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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자랑스러운 광주 수필가 서양순 1. 시작하는 글
광주는 호남의 중심 도시다. 노령산맥이 힘차게 뻗어 내린 무등산을 배경으로 널찍하게 자리 잡은 아름답고 인정이 넘친 살기 좋은 고장이다. 광주라 이름 하게 된 것은 고려태조 23년(940)에 광주(光州)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천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이다. 광주를 일명 “빛 고을”이라 칭하기도 한다. 빛 고을은 광주의 예명(藝名)처럼 느껴 지기도하여 광주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름이기도 하다. 광주는 아름다운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광주천과 흑룡강이 흐르고 있으며 산수가 아름다워 예로부터 시인 묵객이 많이 배출된 예향(藝鄕)의 도시이다. 광주는 넓고 기름진 평야를 접하고 있어 농산물이 풍부하고, 서남해의 넓은 바다와 천혜의 개펄이 무진장으로 펼쳐 있어 물고기의 서식과 산란 처로 많은 종류의 어종이 생산되고 있다. 이 고장에서 풍성하게 생산되는 오곡백과며 수산물은 삶을 윤택하게 하였다. 이러한 풍부한 자원은 남도 특유의 음식문화가 발달되어 미향(味鄕)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동안 광주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 많은 고난과 인내를 겪어 왔다. 일제의 암흑시대에 식민정책에 항거하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학생들의 애국운동 이였다. 임진왜란 때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똘똘 뭉쳐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끄는데 힘을 다 했다.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부녀자와 노인까지 참여하여 전쟁의 뒷바라지를 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 라고 기록된 난중일기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현대사에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군사 독제의 만행이 이 고장 광주에서 일어났다. 이에 광주시민은 죽음으로 항거했다. 권력에 맛 드린 정치군인들은 광주를 피바다로 물들였고 송두리째 죽음의 도시로 내 몰았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 모든 언론 매체를 통해 교활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광주를 짓밟고 매도했다. 그러나 광주는 죽지 않았다. 밝은 빛으로 미래의 희망으로 민주항쟁의 성지로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광주는 이렇듯 나라가 어지럽고 위태로울 때 마다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한 의향(義鄕)의 도시이다. 나는 광주에서 살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 한다. - 2 - 이번 “광주 이야기”를 쓰려고 결심을 하면서 광주. 전남을 제외한 다른 시 도 사람들은 “광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알고 싶었다. 그래서 100사람(전국 문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보내 의견을 물어 보았다.(94명회수) 1). 선생님께서는 광주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2). 선생님께서 광주에서 받은 좋은 인상은 무엇입니까? 3). 선생님께서 광주에 대해서 나쁜 인상은 무엇입니까? 4. 선생님께서 광주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나 재미있는 추억을 갖고 계시면 적어 주세요. (1). 광주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가. 5.18 민중 항쟁)(41%). 나. 무등산(30%). 다. 예향의 도시(9%) 라. 광주학생독립운동(8%). 마. 김치 축제(3%). 바. 기타 (2). 광주에 대한 좋은 인상은? 가. 따뜻한 인정. 나. 친절하다. 다. 음식 맛이 좋다. 라. 무등산의 푸른 숲. 마. 교통흐름이 좋다. (3). 광주에 대해서 좋지 않았던 생각은? 가. 친절하나 믿음이 안 간다. 나. 언어가 거칠다. 다. 잦은 데모. 라. 소득이 낮은 도시 마. 불신 불화 조급. 바. 정치성이 너무 강하다. (4). 광주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 민주성지의 시민에 걸맞게 시민의식이 성숙 되었으면 한다. 나. 예향의 도시로 발전되기를 기원한다. 다. 질서 있고 깨끗한 도시로 변했으면 한다. 라.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열린 마음, 통합의 정신이 있었으면 한다. ☆. 광주하면 떠오르는 것은 예상 되로 5.18 민주항쟁,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떠 올렸다. 무등산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예향의 도시, 김치축제 순으로 나타났다. 광주는 의향, 예향, 미향의 도시임이 나타났다. 우리 광주는 오랜 역사 속에 애국충절의 정신이 배어 있음을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여야 - 3 -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어서 무등산, 음식 맛을 꼽았다. 광주에 대한 나쁜 인상으로는 친절하지만 믿음성이 부족하다, 언어가 거칠고 욕설이 많다, 잦은 데모, 불신 불화 조급하다, 정치성이 강하다. 광주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민주성지의 시민에 걸맞게 시민의식이 성숙되기를 기대한다. 예향의 도시로 발전되었으면 한다. 질서 있고 깨끗한 도시,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열린 마음과 통합의 정신이 있었으면 한다는 의견으로 집약 할 수 있었다.
