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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8:15~19(41)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2023. 4. 30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에 제가 전공하였던 부분이 역사 신학이었습니다. 제가 평소 역사나 히스토리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에 역사신학을 전공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신대원에 다니면서 배운 여러 과목 중에서도, 특히 제가 관심이 많았던 것이 교회사였습니다. 교회사 중에서도 교회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는 중세시대를 다루는 중세교회사를 정말로 재미있고도 흥미롭게 공부를 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중세교회사를 공부하다 보면, 중세시대 천주교에서 행하였던 여러 가지 잘잘못들을 상세하게 공부를 하게 됩니다. 중세 천주교회의 여러 가지 독특한 모습 중에서도 ‘성물숭배사상’이라는 아주 독특한 천주교만이 가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물숭배사상은 글자 그대로 ‘거룩한 물건, 성물(聖物)’을 숭배하는 사상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의 유골이나 성인이 남긴 유해나 유물들이 신성한 효력을 지녔다고 믿는 것이 바로 ‘성물숭배사상’입니다. 즉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확인하기 위하여 상처난 예수님의 몸에 집어넣었던 손가락이 신령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성물 숭배사상이 얼마나 극에 달했느냐 하면, 당시 유럽 전역에 널려 있었던 수많은 구도원 중에서 성물이 하나라도 있다는 소문이 나면 그 수도원은 금방 부자 수도원이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설이 좋고 경치가 좋은 곳에 세워진 수도원이라도 성물이 없으면 사람들이 찾지를 않아서 가난을 면치 못합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수도원이 되어 문을 닫게 되는 수도원이 되는 것이 성물이 가진 힘이라는 엉뚱한 판단까지 내리게 됩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사진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예수님이 신었던 샌달(슬리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샌달(Sandalen Christ)’이라 이름이 붙어 신성시 됩니다. 옆의 사진은 보기에는 흉측하게 보이지만, 카톨릭의 성인인 ‘聖 카타리나의 손’으로 알려진 성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매달렸던 십자가의 파편, 예수님이 쓰셨다는 가시면류관의 가시 등 수많은 성물들이 제작되고 팔려나가면서, 도리어 올바른 신앙을 어지럽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교인들이 왜 예수님의 흔적이나 성인으로 칭송받는 사람들의 유물에 관심을 가질까요? 엄청난 고액으로 판매되는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요? 성물 숭배사상이 기독교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오늘날에도 천주교 안에서는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멕시코인들이 즐겨 먹는 옥수수가루로 만드는 토티야(tortillas)라는 납작한 옥수수빵이 있습니다. 루비오라는 여인이 토티아 빵을 화덕에서 구운 후 꺼집어 내어 식히다가 놀랄만한 사건을 경험합니다. 동글납작한 토티야 빵 표면에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이 보여진 것입니다. 빵을 굽다가 그을림에 새겨진 얼굴을 두고 루비오는 예수님의 얼굴이라 판단합니다.
루비오 부인은 토티야 빵을 거룩한 성물로 생각하고 성체용기에 담아 거룩하게 보호하기 시작합니다. 하루 종일 성체용기를 돌보는 일에만 헌신합니다. 그 구운 빵 앞에서 낮에도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합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국민 대부분이 카톨릭신자인 브라질에 큰 뉴스거리가 됩니다. 그녀의 친구들, 이웃들, 심지어는 지나가는 나그네들까지 그 앞에 와서 기도하고 돈을 주고 갑니다. 사람들은 구운 빵 표면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두고 예수님이라 말하면서 놀라워합니다. 루비오 부인이 이 빵 하나를 가지고 매우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상하다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진실이 드러났는데, 빵을 굽다가 자연스럽게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일부로 조작해서 만들어진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한바탕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의 사람들은 빵에 있는 얼굴이 진짜 예수님의 얼굴이라 믿는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왜 이런 것에 흔들리고 열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모습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신앙을 가진 분들도 하나님 보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이런 잘못된 신앙관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당신은 신앙생활을 오래하였는데 아직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직접적인 응답을 받지 못하였나요? 그렇다면 당신이 다니는 교회가 잘못되었고, 당신이 믿고 있는 신앙이 잘못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라는 말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어떤 모습인가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악수를 하고 대화를 하고 밥을 같이 먹으면서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인가요?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신앙의 모습이 꼭 눈으로 나타나고, 피부로 느껴지는 3차원 세계의 모습인가요?
만일 이런 먹고 마시고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단들을 보세요. 지구상에 있었고 또한 현재도 있는 모든 이단들은 하나님이라 말하는 자칭 교주들이 하나님 행세를 합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신을 가진 사람을 두고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모습인가요?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또한 늘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내주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고 내가 만질 수 있다고 해서 그런 대상이 하나님이라 오판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가진 장자권을 속여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장자에게 주어지는 아버지의 축복권 역시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취하게 됩니다.
그의 마음에 육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 세상을 향한 마음이 더 강했고, 죄의 유혹이 더 컸습니다.
