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에 구름이 걸렸다가 넘어가는 것을 보며 배낭을 멨다. 날씨 조짐이 심상치가 않다. 조금만 참아주면 좋으련만 산의 날씨라는 것이 예측할 수가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되겠군. 출발하자마자 몇 방울 비가 듣기 시작한다. 점심 먹을 장소까지 이동해야 비를 피할 데도 없으니 차라리 비가 더 오기 전에 여기서 먹는 것이 낫겠다고 우차장이 길섶으로 안내한다. 나무 등걸이나 바위에 앉아 도시락을 꺼내니 삼각김밥 3형제가 나란히 들어 있네. 다른 도시락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한국에서 멋어본 삼각김밥 생각을 하며 밥 한 입에 물 한 모금 하며 2개를 꾸역꾸역 먹어 치웠다. 나머지까지 억지로 먹으면 도리어 탈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도로 집어 넣고 비에 대비한 준비를 한다.
체온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긴팔 셔츠를 덧입고, 발목에는 이번에 새로 장만한 반스패츠를 채웠다. 산에 다니다 보면 신발에 물이 들어가는 것이 가장 고역이었다. 스패츠는 꼭 눈이 들어갈 것에만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비 또는 돌 등의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하는, 쓰임새가 다양한 장비라고 하는 걸 배웠다. 머리에도 새로 산 고어텍스 모자를 썼다. 다른 사람들은 고어텍스 자켓과 바지에 우비까지 중무장을 하는데 하늘을 보건대 그리 무자비하게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으니 걸으면서 땀이 나면 비에 젖는 것보다 때로는 못하다는 사실을 감안했다. 나만 준비하면 되나? 귀중품이 있으니 배낭 카바는 기본이지.
가볍게 걷기 시작하는데 유난히 돌이 많은 길이 미끄럽다. 거기다 이제부터 경사가 심해지니 긴장이 되는군. 내가 빨리 걸어서 자기도 자꾸 속도가 빨라진다고 우차장은 타박이 심하다. 그 말을 듣고 서서 쉬면서 뒤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는데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잠깐 고민을 했다. 이제 겉옷은 거의 다 젖다시피 했다. 그냥 이대로 가야 하나, 아니면 남들처럼 지금이라도 비옷을 꺼내 입어야 하나? 이고문님은 오늘 따라 앞서서 잘 걸으신다. 마치 자신을 테스트라도 하는 양.
어느 정도 올랐을까? 멀리 녹아내린 눈이 보이고 계곡에 아직도 두꺼워 보이는 얼음이 한 겹 덮여 있다. 당연히 기온이 내려가 팔에 소름이 돋는다. 비는 그쳤고 햇살이 여우처럼 반짝이는데 빗물을 머금은 나무와 꽃들이 한층 싱그럽다. 수피가 독특한 나무도, 조롱조롱 꽃인지 열매인지를 매달고 있는 식물도 모두 반갑다. 나무 이름은 묻지 말라고 했는데 혹시나 싶어서 수피가 특이한 나무가 무언지 아느냐고 우차장에게 물으니 '저노므시키'란다. 다음에 또 물으면 '간나새끼'라나? '나무 木'자를 일본말로 '기'라고 하니 우스갯소리를 하는 모양인데 처음에는 진짜인 줄 알고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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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가면 산장이 보인다고 우차장이 일러 주었다. 이제부터는 눈길이다. 싸늘한 눈바람이 몰려와선 한 차례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한여름에 피서는 확실히 온 셈이군. 한국은 지금도 30도를 오르내릴텐데... 눈길이다 보니 길도 미끄럽다. 스틱을 꺼내 중심을 잡아가며 올라가다가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조심조심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살살 걷다보니 산장이 코 앞에 보인다.
걸음을 멈추고 보니 앞 위쪽으로는 양쪽에 우뚝한 봉우리가 있고 그 아래는 설사면이 펼쳐져 있는데 여기도 온갖 색상의 텐트가 만발한 꽃이다. 여기까지 저 텐트와 필요한 물건들을 지고 올라오기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무래도 대다수가 젊은이들인데 우리와는 즐기는 문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나라 젊은 사람들은 3D업종이라고 힘든 일을 피해서 직장을 잡기 어렵다는 말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콘도나 펜션 아니면 민박을 정해서 즐기지 이렇게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 면을 보면 아무래도 정신력에 차이가 나지 않을까?
