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신 주님(창15:1-7절)
인생에게는 반드시 두려움이 있읍니다. 염려와 걱정 근심도 있읍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불가피한 현상들입니다. 신앙인에게도 때로 두려움이 생길 수 있읍니다. 이 땅은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도 이 면에서 예외는 아니었읍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의 조상들은 걱정 근심이 없는 특별한 인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아브람에게 말합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아브람도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럼 그가 무엇을 두려워했습니까?
본문 1절에 '이 후에'라는 시간의 부사가 기록되었읍니다. 어떤 일 후를 의미합니까? 이 일은 분명히 14장에 기록된 사건과 관계됩니다. 14장에서 아브람은 318명의 가병을 데리고 엘람왕을 비롯한 4개국의 연합국과 싸워 대승을 걷우었읍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 북쪽 시날 땅에 위치한 엘람 왕의 연합군은 소돔 왕을 비롯한 5개국의 동맹군들을 물리친 강한 군대였읍니다. 그리고 엘람 왕은 가나안 땅을 식민지로 장악하려고 남쪽에 위치한 강대국 애굽과 다툴 정도로 강국이었읍니다. 그러나 엘람 왕은 아브람 개인에게 패하여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엘람 왕이 가만 있을 리 없읍니다. 그는 반드시 군대를 재편성하여 아브람을 공격하려 올 것입니다.
이를 예상한 아브람은 대승리후에도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이들이 공격하러 온다면 개인 아브람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런 마음의 변화를 읽으시고 이상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시기적절한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아주 자상하게 돌보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였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자세히 생각해 봅니다.
여호와는 아브람의 방패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가나안 땅에서 삽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약속하신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그는 단신(單身)이며 그 땅에서 이방인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모여 사는 7부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산지(山地) 이곳저곳을 방황하면서 살아갑니다. 누가 보아도 그는 힘이 없어보이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도 인간인지라 가나안 땅에 살면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그에게 항상 있었읍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시104:12-13) 이렇게 아브람을 비롯한 이삭과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힘없는 소수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라도 치기만 하면 금방 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무리였습니다.
신약 시대 성도들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구원받고난 이후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세상이 성도를 미워하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항상 외롭습니다. 심지어 가족들과도 소원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 고독해집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성도들을 바보로 봅니다.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이 저에게도 많은 외로움을 주었습니다. 불신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행동 방식에서 나와 그들은 달랐습니다. 자연히 그들과 거리가 생겼읍니다. 홀로 대학 켐퍼스를 다닐 때가 많았읍니다. 그 결과 대학 생활이 재미없어 보였읍니다. 이 때 꼭 이렇게 살 필요있는가하는 의문을 가지면서 신앙에 대해 회의(懷疑)를 품은 적도 저는 있었읍니다. 성도의 삶이 참으로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버리는 어리석은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 결과 견뎌 나갔읍니다. 그 때가 신앙의 연단기간이었음을 저는 나중 알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읍니다.
여러분들중 혹 이런 회의에 빠진 분은 없는지요? 이 땅에서의 신앙 삶은 영광의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참을 각오가 된 성도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도 그런 삶을 살았음을 잊지 맙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 후손들의 방패였읍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시105:14-15)
왜 그렇습니까? 아브람은 단신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이신 여호와가 그를 불렀고 그에게 언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에 대해 이렇게 간단하게 말합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15:7) 이런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람과 그 후손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기 위해 아브람과 그 후손들을 보호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12:3)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바로 아브람과 그 후손들을 위한 방패자체였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믿음으로 아브람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9)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방패가 됩니다. 더구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산 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물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에 위로와 힘을 얻기 바랍니다!
