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정보는 소장 학자 김시덕의 출현을 축하하면서 '크메르의 세계' 아카이브 기록물로서 보존하는 것이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를 클릭하라. [크세] |
(출처) 주간조선 [2297호] 2014.03.10.
한반도와 유라시아 동해안 500년사 (4)
임진왜란, 100년 격동기 문을 열다
(원문위치: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8&nNewsNumb=002297100009)
1592~1598년 임진왜란(2) - 대륙 세력이 되고자 한 일본의 세 번째 좌절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
(사진) ‘나무묘법연화경’ 깃발을 꽂고 싸우는 가토 기요마사의 모습. 가토에겐 임진왜란이 성전(聖戰)이었나? 1850년 ‘영걸 삼국지전’. 개인 소장. |
유라시아 동부 도서부(島嶼部)의 유력한 세력인 일본열도의 국가들은 네 번에 걸쳐 유라시아 동부 대륙 지역의 진출을 꾀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첫 번째는 한반도의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시기였으며 이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끝났다. 이후 한반도는 신라와 발해가 남북으로 병립하는 시기를 맞이했으니 이것이 한반도의 첫 번째 분단이었다.
두 번째는 고려시대 말기에서 조선시대 전기에 걸친 13~16세기의 왜구였다. 이들은 한때 고려와 명나라의 안정을 흔들 정도였으나 결국 항구적인 정착지의 확보에 실패하였다.
세 번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이다. 인도까지 정복하려 했다는 이 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단기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축출되었다. 이때 일본 측은 명나라 측에 한반도의 분단을 제안하였으며 명나라에서도 조선 국왕의 교체를 논의하는 등, 한반도는 두 번째 분단의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네 번째는 조선의 강제병합부터 1945년 8월의 패전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일본열도의 세력은 만주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세력으로 그 지위를 확고히 하는 듯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그리고 일본 세력의 급속한 퇴각에 따른 공백기에 한반도는 또다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열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일본 측으로서는 유럽의 대륙부인 프랑스의 태반과 도서부인 영국을 지배하던 노르만 왕조, 동남아시아의 대륙부와 도서부의 상당 부분을 지배한 스리비자야 왕조와 같은 형태의 영토를 만들고자 한 시도가 번번이 무산된 셈이다.
역사상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정세를 뒤흔든 최초의 사건이 임진왜란이었지만, 그들의 활동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부에서 관측된 것은 한반도의 삼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아닌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서(魏書)’의 한반도 관련 기사에는 왜인이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에서도 왜인이 신라의 도읍인 금성(金城)을 공격했다는 기사를 비롯하여 왜인의 지속적인 움직임이 관측된다. 이 시기를 다루는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으로 상징되는 일본열도의 중앙집권적 세력에 의한 것으로서 해설하며 이러한 이해는 일본에서 20세기 전기까지 이어졌다. 이에 따라 조선을 강제병합한 20세기 전반에 일본 측은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의 거점으로 그려지는 가야 지역에 대한 발굴 내지는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그 역사적 실체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였다. 최근 들어 가야 지역이 아닌 전라남도의 영산강 지역에서 일본열도 출신의 무사(武士)들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왜계(倭系)’ 무덤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진서(晉書)’ 열전에 보이는 마한(馬韓)의 잔존 세력 ‘신미제국(新彌諸國)’이 백제에 저항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20세기 전기에 일본이 만들어낸 ‘임나일본부설’과는 무관하게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란, 마치 일본열도의 통일 정권이 이들을 주도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파견한 양 후세에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일본서기’ 등의 고대 일본 역사서에서 ‘임나일본부’의 창세기(創世記)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른바 ‘진구코고(神功皇后)의 삼한 정벌’ 전설이다. 이 전설의 개요를 간단히 설명하면 진구코고의 남편인 주아이텐노(仲哀天皇)가 규슈 지역에 군사 원정을 갔다가 한반도를 정복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도 무시한 바람에 죽자, 진구코고가 이 신탁(神託)을 수행하여 신라·백제·고구려를 정복, 일본의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진구코고라는 사람의 실존 여부, 과연 이 시기에 일본열도에 이처럼 대규모의 해외 원정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단일한 중앙집권 정권이 존재했는가의 문제를 포함하여 ‘진구코고의 삼한 정벌’ 전설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성의 여부와는 별도로 전근대 일본에서는 이 전설을 통해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군사적 개입과 국제관계를 설명해 왔다.
