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8(THE END)
마지막으로 처녀가 자결한 곳에 피어난 백일홍이 아닌, 이무기가 승천하며 흘린 감사의 눈물로 탄생한 꽃에 이름을 지어준 호백이의 역할에 대해 나누고 싶다.
성서의 첫 책인 창세기에는 아담이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 착안해 열한 살 어린이이자 여성인 호백이가 백일홍의 이름을 짓도록 했다. 이름을 짓는 사람은 권위자다. 역설적이게도 권위에서 배제된 계층인 여성 어린이를 권위자로 세우면서 진짜 권위가 어디서 오는지를 묻고 싶었다. 사랑하고 돌보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권위다. 더 이상 안타깝게 죽은 처녀를 기리며 사람들이 지어준 슬픈 운명의 백일홍설화를 입에 올리지 말고, 다른 생물을 돕기 위해 용기를 발휘한 영웅, 해녀들의 이야기로 백일홍을 기억하면 어떨까?
특정 시기에 일어나는 학습효과가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각인효과’는 말 그대로 강력하다.
어떤 이야기가 먼저 우리를 점령하는지, 어떤 이야기가 주로 생산되고 배포되는지는 한 사람의 인생 전체와 무의식까지 좌우하는 강력한 접착제다. 의식하고 떼어내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무의식에 끈끈하게 달라붙으면 더더욱 탈착 불가능하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 예외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프북스가 출간한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옛이야기>(이하 페·다·옛)에서 작가 지현이 쓴 신콩쥐팥쥐가 그랬다.
일찍 들었던 콩쥐팥쥐가 식상하기도 했고, 작가 지현이 재창조한 콩쥐팥쥐가 너무 신나고 통쾌해서 자연스럽게 신콩쥐팥쥐가 옛콩쥐팥쥐를 삼켜버렸다. 지금 나에게 살아있는 콩쥐팥쥐는 신콩쥐팥쥐다. 없던 인물을 창조한 이야기 또한 옛이야기를 몰아내는 강력한 치료약이다. 앞에서 언급한 페·다·옛에서 작가 조박선영의 홍길영전이 적절한 예시다. 홍길동만 주야장천 들었는데, 슬기롭고 힘센 누이 ‘홍길영’을 상상하다니!
작가가 이토록 멋진 인물을 창조하면 단박에 기존의 홍길동은 잊히고, 새로운 인물 홍길영에게 마음이 옮겨가고 새겨진다.
이게 다 두 작가의 치열한 고민과 연구 덕분이다. 해녀이야기로 탈바꿈한 <해녀의 딸> 역시 백일홍설화를 새롭게 읽는 디딤돌이 되길, 두 작가의 인물들처럼 주인공 호백이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