2. 내가 하고 싶은 “광주 이야기” 1). 일화(一話) - 김덕령 장군과의 만남.-
나의 출생지는 전남 해남군 황산면 신성리. 면소재지에서 7km쯤 떨어진 깊은 산골마을이다. 이곳에서 10살이 될 때까지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며 살았다. 하루는 할아버지께서 광주 무등산 김덕령 장군 이야기를 해 주셨다. 김덕령 장군은 비호처럼 날 새고 천하에 그 힘을 당해내지 못할 정도 장사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서까래 끝을 잡고 집둘레를 몇 바퀴씩 돌았다하니 그 힘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청년 김덕령은 활을 쏘면 백발백중 했고 비호처럼 말을 잘 탔다고 한다. 하루는 말을 시험하기 위해 화살을 하늘 높이 쏴 놓고 말에게 화살이 떨어지기 전에 앞산 봉오리를 돌고 오라 했다. 땀을 뻘뻘 흐르고 뛰어 오는 말을 늦게 왔다고 목을 배어버렸다. 목을 베고 한 참 있으니 “툭‘하며 화살이 떨어 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린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 후부터 김덕령 장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광주가 어디에 있는지 무등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얼마 후 서당을 탈출하여 면소재지에 있는 황산초등학교에 찾아 갔다. 선생님을 붙잡고 입학을 시켜 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시험을 보았다.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물어도 보았고 이름도 써보고 여러 가지 시험을 보았다. 나는 3학년에 편입 허가를 받았다. 그 때 나는 밤마다 할머님께 “춘향전”이며 “장화홍련전”을 읽어 주고 있었다. 학교에 다니게 되어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말없이 서당을 탈출하였으니 아버지한테 매 맞을 일이 걱정스러웠다. “신식 글을 배워서는 구장(지금 이장)도 - 4 - 못한다.”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드디어 학교엘 다니도록 허락을 받았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고 목포에서 사범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졸업 자격증을 광주(중앙초등학교)에서 받게 되어 생후 처음 광주를 구경 했다. 목포에서 출발하면서는 김덕령 장군이 살던 무등산을 구경하고 싶었다. 멀리 보이는 무등산을 바라보면서 그 꿈을 다음 기회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광주생활이 시작 되었다. 교사 첫 발령을 받고 십 오년이 지난 1969년 도에 완도에서 근무하다 광주 발령을 받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참 묘한 인연이다. 어려서부터 늘 생각하던 김덕령 장군이 살았다는 충효동 성안마을에 학교가 있었다. 더욱 신비스럽고 감동스러웠던 것은 김덕령 장군의 생가에 방을 얻게 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아닐 것 같았다. 나는 학교가 끝나고 방과 후나 주말이면 김덕령 장군이 뛰 놀았던 곳을 찾아 다녔다. 장군의 체취와 흔적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충장사를 비롯하여 무기를 만들었다는 주검대도 찾아보았다. 많은 곳을 답사를 했다. 서가레 끝을 잡고 집을 빙빙 돌았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면 환벽당이며 취가정 단풍정을 찾았다. 충효동 성안 마을 사람들로부터 김덛령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장군이 젊은 시절 씨름판에 나가면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장군의 누나가 동생이 힘을 너무 과신할까봐 남복(男服)을 하고 씨름판에서 동생을 넘어 드렸다는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웠다. 장군의 탄생신화며 많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학습 자료를 만들었다. 그 자료를 직원 연수 자료로 썼으며 자료전시에 출품하가도 했다. 장군은 임진왜란 때 나라가 위난에 처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았다. 파죽지세로 왜적을 물리쳐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파 싸움에 휘말려 요절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당파 싸움의 해독은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 됐던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에서 잘 묘사 되었다. 나는 장군의 생가에서 살면서 남아를 낳으리라 기대 했으나 여아를 분만 했다. 이름을 충효(忠孝)라 불렀다. 여장군이 되리라 기대가 컸다. 큰 빛을 보지 못했으나 초등학교시절엔 광주 육상 대표 선수로 중학교 때는 광주 수영대표선수로 활동했다. 요즈음 나는 정년을 하고 매주 한두 차례 무등산을 - 5 - 찾는다. 나는 산장 쪽으로 즐겨 다닌다. 충장사를 비롯해서 그 일 때가 장군이 어린시절부터 성장하기까지 삶의 활동무대였다고 생각 할 때마다 나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2). 이화(二話) - 헌병대에서 하루 밤의 추억 - 나는 군 생활을 최전방에서 했다. 당시 교보(교사) 군번을 받는 사람은 최전방으로 배치되었다. 나는 중부 전선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군데에서 고향이 어디야고 물으면 아마 전라도가 고향인 사람들은 거의 광주라 대답 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군 생활을 하면서 광주 친구(임호현)의 덕을 톡톡하게 보았다. 