오후 2시 15분 마지막 힘을 모아 가라사와( 학澤 )산장에 도착했다. 해발 2350m란다. 산장 입구에 놓인 의자에 일찍 온 사람들이 모여 주변을 감상하고 있다. 김차장이 와야 방 배정이 가능하니 잠깐 쉬라는 말을 듣고 벤치에 자리를 잡은 후 커피물을 준비해 가져온 비스켓과 커피로 상을 차렸다. 아! 이 분위기와 어울리는 향이라니... 열심히 장비를 챙겨 지고 오신 이고문님 덕에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시간이다.
산장에서는 9시에 소등을 한다, 비누와 치약을 쓸 수 없다는 등의 주의사항을 우차장에게 들었다. 그건 우리 나라도 자연 보호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는 사항이다. 물론 자기가 만든 쓰레기는 자기가 도로 가지고 내려가야 한다. 작년에 갔던 지리산 산장 구석구석에서 냄새를 풍기던 음식 쓰레기를 떠올리며 구호뿐인 우리 나라의 정책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에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있지만 우리 나라만큼 쓰레기가 널려 있는 것은 어디서도 볼 수가 없었다. 새삼스레 이들의 준법정신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방 배정을 받았다. 우리는 2층 하나( 花 ) 방이다. 空, 峰, 木 등등 방의 이름을 자연에서 따온 것이 눈에 띈다. 방에 들어서니 두 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 층에 4명이 자면 적당해 보인다. 그런데 일본이 지금 연휴기간이라 사람이 많아 6명을 배정한단다. 하는 수 없지. 하필이면 일본 연휴기간에 온 사람 잘못이랄 밖에.
산장에서 할 일도 없고 좁은 것이 답답해 이고문님과 밖으로 나와 무엇을 할까 하다가 멀리 보이는 산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배낭을 벗어 놓고 나오니 이렇게 날아갈 듯 홀가분한 것을... 가볍게 걸어 눈밭에서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고 장난을 치니 룰루랄라 놀러나온 어린애처럼 들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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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마주 보이는 산장을 향해 갔다. 처음에는 야영객을 위한 곳인가 보다 싶었는데 가 보니 생각보다 더 넓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우리도 '오뎅'과 '정종'을 시켜 자리를 잡았다.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바디랭귀지'로 의사를 전달해서 국물 한 국자 더 얻은 것에 만족하며 내일 산행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상무님이 오셨다. 대낮에 산장에 누워 있기 심심하셨던게지. 그렇게 모인 것이 혼자 온 김선미씨에 가이드 두 명까지 합해서 6명이 되었다. 우리가 오뎅을 더 시킨다고 하자 가이드가 하는 말
"오뎅은 그렇게 한 요리 전체를 다 가리키는 말이라 얘네들 못 알아들어요."
아하, 그래서 우리가 아까 호기있게 오뎅이라고 주문하자 파는 사람들이 이것 저것 보여주며 어떤 것이냐는 몸짓을 했구나. 또 하나 배웠네. 물론 국물 좀 더 달라고 하자 야멸차게 거절해서 이 나라 사람들의 또다른 면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우리 나라라면 국물은 일단 무한정 더 주고 심지어 떡볶이를 먹어도 오뎅 국물은 덤으로 그냥 퍼주질 않던가. 이래서 우리 나라 사람을 보고 푸근하다고 하겠지. 갑자기 우리 나라의 따뜻한 오뎅 국물 같은 후한 인심이 그립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가 산장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간단히 우리끼리 술 한잔을 했다. 다음날 산행을 위해서 과음은 금물이지. 무슨 미련인지 그쳤던 비가 다시 후둑후둑 한다. 자리를 펴고 누웠는데 몸끼리 부딪힌다. 산장은 다 그러려니 싶지만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난방이 되지 않는데도 인구 밀도가 높아서 그런지 공기도 텁텁하고 후텁지근하다. 밤 9시도 안 되었으니 잠이 올 리 만무이나 그냥 눈을 감고 피로를 푼다. 두런두런 밖에서 들리는 소리와 복도에서 왔다갔다 하는 소리에 잠은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억지로 잠을 청해 보려 노력하는데 차츰 더워지는군. 어젯밤 생각에 혹시 추울까 싶어 신었던 양말을 벗어 발치에 던지고 바지도 겅충겅충 걷어 반바지를 만든다. 그래도 덥다. 이번에는 반팔 티셔츠를 허리춤에서 빼내어 공기가 통하게 하면 나을까 싶다. 이렇게 온갖 엉뚱한 짓을 하다가 스르륵 잠에 빠진다.
첫댓글 자세히도 쓰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