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액질(釉液質)
강 신 재
모든 행위(行爲)의 원인(原因)은 신체 내부(身體內部)의 내장기관(內臟器官)의 활동 상태(活動狀態), 신체외부(外 部)의 물리적(物理的) 상태, 그리고 사회(社會)상태 등에 있다. 행위의 원인을 캐내기를 단념한 사람들이 자유의지 (自由意志)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 신경학자(斤輕學者) 영
지나간 세월 속에 일어났던 일들을 사람은 대충 잊고 살게 마련이고 더구나 그것이 자기와 직접 관련 없이 생겨나고 진행했던 일인 경우에는,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과거의 한 토막으로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로만 여기고 있다.
그러나 가다가는 크고 작은 우연이 작용하여서, 누구나 그처럼 간단히는 흘러간 과거로부터 놓여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케 하여준다. 흘러간 과거로부터 ―라기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결코 인간은 놓여날 수 없다고 함이 더욱 적절할지 모르겠다.
운명이라는 말이 생각킨다.
이 어휘를 사람들은 상당히 꺼림칙이 여기고 반발을 느끼기도 하는 것은 삶에 지쳐 기진맥진한 늙은이들의 군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자 다른 조건 아래―미묘하게 다른 구조와 다른 환경 밑에 생명이라 불리는 현상을 부여받은 유기물인 사람은, 결국 그 자신을 빚어서 만들고 있는 화학 성분과 외적 조건에 따라 ―말하자면 논리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전적으로 밀려 나가고 있는 듯이만 보이는 면이 없지 않은 것이다. 저울대의 바른쪽을 누르면 왼쪽은 올라가듯, 일정한 성정의 인물을 일정한 환경 밑에 놓으면 정확히 예기되는 하나와, 결과에만 도달한다는 사실은 꽤 주의할 만하지 않겠는가?
이런 식의 사고는 늙은이들의 습기 찬 운명론보다는 한결 맹랑한 대신 속 시원한 구석도 갖고 있는 것 같다. 창가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을 멀리 우주 속 일 점에까지 불어 올려 보내고픈 마음마저 일게 하는…… 별의 운행이나 그 소멸 생성도 다 같은 물리적 원리에 따흗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턱 없이 기분이 넓어지기까지 한다.
하기는 내가 지금 여기에 쓰려고 하는 것은 그처럼 광활한 무대를 가진 현란한 이야기도 아니고 ‘물리학적 필연’ 이 의당 인간 세계에도 가져와야 할 이치인 밝고 행복한 사람의 상태에 관한 것도 못 된다. 인물은 역시 구질구질하고 별로 보잘 것이 없고 조금도 속 시원히 생겨 있지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 인물은 내 머리에 사람의 마음의 메커니즘 같은 것, 마음이나 몸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물질이고, 그 물질의 양과 결합의 양상에 따라 결코 다른 인물일 수는 없는 ‘그’가 생겨난다는 물리학자의 설명 같은 것을 생각나게 해주었다.
유례없이 복잡하나 결국 기계라는 것에 사람도 낙착이 되는가 싶어지고, 내 이야기의 이 구지레한 역할을 맡아 한 인물에 대해서도 같은 감개를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K고녀는 예부터의 주택지인 재동 어귀에 그 얼마 아름답지 않은 붉은 벽돌의 벽을 내보이며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식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모양 사나운 건물이어서 입버릇 고약한 축들의 말로는 형무소를 닮았다는 것이었다. 서울뿐이 아니고 지방에 가보아도 형무소는 어디나 그렇게 붉은 벽돌이고 그렇게 정면 현관께가 넙데데한 채 높이 솟아 있다는 것이었다.
살풍경하기는 건물만이 아니어서 좁은 운동장을 회색 시멘트 담이 둘러치고 있는데 풀포기 하나 구경할 수 없었다. 다만 뒷마당이라 불리는 측면 공터에 창문을 따라 벚나무가 여남은 그루 서 있는 것이 풍취를 위한 거의 전부인 셈이었다. 그 밑의, 말라서 하얗게 쪼개진 땅바닥에, 군데군데 빈약한 클로버가 달라붙어 기고 있는 모양은 없느니만 차라리 못한 감이었다.
