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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봄 나들이
그렇게 생활이 조금씩 안정이 되자 기로는 점차 생활의 영역을 넓혀가게 된다.
그런데 아무래도 시골이기 때문에 ‘시골장’도 그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거기 가까운 ‘강진면’ 소재지에 2, 7일 장이 선다는 걸 알았기에, 기로는 날을 잡아 '봄 나들이'로 장 구경에 나섰다.
아침부터 날씨가 맑았다.
비록 다소 쌀쌀하긴 했지만 낮이 되면 풀릴 것이었다.
다소 들뜬 기분으로 기로는 아침 일찍부터 물을 데워 머리를 감는 등 장에 갈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통나무집에서 나오는데 보니, 엊그제 옮겨 심었던 수선화들이 이제 제법 파릇파릇 생기가 돋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여전히 축 늘어진 이파리를 가진 놈도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파리들이 위로 향한 모습이어서,
'아, 저것들도 새로운 땅에 적응을 하는 모양이로구나. 저러다가... 꽃이 피겠지?' 하는 생각에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이었다.
시골 장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하니, 또 한 시 반에나 있다는 돌아오는 버스 시간에 맞추다 보면, 시간도 남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이 버스는 호수 상류에 있는 ‘운암면’에서 출발해서 마을 입구의 호수 순환도로를 지나는 것이라, 전주와 운암대교를 지나는 버스와는 달리(그 버스를 타려면 '막은댐'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마을만 벗어나면 탈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기도 했다.
버스는 제 시간에 도착했고, 많지 않은 승객들은 아닌 게 아니라 장에 가는 모습의 노인들도 몇 보였다.
호숫가를 몇 구비 돌던 버스는 (구)'운암대교'를 건넜고, 거기서부터는 계속 내리막이더니, 그 마지막이 '강진'이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장과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장이 어딜까?' 하고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는데,
그 안 쪽으로 몇몇 포장이 보였는데, 거기가 장이라는 것이었다.
"에게게! "
그래서 가 보니, 시장을 한 바퀴 도는데 채 10 분도 걸리지 않는, 작아도 너무 작은 장이었다.
간단한 약초, 나물, 생선, 닭, 시골 장답게 각종 씨앗을 파는 상인도 있었고, 봄을 맞아 각종 묘목을 팔기도 하는 등, 그저 다른 시골 장하고 별다를 것 없었지만 규모 면에서는 보통 작은 게 아니었다.
게다가 기로가 사려고 했던 건, 기껏해야 상추와 쑥갓 씨일 뿐... 나머지야 살 것도 없었고, 사고 싶은 물건도 없었다.
그런데 기로는 장을 돌다가 한 순간 피식! 웃고 말았는데,
장의 후미진 곳에 식당 하나가 있었는데, 손으로 쓴 ‘팟죽’이라고 적은 글씨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그 아래에 ‘비빈국수’라는 글씨에 눈이 가면서는... 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 앞에 서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까지 하면서 기록으로 남겨둘 정도였다. 그러면서 생각해 봐도,
물론 ‘비빔국수’가 당연히 맞겠지만, ‘비빈국수’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서는 또 이상하게, 어쩐지 그 ‘비빈국수’라는 단어가 더 정감이 가면서, 그 식당에 들어가 팥죽이거나 비벼먹는 ‘비빈국수’를 한 번 먹어보고 싶다는 충동도 슬며시 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일단, 반장을 통해 들었던 ‘손으로 만든 짜장면’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면 소재지인 강진엔 중국집이 두 곳이나 되었다.
그래서 한 행인에게 물어보니, 그 사람도 여기 살지 않아서 모른다고 하던데, 자세히 보니... ‘손으로 만든 짜장면’이란 글씨가 보여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리 크지 않은 중국집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로가 길을 물어보았던 정장차림의 행인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멋쩍은지 묻지도 않았는데 기로에게,
"저는 출장 차 강진에 왔는데, 마침 점심을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그렇게 소문난 맛집이라면, 나도 한 번 맛을 봐야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기로는 첫날부터 사람을 끌고 가는(?) 손님이 된 꼴이었다.
마침 약간 어두운 방이 하나 비어있어서, 기로는 그 사람과 초면인데도 마치 같은 일행인 양 나란히 방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래서 보니, 이 집은 부부가 일을 하는 것 같은데, 남편은 연신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늘렸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장사는 부인이 다 맡아 하는가 보았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서야 나온 짜장면은, 소문 만큼 맛있는 건 아니었다.
