至豊壤寓新門外. ○五月 寓懸燈寺 寺在加平縣. ○六月 入花嶽山 倭聲 逼近故也. 移寓朝宗寺 倭兵四出其傍 而賴山深不至其處. 入彌智山 寓小雪寺 寺在楊根郡. 七月 入龍門山 ○八月 自關東踰竹嶺至豊基 備經艱危 有僧敬雲 終始指路甚勤 寓浮石寺 寺在今順興府 寓龍壽寺 寺在禮安縣. ○時倭自平昌駒峴 先生乘夜跋涉 得抵龍壽 移寓薪田村 村在安東府西鶴駕山下. 九月 還河隈 留數日 復自禮安至奉化 移寓太白山下道心村 風餐露宿 晝伏夜行 間關避賊 闔門獲全.
이 밖에 김굉필의 외증손이자 이황, 조식의 제자인 한강 정구(중종38년 서기1543~광해12년 서기1620)도 봉화 춘양면 춘양상고쪽 서당동에서 잠시 살다갔고, 또 문충공 김성일의 아들 김잠도 법전 옥천리에 와서 살았으며 강흡(1602~1671)형제도 법전에 들어와 살면서 지금의 법전 강씨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 외에도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1593 ~1654), 동추 김람, 손우당 홍석, 정래정등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터를 보기위해 태백산 남록에 와서 살다간다.
이백년 태평성세속에 평화롭게 살다가 맞이한 임진왜란 때에는, 이렇게 풍찬노숙風餐露宿 주복야행晝伏夜行 즉, 이슬 맞으며 자고 비바람 속에 밥 먹으며 낮엔 숨죽이고 있다가 밤에만 이동하는 이런 고생을 하면서도 가족의 생명을 십분보장할 수가 없었기에 미리 전란에 대비하여 아지트를 눈여겨 봐둬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아닐까? 이후 병자호란까지 겪은 뒤에는 이런 생각이 더욱 절실해 졌을 것이다.
앞의 글 ≪파동기행≫에서 동해바다 옥원, ⇒빙곡, ⇒도원을 경유하여 태백산으로 들어가려했던 대화내용에서도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다. 이 로선에는 서울이나 대도시와 같은 정치적 군사적 비중이 높은 전략요충지가 없었고, 역사상 한번도 적의 침입이 없었던 경로였다. 물론 태백산도, 일본군국주의군대의 조선의병소탕전이나 한국동란 이전까지, 단양 풍기간의 죽령이북으로는 지리적으로 서울도성에서 가깝지만 전화戰禍를 입은 적이 없었다.
전쟁의 화가 이르지 못하는 깊은 산속 아지트. 그러면서도 백석의 쌀이 소출되는 농토가 있어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는 곳. 이런 곳이 이 시대의 유토피아였다. 이런 곳을 한마디로 백석지라고 표현한 것이다. 백석지를 찾는 이유는 바로 종족의 안전도피처였으니 백석지는 여러 곳이 가능하다.
따라서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다. 태백산에 좀 넓다는 경작지는 다 백석평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동쪽 바다에서 황지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구사리 백산과, 남쪽 춘양에서 곰넘이재를 넘어 태백산 공군부대 천평으로 올라오는 곳에는 춘양애당리 백평교가 있다. 이것으로 볼때 산속 가장 깊숙한 백석평로 가는 경유지나 길목도, 백석 또는 백산이란 촌락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태백산 공군부대에서 곰넘이재 남쪽 춘양 애당리 참새골 백평교>
교통이 발달하여 산길과 터널이 뚫린 지금에 비해, 병자호란이후 태백산의 영역은 상당히 넓은 영역이였다. 죽령입구 풍기와 순흥부 이북의 부석, 봉화, 법전, 춘양, 석포, 현동 등지는 개간이 덜된 산간지역이였을 것이다. 삼척 가곡등지도 지금과 같이 태백산 영역이였고 가곡에서 낙동강상류 동쪽지역은 거의 무인지경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춘양까지는 어떤 적도 쳐들어가봤자 실익도 없는 곳으로 여겨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태백산 사고지까지 만들었으니 그 이상 깊은 산속인 황지는 논농사도 힘든데 굳이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태백산남록까지도 안전치 못한 상황이 오면, 논농사도 안되는 즉, 경제적으로 궁핍해질 황지방향으로 숨어들어 가야하지 않은가?
봉화 춘양면 애당리의 참새골 석문동은 백두대간인 삼거리, 깃대베기봉, 부쇠봉을 경유하여 태백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인데 전쟁이 이 돌문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자시에만 돌문이 열린다는 도교적 색채의 자개문의 전설이 남아있다. 양란이후에 퍼진 대중적인 불안감이 산속에 백석평이란 유토피아 세계를 설정했고 나아가 종교적으로 십승지나 정감록류의 비기와 도참, 민간신앙을 확산시켰다.
백석평이란 단어형성에는 이러한 역사적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평야지대에서는 만석꾼은 있어도 만석지는 없었다. 산속에서는 한계 수확치인 백석 수확의 땅이 발견되면 그것은 뉴스거리 아닌가? 또 그 자체로 의미가 전달되니 의사소통의 기본단위 즉, 단어로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던가? 우리지역의 사십마지기도 농토크기나 단위를 나타내는 말로 산출량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이런 류의 지명을 주변에서 찾아보면, 공군부대 자리인 천평(지명은 보통 뜻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음을 나타낼 때도 있다), 윤선거의 느릅령 백석평, 솔안 백산, 도계 구사리 백산, 춘양참새골 백평교등이 있었다.
가공할 양란의 피해를 실감한 백성들의 종족보존의 염원이 전란도피처로서 산속을 집착하게 하였고 그 산속에서도 소출이 많이 나올 만한 곳을 동경하여 농사산출량 또는 넓이를 그대로 지명으로 삼아 상상 속에 백석지라는 곳을 만들어 냈다.
4. 마무리
전란속에서 종족보존과 가문의 안전은 실로 지상과제다. 의병을 일으킨 것도 나라에 충성하기 위한 것이였다고 하지만, 실은 자기 동네, 자기 가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어났다. 왜란초기 의병이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내 가족만 안전하면 I don't care.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노골적인가?)
듣기 좋은 말로 다시 해보자.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평시 도성체계였다가 전시에는 산성방어체제로 바뀌는 전략을 구사했다. 각 가문에도 산성에 대비되는 은신처에 처자식을 숨겨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한편 동양의 사고가 서양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년호 사용에서 실마리를 볼 수 있는데, 서기는 끝없이 이어가지만 육십갑자는 돌고 돈다. 힘 있는 놈이 당장은 세를 펴도, 산속에 때를 보고 있다가 약세가 다시 강세로 될 때 나와서 물리친다는 생각이 아닌가.?
조선중기 인민들은 전란의 공포를 겪은 후부터 적들이 점령 후순위 땅으로 생각하는 곳 중에 크게 농경가능한 곳을 도피처로 염두에 두고 살면서도, 보다 더 깊숙한 산속에 종족보전의 확실한 보장과 경제자급이 충족되는 상상속의 백석지를 설정하여 동경했다.
마음속의 동경과 염원, 상상은 구체화 가시화가 요구되고 관념은 현실로 진화된다. 책속의 홍길동에게 고향이 생기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덤이 생기듯, 태백산 백석지는 척주지 편찬년인 서기1662년에 벌써 "태백산 우보산 느릅고개에서 구문소로 가는 서남쪽 5리 거리에 있다"고 구체화되었다.
그곳에는 지금 백산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