이층 교실 창문에서 내다보아도 검은 기와의 지봉들 말고 좋은 경치는 뜨이지 않았는데 저만큼 언덕 위에 새로 지은 K중학의 꼭대기 일부와 높은 굴뚝은 마주 보였다. 그 큰 굴뚝은 스팀의 시설이 있다는 증거여서 K여고의 낡아빠진 벽돌 건물에는 물론 없는 물건이었다.
K중은 세칭 수재들의 전당이어서 여학생들은 엷은 동경을 그 건물에조차 품고 있어, 복도의 창틀에 팔굽을 걸치고 자주 그편을 바라보는 아이는 그것만으로 놀림을 받을 지경 이었지만 당시의 K중생이란 인상부터 목석 같다고나 할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교모는 머리 위에 수평으로 얹혀 있고(일 밀리의 반쯤이라도 옆으로 비뚤어 있는 법은 없었다) 눈도 똑바로 정면 눈높이께를 쏘아보며 걸어간다. 두리번거리거나 실없는 소리를 주절대고 큰 입을 벌리고 웃어서는 못쓰고, 가슴은 펴고 목은 꼿꼿이 쳐들고 있어야만 하였다. 자로 대고 만든 듯 각어˙ 진 어깨는 뒤에서 보아도 표가 났다. 마치 사관학교 생도가 행진을 하듯 그들은 하학 길에라도 빳빳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기라도 하였다가는 아마 틀림없이 퇴학을 맞았을 것이었다.
하니까 노상에서 여학생과 말을 하는 따위 일은 거의 없어서 오빠나 친척을 그듭 가운데 가진 아이는 가다 오다 만나게 되는 때에라도 모른 체 앞만 보고 지나가는 소년을 대하는 뿐이었다.
K고녀 쪽도 형편은 비슷하여 교원실에는 까다로운 선생님이 가득 있어 이모저모로 감독이 야단스러웠다.
자세를 바로 해라, 이야기할 때 몸을 흔들면 오해를 산다. 공연히 사람을 쳐다보지 말라. 정숙하고 견실하라, 너희는 남들과 다르다. 부녀자의 귀감이 되라.
예법을 가르치는 늙은 여자 선생은 목욕할 때 왼쪽 반신의 비누질은 바른손으로, 우측 반신은 왼손으로 해야 한다는 말까지 들려주었다.
이런 지경이므로 보이 프렌드를 갖고 있느니 하는 일은 전무에 가까웠고 남학생에 관한 것을 화제로 삼기 좋아하는 아이는 급우간에 불량 취급을 받을 형 세였다.
이렇게 k고녀생들은 현모양처의 모토 아래, 돛대같이 프라이드 높게, 의무감 강하게, 좀 맛대가리는 없이, 얼마 어여쁘지는 않게, K중의 건물을 바라보고 가끔 농담을 하는 것이 고작인, 대체로 학부형이 안심해 좋을 분위기 속에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이나 미술 따위 ‘병적 요소를 지닌’ 것들은 남학생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거리 격리되어 있었다. (그래도 나중 졸업하고 한참 지나고 보니 그 당시부터 그렇지 않은 사이였다면서 결혼까지 한 커플이 두셋은 있어서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의 내막이라는 감이 들기는 하였지만.)
졸업반이 되었을 때 우리 학년에는 낙제생이 한 명 편입되었다. 입학시험이라면 모르되 진급하는 데 낙제란 말로만 듣던 소리여서 교실에서 그녀를 발견하였을 때는 무던히 민망스러웠다. 시집가는 데 지장이 있다 하여 즘처럼 그런 교칙을 적용하는 일은 없었고 마지못할 경우일지라도 휴학이라든가 전학 같은, 무슨 다른 조치가 취해지는 전례였기 때문이었다.
김옥례라고 하는 그 아이는 성적 불량이라는 이유를 그닥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당당히 낙제를 해놓았던 것이다.