손으로 만들어서 면의 두께가 고르지 않은 식감만 좋을 뿐, 썩 쫄깃거리지도 그렇다고 또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오늘은 어쩔 수 없지만, 다음에는 그 '비빈국수'를 먹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소문만큼은 아닌, 그저 먹을 만한 짜장면 한 그릇을 먹었을 뿐이다.
다시 장에 나와 기로는 예정대로 상추와 쑥갓 씨를 샀다.
그리고 다시 장을 한 바퀴 돌면서 탐스런 밀감이 보이기에, 가격을 물으니,
한 바구니에 3 천원이라고 했다.
'왜 이렇게 싸지?' 하면서 기로는 두 바구니를 샀다.
하나는 엊그제 기로에게 곶감을 준 산장 할머니에게, 다른 하나는 바로 옆집 팔순의 할머니에게 드리려는 심산이었다.
그게 장 구경의 전부였다.
터미널에서 약 40 여분을 기다린 뒤 버스를 탔는데,
돌아오는 버스에서 운암대교를 건너며 바라보니, 기로 자신이 사는 '둔터니' 마을은 호수 건너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리고 이 버스 역시 아침에 탔던 역코스여서 ‘막은댐’에서 내리지 않고 마을 입구까지 오는 편리함도 있어서 좋았는데,
버스에서 내려 둔터니로 꺾어 내려오려다 보니, 기로 자신이 사는 집 '夢想?' 앞에 반장이 서 있었다.
오늘, 기로가 장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그가, 버스 도착 시간에 정확히 맞춰 기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기를 무척 좋아하는 그는, 요즘 기로와 말벗이 되는 게 무척 신이 난 듯했다.
기로 입장에서도 싫지 않은 게, 아직은 시골살이에 서툰 기로에게 반장은 '길라잡이'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던 것으로, 더구나 기로의 성격이 상대방(그)의 말을 잘 들어주면서 맞장구도 곧잘 쳐주는 식이라, 반장은 틈만 나면 기로에게 와서 얘길 걸곤 했다.
그러다 보니 기로의 입장에서는 조금 귀찮기도 했지만, 사람 자체가 나쁜 건 아니어서... 그의 말을 다 받아주는 편이었다.
다만, 한 얘기를 반복적으로 하거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를 혼자 말하듯 하는 게 지루하거나 싫증나기도 하지만......
(원래 친구 범상이, 반장은 자기 걸 나눠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고(그 말은 산장 아저씨한테 들었다고 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니, 그걸 조심하라는 귀띔은 했었다.)
기로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천천히 걸어 마을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산장 할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인사를 하자,
"예... 어쩐 일여?" 마루에서 뭔가를 하고 있던 할머니는 반가운 음색으로 기로를 바라보았는데,
"저... 귤 좀 드시라구요." 하면서 밀감 봉지를 내 놓자,
"왜, 이런 일을 혀?" 하면서도 여간 고마워하지 않았다.
"근데, 지금 제가... 누가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어서, 바로 가야 하거든요?" 하고는 바쁘게 나오자,
"잘 먹으께..." 했지만,
기로는, 엊그제 얻어먹은 곶감과 대추에 대한 보답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집을 나와 다시 내려오는데, 반장이 저만치 보였다.
그렇지만 기로는,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고는, 옆집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옆집 할머니도 마당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기로가 큰 소리로 인사를 하자(할머니는 귀가 먹어 잘 듣지 못한다.), 겨우 기로의 몸 표정을 보고 알아보는 것이었다.
"어디 갔다 와?"
"시장요."
"전주?"
"아니요, 강진장요..."
"응..."
"할머니, 이 것 드세요." 기로는 가방을 열고 자신의 몫으로 밀감 몇 개를 남겨 놓고, 암갈색의 떼가 탄 마루에 환한 귤을 쏟아 놓았다.
"뭐여? 밀감 아녀?"
"예. 드세요."
"아이고, 고마워라... 쪼금만 놓고 가."
"됐습니다. 그럼, 저는 갑니다." 하고 나왔는데,
반장은 기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확히 오시느만......"
"예, 점심은 드셨습니까?"
"예, 방금 먹고 나왔어요."
"오늘, 장에 가서 여러 가지를 하고 왔습니다."
"장이 쪼그만 해서.. 뭐, 볼 거라도 있든가요?"
"예, 장은 작드라구요. 그리고 짜장면은 반장님 말씀처럼 썩 맛있지는 않더라구요. 어쨌거나 같이 올라가서 귤이나 드십시다." 하고,
기로는 옆집 할머니에게 드리고 남은 몇 개의 귤을 마루에 내 놓았다.
