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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시인은 없다
1970년대만 해도 아이들이 읽을 만한 잡지가 흔하지 않았다. 시골 초등학교 도서실로 다달이 오던 『어깨동무』는 몇 해 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도서실에서 책을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어깨동무』가 든 봉투를 처음 개봉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정말 한 줄도 빼지 않고 읽었다. 집으로 잡지를 가져가서 읽는 날도 있었다. 물론 도서실 책정리 담당자의 ‘권력’을 이용한 불법대출이었다. 우리집 건너편 방앗간 할머니는 혼자 살았는데, 내가 슬픈 이야기를 읽어주는 걸 좋아하셨다. 물레를 돌리며 명주실을 뽑는 할머니 옆에서 책을 읽어주면 할머니는 자주 슬피 우셨다. 그 덕분에 나는 누에고치 속의 번데기를 얻어먹거나 가끔 십 원짜리 동전을 두어 개 얻을 수 있었다.
책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내가 가장 하기 싫은 것은 글쓰기였다. 독후감이 쓰기 싫어 책을 읽다가 덮어버린 적도 많았다. 매일 일기장 검사를 하는 담임선생님을 만나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4학년 여름방학 때 숙제로 쓴 일기를 5학년 여름에는 날짜만 바꿔 제출하기도 했다. 해마다 학교에서 백일장이 열리면 나는 시(운문)를 썼다. 시가 좋아서가 아니라 길이가 짧기 때문에 빨리 쓰고 뛰어놀기 위한 속셈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교지에 처음으로 투고한 시는 심혈을 기울여 썼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실리지 않았다. 나는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함부로 단정 짓고 말았다. 좋은 시를 고르는 선생님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고! 그리하여 고등학교에 가게 되면 문예반에 들어가 시를 써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장래에 이름을 날리는 시인이 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고등학교 교지에 적어도 시 한 편만은 꼭 실리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내 삶의 미래에 대한 설계도를 다시 그리면서 한 사람의 시인으로 살아가는 꿈을 꾸게 된 것은 30여 년 전, 거기서, 그렇게 비롯되었다.
천재시인이 과연 있을까? 내가 보기에 천부적으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시인이란 애초부터 없다. 어떤 시인의 재능에 대한 찬사는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찬사이지 인간으로서의 천재성을 인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천재시인이라는 말이 랭보의 이름 앞에 붙는 것은 십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경악할 만한 상상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고, 이상의 앞에 이 말이 붙는 것은 그의 파격적인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천상병 시인을 가리켜 '천상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전에 보인 낭만적이고도 기구한 행적에다 그의 이름에서 연상된 말놀이를 결합한 결과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은 자신의 게으름을 인정한다는 것과 같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책에서는 예술가란 자신의 작업을 지속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 즉 중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 자들이라고 규정한다. 예술창조에 대한 지속성이 곧 예술적 재능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자신이 가진 재능이 얼마나 되는지 걱정하는 것보다 더 쓸모없고 흔한 에너지 소모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즉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가지 않으면 눈부신 천성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주의 깊게 볼 것은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배워나가며 발전한다”는 대목이다.⁵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 혹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을 뜻하지만, 그 창작물을 통해 변화 · 발전하는 존재이다. 한 편의 시는 독자들을 감응시킬 뿐만 아니라 창작자 자신에게도 틀림없이 좋은 공부 거리가 된다. 좋은 시든 나쁜 시든 ‘이미’ 창작한 한 편의 시에는 ‘앞으로’ 창작할 시의 방향과 원리가 다 들어 있다. 또한 어렴풋하게나마 시인이 살아가면서 지향해야 할 삶의 지침까지 들어 있다.
시인이라는 존재의 엄숙성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시라는 양식이 원래부터 엄숙하고 고결한 품격을 타고난 것은 아니며, 그리 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예술 창작의 결과물인 시는 하나의 창조적 생명으로서 시인을 간섭하고, 가르치고, 지시하고, 격려하고, 고무하고, 나아가게 하고, 물러서게도 한다.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 무서운 진리 앞에서 시인은 엄숙해질 수밖에 없다.
시인으로서 타고난 재능에 기대어 시를 기다리지 마라. 그리고 재능이 없다고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지도 마라. 그렇게 하면 시는 절대로 운명의 조타수가 되어주지 않는다. 시인 역시 시의 길을 여는 조타수가 되려면 선천적인 재능보다 자신의 열정을 믿어야 한다. 이광웅 시인은 「목숨을 걸고」라는 시에서 “뭐든지/진짜가 되려거든/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고 주문한 바 있다. 열정의 노예가 되어 열정에 복무할 때 우리는 그 열정에 대한 신뢰를 가까스로 재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중에 ‘시는 감성으로 쓰고, 소설은 노력으로 쓴다’ 는 허무맹랑한 말이 있다. ‘나이가 들면 감성이 무뎌진다’ 는 출처불명의 유언비어도 떠돈다. 모두 세상을 어지럽히고 선량한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이려는 헛소리들이다. 시를 쓰는 당신은 이런 말들에 귀가 어두워져 펜 끝을 흐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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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데이비드 베일즈 · 테드 올랜드, 『예술가, 무엇이 두려운가』, 임경아 옮김, 루비박스, 2006, 49~50쪽.
2024.7.1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