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의 명암(明暗)]
(요3:1-5, 19:39-42)
I.서론: 고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눈이 하나밖에 없는 애꾸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의 집으로 화가를 불러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화가는 한 쪽 눈이 감긴 모습을 정직하게 그렸습니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을 본 한니발 장군은 대노(大怒)했습니다. “왜 이렇게 병신 꼴로 그렸느냐!”장군은 화가를 끌어내어 목을 치라고 명했습니다. 그 화가는 그림 하나 그린 대가로 죽고 말았습니다.
장군은 다시 다른 화가를 불러서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앞서 화가의 죽은 사유를 알고 온 화가는 한니발의 초상을 두 눈이 다 성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한니발 장군은 이번에도 대노했습니다. “내 눈이 어째서 둘이냐. 하나밖에 없는 눈이 네 눈에는 둘로 보인단 말이냐 이건 내가 아니라, 딴 사람이 아니냐! 괘씸죄로 이 화가도 역시 참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불려와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생명을 부지했습니다. 이유는 그는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도록 한니발의 옆모습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터득할 수 있는 삶의 지혜는 어느 측면(側面)을 먼저 보느냐, 어디에 <주관심>을 두느냐가 인생의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평안, 고요함 및 행복은 권력과 부(富)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또한 <관심의 방향>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나의 세계관, 인생관, 명예, 지식 및 지위가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문에 등장하는 <밤과 낮에 찾아 온 사람>, 니고데모의 인간됨과 그의 삶의 명암(明暗)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II. 본론: 니고데모의 어두운 면(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그는 전형적(典型的) 바리새인, 유대인의 관원(통치자), 70인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산헤드린 회의는 국내외 유대인의 종교적 최고통치권을 가졌으며, 거짓 선지자를 발본색원(拔本索源)하여 출교(黜敎)하는 임무를 가졌습니다. 어떤 주경가는 “그의 지위가 비겁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게 했고, 그래서 그의 신분 때문에 소극적인 신자가 되게 하였다.”고했습니다. 관원(官員)이라는 것 때문에, 한때 공공연하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 거침돌이 되게 하였습니다.
니고데모가 빛이 되신 주님을 밤에 찾아와서, 참만남(Encounter)의 대화(對話)를 하지 못 것은, 예수님을 <그분>(It)으로 단순히, 기적(奇蹟)이나 행하는 세상의 종교가 중에 한분으로 보았고, 하나님의 아들 Messiah로 오셔서, 우리를 중생(重生)시키는 참 빛이 되신 <내 삶의 주인>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주인(主人)으로 모실 때, 주인은 종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숙지하고 있습니다. <마6:25-34>에서 너희 목숨의 문제를 “내가 보장하겠다.”했습니다.
'의, 식, 주를 염려치 말라,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주제(主題, 그의 나라와 그의 의)와 부제(副題, 의식주)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 온 것은 의식주와 관련된 직업의식이 주제이었고, 신앙(구원)은 부제로 생각한 것이 그의 착각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어두운 면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역사 속에서, 1945. 8. 15 해방은 우리 힘으로 독립하지 못했고, 외세(外勢)에 의존했으며, 독립 운동의 주체세력(主體勢力)이 아닌 비겁했던 친일세력(親日勢力)을 등에 업고, 자유당(自由黨) 단독정부(單獨政府)가 출범했기에, 자유권 정권이 부패할 수밖에 없었고, 붕괴의 원인 중에 하나였다고 생각해 봅니다.민족의 정체성(The Identity of Nation)이 없는 캄캄한 밤의 방황(彷徨) 속에서, 다시 말해서, 한민족의 정체성 위기(The Crisis of the Korean Identity)로 인하여, 결국 <밤에 찾아 온 자들>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신앙을 축복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아직도 주제와 부제가 도착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지난날 거리 전도에서 <예수 천당>을 많이 부르짖었으나, 천당 갈 때까지의 중간윤리(中間 倫理)의 부재(不在)가 현재 한국교회가 수난을 당하는 이유 중에 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개가 <밤에 찾아 온 사람들>때문이라는 것입니다.책임질 청지기(Stewardship)정신이 없어서, 오늘의 한국교회의 타락의 모습입니다. 비겁하고, 정체성이 없고, 타산적인 현실타협주의에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니고데모의 밝은 면을 생각해본다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낮에 찾아 온 니고데모의 면모가 <요 19: 39-42>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제1차 방문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초(始初)였다면, 요 7: 50에 한번 언급이 있고, 낮에 찾아 온 그 시간적 간격(間隔)은 적어도 2-3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밤에 찾아 왔을 때는, 산 예수를 만났으나, 그는 아집(我執), 자기 선입견, 및 편견 때문에 캄캄한 밤이었으며, 예수님의 밝은 빛 앞에 대면(對面)했으나, 그 빛을 니고데모는 받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낮에 찾아 온 니고데모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통해서, 그의 가슴에 예수님의 빛을 받았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殞命)하시자, 평소 갈릴리제자들은 전부 실의(失意)에 빠져 도주해 버리고 말았을 때, 주님의 가장 고독하고 어두웠던 그 순간에 반대로 밤중에 찾아 왔던 니고데모와 같은 산헤드린 회원이었던 아리마데 요셉 등의 귀족출신(貴族出身)에 의해서 장례(葬禮)가 치러진 것은 예수님은 모든 신분계급을 초월해서 Messiah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값비싼 몰약과 침향 섞은 100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장례를 위해서 정성스럽게 예수님의 최후를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露出)되는 것을 겁내어 은밀(隱密)히 밤에 찾아 왔지만, 예수님의 결정적인 순간에 비장한 용기, 친절 및 희생을 각오한 예수의 ‘숨은 제자’ 또는 ‘비밀의 제자’로서 그 사명을 다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 권력, 명예, 및 물질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해 다 잃어버릴 것을 각오한 사려 깊고, 과감한 그의 행동은 그의 신앙과 <행동하는 양심>은 길이길이 후세에 귀감(龜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 집고 넘어 갈 문제가 있습니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다 산헤드린 회원들이요, 은밀한 제자들이 이었습니다. 