이처럼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 지역에서 자신들의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 ‘진구코고의 삼한정벌’이었다면, 그 활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한 일본의 수군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한 663년 8월의 백강전투였다. 신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 등의 지배층을 당나라로 끌고 가자, 백제 부흥군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일본 세력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군이 육지에서 신라군에 맞서고 일본 수군이 오늘날의 금강 근처에서 당의 수군과 맞서 바다를 피로 물들일 정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신라·당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백제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사라졌고, 그들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시도는 유라시아 동부의 정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으며, 한반도의 분열상태라는 불안정 요인이 제거되어 이후 신라·당·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유라시아 동부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일본열도 세력은 대륙 국가들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지정학적 요건에 힘입어 폐쇄적이고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러한 일본열도의 세력을 군사적으로 위협한 것은 13세기에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열도의 서부 지역을 침공한 사건이었다. 저명한 일본 중세사 연구자 아미노 요시히코가 지적하듯이 고려가 40년간 몽골의 침공에 항거한 덕택에 일본열도는 몽골의 군사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느슨한 형태로 몽골제국의 일부가 되자 몽골은 고려를 연합하여 일본열도의 정복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일본열도를 지배하던 가마쿠라 막부의 군사 정권은 연합군에 의한 1274년, 1281년의 두 차례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막부는 무너지고 일본에는 두 명의 덴노(天皇)가 병립하는 분열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한 일본열도의 혼란기에 주로 서부 일본의 세력이 또 다시 유라시아 동부 대륙 지역에 대한 약탈과 점령을 시도하였다.
‘고려사’에서는 왜구가 처음으로 활동한 것을 1223년으로 전하면서도, 1350년 기사에서 ‘왜적의 침구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설명과 함께 왜구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고대 영국의 역사서인 ‘앵글로 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에도 유럽의 왜구라 할 바이킹의 첫 활동은 787년 기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793년 기사에서 “번개가 몰아치고 사나운 드래곤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등 무시무시한 전조들이 노섬브리아 땅에 일어나 사람들을 매우 두렵게 하였다. 그 직후에 큰 기근이 있었고 같은 해 1월 8일에 이교도들의 무리가 린디스판에 자리한 하느님의 교회를 약탈하고 살육하였다”고 하여 바이킹의 활동이 이때 본격화되었음을 인상 깊게 전한다. 이처럼 왜구와 바이킹은 유라시아 동부와 서부의 대륙의 국가들에 충격을 주며 여러 세기에 걸쳐 활동하였지만, 노르망디·시칠리·러시아 등의 항구적 정착지를 마련한 바이킹과 달리 왜구는 대륙에 거점을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사진) 일본에 상륙한 몽골·고려 연합군과 이를 피하는 일본인의 모습. ‘삼국퇴치 신덕전’ 중권. 개인 소장.
왜구 세력이 소멸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반도는 이종무가 이끄는 조선군이 1419년에 쓰시마를 공격한 것과 같이 일본열도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취하였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무역을 활성화함으로써 왜구가 취할 수 있는 상업적 이익을 줄이고, 왜구에 섞여 있던 왕직(王直)과 같은 중국인을 회유하여 제거하였으며, 척계광(戚繼光)과 같은 장군들이 왜구에 맞설 수 있는 효과적인 전술 전략을 개발하였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통일 정권이 수립되면서 왜구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특히 도요토미 정권은 한편으로는 왜구를 진압한 공을 인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하여 전쟁의 명분을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왜구 세력을 흡수하여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일부에 편성시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왜구의 활동과 임진왜란이라는 침략 전쟁을 동일한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지만, 왜구의 활동에서는 일본열도의 통일된 정권이 대륙을 정복하려는 의지와 그 의지가 실현되는 메커니즘이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이에 부정적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부를 침공한 세 번째 사건이었다. 열도의 100년간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열도 내에 가톨릭을 포교하려 하자 일본을 불교와 신토(神道)의 국가로 규정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의 지배가 일본열도의 구석구석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조총이나 전함과 같은 가톨릭 국가들의 우수한 군사 물자를 지원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시행한 것과 같은 철저한 기독교 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고스티뇨 고니시 유키나가(Agostinho·小西行長)와 같은 유력 가톨릭 장군들이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a de Cespedes)와 같은 예수회 신부를 일종의 군종신부로서 한반도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임진왜란은 가톨릭을 믿지 않는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 대한 일종의 ‘성전(聖戰)’이었다. 당시 유럽 가톨릭 국가들도 종교의 이름으로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학살하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니, 임진왜란 당시의 가톨릭 장군과 병사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중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립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 正)는 열렬한 불교신도였다. 그가 신앙한 불교는 13세기에 니치렌(日蓮)이라는 승려가 개창한 니치렌슈(日蓮宗)라는 종파이다. 니치렌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 의 힘으로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 침공에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니치렌슈는 일종의 일본적 ‘호국불교’로서 기능하였다. 니치렌슈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일본이라는 국가보다 위에 있다는 근본주의적 주장을 펼치며 반란을 일으키거나 그때마다의 정권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다. 이 종교의 일파인 창가학회의 설립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는 일본 정부가 국가신도(家神道)를 강제하는 데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앙이나 사상에 투철하여 국가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사례는 일본열도의 역사상 보기 드물다. 참고로 같은 시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는 수십 명의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마찬가지 이유로 체포되어 옥응련 등이 옥사한 ‘등대사(燈臺社) 사건’이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박관준 등 수십 명의 기독교 신도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옥사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는 정치에 대한 종교의 우위를 주장하여 국가에 대립하는 것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일본의 토착 신앙인 신토와 니치렌슈라는 열광적 불교 종파의 가르침을 체화하여 자신의 군사적 행동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였다. 조선 침공을 선언한 도요토미는 가토가 독실한 니치렌슈 신도임을 알고는 이 종파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하사하였다. 가토는 이 깃발을 내걸고 임진왜란 7년간 한반도에서 활동하였으니, 그에게도 임진왜란은 니치렌슈를 믿지 않는 이교도와의 ‘성전’으로 간주되었을 터이다. 가토가 사명대사와 같은 조선의 불교 신도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로 임한 것 역시, 그가 임진왜란을 일종의 종교전쟁으로 보았음을 짐작케 한다. 불교는 역사상 평화로운 종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대규모의 승병(僧兵)을 지닌 사찰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세 일본이나 미얀마·스리랑카의 현대사에서 보듯이 불교도가 공세적 입장에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듯 1592년의 개전 당시 일본군의 선봉에 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각기 기독교(가톨릭)와 불교(니치렌슈) 신도였으며, 이들에게 임진왜란은 일종의 종교전쟁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에서는 일본군이 부처와 일본의 여러 신의 도움으로 전투를 잘 치를 수 있다는 대목이 적지 않게 확인된다. 인간은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었을 때 가장 잔인하게 전쟁을 치를 수 있음을 역사는 수천 년에 걸쳐 증명한다.