보충대에 배치 된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주전자를 가지고 물을 길로 갔다. 주전자 뚜껑을 우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친구에게 이야기 했더니 내일 보급 검열인데 큰 일 났다며 함께 찾으러 가자고 한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운 겨울이다. 땅은 꽁꽁 얼어붙고 바람은 쌩 쌩 부는 겨울밤. 아무리 궁리해도 주전자 뚜껑을 건질 방법을 못 찾았다. 친구는 옷을 훨훨 벗으며 우물 속에 들어간다고 한다. 내가 감히 생각도 못한 발상이었다. 난 용기가 생겼다. 아무래도 내가 더 건강하니 내가 들어가겠다고 우겼다. 사실 그 친구는 몸이 허약한 편이였다. 친구한테 용기를 얻은 나는 우물 속에 뛰어 들어 주전자 뚜껑을 건져 냈다. 만약 그 친구가 없었다면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선임하사한테 그 날 밤 나는 처참한 모습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 때 그 광주 친구를 잊지 못하고 있다. 첫 휴가를 오게 되었다. 광주에 도착하니 차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나는 극장에 가서 상영중인 벤허를 보았다. 중간쯤만 보고 나오려고 했으나 깜박 잊고 말았다. 막차는 이미 떠나고 없다. 호주머니엔 겨우 집에 갈 차비 밖에 없으니 여관에도 갈수 없고 난감했다. 헌병대를 찾았다. 아마 지금 도청 앞 상무관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헌병대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관등 성명을 신고 했다. “이병 서양순은 5사단 36연대 2대대 본부중대에 근무 중 휴가를 왔다가 고향에 가는 막차를 떨치고 헌병대에 찾아 왔습니다.” 당직 장교한분이 빙그레 웃으면서 “잘 왔다.”고 하면서 당직 사병을 불러 “김 병장 이 사병은 최 전방부대에서 근무하다 휴가 왔으니 저녁밥도 네가 타다 주고 침구도 네가 펴 주라.” 명령한다. 당직사관이 나간 뒤에 - 6 - “야! 식기는 저기 있고 식당에 가서 밥 타다 먹어”한다. 잠시 나갔다가 되돌아 온 당직 장교가 그 장면을 보고 당직병을 불러 세우더니 발로 차고 뺨을 치면서 기압을 준다. 교실만큼 큰 내무반에 나 혼자 침구를 깔고 잠을 청했다. 초저녁엔 잠에 취하여 알지 못했으나 하도 시끄러워 잠을 깨보니 왼 군인들이 가득 찼다. 야간에 군기 위반한 사람, 통행금지 위반한 사람, 술 취한 군인들로 내무반은 초만원이다. 아침이 되니 벌써 김 상병이 밥을 타다 준다. 나 때문에 어제 저녁 기압을 받은 일을 생각하니 미안 했다. 당직사관 덕택으로 하루 밤 헌병대에서 대접을 잘 받았다. 최전선을 지키는 보람을 맛보았다.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155마일 전선을 지키는 전방부대의 노고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역시 군대는 명령이야!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대란 말이야! 지금도 광주 극장이나 상무관 앞을 지날 때마다 그 때의 추억이 생각난다. 어려움에 처한 나를 구해준 임호현 친구가 오늘 따라 더욱 그리워진다. 그 때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면서 광주 송정리 역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첫 휴가였기에 군복을 입고 보니 모든 것이 내 세상 같았다. 군인은 기차를 타면 무임승차 인줄 알았다. 목포에서 기차를 타고 송정리에서 군용 열차를 바꿔 타려고 무궁화열차(?)를 탔다. 개찰하는 역무원이 표를 주라고 했으나 표가 없었다. 무임승차를 하였다고 세배의 차비를 내고 통과 했다. 수속을 밟기 위해 헌병대에 찾아 갔다. 이번에도 씩씩하게 관등 성명을 대고 난로 옆에 다가가서 앉았다. 사무를 보고 있던 상병이 묻는다. “야 무슨 차로 왔어?” “예 방금 무궁화 열차로 왔습니다.” “군인이 왜 상무열차를 타지 않았지? 종이를 한 장 주면서 서명을 하란다. 읽지도 않고 서명을 하고 말았다. 휴가병들의 군용 열차 승차 수속인줄 알았다. 옆에서 함께 불울 쬐던 하사관이 내가 말 한마디 없이 무표정하게 군 풍기 위반 싸인을 하는 것이 이상 했던지 “너 무슨 군 풍기 위반 했지?” “군 풍기 위반 안 했는데요.” “방금 싸인 했지 않니?” 휴가를 보내면서 중대장이 신신 당부 했던 군 풍기 위반 하지 말라는 당부 말씀이 떠올랐다. 첫 휴가는 광주에서만도 세 차례나 - 7 - 실수를 했다. 이래저래 광주는 나와 인연이 깊어 갔다. 3). 삼화(三話) -광주의 홍보대사-
광주는 오랜 역사 속에 애국충절의 정신이 용광로처럼 살아 숨쉬는 고장이다.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광주는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처 할 때 마다 분연히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이 고장을 예로부터 충절과 정의가 넘치는 의향(義鄕)이라 불러 왔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란 말이 결코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사시대부터 찬란한 문화를 꽃피어 온 우리 고장은 부족국가 시대에는 마한의 많은 나라들이 자리 잡고 살았다. 그 근거로 산월동과 치평동 신창동 일대에서 선진 농경문화를 영위 했던 유물들이 발굴 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로 풍부한 자원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평화롭게 살았다. 신라가 통일 되어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가 그 힘이 쇠퇴 하자 광주는 견훤의 후백제 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시 후백제의 멸망으로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백제는 많은 탄압 속에 찬란했던 백제문화는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또 한 차례 시달림을 받으면서 찬란했던 백제문화는 송두리 체 살아지고 말았다. 