방패라는 단어에 재미있는 뜻이 있습니다. 방패는 공격용 무기가 아닌 방어용 무기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아브람과 그 후손들은 항상 공격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방패가 그들을 보호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아브람은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방패에만 의존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아브람과 그 후손들은 하나님의 보호아래서만 살 수 있는 그런 존재였읍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고후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 말은 성도가 구원을 받고난 이후 불같은 시험에 계속 노출(露出)된다는 뜻입니다. 흔히 예수님 믿고 잘 살아 보고자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을 우리는 기복주의(祈福主義: 이 세상의 복만 추구하는 자세) 신앙이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현세적(現世的)인 복(福)을 위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물론 비성경적입니다. 구약 성도나 신약 성도나 모두 이 세상에서 많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연단이 없다면 그의 신앙에 반드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분열 왕국인 남방 유다 나라의 3번째 왕인 '아사'는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흠없이 행했습니다(왕하15:9-15절) 그는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을 때 태후의 위를 폐하고 우상을 찍어 버릴 정도로 하나님께 충성했읍니다(같은 장 13절) 이 때 그는 구스의 백만 대군을 하나님을 신뢰하여 물리칠 정도로 그의 신앙이 출중했읍니다(대하14:9-15:2절) 이 후 약 30여년 동안 남방 유다는 전쟁없이 평화 속에 살았습니다(대하15:19절). 하나님의 남다른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위 36년째 맞았을 때 북방 이스라엘이 유다를 쳐들어 왔읍니다(대하16:1절) 이 때 그는 겁이 나서 여호와의 곳간과 왕궁 곳간의 모든 은금을 취하여 다메섹의 아람왕 벤하닷에게 보내어 원군(援軍)을 청했읍니다(대하16:2-3절) 이 때 선견자 '하나니'가 나타나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아사는 회개하지 않고 그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대하16:10절). 이후 그의 말년은 비참했읍니다(대하16:11-13)
믿음 좋은 아사왕이 왜 그렇게 달라졌습니까? 연단없이 30년을 평안히 살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이나 연단없는 삶을 원하시는지요? 이것은 신앙인 스스로 저주를 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가 불같은 시험을 받을 때 곧 망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그 시험에서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합니다. 이 때문에 성도는 불같은 시험을 만나도 대범해 집니다. 이미 단련(鍛鍊)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2-3)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이는 환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연단을 낳으며 연단은 소망을 이루어 줌을 알기 때문입니다(롬5:3-4절)
그렇다면 불같은 시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사도 베드로는 달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벧전1:7) 이렇게 불같은 시험은 성도를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신앙의 성숙을 원하신다면 시험 당함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요!
성숙한 성도는 고난 중 오히려 기뻐합니다. 방패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며 그리고 고난이 결국 연단을 이루어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공격이 아닌 방어의 삶을 삽니다. 아주 소극적인 삶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합니다. 인내로 승리합시다!
여호와는 아브람의 지극히 큰 상급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심리를 잘 읽으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그는 아직도 기업을 얻지 못했읍니다. 오히려 나그네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변 부족들이 언제라도 공격하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잃을 수 있는 위험에 항상 그는 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 그런 위험을 알고 그는 재빨리 애굽으로 피신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될 수 있는 그런 삶을 가나안 땅에서 살았습니다. 이 때 그가 갖는 불안은 무엇입니까? 미래 보장도 없는 삶을 지금 자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위에 한 가지 불안이 그에게 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해주겠다고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지 이미 10년이 지났습니다(창16:16절).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손은 어직도 그에게 없었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을 상속받는대해도 그에게 후손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후손 문제는 그의 장래와 관계하여 그에게 심각한 문제였습니다(본문 2절).
하나님도 이를 잘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람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이 말은 가나안 땅에서의 그의 모든 삶과 행위는 반드시 헛되지 않는다는 약속을 뜻합니다. 아브람의 장래와 미래에 대한 어떤 의심도 그가 가져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걸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믿을 수 있다면 아브람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없이 가나안 땅에서 계속 나그네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반드시 보상과 상급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도들도 신앙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많은 회의를 갖습니다. 미래 보장도 없는 신앙 삶을 사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재미있게 그리고 육체를 즐기면서 삽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무언가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 삶이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때 불신자들도 그런 초신자의 신앙 삶을 비웃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그렇게 어렵게 인생을 살 것없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헛된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됩니다. 성도의 신앙 삶은 반드시 그 결산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보증해 줍니다.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를 이렇게 달리해서 우리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십시다! 그리고 그를 위해 사십시다! 그러면 우리의 생은 반드시 큰 결실로 나타납니다. 이는 참으로 큰 복입니다.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이 어느 하나라도 헛된 것이 없게 됩니다. 하다 못해 밥먹고 잠을 자는 것도 상급을 얻게 합니다. 주를 위한 모든 것은 예외없이 상급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망 때문에 성도들은 무언가 하다가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지만 하나님 이런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학교 공부도 결국 주를 위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공부하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공부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주를 위해 의미가 다 있습니다.