이와 같은 야곱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교회에 출석도 하고 설교도 듣고, 성만찬도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세속적인 관심만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올바르게 만나지 못하였기에 세상의 욕심이 내 눈을 가려 버리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지극히 세상 욕심과 세상 생각만 가득하였던 야곱이 본문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인생의 목적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 모두 역시 이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야곱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듯,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여러분의 인생이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져온 변화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내가 만져 보고 피부의 감각으로 느껴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을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교감을 하거나, 또는 악수하고 껴 앉는 행위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설교 말씀을 듣다 보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임재하심이라는 단어는 어려운 단어입니다만,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거주하고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 안에 머물고, 내가 하나님이 나에게 임하여서 나에게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느낌과 감정 속으로 모실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결단코 쉬운 모습이 절대 아닙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였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자신의 몸을 학대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바랐습니다. 밥을 굶기도 하고, 깊은 산속이나 광야로 들어가서 세상으로부터 단절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원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잠을 자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원했고, 어떤 이들은 목숨을 건 40일 금식기도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다 하나님에게 바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원하였습니다.
수많은 행동과 모습 중에서 그 어떤 것이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모범답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자질 그리고 믿음의 바탕을 보면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야곱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6절에서 야곱은 고백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영어 성경 NIV역은 “Surely the LORD is in this place(참으로 여호와께서 이곳에 계신다)”라고 번역합니다. 야곱은 이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라고 확신합니다. 야곱이 말하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를 말하는 것인가요?
지금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고 있는 중입니다. 도망가는 도중 광야에서 밤을 새게 됩니다. 그때에 꿈을 꾸는데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때에 잠을 깬 야곱은 자신이 잠을 자던 돌배게를 모아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야곱이 여기라고 말한 곳의 이름은 <루스>라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이후 그 장소를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 부릅니다. ‘루스’가 ‘벧엘’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고 생각하는‘루스’가 아닙니다. 장소로서의 루스에만 머물게 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만이 ‘벧엘’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당 안에서만 하나님이 활동하고, 교회당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 결과 교회당을 벗어난 다른 장소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내가 일하는 일터나 내가 머물고 있는 세상 속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과 판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루스라고 말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장소가 벧엘이 됩니다. 내가 일하는 직장이 벧엘이 됩니다. 내가 머물고 생활하는 나의 가정이 벧엘이 됩니다.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잠을 잔 장소를 두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17절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당 안에서 예배할 때나, 직장 속에서 일하고 있을 때나 두렵고 경건한 모습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부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심으로 보다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10살 된 어린 소녀가 MRI 기계 속에서 검진을 받고 있었습니다. 5분 동안 기계 위에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있어야만 했습니다. MRI를 찍는 기술자는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인터콤을 통해 말합니다. 그런데 아이의 입술이 계속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번 더 움직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아이의 입술은 계속 움직입니다.
그때 화가 난 기사가 음성을 높이며 말합니다. “ 왜 계속 말하고 있니. 말을 하면 사진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잖아”그런데 아이는 거대한 MRI 기계 속에서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계속합니다. 기사가 와서 들어 보니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가 중 후렴 부분인 ‘날 사랑하심(yes .jesus love me)’라는 부분을 계속 부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통사고로 실려 온 아이는 혼자였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이미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아이만 혼자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에 어린 아이가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라고 부른 것입니다. 어린아이이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은 아이였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느낀 아이였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신앙고백을 멈추지 않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경험하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15절,“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놀라운 약속입니다. 비록 지금은 들짐승소리를 들으면서 불안하고 무섭게 잠을 자는 광야입니다. 부모님을 떠나 혈혈단신 홀로 도망치는 외로움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서 다시금 이 땅으로 돌아 오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야곱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이때부터 오로지 하나님의 손만 부여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의 그 어떤 약속 중에서도 가장 귀하고 가장 중요한 약속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약속입니다. 이제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광야 같은 어려움 속일지라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벧엘의 야곱을 통해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런 가능성의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는 분입니다.
몇 해 전 미국 뉴욕에서 브라더스 서커스단이 공연할 때의 일입니다. 철망으로 둘러친 공연장 안에서 사나운 호랑이 세 마리가 쑈를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조련사가 채찍으로 땅을 치면서 호령을 하면, 호랑이들이 사다리를 올라가기도 하고, 조련사의 말 한마디에 통제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조련사가 고함을 치면서 호랑이를 다룰 때 갑자기 정전이 된 것입니다. 호랑이들이 철책 안에 갇혀 있기에 관중들에게는 위험이 없었지만 문제는 조련사였습니다. 관중들은 어두운 암흑 속에서 호랑이가 조련사에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두려워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조련사의 고함과 채찍 소리가 들려 왔고, 이내 전기가 들어오면서 위기 상황을 넘기게 됩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지역 신문기자가 취재를 하였고, 조련사는 이렇게 인터뷰를 합니다. “어둠 속에서 당황하면 호랑이들의 먹이가 됩니다. 나는 어두움 속에서 호랑이들을 전혀 보지 못하지만, 호랑이들은 내 숨소리까지도 나 느낍니다. 그래서 조련사는 어둠 속에서도 밝은 곳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가 살아가는 인생도 조련사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사방으로 꽉 막혀 있는 어둠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는 약속을 믿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 호랑이의 발톱이 나를 해꼬지 하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행하신 언약을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다 이루어 주십니다. 다가오는 5월의 모든 시간 속에서도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