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16. ㉠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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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후손인 ( ㉠ )은/는 북쪽으로는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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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② 처음으로 ‘발해’를 정식 국호로 삼았다.
③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체계를 완비하였다.
④ 장문휴에게 명하여 산둥반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정답: ③
* 발해 선왕(818~830)에 대하여
7세기 말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건국 당시에는 국호가 진(震)이었으나 당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713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봉작을 받으며 발해라 불리웠다.
대조영(고왕: 698~719)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대무예)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또, 돌궐, 일본(727년 수교)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왕(737~793, 대흠무)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이때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 상경에서 동경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무왕), 대흥(문왕)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문왕이 죽자 한동안 왕이 피살되기도 하고 정치적 불안상태가 있었다가, 9세기 전반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4세손 대인수(선왕)가 즉위하며 대조영 직계에서 대야발 직계로 변동하였다. 선왕(818~830)때에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완비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