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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 인지면 애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송곡서원(松谷書院)은
서산에서 배출된 향현들을 제향하는 향현사(鄕賢祠)이다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학문 연구와 명현(明賢)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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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지선1코스 시점인 창리포구에서 부석버스터미널(차부삼거리)까지 11.9km 트레킹을 마무리 짓고
곧이어
부석버스터미널에서 ▶ 부석사(도비산) ㅡ 도비산 전망대 ▶ 송림사(인지면 산동리) 곁 공용주차장까지
지선2코스 일부인 4km를 추가로 걷는 트레킹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산리 송림사 공용주차장에서 3.6km를 차량으로 이동하여
서산 송곡서원(松谷書院)과 서산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으로 견학을 갑니다
송곡서원(松谷書院) 방문에 이어, 바로 곁에 있는 서산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을 관람 합니다
송곡서원(松谷書院)은 매년 음력 2월과 8월말 마지막 정일(丁日)에 향사를 지낼 때 외에는
서원(書院)을 항시 개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팀장님은 서산시청 문화예술과
컨텐츠 담당자와 사전에 단체 방문 일정에 조율을 맞춰 문화해설사님도 소개(紹介) 받았습니다
송곡서원 홍살문 앞에서 문화해설사님의 서원(書院)에 관련된 설명을 귀담아듣고 있습니다
서산 지역에서 배출된 유명 인사 몇 분의 이름이 호칭될때마다 모두가 아~ 아~ 하고 감동을 합니다
홍살문을 지나 서원(書院)의 영역으로 들어와 송곡서원으로 이어지는 진입로에서 뒤돌아본 홍살문 입니다
홍살문을 지나 송곡서원으로 이어지는 진입로 좌우에 보호수로 지정된 600여년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0호인 서산 송곡서원 향나무가
2018년 5월 3일자로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제553호 지정 고시됐다고 밝혔습니다
송곡서원 입구 오른쪽 향나무는 수령이 600년 가까이되었다 합니다
송곡서원 입구 왼쪽의 향나무도 600여년 가까이되었다 합니다
송곡서원 진입로 오른쪽의 향나무이며, 향나무 오른쪽 건물은 류뱡택 천문학자 사우 입니다
송곡서원 진입로 오른쪽의 향나무
송곡서원 진입로 왼쪽의 향나무
송곡서원 외삼문(外三門) 오른쪽은 강학 공간인 동재(東齋)이며, 외삼문(外三門) 왼쪽은 서재(西齋)로
동서(東西) 양재가 ㄷ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서(東西) 양재가 ㄷ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가 한 건물로 연결된
강학 공간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입니다
(동재(東齋, 西齋) : 조선 시대 때 유생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
동재(東齋)쪽에 기적비(記蹟碑)가 세워저 있군요
송곡서원(松谷書院)은 서산에서 배출된 이름난 학자, 충신 등의 공적과 덕행(德行)을 추모하기 위하여
집을 세우고 제사(제향)지내는 사당(祠堂) 향현사鄕賢祠)로서
처음에는 서령 유씨와 서산 정씨 두 가문의 배출 인물을 제향하다가 경주 김씨(慶州金氏), 광산 김씨(光山金氏),
그리고 절의와 행적이 비슷한 남원 윤씨(南原尹氏) 인물을 합향하여 모두 9위를 모시는 향현사로 변천하였다.
창건 당시의 제향 인물은 정신보(鄭臣保, ?~1261), 정인경(鄭仁卿, 1241~1305), 류방택(柳方澤, 1320~1402),
유윤(柳潤, ?~1476) 유백유(柳伯濡) 외에 1797년(정조 21)에 김적(金積, 1564~1646)이 추배되고,
1813년(순조 13)에는 김위재(金偉材, 1701~?)가, 1832년(순조 32)에 유백순(柳伯淳, ?~1420)
추배 연대가 불분명한 윤황(尹璜)이 함께 제향되었다 합니다.
