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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축복의 통로(다니엘서 1:8~21)
“성령 충만 하십시오! 신앙의 길을 잘 달리시길 바랍니다. 결코 물러서지 말고, 이번 한 주도 하늘의 큰 면류관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우리 벧엘 교회에 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두 한 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날을 살아가면서 항상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혼탁한 이 육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때마다 순풍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결혼을 할 때나, 아기를 키울 때, 또는 중년의 위기를 겪을 때나, 사업을 할 때, 등등의 삶의 고비 고비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결코 피해갈 수 없는 현실임을 아무도 부인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금년 여름 날씨처럼 강력한 태풍이 왔다가 어느 순간 바람이 잔잔해지면, 또 다른 태풍이 밀려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풍랑에 정신없이 휘말려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견디기 힘든 강풍 한가운데 서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강풍 가운데서 흔들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든 인생의 삶 속에서 평탄함이 계속되기만을 위해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외면하시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바로 우리를 곁에서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시며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들은 이 육신의 삶 속에서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고난을 결코 홀로 겪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고통스런 한숨 소리를 들으시며, 중보하시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우리들이 인생의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고난의 강풍 앞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지체치 않으시고 달려오시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배가 없으면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라도 저와 여러분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위기의 강풍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인간적인 힘과, 능력, 그리고 지식과, 경험에 의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인정하십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이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들의 힘과 능력으로 견디기 힘든 강풍이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려고 할 때,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우주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신 저와 여러분들을 이 험난한 육신의 삶 속에서의 사나운 광풍 속에서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한 때,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저서 중에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인 즉은, 한 개인으로서는 도덕성을 잘 유지할 수 있다 해도, 비도덕적인 사회에 들어가면 근본적인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는 인간적인 내면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내용입니다.
또한, 인간이 이 육신적인 세상의 구조적인 각종 병폐 속에서 얼마나 자신이 무기력한 존재인가를 누구나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때문에 저도 경험해 본 사실이지만, 처음에는 순수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신학교에 들어갔던 수많은 이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막상 목회 현장에 나설 때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해있는 교계의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점들과 자신의 인간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방황하며,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자기 자신에게 닥쳐온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울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때로는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비일 비재 합니다.
즉,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이며, 손바닥으로 강을 막는 초라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모 대통령도 한 때는 자신에 대한 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힘들어 못해 먹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결국 자살)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 말씀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결연한 의지와 결단은 저와 여러분들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과 도전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그들 즉,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산해진미(山海珍味)로 가득한 소위 왕만이 먹을 수 있는 각종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하고, 오로지 채식만을 고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육신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뢰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요 며칠 동안 이곳저곳 계속 집회를 다니면서 시간만 나면, 왠지 모르게 다니엘서를 계속 반복해서 읽게 되어 오늘 본문에서 느끼고 깨달은 그 내용의 영적인 비밀을 선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오늘 말씀의 제목인 ‘넘치는 축복의 통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만 섬김으로 백배나, 천배나 지금보다 더 나은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온전한 믿음의 축복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8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아멘!
성도 여러분! 여기서 ‘뜻을 정하여’라는 뜻을 원어로 해석해 보면, ‘마음을 결정하여’란 뜻입니다. 그래서 이는 그 당시에 히브리인들의 개념상 ‘마음’이 전인격(全人格)의 핵심인 좌소(坐所)라는 점과,
‘더럽히다.’가 신적 모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들의 전인격을 다하여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을 결단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에게 주어졌던 왕의 음식들은 그 당시 율법의 음식 규례에 어긋나는 부정한 동물의 고기, 또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여러분! 왜 그 음식들이 부정한 것인지 한번 알아볼까합니다. 레위기 11장 2절로 8절에 보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다음과 같습니다. 짐승 가운데서 굽이 갈라진 쪽발이면서 새김질도 하는 짐승은 모두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두 쪽으로 갈라졌더라도, 낙타는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기에 먹어서는 안 되며, 오소리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기에 먹을 수 없습니다.