귀여운 모양으로 덧니가 나고 속눈썹이 긴, 크고 윤기 있는 눈을 가진 처녀였다. 당시의 졸업반은 지금의 고 일에 해당하여 만 십육 세가 표준 연령이었는데 옥례는 일 년 상급이었던 탓으로 그랬는지 몹시 어른스럽게 보였다. 아니 그 탓만이 아니었을지 몰랐다. 그녀의 그렇게 윤기 있는 눈과 작은 입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딘가 탁하고 무거운 열기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기름한 편이나 아래위가 거의 같은 모양으로 둥그스름한 얼굴은 탄력 없이 노르께하고 목에 깊이 패는 줄은 나이 많은 여인을 연상케 하였다. 가슴이 크고 뚱뚱하지는 않은데 무거워 보이는 몸집을 하고 있었다.
옥례는 서면 선 대로 앉으면 앉은 대로, 몸을 움직거리기를 싫어하는 성질 같았다. 걸어야 하는 때는 겨워하듯 느릿느릿 맨 뒤를 따랐다. 체육 시간에는 맡아놓고 정양실에 누워 있었고 수업 중에는 멀거니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 일이었다.
나는 그녀가 결코 특별한 저능은 아니지만(그때에도 치열한 입시 경쟁은 있었다) 조금도 공부에 착심1하지를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때과 선생의 음성은 그녀의 귓전을 스치고 지날 뿐 머릿속까지 들어가는 일은 없는 것이었다. 시험 때에조차 그녀는 마지못한 듯이 천천히 연필을 놀렸다. 쓸 것이 없는지 쓰기가 싫어지는지 중도에서부터는 손을 내리고 창밖을 보고 있다.
시간 중에 지명을 하고 짓궂게 무언가 시켜보려고 추궁을 하는 선생도 없지는 않았다. 옥례는 고개를 약간 숙이듯 하고 조용히 서 있다. 입을 열지 않았다. 비웃음 같기도 하고 또 다른 더 강한 거부의 표정 같기도 한 엷은 미소를 보일 듯 말 듯 입가에 띠고 옥례는 어느 때까지나 잠자코 서 있는 것이었다. 어떠한 모욕적인 언사도 그녀에게 무안을 타게 하거나 반발을 일으키게 하지는 못하였다. 봄바람이 불어 벚꽃잎을 화르르 그녀의 감색 잠바스커트 위로 날려 보내던 양을 지금도 기억한다.
무겁게 움직이지 않는 탁한 늪의 느낌과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특별한 아이’라는 관심이 차차 엷어지고 스스럽지 않아진 다음에도 나는 때때로 이상한 무서움 같은 것을 그녀로부터 느꼈다. 어떻게 된 서슬에 그녀가 누구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 눈이 아름답게 반짝이며 표정 이 생동하였다. 귀여운 모양의 덧니를 내보이고 웃으면 음침한 기가 사라지고 그녀는 결코 바보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하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옥례는 대개는 혼자서 우울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여름이 깊어갈 무렵 옥례는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통신망인가의 조직에 나는 그녀와 연락을 취하도록 지시받았다. 집이 인접한 것도 아니지만 띄엄띄엄 산재한 거리가 그래도 제일 가까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약도를 그려주고 예의 생기 있는 표정으로 방긋 웃어 보였다. 나는 옥례가 늘 그렇게 보통으로! 행동하고 무거운 늪같이, 노르께한 살갗만 두드러져 보이게 침묵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침묵에는 확실히 침묵 이상의 것이 개재하였다. 속눈썹이 긴, 윤기 있는 눈을 허공에 고정시키고 옥례는 거기에 어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있는 듯하였다. 주위에서 들까부는 급우들이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세계를 그녀는 신기루처럼 그렸다 지웠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세계에는 어쩌면 근엄하나 아무 깊이도 없는 대부분의 생도나 극성만 뗘는 애들에게는 없는, 어떤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을지 모른다고 나는 차차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을 소유하기 때문에 옥례는 모든 속물적 인 가치관에서 그처럼 초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즈음 내면적인 고독의 쓰라림을 맛보기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옥례의 자약함²에 일종의 신비를 느끼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꺼림칙함, 아지 못할 공포의 그림자 같은 것이 가셔지지 않아서 더 그녀에게 접근해 가지는 않고 있었다.
