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여성, 엄마이고 게다가 문법학자라니 정말 매력적인 시작이다.
처음에는 남편이 문법학자인가 생각했는데, 남편은 사업수완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근면한 학자였을 뿐으로 다섯째 딸이 태어난 직후로 죽어버렸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문법학자는 자녀들을 충분히 가르쳤지만, 지참금을 요구하는 결혼 풍토에 딸들을 결혼을 시킬 방도가 없다. 이런 엄마의 걱정을 눈치 챈 딸들이 먹을 입을 줄이겠다며 15살이 되자마자 큰 딸을 시작으로 다섯 딸 모두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러 길을 떠나겠다 한다. 엄마는 맏이인 큰 딸에겐 언어의 견고한 핵심이자 보물인 명사 자루를, 제일 겁이 없고 대담한 둘째 딸에겐 언어의 힘이라 생각되는 동사 자루를, 사랑스럽고 제일 우아한 셋째는 형용사 자루, 제일 활기차고 가장 쾌활한 넷째에겐 기운차게 이리저리 뛰어 도망치는 작은 생물인 부사 자루를 선물로 준다. 막내인 다섯째 딸은 엄마가 건네주는 새 명사 모음집과 부사를 모두 거부한다. 큰언니가 가져가서 잘 쓰고 있는 명사 말고 부사도 별로라 한다. 질서와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평범한 자신에게 어울리는 전치사 자루를 등에 지고 운명의 길을 나선다.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뒤이은 서사는 더 황홀하고 매혹적이다.
맏딸은 명사 자루의 도움으로 ‘실재’라는 왕국을 왕과 함께 다스리며, 견실하고 사고가 명확한 국민들과 함께 살아간다. 둘째는 동사 자루의 도움으로 유목민 여왕인 배우자와 동성결혼을 하고 자녀도 여럿 낳은 후 뚜렷한 국경도 정해진 수도도 없는 왕국 ‘변화’의 두 통치자가 된다. 셋째는 여성이고 싶은지, 남성이고 싶은지, 양성이고 싶은지 결정을 못 내리는 주술사를 걷어차고 형용사의 도움으로 왕국의 첫 여왕이 된다. 젊은 사냥꾼과 결혼해 여러 자녀를 두고 ‘미묘’라는 나라를 다스린다. 넷째는 부사의 도움으로 ‘다양’이란 지역에서 큰 부자가 되어 훌륭한 집을 짓고 어머니와 남은 여동생을 불러 만족하며 산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돈과 신망만 있으면 노처녀의 삶도 좋다며 노처녀의 삶을 선택한다. 막내는 전치사의 도움으로 혼란스런 나라를 구해줘 대통령으로 추대된다. 대통령의 첫 프로젝트로 문법학교를 열어 아이들에게 문법을 가르치며 네 명의 학교 선생님들과 결혼한다. ‘관계’라는 땅으로 알려진 이 곳은 계보학자들가 중매쟁이 외에도 외교관과 상인을 많이 배출해 협상과 거래로 실재와 변화, 미묘, 다양, 관계의 다섯 나라를 하나로 묶는다. 이 제국의 이름은 ‘협력’이며, 이처럼 더 견고하고 강하고 복잡하며 활동적이면서 더 조직된 나라는 없었다. 이 나라의 좌우명은 ‘함께’다.
<문법학자의 다섯 딸>은 내게 상상하는 이야기의 힘에 대해 강력히 심어주었다. 이 책을 오래 전에 추천했으면서도 글을 못 썼던 이유는 내 속에도 이렇게 재밌는 숨은 이야기가 있겠거니 기대하며 꿈에서도 일상에서도 계속 내 이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어제 밤에 도저히 안 되겠다며 책상에 앉아 친정엄마와 다섯 형제들을 주인공으로 문법학자의 다섯 딸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손재주 좋은 장인의 세 딸과 두 아들>이란 제목. 경상도 깡 시골 셋집에 손재주 좋은 장인이 개성 강한 세 딸과 패션감각 있는 두 아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멀리 돈 벌러 외국배를 타러 가서 혼자 다섯 자녀를 키우느라 아등바등 살아갑니다. 손재주 좋은 장인은 남들이 버린 옷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고, 콩나물 값 아껴가며 공부를 시켰습니다. 어릴 때부터 장군 같다는 말을 자주 듣던 큰 딸은 “남들이 다 가는 대학, 흥미없다”며 일찌감치 여군으로 병과는 전투 기갑부대에 지원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까지 쓰다 변희수 하사 스토리로 가려는데, 한 사람의 스토리 구조를 이렇게 세우기도 어려운데 다섯 명을 하루 만에 도저히 못해! 하며 손 들고 말았다.
