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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 곧 그리스도 주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2장 8-20절 /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구주, 곧 그리스도 주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신 소식과 징조를 받은 사람들
아기 예수가 탄생하여 강보에 싸여 말 구유에 뉘어 있을 그 때에 예수님이 탄생하신 사실을 알게 해 주는 소식과 함께 징조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여기서의 동방은 바벨론을 의미할 것으로 봅니다
. 그리고 박사들은 원문의 단어로는 바벨론에서 기원된 단어로 보이며 바벨론, 메데, 그리고 페르시아에서 현자, 교사, 제사장, 의사, 점성가, 예언자, 해몽가, 마술가 등의 다양한 뜻을 총칭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동방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에 의해 그들을 인도하는 것으로 나타내신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까지 온 것과 관련하여서 볼 때 과거의 용어로 표현하면 별을 연구하는 자들인 점성가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천문학자에 해당합니다. 이들 박사는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별을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구약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메시야 약속을 바라보며 그 기다림에 있는 자들로서 별을 연구하는 것을 통해 그 징조를 찾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과거 바벨론에서 무려 70년간이나 겪은 포로로 거주하면서 여호와 신앙을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바벨론을 정복한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유대인들이 포로지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을 때에 그곳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바라보며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여 약속으로 주신 메시야를 기다림에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고대 바벨론의 점성술을 배워 별을 연구하는 것에 있었으며, 그 별의 연구를 메시야 징조를 찾는 것에 적용하여 메시야가 오실 때의 징조를 하나님께 구하며 별을 연구하는 중에 있었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메시야 사상에 있어 온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별을 보고서 예수 탄생의 징조를 알았으며,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의 수단으로 별의 인도를 받아 예수가 계신 곳에 찾아와 경배하였습니다(마2:1-12).
그리고 또 한 부류가 베들레헴과 가까운 거리에서 양떼를 치는 목자들입니다. 이들은 밤에 집 밖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다가 주의 사자로부터 예수 탄생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나타나 목자들 곁에 섰는데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두루 비취고 있으므로 이런 일이 왜 있는지 영문을 모르는 까닭에 목자들은 크게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의 사자가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구주 예수의 탄생을 알려 주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리고 나서 홀연히 허다한 천사들이 그 천사와 함께 있으면서 구주 예수를 보내 주셔서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평화가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주의 사자로부터 구주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 길로 달려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찾아서 보고 주의 사자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다 말해 주었습니다(눅2:15-17).
구주, 곧 그리스도 주이신 예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
주의 사자는 목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소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을 주는 좋은 소식으로서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유일한 소식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주의 사자는 누가복음 2장 11절에서 다음과 같이 전해 주었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요한복음 3장16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그들 가운데 오신 것이라고 임마누엘로 불릴 것에서 마태를 통해서 알려 주시지 않았었는지요(마 1:23). 천지의 대주재되시는 하나님이 온 세계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독생자를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 보내셨는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그들 가운데 오신 것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이 말이죠. 예수님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와 그와 정혼한 요셉에게만 기쁜 소식이 아니며, 또한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 그리고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만 들려지는 기쁜 소식이 아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점에서 온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게 미칠 하나님이 행하실 큰 일을 알려주시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전해 소식인 구주 예수님의 탄생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큰 기쁨을 준 좋은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당시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던 헤롯왕과 온 유대 백성들 사이에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최대의 소식입니다. 우리가 사회, 문화, 정치 등등에 관한 소식을 들으며 삽니다마는 그런 소식들에서는 사람의 근본 문제인 구원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큰 소식거리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근본 문제와 관련해서는 미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당시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은 구주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 주로서 온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라는 소식을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구주, 곧 그리스도 주이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신 사실을 놓고 참으로 깊이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예수께로 나아옴에 있어야 합니다.