하루 나는 옥례의 집에 갈 일이 생겼다. 그녀는 그날 결석을 했었고, 나는 등교 전에 그녀에게 어떤 사항을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전화 같은 것은 없었다. 초저녁에 약도가 가리키는 대로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비탈을 좀 올라가서 꼬불꼬불 골목을 여러 번 구부러진 데에 있었다. 이런 곳에 싶을 만치 울창한 수목이 담장 안에 가지를 겹치며 뻗어 올라 있고 밤나무의 꽃인지 싱싱한 냄새가 어둠을 좀더 자욱하게 느끼게 하였다.
나무 잎사귀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대문이 거기 있었다. 뒷문인 것 같다고 그때 생각하였는데 나중 보니 문은 그것 하나여서 그러니까 그것 이 정문인 것이었다.
가느다란 길이 여름 꽃이 우거져 핀 수풀 사이를 인도하고 있었다.
가슴 높이에 이르던 그 초목들은 무슨 이름이었는지, 어스름 어둠 속에 큰 꽃송이들이 둥둥 뜬 것 같아 보였다. 발밑에서는 뭉쿳한 풀 향기가 뿜어 오르고 감미로운 훈향을 흐트러뜨리는 찔레와 덩굴장미는 집 둘레에 몰려 피어 있었다.
벽에 달아놓은 작은 등불로 하여 그 단층집은 회색 벽돌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낡은 수도원의 부속 건물 같은 느낌이었다.
방 하나에만 엷은 문장이 드리워 그 빛깔에 분홍으로 물든 불빛이 흘러나올 뿐 다른 부분은 깜깜하였다.
기묘하게도 나는 이 집의 모양 또한 건물의 후면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그때 가졌다. 현관이 크지 않은 탓이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 때문도 아니었을 것 같았다. 두드러진 모양은 갖추지 않았지만 난간과 돌층계 등 별다른 것이 없는 입구였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돌아앉은 듯이만 여겨지던 까닭을 지금도 나는 알 수가 없다.
옥례는 잠깐 기다리게 하고 나서 나타났다. 안이 어두웠던 탓인지 나는 그녀가 어디 땅속 깊숙한 데에서 떠올라 온 듯한 착각을 가졌다. 그녀는 조젯의 원피스를 입고 교실에서보다 화사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몸매가 그처럼 무거워 보이지 않는 데에 놀라고 있었다. 교복, 하고많은 제약, 관립 학교 특유의 그 억압감이 옥례를 어쩔 수 없이 무거워 보이게 만들고 있었구나 하고 나는 그런 생각을 더듬었다.
들어오라고 그녀는 낮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치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옥례는 성대를 갖지 않은 동물처럼 노상 소리를 안 내고, 어쩌다 말을 할 때에는 그처럼 낮고 작게밖에는 발성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옥례를 따라 넓은 마루방으로 들어갔다. 거기 잇대어 분홍빛 불이 흘러나오던 방이 바라보였다. 그리고 긴 의자 앞 양탄자 위에 전신에 불빛을 받아, 피어난 꽃송이같이 화려해 보이는 젊은 여성이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넓은 헤어밴드로 누르고 목 언저리에서 물결치게 하고 있었다. 소매 없는 담홍색 양복을 입은 백랍³처럼 희고 미끈한 팔다리가 강렬하게 눈을 끌었다. 다리가 걸음을 걷기 위한 것이고 손이 물건을 집기 위한 것임에 틀림은 없지만 또 그 이상의 것이라는 감개를 특별히 유발하는 아름다운 형태의 팔다리가 있는데 이 여자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멈칫해질 만큼 남다른 의미를 저점로 과시하며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발소리에 이편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어두워 잘 안 보이니까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그 얼굴을 보자 나는 어디서 본 여자인 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궁리해보니 어디서도 만난 적은 없었다. 다만 그 생김새는 일종의 미인형이고, 그렇게 생긴 입술을 노상 아름답다고 여기는 습관에 젖어 있는 까닭에 그 얼굴이 생소하지 않았던 모양 같았다. 어느 유명한 여배우의, 어쩌면 여러 명의 스타의 특색 같은 것을 모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녀는 물속의 잉어처럼 싱싱해 보였다. 피부에서는 빛이 나고 어른이면서 소녀처럼 앳되었다. 옥례와는 반대로.