토끼도 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았기에 먹어서는 안 되며, 돼지는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진 쪽발이기는 하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사는 모든 것 가운데서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물고기는 바다고기든지, 민물고기든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동물 가운데서 지느러미가 없고 비늘이 없는 것은 먹을 수 없습니다.
또한, 새 가운데서 각종 독수리 종류와 까마귀, 타조, 올빼미, 갈매기, 각종 매, 부엉이, 가마우지, 따오기, 백조, 펠리컨, 흰 물오리, 고니, 각종 해오라기, 오디새, 박쥐는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네 발로 걷는 날개 달린 벌레는 모두 먹을 수 없으나, 네 발로 걷는 날개 달린 곤충 가운데서도 발과 다리가 있어서, 땅 위에서 뛸 수 있는 여러 가지 메뚜기, 방아깨비, 누리, 귀뚜라미 같은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이해가 되십니까?
하지만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이러한 동물이나, 물고기 그리고 새나 곤충들 중에 요즘 사람들이 안 먹는 것이 어디 있습니다. 특히 약이 된다고 하면, 씨를 말릴 정도로 사람들이 다 잡아먹지 않습니까?
그 당시 율법에 의하면 그렇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만 받은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먹을 수 있는 축복받은 사람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원래 다니엘(Daniel)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니엘은 유다 왕 여호야김 3년에 바벨론 1차 침입 때,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포로요! 인질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인물이 출중하고, 박학다식하였던 관계로 일종의 특혜를 받아 바벨론 왕실로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다니엘이 인간적인 생각에 자기 자신의 명예와 부귀영화에만 집착을 하였다면, 비록 포로의 신분이었으나, 세상적으로 크게 출세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자신의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이 투철하였기에 그 신앙을 방해하는 그 어떠한 요소와, 조건과는 추호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그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은 물론이요, 모든 조건들을 포기하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당시 다니엘이 처한 상황으로 볼 때, 이와 같은 행동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도 상관치 않겠다는 순교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앙의 양심을 걸고 말씀해 보세요?(묻기)
오늘날 우리들 주변을 살펴보면, 수많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 중에 과연 누가 다니엘과 같은 이런 생각과 결단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한국교계가 피폐해져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이 윤 목사만 온전하게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을 붙잡고 영적인 삶을 통해 재림의 주님을 기다라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진실한 믿음을 벗어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제가 이제까지 우리 교회에서 사례금 한번을 받아봤습니까? 집회를 그렇게 다녀도 강사비 한번을 받아봤습니까? 그저 시간만 나면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에 힘쓰며, 오로지 말씀을 묵상하며 살고 있잖습니까?
그래도 저와 우리 사모는 밥 굶지 않고 철 따라 옷은 입고 다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은혜와 은총이라 확신합니다. 인정하시는 분만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의 집사님 부부가 갑자기 지방에 다녀올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자신의 다섯 살짜리 아들을 누구한테 맡길까? 고민을 하다가 목사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승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목사님 부부는 그 다섯 살짜리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오셨으니, 기도를 부탁해 볼까? 얘야! 네가 식사기도를 하면 어떻겠니?’하고 목사님이 아이에게 묻자,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모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평소에 엄마가 하시던 대로 하면 돼! 간단하게’ 그랬더니 이 아이가 갑자기 ‘야! 이 돼지 같은 놈아! 좀 가만히 앉아서 먹지 못해!’라며 큰소리를 지르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예화의 내용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와 같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온전한 믿음을 심어주고 양육하는 교회와 같은 곳임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의 가정은 믿음이 연약한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을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어디라고 보십니까? 안방입니까? TV 앞에서입니까? 아니면 응접실입니까? 그것은 바로 바로 음식을 먹는 식탁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305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아멘!