송곡사중건기적비(松谷祠重建記蹟碑)
강학 공간보다 1단 높은 곳에 위치한 내삼문(內三門 입니다
내삼문(內三門)으로 구획된 담장 안쪽의 사우(祠宇) 내부에는 제향 인물 9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사우(祠宇) :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
사우(祠宇)에 모신 9명의 위패를 설명해 주시는 문화해설사님
제향 인물의 위차(位次)는 왼쪽부터 정신보, 정인경, 유방택, 윤황, 유백유, 유백순, 유윤, 김적 순입니다
위차(位次) : 자리
정신보(鄭臣保)
중국 저장성 출신으로, 송나라에서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을 지낸 성리학자이다. 몽골의 침략으로
송나라가 멸망하자 1237년(고종 24) 고려로 망명하여 충청남도 서산의 간월도에 정착하였다.
오세재(吳世才)의 증손녀인 고창군부인(高敞郡夫人) 오씨와 혼인하여
정인경(鄭仁卿) 정준경( 鄭俊卿) 두 아들을 두었고 1269년(고려 원종 10) 인주(麟州 지금의 의주) 태수를 지냈다
송나라의 문물과 유학(儒學)을 전수한 공으로 1292년(고려 충렬왕 18)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추증되었고, 송곡서원(松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아들 정인경이 서산(瑞山)을 본관으로 제수받음으로써 서산정씨의 시조가 되었다.
서산정씨대종회에서는 정신보(鄭臣保) 그를 원조, 정인경(鄭仁卿) 을 시조라 칭한다.
정인경(鄭仁卿)
정인경(鄭仁卿)은 성품이 정직하고 몽고어에 능해 통역관으로 이름이 알려져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 정동성이문관(武德將軍征東省理問官)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269년(원종 10) 세자(훗날 충렬왕)가 원나라에 갈 때 시종하였다. 세자가 돌아오다가 파사부(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임연(林衍)의 변(變)을 고하는 자가 있어 인주의 수령으로 있던 아버지 정신보(鄭臣保)에게
이를 알려 세자를 다시 원나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이 공으로 1274년(충렬왕 1) 시종일등공신(侍從一等功臣: 高麗史)에 올랐다.
류방택(柳方澤)
류방택(柳方澤, 1329 ~ 1402년)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대표적 천문학자로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을 제작하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본관은 서산(瑞山), 호는 금헌(琴軒)이다. 충남 서산 출신으로 경서와 천문역법(天文曆法)에 뛰어났다.
1362년(공민왕 11) 밀직부사 겸 판서운관사(지금의 기상청장)에 등용되었으나 고사하고 집으로
돌아와 학문과 천문탐구에 몰두하였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한 뒤에는 서산 도비산에 은둔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새 왕조의 권위의 표상으로서 천문도(天文圖)를 만들도록 명하여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이 제작되었는데, 류방택은 여기서 천문 계산을 담당하는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태조가 개국일등공신 녹봉과 서령군 한성윤을 제수하였으나 고사하여
고려의 유신으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켰다.
2000년 국내에서 발견한 소행성에 그의 이름인 "류방택별"로 붙여졌고, 2006년부터
서산시에서 '류방택 별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서산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이 건립되었다.
윤황(尹璜)
고려 말 충신으로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할아버지는 합문지후예조전서(閤門祗候禮曹典書)를 지낸
윤영찬(尹英贊)이고, 아버지는 도평의록사(都評議錄事)를
지낸 윤수균(尹守均)이다. 부인은 지안주사(知安州事)를 지낸 이광필(李光弼)의 딸 신평 이씨다.
합문지후예조전서(閤門祗候禮曹典書) : 고려 시대에, 합문에 속하여 나라의 의식을 맡아보던 벼슬.
윤황(尹璜)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고려 말 광정대부문하평리(匡靖大夫門下評理),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는 어렸을 적 친구였지만 그가 새 왕조를 세우자 스스로
후송(後松)이라는 호를 짓고,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며 송악(지금의 개성)의 두문동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종이 여러 차례 후한 상과 벼슬을 내리며 조정에 나와 주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문하평리(門下評理) : 고려 시대, 문하부의 종이품 벼슬
광정대부(匡靖大夫) : 고려 시대, 문관의 정이품 벼슬
공조(工曹) : 고려, 조선 시대, 육조의 하나
문하부(門下府) : 고려와 조선 초기에 나라의 모든 정사를 보살피던 중앙 최고 행정 관청
윤황이 죽자 태종은 손수 조문을 하고 특별히 국사 무학(無學)에게 묏자리를 잡게 하여 당진현 관정리에 장사
지냈다. 1798년(정조 22) 고려 후기 충신 김주(金澍)의 시호를 내리고 추존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윤황의 절의가 알려져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후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495번지에 있는 송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송곡서원에서는 제향된 인물의 행적을
정리하여 행장록(行狀錄)을 펴냈는데, 충간공후송윤황행적(忠簡公後松尹璜行績)에 윤황의 기록이 실려 있다.