구주, 곧 그리스도 주를 바라보는 믿음에 있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나심에 대해 주의 사자는 이분이 누구신지,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려줬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도 알려줬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렇게 나신 아기를 보거든 그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나신 구주, 곧 그리스도 주님이신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님이 어떻게 온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지를 “구주, 곧 그리스도 주이시다.”라는 말씀에서 알려 주셨습니다. 여기서 ‘구주’란 말은 ‘구원자’란 뜻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하나님의 명칭(삼하 22:3; 시 24:5; 106:21; 사 43:3)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선포되는 하나님이 전하시는 메시지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칭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서 사용되었으며, 이를 나타내는 구절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주’라고 하는 표현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오직 이곳에서만 보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것의 뜻은 ‘기름부음 받은 주님’입니다. 이때 ‘주’는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LXX)에서 보는 것인데,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번역입니다. 주의 사자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가 어떻게 온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지를 “구주, 곧 그리스도 주이시다”라고 하는 말씀에서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는 구원자 하나님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구원자 하나님을 지금 누구에게서 보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께서 온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지요. 그는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 곧 구원자 하나님이십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예수님에게서 그 구원자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나신 큰 기쁜 소식을 듣게 되는 사람들은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이제까지 이런 소식이 주어진 일이 결코 없었던 참으로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말하는 것에서 알려주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여기서 ‘지극히 높은 곳’은 ‘가장 높은 곳’을 이르는 말인데,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은 사람이 상상하며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나셔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이신 것은 구원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신 것으로 가장 높은 곳인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세상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누리는 영광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해 나가심으로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요 17:4-5). 이는 구약에 예언을 통해 주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사 44:23)
여기서 보는 대로 야곱, 곧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신 일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구주, 곧 그리스도 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의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이죠. 이렇게 지극히 높은 곳의 하나님께 영광인 구주, 곧 그리스도 주 예수님의 나심은 예수께서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평화에 있게 하는 복이 됩니다. 여기서의 평화는 사람들 간에 미움, 시기, 다툼, 싸움, 전쟁이 멈춘 상태에 있는 그런 세상을 살게 될 것이란 것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라고 하신 화목이요, 그래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에서 보는 화목입니다. 즉, 하나님과 화평(평화)을 누림으로 그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모두들 간에 누리는 평화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구주, 곧 그리스도 주로서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영원히 제거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는 죄와 사망에 있지 않게 하셨기 때문에 있게 된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령한 복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낳은 동정녀 마리아가 마음에 품고 간직한 것, 마음에 새기고 생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리고 목자들이 주의 사자로부터 듣고 이를 말해 준 것도 이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우리는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는 자들입니다. 해바라기가 왜 이 이름이 붙었는지 아시죠? 해를 좇아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높은 산 위에 있는 나무들의 특징을 보면 해가 있는 쪽으로, 그래서 해를 충분히 받는 쪽으로 가지가 잘 뻗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은 그리스도 주이신 것에 있습니다. 구원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여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구주, 곧 그리스도 주이심을 알고 믿은 사람이 히브리서 11장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예수가 그리스도 주이심을 알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이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의 오심을 약속으로 받고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어지는 하늘의 세계를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주신 믿음에 의해 증거를 받고 본 것처럼 확신과 소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구주, 곧 그리스도 주이심을 알고 믿은 사람들은 구름이 몰려들어 둘러 싼 것과 같이 참으로 허다하게 많습니다. 이들은 다 믿음으로 산 증인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까지 걸어간 모든 행적들은, 땅 위의 성도들에게 신앙할 수 있는 증거들을 무수히 제공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 증거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살면서 다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고난을 감당하였습니다. 이기며 살았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했는지요. 그 해답을 성경은 “그들은 다 믿음으로 살았다.”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을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다한 경주를 경주하였다는 말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무거운 것은 이 세상 염려와 욕심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은 신앙인들로 하여금 전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신앙인들로 하여금 넘어지게끔 하는 올무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말입니다. 그런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그럼으로써 겪는 고난을 참고 견디며 적극적으로 이겨 나갔습니다. 마치 경주하는 구주 예수님이 계신 목표한 곳에 다다르기까지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 믿음을 보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산 신앙을 보는 것입니다. 구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분이시오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또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그는 우리에 앞서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예수만을 바라보며 사는 믿음을 주셨고, 친히 하나님 앞에 행해 보이신 믿음으로 우리의 믿음을 가르쳐 인도하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산 바를 끝내시는 완성에 있으십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a)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2b)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게 되는 은혜를 입은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바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신을 생각하고 육체의 정욕대로 살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게 되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입니다만,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믿는 믿음에 있게 된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을 생각하고 육체의 정욕대로 살고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것을 내려놓음에 있습니다. 가끔, 어쩌다가 아주 가끔 그러는 것이 아니죠. 수시로, 아주 수시로 내려놓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구주, 곧 그리스도 주이심을 인정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일생의 전 여정을 주님을 인정하며 삽니다. 그러한 우리는 육의 모두를 부인함에 있습니다. 그렇게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의존함에 있습니다. 그게 구주, 곧 그리스도 주 예수의 사람이 된 사람의 인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