그러므로 식탁이 살아있는 가정이 바로 행복한 가정인 것입니다. 비록 음식은 풍족하지 않더라도 아내나,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담겨 있다면, 그러한 식탁은 육신적으로 풍성한 식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온전한 믿음과 사랑이 담긴 대화가 오고 간다면, 그 곳이야 말로 하나님 안에서의 정서적으로도 풍성한 식탁이요! 그것이 바로 주 안에서의 행복을 누리는 지름길이란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남들에 비해 초라한 식탁일지라도 그곳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가 선포되고, 그 은혜가 경험되는 곳이라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모두가 풍성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든 것이 함께하는 풍성한 식탁이 있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가정의 천국인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이 다니엘은 어려서부터 분명하게 온전한 믿음의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매사에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순종에 대한 교육을 꾸준하게 받으며 성장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도 그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항상 온전한 믿음으로 살았으며, 그러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오늘날 이 육신의 세상이 바벨론과 같이 혼잡하고 힘든 세상이지만, 항상 다니엘처럼 온전한 믿음으로 가족과, 친지와, 직장과 사업체, 그리고 이웃들에게 본이 되시는 귀하고 복된 가정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매사에 있어서 온전한 믿음이 충만한 가정들이 다 되어서 우리 벧엘 교회와 모든 분들이 백배, 천배의 믿음의 댓가를 넘치도록 받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온전한 믿음의 얼굴을 지닌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15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아멘!
그동안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열흘 동안 채식으로 배를 채우고 물만 마셨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바벨론의 소년들은 왕이 주는 산해진미와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도 열흘 후에 궁전의 내시(內侍)들이 찾아와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을 보니, 그렇게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었던 바벨론의 소년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열흘이란 기간은 그들의 식생활에 대한 결과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기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발생할지도 모를 잘못된 결과를 쉽게 만회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부연설명)
때문에 이러한 시험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들의 온전한 신앙에 의지함으로서 목숨을 걸고 이를 고수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영적인 승리가 드러났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얼굴’이란 단지 신체의 일부분에 속하는 표면적인 얼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신앙심에서 비롯된 외적인 몸의 전체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온전한 믿음의 성도들은 궁극적으로 건강하고, 존귀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얼굴뿐만 아니라 육신의 삶 자체가 매사에 아름답고 윤택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여러분! 못 생긴 제 얼굴이지만, 여러분들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장로님들을 비롯하여 특히 권사님들께서 저에게 그런 말씀을 자주 하시잖아요? 얼굴에서 항상 밝은 빛이 난다고 말입니다. 사실이 아닐지라도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여러분! 이 육신의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크리스천들까지도 육신의 야망을 쟁취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육적인 재물을 모으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을 스크루지 영감 같은 자들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욕심 많은 스크루지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물론, 주변의 모든 환경과 조건을 어떻게 하든 이용을 해서 단 한 푼이라도 더 쥐어짜 내어 모으는 일밖에 몰랐기 때문입니다.(부연설명)
그렇기에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야망이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뤄지든지, 안 이뤄지든지 간에 자신 스스로가 육신을 위하여 그 야망을 좆아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온전한 믿음에 의지하여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이 바라는 야망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때가 되면 반드시 나의 달란트대로 분명하게 이루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야망이 하나님의 섭리와 일치한다면, 그 보다 더 풍요로우며, 그 야망을 충족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도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야망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의 야망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찾으면, 그동안 이기적인 세상에서의 동기를 통해 야망을 품을 때와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올바른 마음과 너그러운 태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또 묻겠습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야망들 중에서 다시금 재고해 보거나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을 통하여 여러분의 야망들이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것인지 냉정하고 솔직하게 생각해 보시기를 권면합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경험해 보아서 잘 알고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솔직히 이 육신의 삶속에서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방향으로 야망을 품어야 하는지, 당장에 결정하기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교회와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추구하고 있는 모든 야망들을 다시금 검토하여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이러한 일들을 추구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실천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야망에 대하여 이해하고, 이에 방해되는 세상적인 모든 것들은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권면합니다. 우리들의 세상적인 욕심과 야망 때문에 하나님과 신앙을 멀리하거나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저버리면 그 순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음을 품는 순간, 내 심령 속에는 세상적인 우상을 따르게 되며 교만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저주와 멸망의 삶으로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내 자신이 초라해지고 파괴가 됩니다.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환경과 조건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온전한 믿음으로 신앙을 잘 지켜야 합니다. 또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고백을 한 여호수아처럼 당당한 믿음의 삶을 살면, 우리들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복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던 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채소와 물만 마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아름답고 윤택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 위에도 윤택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언제나 어느 때나, 나의 야망이나, 목표들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께로부터 백배나, 천배나 윤택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인 20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아멘!