유백유(柳伯濡)
고려 말 조선 초, 서산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서령(서산)으로 아버지는 유방택(류방택, 柳方澤)이고
동생은 유백순(柳伯淳)이다. 유백유(柳伯濡)는 동생 유백순과 함께 이색(李穡) 밑에서 공부하였는데
사람들은 형제를 유씨쌍벽(柳氏雙璧)이라고 불렀다. 유백유는 목은이색의 손서(孫壻, 손녀의 남편)이다
유백유는 춘추관수찬으로 박실(朴實) 김도(金濤)과 명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보았다. 고려 말기에는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우왕 때 판내부시사가 되었다. 창왕 때 조준(趙浚)이 토지 개혁안을 내놓자 시중 이색이 옛 법을
가벼이 고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유백유가 이색의 편을 들어 신구(新舊) 세력 간에 대립이
일어 났다. 1391년(공양왕 3)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서 토지 개혁을 비난하였다가 전라도 광주에 유배되었다.
목은 이색이 쓴 목은집(牧隱集)과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유백유가 지은 호기(號記)와 저정기(樗亭記)가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495번지 송곡서원에 아버지 유방택, 동생 유백순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유백순(柳伯淳)
유백순(柳伯淳)[?~1420]은 조선 개국 후 어지러운 정치 질서를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학문과 경서에 뛰어나 성균관대사성을 지냈으며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으며,
효경과 절의로 이름이 높았다. 본관은 서령으로 아버지는 유방택(류방택, 柳方澤)이고, 형은 유백유(柳伯濡)이다.
유백순은 형 유백유와 함께 이색(李穡) 밑에서 공부하였는데, 사람들은 형제를 유씨쌍벽(柳氏雙璧)이라고 불렀다
1376년(우왕 2) 병진방(丙辰榜)에 병과(丙科) 3위로 합격하였고,
조선 개국 후 1406년(태종 6)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408년(태종 8) 좌사간대부로 있을 때, 반란을 꾀한 죄로
제주에 유배된 왕의 처남들인 민무구(閔無咎)와 민무질(閔無疾)을 엄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파직된 간관(국왕의 옳지 못한 처사나 잘못에 대해 간언하는 관리) 안속(安束) 등을 용서하여
언로(言路)를 열어 놓을 것을 청하였다.
역모 죄인인 목인해(睦仁海)의 참형을 늦출 것을 청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사헌부대사헌 맹사성 등과 함께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유백순이 죽자 세종은 관곽(棺槨)과 종이 70권을 내리면서 ‘성품이 굳세고 곧으며 경전에 밝고 역사에 통달하였
으며, 오랫동안 국학(國學)의 장관으로서 후학 양성에 힘써 많은 문사가 그의 아래서 나왔다.’라고 칭송하였다.
유백순의 아버지인 유방택과 형 유백유가 제향된 송곡서원에 1832년(순조 32) 추가로 배향되었다.
유윤(柳潤)
조선 전기 서산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서산 서령으로 아버지는 유회(柳淮)이고,
할아버지는 저정(樗亭) 유백유(柳伯濡)다. 서령 유씨는 고려 때 서산 지역에 정착한 토착 성씨다.
유윤(柳潤, ?~1476)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으나, 1455년 단종이 폐위되자 관직을 버리고
청주 무동(현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세조가 여러 차례 관직을 주며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무동처사(楙洞處士)라는 어필을 내렸는데 그것이 호(號)가 되었다.
1476년(성종 7) 세상을 떠날 때 벼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후손들이 모두 그 뜻을 따랐다고 한다.
처사(處士) :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선비.
김적(金積)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단구자(丹丘子)이며, 할아버지는 서산 지역에 자리 잡은 경주김씨의 입향조(入鄕祖)인
김연(金堧)의 손자이다. 어머니의 외삼촌(외외종조부)이자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아버지인
이계(李啓)에게서 이정구와 함께 글을 배웠다.