여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중에 전쟁의 목표를 변경하면서 임진왜란에서의 학살은 도를 더해갔다. 인도와 중국을 정복하여 중세까지 일본에 알려진 세계 전체인 인도·중국·일본을 모두 지배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던 전쟁 초기에는 한반도가 향후 장기전의 거점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은 한반도의 주민들에 대한 지배를 철저히 함으로써 군량미의 원활한 보급 등을 꾀하였다. 그러나 조선 민관(民官)의 항전과 명나라 군의 참전으로 인해 ‘세계 정복’의 기대가 1년 만에 꺾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반도의 남부 4개 지역만이라도 점령하고자 명나라 측에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한다.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러한 조건으로 강화 교섭을 추진하는 한편, 명 조정의 일각에서도 조선 국왕의 교체를 주장하는 등 조선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결국 국왕 교체와 한반도 분할안 모두 기각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력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1597년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자신들의 당초 의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보복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학살한 것은 주로 이 시기였다.
유라시아 동부를 지배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걸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여름에 사망하자 전쟁을 계속 할 명분을 상실한 일본군은 열도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부에 대한 지배를 꾀한 세 번째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시도가 유라시아 동부에 미친 영향은 이전의 두 차례와는 달랐다. 중국에서는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로 교체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서는 등 정권 교체가 있었다. 이 영향은 타이완과 동남아시아에까지 미쳐서 이들 지역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었다. 한반도는 분단의 위험을 피했지만 잇따른 쿠데타와 반란, 그리고 만주족과의 두 차례 전쟁과 점령이라는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왕조 교체에 준하는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유라시아 동부의 질서를 재편한 100년간의 장기적 변동기를 연 사건이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이 100년간의 격동기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
|
첫댓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통일 한반도"를 "정상상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저는 한반도의 역사가
(1)통일 한반도, (2)분단상태, (3)한반도 전역을 무대로 하는 국란[몽골침입, 왜란, 호란, 일제침략, 한국전쟁] 등
3가지 상태를 주기적으로 반복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한반도의 "분단상태"를 가장 안정된 상황으로 보면서
"영구분단 평화론"을 주장하는 것이죠..
김시덕 선생의 글은
저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각도,
즉 일본의 관점에서 한반도를 고찰해보면서
제 가설을 검토해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게 됩니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주기적 상황 변동설을 다른 지역..
가령 중국에 대해 대입해보면,
중국 역시 분열기, 전란기, 통일왕조기를 반복해왔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중국대륙에서는 통일왕조의 출현이 안정을 이루고 문화를 융성시켰던 데 반해,
한반도에서는 도리어 분단시대가 안정을 이루면서 문화를 융성시켰다는 점이죠..
매우 흥미롭습니다..
제가 장기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2가지 큰 가설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한반도 영구분단 평화론"이고..
다른 하나는 "내전 발발의 5대 조건설"입니다..
김시덕 선생의 등장을 통해
새롭게 많은 영감을 얻게 되어 반가운 마음입니다..
물론 김시덕 선생인
통일론자인지, 아니면 저처럼 분단론자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고 보면..
오늘날 중국의 국력이 커지는 것은
그들이 현재 중국대륙에서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제1 원인고
무슨 그들 나름대로의 경제정책이나 이념 같은 게 제1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오늘날 남한만이라도 발전하게 된 데는...
분단을 통해 섬나라로 변한 것이 제1 원인일 수도 있다...
하는 가설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마치 남쪽의 분단국가였던 통일신라가 문화를 꽃피웠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한때는 안정된 3국 체제 안에서 백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