그렇게 둘이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아 귤을 까먹었는데, 둘 다 점심을 먹은 뒤라 부담도 없어서 자유로웠다.
그런데 철이 지나가고 있어서인지 상큼한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귤은 달았다.
마루의 그늘이 시원하게 느껴지도록 날은 푸근했고, 그런 봄날에 호수를 바라보며 귤을 까먹는 맛도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도 날이 좋았다.
날도 풀리면서 '夢想?'의 하루는 제법 분주해지고 있었다.
아침에 범상이 상하수도 연결을 위해 전주에서 왔다. 그런 뒤 점심 무렵엔 범상 처 친정 식구들이 축대 쌓아놓은 걸 돌아보기 위해 차 두 대로 나눠 타고 도착했다.
그런 와중에 기로는 이 집에 있던 학돌과 돌절구를 옮겨다 마당의 구석에 심었다. 그리고 오동나무 의자(통나무) 하나를 그 주위에 더 심었다.
그랬더니, 이 전에 심어 두었던 두 개의 의자와 함께 한 덩어리의 재미있는 쉼터가 돼 보였다. 아직 마당은 너저분한 상태였지만, 쉼터만은 썩 근사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던 범상도,
"야, 제법 근사한데?" 하고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는데,
"그래? 그러면, 언제 다음에 올 때 막걸리 좀 사 와라. 여기에 앉아 한 잔 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일 거야." 하고 기로도 씩 웃으며, 조금 전에 심었던 오동나무 위의 흙을 털어내며 말을 받았다.
그러자 범상 처 식구들도 쉼터를 살펴보면서는,
"역시 예술가의 안목은 다르네요!" 하면서 기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듯했다.
'호수를 배경으로 있는 아담하면서도 자연스런 쉼터. 이제 이곳에서 반가운 손님과 막걸리를 마시리라...... 안주는 된장에 풋고추나 오이 같은 게 좋겠다......' 기로는 그런 상상을 하다간,
"야, 범상! 그러지 말고.. 아예, 지금 차를 타고 나가 막걸리를 사 오던지?" 하자,
"아냐!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전주에 돌아가야 돼. 술 마시고 음주운전 할 수는 없잖아?" 하고, 범상도 다소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통나무집 쪽으로 돌아갔다.
# TV 출연
'夢想?' 마당 귀퉁이에 ‘쉼터’를 만들고 있는데,
여기 집 주인 친구의 처가 식구들이 놀러 왔습니다.
그들은 며칠 전 '夢想?'에 축대를 쌓은 것을 돌아보기 위해 온 것이었는데, 차가 두 대가 와서 많은 식구들이 북적댔습니다.
오후였는데,
그런 와중에, 누군가 동네 반장 딸애(인사 잘하는 '정미')와 몇 아이를 앞세우고 지나가다가, 친구 처가식구와 뭔가 얘기를 하더니, 손가락질로 나 있는 쪽을 가리키던데, 바로 나를 찾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지?' 의아해 하며 내가 그 쪽으로 가자,
그는 방송국의 PD라며, 어린이 프로에 나갈 ‘마암 분교’ 어린이들을 찍는데, 반장 딸애(정미)의 얘기를 다큐멘터리식으로 찍고 있다면서... 나에게 그 프로에 동참해줄 수 있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왜?" 하면서, 나는 펄쩍 뛰었지요.
매스컴이라던지 하는 데에 얼굴 내미는 걸 질색하는 내가,
'내가 이런 도회지적인 것에 신물이 나서, 더구나 이 시골까지 왔는데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며 나는 딱 잘라 거절했지요.
그런데 얘기인 즉, ‘마암분교 어린이’란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정미가 학교에서 갑자기 내 얘기를 하더라는 겁니다.
자기네 동네에 서울에서 이사 온 ‘화가 아저씨’가 있는데, 솟대도 만들고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 참! 지가 나를 봤으면 며칠이나 봤다고, 벌써......'
그래서 오늘은, 정미네 집에 다른 친구들이 놀러오는 내용을 촬영 중인데,
정미가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했다던, 정미네 집 가는 길목에 있는 ‘화가 아저씨’에게 애들을 소개해주고,
그 화가 아저씨와 얘길 나누는 것을 찍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얘기는 그럴싸했습니다. 그런데,
'정미가, 학교에서 내 자랑을?' 하는 생각에 잠깐 어리둥절하긴 했었지만,
나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TV 출연은 싫다고 다시 한 번 거절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PD는 집요하게 나에게 달라붙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도망가는 식이고, 그는 계속 나를 쫓아다니는 모습으로 실랑이를 하고 있었는데요,
그걸 지켜보던 친구,
"야! 다른 사람들은 TV에 나오고 싶어서 안달인데, 너는 방송국에서 부탁을 하는데도 싫다고 하냐? 참, 이상한 놈이야, 너는!" 하고 짜증까지 내는 식이었고,
그 옆에 있던 친구 처, 그리고 그 식구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에게 촬영에 응해주라며... 한 목소리로 나서서 목청을 높이기까지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이! 괜한 일에 얽혀 들어가지고......" 나는 짜증이 났습니다.