이 점에서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장이 없는 미래를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립니다. 비록 세상에서 성공해도 죽음 이후 어떤 상급도 그에게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성적을 낸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잘 된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모르고 그져 막연히 일합니다. 결국 이들은 쾌락주의에 빠집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여러분들의 삶에 보람과 기쁨을 제공합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아직도 진실한 싱앙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브람에게 준 하나님의 보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이런 약속을 못받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약속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절).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의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두려움이 있습니까? 목표도 없이 인생을 막연히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두려움은 불신의 결과 나타납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이에는 형벌이 따릅니다(요일4:18절).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이 때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 때 영적 평안이 우리를 사로 잡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절망을 모르는 사람으로 힘차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은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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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담대함(엡3:1-13절) 장 창수선교사
사도 바울의 일생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는 전에 유대교의 열심분자로서 그리스도를 그렇게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을 붙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일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적 사울이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로 변했습니다.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위해 나머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기쁘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의 간증에 의하면 이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위로의 하나님이 고난중 반드시 자신을 위로해 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고후1:3-5절) 둘째,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자신의 죽을 육체에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넘치게 하기 때문입니다(고후4:11-18절). 셋째, 그 고난은 자신에게 의의 면류관을 안겨 주기 때문입니다(딤후4:7-8절). 마지막으로 죄인중에 괴수로되 그가 값없는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생애를 걸쳐 복음 사역에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원인이 기록됩니다. 이를 알므로 우리들도 성도로서 담대한 신앙 삶을 살기 원합니다.
복음의 성격을 잘 아는 바울(1-6절)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2장에 걸쳐 우리가 받은 바 구원이 너무나 엄청난 것임을 진술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1장에서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설명된다면 2장에서 구원을 받을 우리의 입장에서 설명됩니다. 이 설명으로 사도 바울 자신도 감격에 젖어 자신을 이렇게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 나 바울"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힌 것에 대해 이렇게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너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힌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자랑이며 영광이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로마 시대 감옥은 오늘날처럼 시설이 좋지 못합니다. 오늘날 어떤 나라의 감옥은 웬만한 나라의 호텔처럼 시설이 참 좋습니다. 바울은 그런 좋은 곳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시절 러시아의 집단 수용소는 '죽음의 수용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살기 위해 수용소 안에 사는 쥐도 잡아 먹어야 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죄수는 인간 취급받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곳에 있었지만 이를 불평불만하거나 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읍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세서 그리고 빌레몬서라는 4대 옥중서신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책에서도 불평 한마디 찾을 수 없습니다. 옥에 갇힌 자 바울이 옥 바깥에서 자유롭게 사는 성도들에게 오히려 기뻐하라고 그는 권했고 성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충고했읍니다(빌4:4절). 사람의 생각으로 이 사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바울의 마음을 여유있게 만들었습니까? 그 원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지식때문입니다. 그는 복음이 무엇임을 잘 압니다. 본문에서 그는 복음을 이렇게 다시 소개했습니다.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2절), '계시로 주어진 신비'(3절)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4절)이다. 사도 바울에게 복음은 '그리스도라는 비밀'로 '하나님의 엄청난 경륜'을 감춘 상태에서 '계시로 주어진 신비'였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신약 시대 거룩한 사도들과 구약 시대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났습니다(5절).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증인들에게 의해 이 복음은 이미 참되다고 검증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복음의 비밀을 특별히 알게 된 바울은 기쁘게 복음의 일에 종사했고 그로 인해 옥에 갇혔지만 담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자신의 자신과 생애 대한 자긍심을 두고 어디에서 생의 기쁨을 찾습니까? 자신의 미모나 가문, 학벌, 명예나 지위 그리고 권세나 부에 두고 있습니까? 이들 모두 상대적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열등하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아니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나라와 민족에 둔다고요? 그러나 지나친 민족적 자긍심이나 애국심은 다른 민족들을 멸시하게 만듭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 예입니다. 결국 그는 600만의 유대인들을 죽였고 그리고 2차대전으로 2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고 그리고 유럽의 문명 자체를 파괴시켰습니다. 그러나 민족적 자긍심도 우월한 민족 앞에서 꺽어지고 맙니다. 이 모두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원리에 위배됩니다.