난 학교 다닐 때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였지, 소설은 왠지 잘 읽지 못했다. 소설의 언어가 나와 잘 맞지 않았다고나 할까? 근데 <82년생 김지영>(조남주)을 필두로 <딸에 대하여>(김혜진 장편소설)의 문체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다 윌라 오디오북 무료 한 달 기간에 김혜진의 <9번의 일>을 읽고 충격에 빠졌다. 이걸 작가가 썼다고? 말도 안돼!!! 정말 젠더 경계를 넘은 글쓰기의 끝판왕이다! 그러다 리아님이 추천해준 <쇼코의 미소>(최은영의 첫 소설)에서 또 한번 놀랐다. 이게 작가의 첫 소설이라고? 말도 안 되는 장면에서 눈물이 주루룩, 감정이 훅 올라오는 걸 여러 번 경험했는데... 이건 또 무슨 문체지? 싶었다.
어떤 연유에선지 모르지만 자꾸 소설, 이야기의 세계로 이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던 차에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옛 이야기>에서 환희와 희망을 보았다. 이렇게 쓰여질 수 있는 이야기가 다 남성중심 서사로 쓰여졌구나. 이 판을 갈아엎어야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아야해 라는 마음이 쑥 올라왔다.
그러다 윌라에서 만난 작품이 세계여성작가페미니즘SF걸작선 <야자나무 도적>이었다. 윌라에선 한 편씩 녹음되어 있었기에 마음에 드는 제목부터 들었다. 소설도 잘 못 읽던 내가 관심 1도 없는 SF소설에 빠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반다나 싱이란 이름은 들어본 것 같고,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도 언뜻 들은 듯해서 여기부터 시작했다. 문법학자의 다섯 딸에서 완전 매료됐다. 이런 게 SF소설이라면 얼마든지 읽겠어! 유쾌한 동화잖아! 이런 동활 읽으면서 자랐다면, 난 전혀 다른 어른이 되어 있었겠지! 이건 정말 그림책으로 만들어야해. 더 많은 페미니즘 동화와 이야기들이 출판되어야 해! 다짐했던 것 같다.
완벽한 유부녀,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 나사파리 구제법, 야자나무 도적. 저녁과 아침과 밤 등을 들었다. 아쉽게도 윌라 오디오북 무료기간이 끝난 후 도서관에서 빌린 종이책은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페미니즘 오디오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윌라에서 한 달간 주야장천 들었던 페미니즘 도서는 심장을 쾅쾅 울리고, 속시원하게 하는가 하면 분노로 두 주먹을 쥐게 했다가 말도 안 되는 세상에 신나게 욕을 퍼붓는 자유를 선물했다. 정말 롤러코스터를 타듯 스릴 넘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런 것들을 들으면서 살아야 해! 거지같은 저자와 내용들 말고!
소설을 공부해야겠다. 아니 페미니즘 SF소설도!
왜 이런 생각들이 훅 올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사 구조를 모르곤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는 건 이번 기횔 통해 분명히 알았다. 공감바다 글쓰기공동체가 각자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내게 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거다. 내 인생에 접속되지 않은 장르들이 튀어올라 나를 매료시키고 유혹하며 손짓하고 있다.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가? 새로운 세상, 신비한 경험에 초대되었다. 떨리기도 하고 기대도 되면서 두렵다. 날 해칠 지도 모르고 상처를 훅 내고 도망칠 지도 모르지만, 난 그 상처에 베이고 흉터가 남더라도 새로운 세상과 경험에 올라타고 싶다.
*모든 이미지들은 구글 이미지에서 책 제목을 검색해 가져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