그들이 유대 종교재판권(宗敎裁判權)을 가진 산헤드린회의 당시 예수님을 고소할 때, 불참했거나, 침묵을 했다는 주경가나 역사가들의 문헌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때, 그들의 두 목소리만이라도 예수를 성원(聲援)했더라면, '주님께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 두 제자는 무서워 떨었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생이 죽은 후, 훌륭한 조사(弔辭)에는 관대(寬大)하나, 그가 산 동안의 칭송(稱讚)하는 되는 인색한 것을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죽은 후의 새 무덤, 새 수의와 향료보다 산 동안의 충성과 사랑이 더 아쉽습니다. “산 동안의 꽃 한 송이가 죽은 후의 세상의 모든 화환(花環)보다 값진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죽은 후의 길고 장광설(長廣舌)의 조사(弔辭)보다 산 동안의 한마디의 사랑, 찬사 및 감사가 더 귀한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자, 한 시간도 못되어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 졌습니다.(요19: 32-36) 예수님의 십자가는 벌써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두 ‘비밀제자’(숨은 제자)를 주께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이렇게 계속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마지막 충성을 바친 2-3년이 세월이 흐른 동안에 그의 율법주의 종교에서, 복음주의 신앙으로 전향(轉向)하기까지 심사숙고(深思熟考)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사람은 대략 3가지의 유형(類型)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감정적인 사람(정서가 풍부한 사람), 지성적인 사람, 의지적인 사람으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감정적 사람은 조금만 자극을 주면 당장 예수 믿겠다고 쉽게 결단을 합니다만, <어떤 예수를 믿느냐>와 끝까지 인내하면서 신앙을 지속할지가 문제입니다.그러나 지성적 사람은 결단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깊이깊이 생각하고, 일단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자기체면, 위신 및 지위 등을 생각해서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의지적 사람은 오래 잘 참습니다. 박해, 핍박이 와도 신앙의 절개를 잘 굽히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지정의(知情意)가 겸비한 신앙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니고데모는 지성적 유대 율법학자로서, 십자가 사건 앞에서 그가 Messiah 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간 그는 5병2어로 기적을 베풀 때나,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보고도, 그것을 Messiah의 증거로 받아 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병 고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격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기를 사랑하신 연고라고 생각한다면, 그러다가 병들면 어찌합니까. 돈 좀 벌었다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다고 감사합니까. 그러다가 장사에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가장 귀한 증거(證據)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증거의 첨예한 초점은 '십자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유일한 유산(遺産)인 십자가의 아픔을 오늘도 우리가 지고 갈 때, 주님은 가장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니고데모는 이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서, 정말 하나님의 아들 Messiah임을 확증(確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결론: 인간의 참 모습도 그의 죽으심에서 들어납니다. 진실(眞實)은 죽음에서 나타납니다. 어떻게 사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생을 끝내느냐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들 주위에서 보면,생전(生前)에는 멋있는 사람 같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실망(失望)을 주고 가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인생의 종착역이 가까이 올수록, 끝을 잘 매듭하고 갈 수 있도록 평소에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지휘관인 백부장과 함께 지키던 사람들이 예수의 임종(臨終)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눅 23: 47)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중생(重生)의 도리를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의 결론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내가 십자가에 매 달려 죽는 것을 보아야 네가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 날이 되어야만 네가 알겠구나!” 하는 뜻입니다. 정말 이 말씀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이 지성적 신앙의 ‘숨은 제자’, 니고데모는 십자가 앞에서 그의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체면, 명예 및 지위(재산까지 몰수당했다고 함.)를 다 버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신앙의 발로입니까!
알려지기를 두려워했던 이 ‘숨은 제자’가 이젠 뭇 대중 앞에, 공개된 제자가 되었습니다. 군중 속에서 죽는 것이 무서워 <예수 믿지 않는 다>고 부인하던 사람들이 그 순교자의 장렬한 모습을 보고, “나 역시 기독교인이다”(I am too a Christian.) 라고 한 것이 기독교 2000년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도 이 니고데모 같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롬 13:11-12 의 말씀처럼 :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도록 합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