신자는 복음인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만족을 찾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생애에 참만족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만유의 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 보다 더 높은 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를 아는 것만이 최고의 영광이며 기쁨이며 영원한 만족입니다.
이 복음은 어떤 일을 이룹니까? 6절에 이렇게 기록됩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3:6) 모든 민족은 바벨탑 사건으로 저주를 받아 하나님 앞을 떠나 각각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흩어진 민족들이 다시 하나님 앞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인류는 비로소 하나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해야할 이유가 여기 있읍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1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9-10) 복음은 진실로 하나님의 이런 경륜을 배경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세계 평화는 어떻게 성취됩니까? 유엔 총회를 통해서요? 미국이나 러시아의 국력을 통해서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세계화를 외칩니다. 세계는 마치 하나의 나라처럼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복음으로 만유의 주되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인류가 굴복되기전 세계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님 나라가 들어서야 비로소 세계 평화는 있습니다. 복음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여전히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구원의 은총을 가져다 줍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창세전에 자신의 아들될 무리들과 그렇지 않은 무리로 인류를 이미 나누었습니다(엡1:3-4절). 그리고 타락 이후 인류는 사탄에게 속한 뱀의 후손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여인의 후손, 둘로 나뉘어졌습니다(창3:15절).
이 사실은 구약 성경이 증명합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는 현장에서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나타납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둘로 분명히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죽음의 자리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처음 복음을 듣고 생명을 택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죽음의 자리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여 영멸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회회교나 힌두교 그리고 불교 국가에 출생하는 사람들은 평생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들 국민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옳다고 믿고 살다가 영멸합니다. 복음은 만인을 위하지만 이들에게 복음의 길은 사실상 막혀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후사가 되며 그리고 지체가 되므로 함께 약속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으로 이방인과 선민 사이 화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받은 바 구원을 더욱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제한된 구원을 받은 특별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바울(7-11절)
이런 엄청난 경륜을 가진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그는 말합니다(7절). 하나님의 엄청난 은총의 경륜을 가진 복음을 생각할 때 그의 부름은 하나님의 큰 은총입니다. 지극히 높고 크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극히 적은 피조물에 지나지 랧는 인간중 하나를 불러 자신의 일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 사실이 조금 달리 이렇게 설명됩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엡3:8)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들중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다고 소개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사울이었을 때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한 전력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의 핍박 때문에 예루살렘에 위치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큰 위협을 느끼고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소아시아 쪽으로 흩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첫순교자인 스데반의 죽음에 관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관한 소문은 신자들을 두렵게 만들었읍니다(행9:26절).
이렇게 사울은 초대 교회 성도들중 지극히 적은 자보다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구원에서 배제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모태에서부터 선택했고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은혜로 자신을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갈1:15절). 과거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버리지 않고 붙들고 그리고 환경을 섭리하심으로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런 은총의 분명한 증거였읍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갈1:16절).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목적이 두 가지로 기록됩니다. 하나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심이었습니다(8절). 이미 사도 바울 자신이 이 은총의 풍성함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한 바울에게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총이 들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죄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함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사도 바울에게서 보여 졌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구약 시대 구원에서 제외되었던 이방인들도 선민들처럼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사도 바울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풍성함은 한없다는 사실에 확신을 갖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함을 드러내려 하심이었습니다(9절). 이 비밀의 경륜은 에베소서 1장에 잘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치밀한 작정과 그 계획에 의해 이방인을 비롯한 인류의 구원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 시기는 이를 잘 증명합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의 출생은 때가 찬 경륜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륜은 그 당시 세상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유럽과 북부 아프리카 그리고 중앙 아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식민지을 두었습니다. 제국내의 공용어는 헬라어와 로마어였습니다. 자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언어로 의사를 잘 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당시 교통과 통신이 잘 발달하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고 말할 정도로 군사 목적을 위해 로마제국의 도로망이 잘 발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고 로마제국내 곳곳에 유대인 회당들이 있었습니다. 