순간, 정미란 녀석이 야속하기까지 하드라구요.
도대체 왜 학교까지 가서 내 얘기(자랑?)를 했는지, 그래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만드는지......
그래서 아예 나는 방으로 숨기까지 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PD라는 사람은 마루까지 쫓아와, 앉아, 아주 집요하게 간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PD님! 왜 이리 날 힘들게 하십니까? 난, 정말 싫은데!" 하자,
"화가 선생님! 이건 이 시골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프론데... 이런 아름다운 곳에 사시면서, 그런 일에 동참하시는 것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제발, 우리 방송 보다는 이런 곳에 사는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눈을 딱 감고... 한 번만 출연해 주세요. 제발......"
그런데요,
아, 나는 그 ‘제발......’이란 말에, 기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래! 어린이 프로니까... 내가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주는데 한 몫을 한다면, 나쁜 일은 아니리라......' 하는 생각으로 겨우 승낙을 하고 말았던 겁니다.
그렇게 난, 이 시골구석에 내려와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생뚱맞은 일인 'TV 출연'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것도 즉흥적이고 갑작스럽게......
이 거, 도대체 무슨 일인지......
TV 촬영은 이랬습니다.
얼마 후에 애들이 집 앞을 지나가는 설정에, 일단 아이들은 정미네 집 근처로 쑥을 뜯으러 가는 길이니, 돌아가는 길에 ‘화가 아저씨’네 집에 들른다는 가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보니, 그 PD는 카메라를 들고 애들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자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드라구요.
무릇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열중할 때 아름답다고 하잖습니까?
그도 그랬습니다.
내가 그토록 냉정하게 거절했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설득시킨 것만을 봐도......
사람이 참 열심이었습니다. 보기 좋게도......
그렇게 얼마 뒤에 애들은 내가 살고 있는 ‘夢想?’에 왔고, 촬영은 시작됐습니다.
나야, 그저 애들과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것으로 끝이었지만요.
그렇게 얼마를 그들과 어울려 얘길 나누었는지 모릅니다.
다시 하라면, 다시 했고, 그 PD의 요구에 맞춰주면서 촬영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근데요, 마치 누군가의 감시를 받으면서 무슨 일을 하는 기분이드라구요.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이 카메라에 찍히는 것이라, 어쩌면 내가 사는 현실과는 다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촬영을 했고, 그런 뒤 그들이 알아서 편집을 해서 TV에 내 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엉겁결에 TV 촬영을 했던 것이고,
'이거, 신문 날 일이네......' 하는 말처럼,
내가 정말 TV에 나온 일이 된 것입니다.
어쨌거나 정미라는 아이는 내가 이 마을에 온 걸 학교에 가서 자랑도 했다니, 지 딴에는 좋은가 보았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거 하나만을 생각하며 TV 촬영에 임해주긴 했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하고, 어리벙벙하기만 했답니다.
'내가 무슨 TV냐고? 참내, 살다 보니 별 일도 다 생기네......'
그 기분은 내내 나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마치 누군가에게 갑자기 무슨 습격을 당한 기분이었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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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로는 이제 TV에도 나올 이 둔터니 마을에 사는 한 ‘화가 아저씨’로, 동네방네(온 세상에) 소문을 내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본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들이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더구나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지금은 지 애미 송 선희한테 가 있는 딸내미 '예은'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다냐?' 하고 한숨까지 나왔는데,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것도 내 팔잔가 부지?' 하고 포기한 채로 촬영에 임하고 있기는 했다.
(그리고 이 일을 잊어버렸다. 어차피 기로가 살고 있는 이 '夢想?'엔 TV도 없어서, 그런 쪽에 관심을 둘 일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졌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스스로 잊어버리고 싶어서, 아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애를 쓰긴 했는데, 다행히 큰 심적 갈등없이 잊어졌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정미라는 아이 역시 그런 일과는 전혀 무관한 듯, 날마다 아침이면 학교에 가면서,
"안녕하세요? 화가 아저씨!" 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해왔지만, 그 아이 역시 TV에 관한 그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고, 기로 역시 무덤덤하게 그 일을 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