성도 여러분! 본 구절에서의 ‘지혜와 총명’은 이 육신의 세상적인 개념에서의 지혜와 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국정 전반에 관한 영적인 지식이나 판단, 그리고 능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박수’는 문자적으로는 ‘마술사’나 ‘점성술사’를 뜻하고 있으나, 당시 바벨론에 있어서 이러한 자들이 나라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특수한 관료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바벨론의 지혜자들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적인 지혜와 총명은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지혜와 총명과도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차원이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아무리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지라도 이미 모든 것들을 다 알고 계심으로 정확히 우리들 모두에게 영적인 지혜와 총명으로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세상적인 지혜와 총명은 가리켜 없어질 관원의 지혜와 같으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은 만세 전에 이미 정해진 없어지지 아니할 지혜와 총명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하지만 그 당시 헬라인들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아무리 지혜와 총명을 추구했어도 결코 하늘의 비밀인 십자가의 지혜와 총명만큼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 25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이 육신의 세상이란? 모든 인간들의 삶과 역사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의 직접적인 섭리 아래 사실 그대로 이뤄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항상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지혜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떠난 지혜란? 미련함과 어둠이며, 멸망과 지옥의 지름길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오로지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지혜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계획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린다 밀로우의 ‘만족’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엘라는 아이들과 함께 남편을 따라 52년 동안 아프리카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남편인 아브라함과 같이 그동안 친숙했던 모든 것들과 고향, 그리고 친구들 곁을 떠나서 아프리카 시골의 타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전기와 에어컨 등, 현대식 편의 시설들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날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더워서 온도계를 실내로 들여와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날씨가 섭씨 49도를 넘기면 온도계가 고장이 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의 생활 여건에 대해 단 한 번도 불평불만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엘라는 그런 열악한 곳에서 복음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누구에게든지 단 한 번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엘라의 딸인 미미가 자신의 어머니의 낡은 일기장에서 항상 만족을 얻었던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심지어 날씨조차도, 불평하지 않겠다.
② 다른 환경이나 다른 장소에 있는 나의 모습을 그리지 않겠다.
③ 나의 몫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않겠다.
④ ‘이것 혹은 저것이 지금과 달랐더라면’이라고도 가정하지 않겠다.
⑤ ‘내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내게 속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다섯 가지의 다짐 속에서 그녀의 비밀은 마지막 말에 들어 있었습니다. ‘내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내게 속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과 마음은 항상 영원한 천국에 고정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오로지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봤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녀의 모든 미래는 하나님의 강하신 팔 안에 든든히 놓여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사는 데 있어서도 항상 자유로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엘라는 이와 같이 ‘내일이라는 소망의 영원’에 집중했기에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그것을 통하여 그녀가 내적인 ‘만족함’으로 이끌림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와 같은 온전한 믿음으로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에게만 나의 시선을 집중하는 것이 지혜와 총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왕이나, 세상이나, 그밖에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았을 때, 백배나 천배나 나은 지혜와 축복을 받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백배나 천배나 나은 지혜와 총명의 축복을 베푸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은 바벨론과 같은 위험하고 어려운 이 육신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오로지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신령과 진정으로 섬김으로서 온전한 믿음을 통한 지혜와 총명이 백배나 천배나 넘쳐나는 축복만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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