아버지는 증 좌승지 김호윤(金好尹) 부인은 화순 최씨(和順崔氏)로 좌윤 최원지(崔遠之)의 딸이다.
아들은 연산현감 김홍익(金弘翼), 김홍양, 김홍필, 충청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다.
1564년 서산에서 출생한 김적(金積, 1564~1646)은, 1609년(광해군 1) 사마생원시에 급제한 뒤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을 거쳐 1613년(광해군 5)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을 지냈다.
광해군의 폭정이 계속되자 염증을 느껴 탄식하고 사직한 뒤 가족을 이끌고 서산으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출사의 기회가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는데, 심지어 월사 이정구가 편지까지 보내 부임을
종용하였지만 “어찌 백수의 나이에 소년들 사이에서 종종걸음을 치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자식에게는 학문을, 노복에게는 농사에 근면하기를 일깨우고 양성당(養性堂)을 지어 이곳에서도 후학을
양성하였다. 부호였으나 물욕에 담담하여 불쌍한 사람을 기꺼이 도왔으며,
임진왜란 때는 수천 석의 곡식을 풀어 돌려받기를 바라지 않으며 굶주린 사람들을 도왔다
큰아들 홍익(弘翼)은 연산현감(連山縣監)으로 재임중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가 몽진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다 험천전투(險川戰鬪)에서 전사하였고, 막내아들 홍욱(弘郁)은 충청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현재 김적의 학문과 저술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다만 김적의 행적은 아들 김홍욱의 문집인
학주선생전집(鶴洲先生全集)에 수록된 「선고행장(先考行狀)」에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다.
서산으로 낙향하여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은거하면서
주변의 사림들과 교유한 흔적인 단구대(丹丘臺)와 용유대(龍遊臺) 등의 유적이 전하고 있다.
묘소는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 먹수지마을 뒤편에 위치한다. 묘전에는 조익(趙翼)이 찬하고, 아들 김홍욱이 쓴
묘갈(墓碣)이 있다. 2011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410호로 지정되었다.
김적은 후일 아들인 학주 김홍욱의 공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1797년 서산 송곡사(松谷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경주김씨족보에 따르면 송곡사가 1868년(고종 5) 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될 당시
김적의 위패는 대교촌 뒤편에 매안했다고 한다.
이들 부자의 묘는 서산시 대산읍 대로화곡길 먹수지마을이다
(2011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410호로 지정된 김적(金積, 1564~1646), 김홍욱(金弘郁)
부자 묘소는 신도비 바로 곁을 지나는 서해랑길 79코스에서 약 150m 지점에 묘역이 있습니다.
나의 카페(다음 카페 "오색채운") 서해랑길 79코스에 많은 자료가 올려저 있습니다)
김홍욱(金弘郁)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학주(鶴洲). 증조부는 서산 지역의 경주 김씨 입향조
인 김연(金堧)(1494~?)이고, 조부는 증 좌승지 김호윤(金好尹), 아버지는 찰방(察訪)을 지낸 김적(金積)이며,
어머니는 화순 최씨(和順崔氏)로 좌윤 최원지(崔遠之)의 딸이다. 부인은 참의(參議) 오정(吳靖)의 딸 동복
오씨(同福吳氏)이다. 아들은 현감 김계진(金季珍)이다.
형은 병자호란 중 험천 전투에서 전사한 김홍익(金弘翼)이다.
(자(字)는 본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으로
예전에, 이름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부르지 않았던 관습이 있어서 흔히 관례(冠禮) 뒤에 본이름 대신으로 불렀다.)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은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46년(인조 24) 이조좌랑과 1650년(효종 1)
이후 집의, 승지를 거쳐 홍충도관찰사(洪忠道觀察使)로 대동법의 실시에 힘썼다.
효종(孝宗) :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한지 5일 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조선 제17대 왕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이다.
효종(孝宗)은 김홍욱과 친분이 있었는데 김홍욱이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에게 가옥을 한 채
하사하였다. 특히 이 가옥(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464번지)은 1745년(영조 21) 여기에서 태어나 1759년(영조 35)
에 왕비가 된 김홍욱의 4세손인 김한구(金漢耉)의 맏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생가이기도 하다.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한 1654년(효종 5)에 효종이 구언교(求言敎)를 내리자 8년 전 사사된
회빈 강씨(소현세자의 빈)의 억울함을 말하고, 그 원을 풀어줄 것을 상소하였다.