광주는 지리적으로 중앙정치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추악한 권력 다툼에서 벗아 날 수 있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풍부한 농산자원이며 많은 해산물이 생산 되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광주를 중심으로 이 고장사람들은 학문을 숭상하고 시 문을 즐기며 선비 정신을 이어 왔다. 정의롭게 살면서 충절을 지키려는 의로운 마음으로 승화 되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년에 일본군이 침입한지 20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40일 만에 평양이 함락 되어 전 국토가 유린 되었다. 이 때 나라를 구출한 사람이 호남인이었다. 바다를 장악한 이순신 장군 휘하의 전라좌수영군과 이억기 장군 휘하의 전라우수영군이 나라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김천일 고경명 김덕령 장군 등은 의병 활동으로 구국에 몸 바친 호남사람들이다. 왜군으로부터 남해바다를 장악한 이순신 장군이 세계 해전 사상 길이 남을 명량대첩을 이끄는데 호남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1910년 나라가 망하고 일본의 노예상태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민족저항운 - 8 - 동도 치열하게 전개 되었다. 3.1운동이며 6.10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이 고장 사람이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4.19(1960년)와 5.18(1980년) 군사독재를 타도하고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던 이들은 거의 이 고장 출신 젊은이들이었다. 광주는 역사 속에 애국 충절의 정신이 베어 있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항상 소외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 때는 훈요 10조에 묶여 인제 등용에서 차등을 받았다. 탐관오리의 수탈로부터 저항을 해야 했다. 일제의 탄압에서 광주학생들은 총칼 앞에 저항했다. 해방 후엔 군사독제로부터 정치탄압을 받아야 했고 광주 호남을 의도적으로 인사정책이나 경제발전에서 철저하게 소외시키고 배제되었다. 5.18을 일으켜 광주의 비극을 잉태 하고 말았다. 5.18이 일어난 후부터 광주를 보는 눈은 왜곡 되었다. 당시 광주의 진실을 이야기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광주시민은 폭군이요 역도라고 신문이며 텔레비전, 라디오 등 모든 언론 매체를 총동원하여 국민들의 머리에 각인 시켰으니 당연했다. 나는 결심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수필작가들만이라도 광주 5.18의 진실을 꼭 바르게 인식 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광주의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광주 연혁이며 발전과정을 읽혔다. 우리의 역사 속에 광주인의 저항의식은 어떻게 나타났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 선조들의 풍류와 예술 활동은 어떠했는가? 오늘의 맛깔스런 음식문화가 발달된 근원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광주의 자랑은 무엇인가? 지피지기는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 했던가? 광주의 역사를 공부한 보람은 있었다. 그 동안 수필작가들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광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야기 했다. 많은 호응을 받았다. 문인들로부터 “광주의 홍보 대사” 라는 칭호까지 받을 정도로 광주를 알리는 일에 열을 올려 노력을 했다. 그 결과 광주에 대해 서서히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내가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회장으로 추대 될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 작년 가을에는 한국수필문학회 여름 세미나를 우리 고장 화순리조트에서 열렸다. 450여명이 참석 했다. 광주를 알리는 좋은 기회로 삼고 광주의 문화와 예술을 체험하도록 많은 곳을 보여 주었다. 5.18 국립묘지를 참배했고 무등산과 가사문화권 일대의 유적지를 답사하여 우리들의 소중한 정신문화를 소개했다. ‘수필문학” (이사장 강석호) 지에 “광주 특집”을 발행하기도 했다. - 9 -