장미의 큰 송이가 아직 다 피지는 않고 한껏 요염함과 같다는 낡은 비유를 나는 상기하였다. 그것은 국어 독본에 나오는 글귀이고 이 여자의 보편성 있는 미에 들어맞는 말일 것 같았다.
우리는 어두운 홀을 지나 기름한 온돌방을 가로질러 갔다. 저편 문에는 발이 걷어 올려져 있고, 미농지⁴ 같은 갓을 씌운 어두운 등이 희미하게 주위를 밝히며 구석에 놓여 있었다. 발 밖은 바로 높다란 담장이어서(집의 앞면이 뒤쪽 같아만 보인 내 착각은 그래도 얼른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집 의 폭은 거기까지인 모양이었다.
골동품이 여기저기 들여 놓인 방 안에는 바싹 마른 노인이 은쟁반을 앞에 놓고 책상다리로 앉아 있었다. 쟁반 위에는 술 주전자가 있었던 듯하나 나는 옥례가 거기 마치 아무도 있지 않은 듯 거들떠보지도 않고 스쳐가므로 따라서 뒤로 걸어갔다. 옥례는 복도를 꺾이더니 거기서 좁다란 층계를 밟고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아까 땅속에서 소리도 없이 솟아오른 듯이 옥례를 느낀 것과 무슨 관련이 있었을지. 여하튼 사닥다리처럼 급하고 좁은 층층다리를 드팀드팀⁵ 밟고 내려가면서 나는 조금 후회스러웠다. 불안해지면서 밖에서 그냥 말만 하고 돌아갈걸 싶었던 것이다.
지하실은 깜깜한 밖을 향해 창이 뚫려 있고 출입문까지 달려 있었으니 아마 사면이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은 아니었을지 몰랐다. 돗자리가 깔렸고 얼마 넓지 않았다. 우묵한 느낌을 더하게 하고 있는 것은 층계를 내려오면서부터 눈에 뜨인 키가 큰 경대였다.
옥례는 그 앞에 앉으면서 친밀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좀 앉어. 화장을 하던 중야.”
“많이 아프지는 않았니? 오늘 결석 했지.”
“아프지는 않았어. 다른 일이 있어서…….”
K고녀는 출결석이 엄격하여 한번 빠져놓고 보면 담임이 꼬치꼬치 캐고 들어서, 결석계를 제출해도 의심암귀, 모두 넌덜머리를 내고 어지간하면 기어서라도 학교에를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연락 사항을 말하였다.
그녀는 응 소리도 안 하고 흘려듣기만 한다. 마음이 안 놓여서 한 번 더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흥.”
하고 이번에는 옥례가 몹시 어른답게, 그리고 어딘가 감미롭게 코를 울렸다. 그러자 나도 학교에서 법석을 하고 다짐을 해대며 내일 꼭 무엇 무엇을 해 와야만 한다고 하던 일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비쳐보기 시작했다. 사실이지 청소용의 걸레를 삼 센티와 이 점 오 센티의 마름모꼴로 누벼 꿰매 석 장 지참해야 한다든가, 학생의 승차 허용 구간이 변경되었으니 내일부터 광화문에서 전차를 내려 걸어야 한다든가, 신사 참배는 방과 후에 하기로 되었다든가 하는 일이 무슨 그리 인생의 중대사란 말인가.
옥례는 경대 위에서 초록색 화장수를 집어 올려 따라 얼굴에 문질렀다. 크림을 바르고 또 무언가 끈적대는 물분 같은 것을 짤각짤각 볼을 두들기며 문질러 넣는다. 옥례의 누런 살갖이 보얗고 밝은 빛으로 변하여갔다. 뒷머리를 동여맸던 손수건을 끄르니까 숱이 많고 좀 무거워 보이는 머리카락이 오늘은 끝이 가볍게 컬되어 어깨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 것이었다.
나는 감심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저녁 냉수에 세수하고 스킨크림이나 쓱싹 문질러대면 그것도 좋은 폭이어서, 이렇게 화장품을 여럿 사용하고 경대까지 따로 갖고 있는 애는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딜 좀 가려구 그래. 만날 사람이 있어.”
