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은 1515년 중종과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호, 자는 천윤이다. 1520년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어 무려 25년간이나 세자로 머물러 있다가 1544년 중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이 깊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3세 때부터 글을 읽을 정도로 총명하여 1522년 여덟 살의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게다가 철저한 금욕 생활을 추구했던 듯 동궁에 머물 당시에는 옷을 화려하게 입은 궁녀는
모두 내쫓았으며,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이는 그가 도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성품은 계모 문정왕후의 표독하고 사악한 성격을 방치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생모 장경왕후 윤씨가 그를 낳고 7일 만에 죽었기 때문에 그는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 그런데 문정왕후 윤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였기 때문에 전실 부인의
아들인 인종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야사에 따르면 윤씨는 몇 번이나 인종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그와 빈궁이 잠들어 있는데 주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번져 일어나보니 동궁이 불에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빈궁을 깨워 먼저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용히 앉아서 타 죽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불을 누가 지른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이미 몇 번에 걸쳐 그를 죽이려 했는데 그때마다 요행히도 그는 죽음을
면하곤 했다. 비록 계모이긴 하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자신을 그토록 죽이려고 하니 자식된
도리로 죽어주는 것이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조용히 불에 타 죽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세자의 말을 들은 빈궁은 자신 혼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졸지에 화형을 당할 지경에 처했는데, 그때 밖에서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를 애타게 부르는 중종의 목소리였다. 인종은 그 소리를 듣고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겐 효행이 되나 부왕에겐 불효이자 불충이라고 말하면서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쳐나왔다고 한다.
이 불은 누군가가 꼬리에 화선을 단 여러 마리의 쥐를 동궁으로 들여보내 지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을 지른 장본인이야 구태여 따져보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종은
범인을 뻔히 알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고,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사건은 유야무야 없던
일로 처리되고 말았다.
이렇게 몇 차례 죽음의 위험을 겪어내면서 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30세였다. 그는 즉위하자 곧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화 때 피해를 입은 사림 세력들을 신원하고
현량과도 복구시켰다. 그리고 그간 자신이 익히고 배운 도학 사상을 현실 정치에 응용하려는
의도에서 다시 사림들을 등용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계에 진출한 사람이 이언적, 유관 등
사림의 대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인종은 미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재위9개월 만인 1545년 7월에 31세의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인종이 그렇게 빨리 죽은 것은 문정왕후 윤씨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한다. 인종은 계모이긴
하지만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인 문정왕후에게 효도를 다하기 위해 극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윤씨는 항상 인종을 원수 대하듯했고, 문안 인사차 들른 인종에게 자신과 아들 경원대군
(명종)을 언제쯤 죽일 것이냐고 말할 정도로 막말을 해댔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은 그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효성이 부족함을 개탄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며
지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 심지어는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식을 두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인종이 앓아 누워 죽게 된 것도 문정왕후가 내놓은 독이 든 떡이 그 원인이라고 야사는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인종이 문안 인사차 대비전을 찾아갔는데, 그날 따라 문정왕후는 평소와 다르게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인종을 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에게 떡을 대접했다. 인종은 난생 처음
계모가 자신을 반기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 아무 의심 없이 그 떡을 먹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인종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얼마 못 가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이 야사가 시사하는 것은 문정왕후의 인종에 대한 멸시와 시기가 얼마나
극악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정왕후의 극악스러움이 먹혀들었던 것은 인종이 너무나
유약하고 선하기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으며, 그의 효행을 기리는 뜻으로 능호는 효릉이라 했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 두 명의 부인을 두었다. 인성왕후 박씨는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로 1514년에 태어났다. 1524년 11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으며 인종이 죽은 후에도 32년을 더 살다가 1577년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인종과 함께 효릉에 묻혔다. 귀인 정씨는 정유침의 딸이며,
정철의 큰 누이다. 소생은 없었으며 생몰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