4). 사화(四話) -민족의 횃불! 광주학생독립운동.-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로운 나라를 보고 결연히 일어선 젊은이가 있는 한 그 나라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은 수 천 년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침략해 오는 주변 민족에 대하여 피로써 항쟁하면서 민족 존영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 중에서도 근세사에 있었던 일제의 침략 행위는 그 규모와 성격이 가장 크고 잔혹하였다.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강토를 짓밟고, 수많은 생명을 살육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내선일치(內線一致), 창씨제도(創氏制道) 등 동화정책을 써서 우리민족을 완전히 말살하려고 획책했다. 광주학생 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한. 일 학생간의 집단적인 충돌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광주를 비롯하여 전국 190개교에서 일어났으며 54,000여명의 남여 학생들이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총궐기했던 민족해방운동으로 전개 되었다. 일제의 민족 차별과 식민지적 노예교육에서 쌓이고 쌓인 민족의 울분을 폭발시킨 전국규모의 학생항쟁이었다. 일본학생들은 우리나라 학생들을 항상 얕보고 놀려 됐다.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일본인 학생들이 함께 기차통학을 하는 한국인 광주여고학생들을 희롱하며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센징” 운운하며 모욕적인 장난을 했다. 이를 목격한 광주고보 학생이 격분하여 나주 역 앞 광장에서 일본인 학생을 불러 세워 힐책 하니 오히려 모욕적인 언사를 하며 기고만장 하였다. 두 사람의 싸움은 결국 한국학생들과 일인 학생 간에 패싸움으로 번졌다. 이 싸움은 광주에서 한국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싸움으로 변했다. 일본 경찰관들의 편파적인 진압은 우리 학생들을 더욱 격분시켰다. 1929년 11월 3일. 이날은 일제 4대국경일의 하나인 명치절(明治節)이자 우리나라의 개천절(開天節)이기도 했다. 침략의 원흉 명치의 생일과 우리의 개천절이 겹친 날이었으니 망국(亡國)의 한이 더욱 뼈저리게 사무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이 일요일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소집하여 명치절 경축식에 참석케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 날 광주에서는 “전남 산미 6만석 달성 경축대회”를 열어 일제가 경제적인 착취정책의 성공을 축하하려는 등 그들은 축하분위에 도취 되어 있었다. 격분을 참던 광주고보 학생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 이였다. 학생들은 명치절 축하식에서 일본 국가의 제창에 묵비권을 행사하고 식이 끝나자 일제히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학생운동을 편파 보도했던 신문사에 몰려가 - 10 - 항의를 했다. 학생들의 진압과정에서 경찰과 일인 교사들이 일방적으로 일본 학생을 두둔했다. 시내 곳곳에서 학생들의 충돌은 거세졌다. 여학생들도 가만히 있지 안했다. 일인 고녀인 대화여고 학생들은 일인학생에게, 광주여고보와 욱고녀(전남여고 전신)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에게 석전용(石戰用) 돌을 날아다 주고 붕대와 구급약으로 부상학생을 간호하고 물을 나르는 등 민족 대 민족의 대결장이 되였다. 이어 광주농고와 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합류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만약 일본이 총칼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진압만 하지 않았으면 3.1 운동 보다 더 큰 위력으로 일제 식민정권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가져본다. 장하다! 광주 학생들이여!
5). 오화(五話) -광주의 자랑, 무등산.- 무등산은 광주의 얼굴이다. 광주하면 무등산이요 무등산하면 광주를 생각한다. 요즈음 등산인구가 많이 늘어 무등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 요일을 가리지 않고 무등산은 만원이다. 광주 사람 뿐 아니라 타 지역 등산 인들이 많이 찾는다. 그래서 무등산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산이 아닌가 생각한다. 설문 조사에서도 5.18민주항쟁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았다. 무등산은 소박하고 넉넉한 산이다. 높고 낮음이 급하지 않고 어디서 보나 모나지 않고 덕스러운 산이다. 광주사람들에게 광주의 자랑이 무어야고 묻는다면 무등산을 제일로 꼽을 것이다. 해발 1,187m. 시내버스 1187번만 타면 무등산 산장까지 수시 오갈 수 있고, 증심사는 시내 어디서나 많은 버스 노선이 연결 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단숨에 무등산엘 갈수가 있다. 무등산은 소백산맥의 남단 지맥으로 광주광역시와 전남 화순군, 담양군에 걸쳐 위치하고 있다. 규봉암, 입석대, 서석대, 원효계곡, 용추게곡 등 수려한 비경을 이루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금강산에도 여기에 비길 경승이 없으며 특히 서석대는 해금강 한쪽을 옮겨 놓은 듯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증심사, 원효사, 약사사, 충장사, 충민사 등은 무등산이 지닌 소중한 문화자원이다. 또한 궁궐의 진상품이었던 무등산 수박이며, 뛰어난 향기를 가진 춘설차는 무등산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무등산엔 100여종이 넘는 동물이 살고 있으며, 144과 1051종의 식물이 분포 되어 있고, 곤충 303종이며, 황조롱이, 소쩍새 등 천연기념물이 서식하 - 11 - 고 있다. 무등산의 봄은 진달레, 산벚꽃이, 여름엔 서석대 주변 및 백마 능선에 만개한 철쭉이며, 가을엔 중봉 입석대 주변에 군락을 이루는 억새풀이 장관을 이룬다. 겨울 설경은 낭만의 극치를 이룬다. 높이 20m가 넘는 돌기둥이 마치 그리스 신전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입석대를 비롯하여 거대한 돌 병풍처럼 절벽을 이루는 서석대, 우거진 녹음 사이에 높이 솟아 있는 규봉암 돌기둥들이 마치 석공들의 솜씨를 자랑이라도 한 듯 절경을 이루고 있다. 무등산은 광주사람들에게 주어진 천혜의 명산이다.