옥례는 그러면서 화장대 한쪽에 세워져 있는 조Ξ1만 사진틀에 시선을 갖다 대었다. 그것은 아주 특수한 눈길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만나러 간다는 것이 바로 그 사람임을 직감하였다. 그래서 좀더 자세히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희끄무레한 스포츠 셔츠를 멋 있계 칼라를 세워 입은 청년이었다.
목책(木珊)⁶에다 한쪽 발을 걸치고 그 위로 상반신을 썩 기울이고 있었다. 어디가 어떻달 것도 없이 아주 멋이 있게 보였다. 대학생이거나 어쩌면 벌써 대학을 마친 사람쯤으로 보였다. 어깨가 네모진 K중의 우량아들이 내 마음속에서 갑자기 형편없는 풋내기들로 느껴졌다.
담장 밖 좀 멀리에서 누가 부는지 색소폰 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가슴 저린 그 독특한 음색으로 꽤 잘 불어 넘긴다. 옥례는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밤낮 저 곡조만 열심히…….”
귀여운 덧니를 내보이며 중얼대는데 아주 미묘한 미소가 한쪽 볼로 퍼져갔다. 꽃향기 속을 흘러왔을 그 젖은 듯한 색소폰 소리의 임자가 바로 사진의 인물과 동일한가 아닌가 알고 싶었으나 옥례의 그 표정만으로는 분간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 밤의 거기의 공기는 다른 어디의 그것과도 같지 않게 농염하고 취할 듯한 열기에 차 있었다. 숙제니 교무실이니 성적표니 하는 것들과 관계없는, 그런 것보다는 한결 무르익은 삶, 그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가 확실히 감지되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오래 머물러 있기에는 합당치 않은 것 같다는 마음도 들었다.
“난 그만 갈 테야.”
“잠깐만 있어. 나도 곧 나갈 테니까.”
옥례는 단추를 끄르고 브래지어의 가슴을 내놓았다. 나는 시선을 피하고 한 번 더 실내를 둘러보았다.
들어오던 문 쪽으로 바싹 대어서 피아노가 한 대 커버도 안 씌우고 놓여 있었다. 옥례가 치지 않을 것은 정한 이치였다. 아까 그 예쁜 여자가 있던 방에도 이 악기가 있는 것을 보았었다. 피아노는 그때는 아주 귀하여서 아무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자리가 없어 이런 데에까지 한 대 놓아두었을 터이지만…… 하나 여하튼 그 여자는 악기를 만지나 보다……
나는 내 생각을 입 밖에 내었다. 옥례는 소리를 하나도 내지 않고 웃었다. 소리를 하나도 내지 않기 때문인지 그녀의 그 웃음에 따라 주위가 모두 깊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윤곽이 흐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아노를? 도레미파도 모르는 사람인데.”
“누구니, 그인?”
그 여자는 굉장히 젊었었다. 옥례보다도 젊은 것 같았다. 하나 물론 옥례보다 더 어릴 까닭은 없었다. 네댓 살은 위일 것이었다. 다만 느낌 이 그처럼 발랄한 것이다.
옥례는 나를 마주 쳐다보며 천천히 아주 이상스러운 투로 한마디 한마디 발음하였다.
“우리 엄마야.”
“……”
“우리 엄마야. 온돌방에 앉았던 건 아버지구.”
씽긋하는 기분 나쁜 미소가 그 말 뒤를 따랐다. 그리고 끈적끈적하는 듯한 그 웃음에서는 정체 모를 점액(粘液) 같은 것이 지익직 배어 나와 밑으로 뚝 하고 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엉거주춤 허리를 들었다. 여기 오래 머무는 일은 아무래도 어딘가 위험한 짓인 것만 같았다.
교복을 참따랗게⁷ 입었으나 내려뜬 속눈썹 그늘에서 늘 무언가 다른 궁리에 잠겨 있는 교실에서의 옥례는 그로부터 더욱 부쩍 나의 관심을 끌어당겼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느라고 때때로 중요한 대목을 잡쳤다.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개어놓고 백일몽을 쫓고 있는 듯한 그녀는 나에게서 갖가지 잡념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그녀에게 친절히 하였으나 너무 친절히 하지는 않았다. 역시 더러는 그녀가 겁이 났던 것이다.