이른바 ‘강옥(姜獄)’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종통(宗統)에 관한 문제로 효종의 왕위 보전과도 관련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하던 문제였다. 김홍욱의 이 같은 발언은 효종을 격노하게 하였고, 결국 하옥되어
친국(親鞠)을 받던 중 장살되었다.
김홍욱의 관작 복구는 1659년(효종 10)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주청으로 이루어졌다
김귀주(金龜住)는 서산 출신으로 김두광(金斗光)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김선경(金選慶)이고,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이며,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오빠이다.
김위재(金偉材)
조선 후기 서산 출신의 유생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홍(士弘), 호는 미암(迷菴). 김장생(金長生)의
6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1633~1687)이고 할아버지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김진구(金鎭龜, 1651~1704)이다
아버지는 형조참판을 지낸 김운택(金雲澤, 1673~1722)이다. 아들은 김정묵이다. 광산 김씨의 서산 입향조이다.
김위재(金偉材)는 정호(鄭澔, 1648~173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경종 1)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완도군 신지도(薪智島)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1724년 영조 즉위 후 사면되어
서산군 화변면 창촌리(현 서산시 부석면 창리)로 낙향하였다. 신임사화 때 화를 당한 피해자의 자손들이 대부분
음사(蔭仕)를 받아 한양으로 갔으나 김위재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여 평생 한강을 건너지 않았다 한다
이후에도 학행(學行)으로 사산감역(四山監役), 부솔(副率)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후에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나 이 역시 거절하였다.
서산 출신으로 영조 때 대사헌을 지낸 김유경(金有慶)은 그의 학식과 덕을 칭송하였고
서산의 사림과 아이들까지 김위재를 존경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학식이 공자 못지않다고 하여 ‘호서 부자(夫子 = 공자를 높여 부르는 말)라고 불렀다.
1813년(순조 13)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495번지에 있는 송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송곡서원에서 펴낸 행장록(行狀錄)에는 김위재와 관련하여
미암김선생행장 방재원지 미급추래(迷菴金先生行狀方在遠地未及推來)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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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 인물의 위차(位次)는 왼쪽(서편)부터 유백유, 유백순, 유윤, 김적, 김위재 순입니다
위차(位次) : 자리
1694년(숙종 20) 서산에 정신보를 기리는 송곡서원은 서산 지역에서 최초로 건립되어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을 피할 수 없었으며 1882년(고종 19)에
복설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성사되지 못하였고, 1910년(순종 4)에 9현의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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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79코스를 답사하면서~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현 위치)에서 앞쪽 나즈막한 고갯마루를 넘어서자마자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의
먹수지마을 뒤편에 솟은 옥녀봉(진행 방향) 아래쪽 경사면에~
김적, 김홍욱(김적의 막내 아들)의 묘역 문화재가 있습니다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의 먹수지마을 뒤편에 솟은 옥녀봉 아래쪽 경사면에 김적선생 묘
김적이 낙향하여 풍류를 즐겼다는 용유대는 도당천과 홍천천이 합류지점의 도당천에 위치한 화강암이며
단구대는 용유대 하류에 있는 암반이다.
용유대 ㅡ 단구대 ㅡ 정순왕후 생가 위치를 위성지도로 그래픽하여 보았습니다
김홍욱선생 묘와 신도비
서산시 대산읍 대로리의 서해랑길 79코스 노선은 김홍욱선생 묘 곁을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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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곡서원을 견학을 하면서 강학 공간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 살림살이 잡동사니 집기들이 마루 위나 마루 밑이나 아무렇게 놓여 있어
지저분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서산을 빛낸 9명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로
이어지는 동서재(東西齋) 경내가 어지럽게 지저분하다는 씁쓸한 느낌이였습니다
삐거덕 하고~
송곡서원(松谷書院) 외삼문(外三門)은 굳게 닫첬습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산천( 山川 )은 의구(依舊)한데~
송곡서원 진입로 좌측 수령이 600년 가까이된 향나무
송곡서원 진입로 우측 수령이 600년 가까이된 향나무
송곡서원에서 서산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으로 갑니다
송곡서원(松谷書院)
송곡서원(松谷書院)의 홍살문(紅살門)
송곡서원에서 서산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으로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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