이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회당들을 이용하여 제국내 곳곳에 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종교적으로 혼난스러워 모든 사람들이 영적 갈증을 느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대 나라는 그 당시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이 지정학적인 위치는 복음이 쉽게 동서남북으로 전파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복음이 효과적으로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는 시대에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는 이 사실들을 잘 증명합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은 완벽했음이 들어납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비웃던 사탄을 비롯한 모든 정사와 권세들이 입을 다물게 됩니다(10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세상이 얼마나 방해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 모든 대적자들의 입을 막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엡3:7절) 하나님이 복음의 일군으로 세우셨다면 당연히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역사 결과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각각 다릅니다. 이 때 은혜의 선물은 은사를 말합니다. 복음 전도의 효과성을 위해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로 복음 전도자를 돕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들은 복음이 하나님의 엄청난 경륜을 지닌 비밀임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있음을 알고 자랑스럽게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화평의 대사요 그리고 멸망당할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인이 됩니다. 이런 일을 보람있으므로 사도 바울은 이 일때문에 옥에 갇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들 첫장 첫절부터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을 항상 자랑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겉으로 사람들의 행불행을 판단합니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바울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자신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신자들의 행복의 기준은 다릅니다. 에수님의 일을 하다고 불의를 당하는 것은 불행이 아닌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를 기뻐하라고 성도들에게 권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늘 나라에 상급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마5:11-12절). 그러나 복음을 모른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이를 잘 증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담대하게 인생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기쁘게 헌신한 바울(12-13절)
이렇게 전해진 복음에 의해 이방인이었던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갈 담력을 얻었습니다(12절). 이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인들은 이런 영광스런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고난에 대해 낙심치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13절). 그리고 이들도 복음을 위한 고난을 영광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담대한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 그 비밀을 잘 아는 것이며 그리고 그 일을 맡은 전도자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세일즈멘은 자신이 파는 상품이 정말 좋다는 자신을 가질수록 설득력도 비례적으로 커집니다. 그러나 상품의 질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그는 없는 말을 만들기 위해 거짖말과 함께 온갖 부정한 방법을 결국 동원하게 됩니다. 물론 상품이 좋아도 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재미있는 현상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짜처럼 만든 거짖말에는 귀를 잘 기우립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영화 제작업자들은 거짖말을 진짜처럼 만들어 영화를 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영화를 보려고 기쁘게 돈을 씁니다. 그리고 거짖말을 진짜처럼 만든 재치와 기지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진실를 말해도 거짖말처럼 듣는 경우가 또한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생을 가져다주는 참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면 사람들은 안듣고 들어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대하거나 복음 전파자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둡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비유의 첫째 목적은 하나님 나라 복음이 참 좋은 것이지만 소수의 사람에 의해서만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다는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에 흥분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비유를 예수님은 말하셨습니다. 둘째 목적은 복음의 결실이 그렇게 쉽게 맺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4씨앗중 하나만 열매맺지만 그 결과는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였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 의하면 복음 전도자는 자신이 수고한 결과에 의해 마음 자세와 노력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복음의 저항 세력이 세상에 반드시 있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 때 교회와 성도는 악이 아닌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라지와 함께 알곡 성도들이 다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내로써 재림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재림 때 알곡과 가라지는 분명히 갈라집니다. 결국 복음은 항상 승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내중 낙심할 필요없읍니다(13절).
이제 우리는 진정한 복음 전도자의 자세에 대해 사도 바울의 경우를 통해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에 대해 이모저모를 잘 압니다. 그 결과 그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기쁘게 고난당할 각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그는 또한 후퇴를 모릅니다.
오는 부활절 때 전도 집회를 갖고자 합니다. 이 집회는 성탄절 집회와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지난 번은 우리가 소극적으로 기다렸지만 부활절 때는 적극적으로 전도 대상자를 찾아 교회로 데리고 올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사람들은 흔히 250명에 달하는 지인들의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최대한 이용해서 전도 대상자를 선정하도록 합시다! 지금부터 기도로 전도 대상자를 선정하시기 바랍니다! 불신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친척과 이웃 그리고 직장 동료들이 그 대상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구체적인 전도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방법에 대해 2월부터 매주일 마다 광고할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기대감을 갖고 기도로 준비합시다! 사도 바울처럼 전도로 죽은 영혼을 살리는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