6). 육화(六話) - 멋과 맛의 고장, 광주- 문화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영위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을 일컫는다. 때문에 이는 인간 행위의 총체적인 생활양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고장 광주는 예로부터 남도 특유의 멋과 맛을 풍기는 고장이다. 나는 친구나 문인들이 나를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하면 광주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심어 줄까 처음엔 고심을 많이 했다. 대상에 따라 몇 가지 코스를 생각했다. 하루 정도 시간이 있을 때는 무등산 산장엘 간다. 가면서 잣 고개에서 차를 한잔 나누면서 한 눈에 보이는 광주 시가지를 감상한다. 산장에 가는 길에 충장공 김덕령 자운 기념관을 구경한다. 비록 많은 유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의병을 이끌고 당당하게 왜군과 맛서 싸운 비호(飛虎) 장군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원호사를 지나 산장에 올라 무등산을 감상 한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바람재까지 산책로가 트여 있다. 원시림에서 쏟아 내는 향긋한 공기가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점심때가 되면 보리밥 비빔밥이 일품이다. 다음은 가사문학관이다. 성산별곡을 지었다는 식영정에 올라 비문에 쓰인 성산별곡을 몇 줄 읽고 나면 깊은 감회를 느낀다. 정송강의 흔적이 물신 묻어나는듯하여 숙연해 진다. 바로 옆에 있는 환벽당을 구경하고 다음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정원으로 잘 보존 되어온 소쇄원을 찾는다. 긴 시간이 없는 친구에게는 한정식을 권한다. 깊고 담백한 남도의 맛이 담긴 한정식은 남도 음식의 대표적인 식단이다. 광주에선 어느 한정식당엘 가나 기본이 “12척 반상”이다. 한정식 전문 식당에 가면 마치 임금님 수라상을 받는 기분이 되어 권하는 사람이나 드는 사람 모두에게 따뜻한 정과 흐뭇함을 안겨 준다. - 12 - 문화관광부와 전라남도는 전라도의 한정식을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식품으로 발전시켜 일명 “한(韓) 부랜드화 산업”을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다. 미향(味鄕) 광주의 전통음식 맛이 머지않아 세계의 맛으로 나아갈 전망이다. 광주의 맛 하면 5미(味)를 꼽는다. 위에 말했던 한정식을 비롯해서 무등산 보리밥, 광주의 오리탕, 광주의 김치, 송정리 떡갈비의 맛은 한번 먹어 본 사람이면 그 맛을 광주와 함께 인상 깊게 기억 될 것이다. 7). 칠화(七話) -광주의 미래는 문화에 있다.-
광주가 21세기 아시아문화를 선도 하는 문화수도 육성에 큰 꿈을 안고 있다. 광주는 어느 도시보다 문화적인 정체성과 전통과 역동성이 뚜렷한 도시다. 판소리, 남종화, 문학, 서예 등 전통 문화 자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2002년 전국 “문화지수조사”에서 문학과 예술 대중 문화부분에서 광주가 1위를 차지했다. 예술이 꽃을 피우려면 무엇보다 예술이 생성할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예술의 싹이 튼다 해도 토양이 나쁘거나 이를 가꾸는 사람이 없을 때 자라지 못한다. 광주는 예로부터 산수가 수려하고 농산자원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고장으로 예술을 사랑하고 즐겨 왔다. 지방마다 자기고장이 예술의 고장이라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광주와 남도인들 만큼 예술을 사랑하고 가꾸어 온 곳은 없을 것이다. 첫째 광주는 판소리, 민요, 농가 등 소리의 본향(本鄕)이다. 판소리는 광주와 남도사람들에 의해서 불리어 졌고 지금도 불리고 있다. 그 예증(例證)으로 “박노식의 조선창극사”, “박 황의 판소리 소사”를 비롯하여 광주 출신 국창 임방울 선생은 암울 했던 일제시대 때 민족의 한을 판소리를 통해 달랬다. 그 공로가 인정 되어 은장 문화훈장을 추서 받은 분이다. 둘째 조선조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학포 양팽손(梁彭孫), 공제 윤두서(尹斗緖)를 비롯하여 무등산에서 남도산수화풍을 정립시킨 의제 허백련(許百練), 서예의 소전 손재형(孫在馨), 서양화가 오지호(吳之湖) 등 예술의 거목들이 광주예향의 자존심을 굳건히 지켜 왔다. 셋째 도자(陶磁)문화는 광주, 남도인의 솜씨가 세계적이다. 고려 상감청자, 분청사기, 백자는 광주, 남도 인에 의해 이루어 졌다. 특히 강진의 상감청자, 해남의 녹청자, 광주의 분청사기와 백자의 오묘한 색상과 예술성은 세계 적 - 13 - 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넷째 가사문학의 진원지는 광주의 무등산 자락이다.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을 중심으로 송순의 면앙정가(俛仰亭歌), 송강 정철(鄭澈)의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 사미인곡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주옥같은 시가들을 남겼다. 광주는 모름지기 예향(藝鄕)의 도시임에 틀림이 없다. 광주는 지금 아시아에서는 처음 문화를 주제로 미래형 문화도시 육성에 힘쓰고 있다. 우리 정신문화와 자산을 아시아 여러 민족과 공유함으로써 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재창조하여 아시아문화예술의 중심 도시가 될 것이다. “문화수도 광주”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광주의 행정 당국과 광주시민의 일치된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8). 