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돌(立石)마을! 우리 나라 땅이름에는 골골마다 ‘입석(立石:선돌)’이라는 땅이름이 참으로 많다. 글쓴이가 조사한 바로는 경북 영양군의 선돌마을을 비롯하여 나라안에 무려 360여개의 ‘선돌’이라는 땅이름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선돌베기, 선돌모루, 선돌숲, 선돌산, 선돌고개, 선돌거리, 선돌우물, 선돌내, 선돌언덕 등등… 물론 그 근원은 돌이 서있거나 큰 바위가 절벽을 이루며 수직으로 서 있는데서 땅이름을 따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여기 충북 중원군 가금면 용권리에 있는 선돌마을은 좀 특이하다. 아무리 마을 주위를 살펴보아도 선돌은 커녕 그럴싸한 바위덩어리 조차 눈에 띄질 않는다. 원래 가금면의 용전(龍田)리는 옛 충주군 금천(金遷)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입석(立石)리를 비롯하여 신평(新坪), 갈등(葛洞), 덕현(德峴)을 합해 용전리라 하고 가금면에 편입시켜 오늘에 이른것이다. 그러나 용전리 보다는 선돌(立石)마을 하면 금방 알아 듣는다. 이 중원(中原)고을은 옛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국경다툼을 벌리며 으르렁대던 곳이다.
신라가 강하면 신라가 짓밟고 고구려가 강하면 고구려가 이 중원벌을 차지하곤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중원을 관류하는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단양 영춘에 고구려의 온달성(溫達城:사적 제264호)과 단양 하방리에 신라적성비(新蘿赤城碑:국보 제198호)가, 중원 가금면 탑평리에는 신라의 중앙탑(中央塔:국보 제 6호)이 번갈아 있다. 가금면 광천리의 장미산(長尾山:342m) 봉우리에는 고구려 성인 장미산성(薔彌山城)이, 노은면 연하리에는 신라 성인 보연성(寶蓮城)이 마주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가 얼마만큼 국경다툼이 치열했던가를 가늠케 한다.
말하자면 남한강 줄기를 따라 선돌마을을 완충지대로 하여 보연성에 수자리(초소)를 두었던 신라를 넘보며 고구려군이 남방경락의 권진기지를 장미산성에 두었던 것. 1979년 2월 25일 이 고을 향토사학가들의 모임인 ‘예성동호회’가 논두렁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이끼 낀 돌덩어리 하나를 발견했다. 돌의 모양새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를 빼어나게 닮은데다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심한 글씨가 띄엄띄엄 있는게 아닌가!
물에 씻어봤더니 글씨의 흔적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예사 비석이 아님을 직감, 이들은 곧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 발굴팀에 알렸고, 그 뒤 정영호(鄭永鎬)교수가 글씨를 판독, 고증하여 1981년 3월 18일 대한민국 국보 제205호로 지정받아 옮겨 세운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의 한쪽을 장식하는 중원군 가금면 선돌(立石)마을의 고구려비다. ‘선돌’ 마을에 국보급 고구려비가 세워지니, 이것이야말로 ‘선돌’이란 예언된 땅이름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