팔화(八話) -“1등 광주 1등 시민”으로 가는 길- 요즈음 광주시내에서 “1등 광주 1등 시민”이란 구호를 많이 접하게 된다. 공공기관에서는 물론 대중 버스에서도 볼 수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10년 후에는 광주가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1등 광주” “1등 시민”이 된다는 야심 찬 푸로잭트라 생각한다. 광주 시민들은 싫어할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생각도 든다. 이처럼 거창하고 미래 지향적인 계획이라면 시민과의 대화를 통한 공감대 형성이 이루어졌으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한번 계획을 세웠으니 관, 민이 힘을 모아 성공하기를 바란다. 얼마 전에 참여 정부에서는 국가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 서울에 치중 되어 있는 공공 기관을 시도에 분산 배치했다. 광주는 한국전력 공사를 비롯한 한전기공, 한전거래소가 배치 됐고 전남은 농업기반공사를 비롯한 다수의 기관이 배치되었다. 정부에서 당초 발표 했던 지역균형 발전과는 거리가 먼 내용으로 발표 되어 경제적으로 낙후된 광주, 전남의 불평을 가져 왔다. 예를 들어 광주, 전남 북 호남권에는 31개 기관을 배치했고 영남권은 60개 기관이 배치됐다. 종사하는 인원을 보면 호남권은 7,860 명인데 반해 영남권은 16,400명으로 나타났다. 경제적인 파급 효과 또한 호남권과 영남권이 너무나 심한 격차가 날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당초 계획 했던 균형 발전 보다는 불균형이 우려 된다. 광주시에서 발표한 “1등 광주 1등 시민”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첫째 잘 사는 경제 도시 건설, 둘째 아시아 문화도시로 도약, 셋째 매력 있는 도 - 14 - 시 창출, 넷째 따뜻한 복지 공동체 구현, 다섯째 미래 지향 도시 공간 조성으로 되어 있다. 계획은 구체적으로 잘 세워 있다. 지금 광주는 광역시 가운데서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도시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10년 후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과연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일까? 광주시와 전라남도는 공공기관 지방배치 계획에 따라 혁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추진 중이다. 불협화음 없이 잘 성사 되어 광주, 전남의 경제적인 낙후성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등 광주 1등 시민”이 되기 위해서 우리광주시민이 할 일 많다고 생각한다. 첫째 시민들의 의식 계획이 필요하다. 우리 광주는 애국충절의 정신이 역사 속에 베어 있고, 민주성지의 도시로 국내외적으로 인식 되고 있어 광주를 찾는 사람들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관심 있는 외국인들도 광주를 찾고 있다. 우리시민의식은 과연 얼마나 변화 되고 있을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광주를 대표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기초기본 질서에 충실한 시민이 되었으면 한다. 교통 신호 지키기, 휴지 안 벌이기, 침 안 뱉기, 깨끗한 환경을 가꾸는 등 시민 각자가 주인의식을 갖고 실천 했으면 한다.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줍는 사람 따로 있다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아름다운 사람은 놀고 간 자리도 아름답다. 골목길에 버려진 쓰레기봉투,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 육교에 버려진 오물, 휴식 공간이면 어디나 더럽혀진 시민의식은 1등 시민의 자질과 거리가 먼 행동이다. 셋째 책을 읽는 일은 1등 시민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책을 읽는 국민은 미래가 있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독서를 얼마나 하고 있을까? 하루에 독서는 몇 시간이나 할까? 1년에 책을 몇 권이니 읽을까? 나는 최근에 발표된 통계자료를 보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우리 국민의 독서량이 미국의 미디어 조사기관인 NOP월드조사 결과를 보면 책과 신문, 잡지를 포함한 주당 독서시간은 겨우 3.1 시간으로 조사 대상국 30개국 가운데서 최하위로 나타났다. 국내에서 조사한 또 다른 자료를 보면 학생들의 경우 학년이 올라 갈수록 책 읽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의 독서량을 수치로 보면 초등학생이 연 평균 19.4권, 중학생이 6.3권으로 초등학생에 비해 반절 이상 줄어들고 있다. 가장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하는 고등학생은 입시 준비에 시달리고 대학 진학이라는 강박관념에 독서를 엄두도 - 15 - 내지 못하고 있다. 독서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특히 우리는 지금 지식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 독서는 지식과 정보를 넓히고 교양을 쌓는데 훌륭한 매체가 아닐 수 없다. 책과 가까이 해야 할 학생들은 교과학습량의 증가와 입시공부에 매달리고 대학생들은 좁은 취업 관문을 뚫고자 취업 관련 서적에 몰두하고 있다. 먹고 살기에 바쁜 성인들은 독서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가 영상과 인터넷에 밀려 “읽는 문화에서 보는 문화”로 바뀌어 가는 흐름도 책을 멀리하게 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책이 없는 집은 문이 없는 주택과 같고, 책이 없는 방은 혼이 빠진 육체와 같다”는 말이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광주가 낙후된 도시, 경제적으로 소득이 가장 낮은 우리 광주를 1등 광주로 이끌어 가는데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다. 넷째 녹지를 확충하고 시민들의 쉼터를 넓혀야 한다. 도시 녹지가 부족하면 기온이 상승한다. 광주시는 다른 도시에 비해 녹지가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도시 온도가 1-2도 정도 높아가고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최근 도시 공간에 나무를 심고, 경전선 철도 이설 부지인 대남로(백운광장과 남광교) 에 조성 된 “푸른 길공원”은 좋은 사업이라 생각 한다. 그러나 무등산 산자락이며 재석산 등 녹지에 아파트 건축으로 녹지공간이 잠식 되고 있는걸 보면 한 치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도시 행정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9). 구화(9話) -내 젊음을 불태운 광주교육- 내 평생 교육에 몸 바쳐온 동안 광주에서의 10년은 교사로서 가장 성숙된 시절 이였다. 그리고 보람된 시절이었다. 1969년 3월 1일자 광주에 발령을 받아 충효초등학교, 월산 초등학교, 수창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하면서 10년 만기가 되어 1979년 3월 1일자로 전남으로 발령을 받고 시외 전출을 하였다. 나는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혼신을 다 했다. 교사로서 사명의식이 투철 했다. 요즈음은 교사들의 교육관이 많이 바뀌어 졌지만 그 때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 어떤 일 보다 우선 했다. 그 때 가르치던 제자들이 지금은 30대의 젊은 나이로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사회의 중심에 서서 활동을 하고 있 - 16 - 다. 나로서는 광주. 전남 인제 육성에 일조를 했다고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다.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을 인정받아 모범교사 표창(71,91년), 우수교사 표창(74년), 국민교육 헌장 표창(74년-장관)을 받았으며 그 외에도 학습지도 우수사례 발표, 연구 발표 등 10회의 교육 표창을 받았다. 전남에서 근무를 하면서도 30여개의 공로표창을 받았다. 교장에 승진하여 1999년9월 1일자 정년퇴임을 했다. 내가 교직 생활을 시작한 1956년 첫 발령(목포 산정)을 받으면서부터 교장으로 퇴임을 할 때까지 계속 특별 활동시간엔 아이들 글짓기 지도를 했다. 그 보람으로 1991년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작품 중에는 광주와 전남을 소재로 한 글들이 많이 있다. 3. 끝맺는 말 광주에 대한 이야기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큼 많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가슴 깊이 안타까운 이야기는 이 고장 광주가 역사적으로 의로운 도시 충절의 도시 이면서도 역사적인 평가를 재대로 받지 못하는 아쉬움이다. 역대 정권으로부터 호남고립화이니, 인사정책이나 경제정책에서 소외 되고 배척 되어 낙후된 도시의 늪을 헤쳐나지 못하고 있다. 이 대로 가다가는 시도별 소득 격차가 더욱 가속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좋게 말해서 우리고장을 남겨진 땅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남겨진 땅으로 남을 것인가? 서론 부분에서 타시도 사람들의 여론 조사에서 광주를 보는 시각을 우리 광주사람들은 올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역대 군사 독재시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강하게 대응해야 했고 반사적으로 그들 또한 강하게 밀어 붙었다. 그 결과 광주의 진면을 재대로 알지 못한 사람들은 광주사람을 지나치게 정치적이니 강성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광주사람에게 가슴을 열고 전 국민을 받아드릴 수 있는 포용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5.18의 민주항쟁을 뛰어 넘어 “1등 광주, 1등 시민” 으로 가는 길에 온 광주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요구되는 시점에 왔다고 생각 한다. - 17 - ☀. 參考文獻 1. 光州誌 (全). 1964. 광주향교. 2. 光州市史. 1985. 1 광주시사편찬위원회. 3. 光州文化遺蹟. 1970. 광주직할시. 4. 3.1 운동. 1982. 민족문화협회. 5. 의병들의 항쟁. 1982. 민족문화협회. 6. 학생운동. 1982. 민족문화협회. 7. 무등산. 1976. 박선홍. 8. 맛과 멋의 향기 그윽한 광주. 2001. 광주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