어느 오후 우리는 재봉실에 가기 위하여 보자기니 재봉곽이니 자막대기를 각기 들고 이층 복도를 줄레줄레 걸어가고 있었다. 앞에서부터 행렬이 멎더니 시간 변경이란다고 하였다. 교실로 되돌아가야 할 일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고 역시 재봉실로 가 있으랬다고 다른 한끝에서는 떠들어댄다. 주번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낙착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각기 판단대로 어느 교실론가 가버리고 우유부단한 무리만 더러 그대로 복도에 남아 있었다. 시업의 벨이 울리고 교사 내는 물속같이 고요하여 졌다.
나는 창문가에 서 있었다. 보슬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구슬픈, 어딘가 비밀스러운 정감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재봉은 흥미 없는 과목이었고, 다른 학과도 지금은 달갑지가 않았다. 어느 때까지나 은실 같은 빗줄기나 보고 있고 싶었다.
누군지가 내 옆에 다가섰다. 그것은 옥례였다. 그녀의 유난히 큰 가슴이 닿을 듯 가까이에 숨 쉬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그 생기가 돌아온 낯을 하고, 낮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너 말야……”
길고 짙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흘깃 주위를 살펴본다. 그리고 다시 말을 잇는 동작은 음성적인 어떤 쾌락에의 탐닉 같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너 말야, 남자하구 여자가 사랑할 때 일을 아니? 정조를 바칠 때의 그걸 말야.”
나는 심약하게도 어정쩡한 미소를 띄워 올린뿐이었다. 사실 그것은 우리들의 푼수⁸로는 너무 대담한 문젯거리였기 때문에 나는 어째야 좋을지를 몰랐던 것 이다.
“……”
“제일 먼점은 말야.”
하고 옥례는 속삭이기를 계속하였다.
“제일 먼저 남자가 요구하는 것은 입술이야. 키스하는 거. 그담은 가슴이지. 마지막이……”
옥례는 열기 띤 눈을 하고 뭐라 말할 수 없이 음란한 손짓으로자기의 몸의 일부를 가리켰다.
나는 옴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대뜸 등을 돌려 내닫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졸업하여 헤어질 때까지 나는 옥례와 말을 하지 않았다. 새 학기에 우리들의 자리가 또 바뀐 것은 그러므로 내게는 퍽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졸업하기 전 가을 하이킹 갔던 산길에서 나는 옥례의 계모를 한번 더 보았었다.
타이트 스커트에 밝은 스웨터를 입고 흰 농구화를 신은 그녀는 좀더 야생적으로 매력있게 보였다. 가느다란 단풍 가지를 하나 꺾어서 어깨에 둘러메고 있어 나는 좋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였으나 그보다도 그녀는 칠팔 명 되는 일행 중의 한 남자와 손을 꼭 맞잡고 있는 것이었다.
맑은 햇볕 아래를 행복한 듯 상기한 볼을 하고 걸어오다가 이편과 마주치자 꺼림 없는 얼굴로 건너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몰라보았겠지만 골동품 앞에 앉아 있던 마른 노인을 나는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가다가 그녀와 손을 잡고 있던 늘씬한 청년도 어디선가 본 사람이란 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편도 멀쑥하게 ‘보편적으로’ 생겼기 때문일까 하고 전과 같은 방법을 갖다 붙여보려는데 생각이 났다. 옥례가 만나러 간다고 하던, 어쩜 색소폰의 임자일지도 모르는 바로 그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럼 옥례와는 어떻게 되는 셈일까?’
궁금하였으나 물론 내가 끼어들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많은 세월 이 흘러갔다.
8·15 해방이 되고, 동란이 벌어지고 학생 혁명이 일어나고 하며, 부대끼어 죽고 살아남아 늙고, 또 아기들은 자라고 하였다.
K고녀의 그 딱딱한 소녀들도 이제 어지간히 세파에 시달려 얼굴들이 잔주름에 싸였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는, 더욱이 그것이 남의 일인 경우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줄만 여기며 살고 있다.
오늘 나는 외출해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덕을 걸어 오르자니 온몸에 땀이 배어난다. 아직 늦봄이지만 이 길을 이렇게 걸어 오르자면 벌써 나무 그늘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우리 집 담장 앞 그늘에서도 누군가가 바람을 쐬며 앉아 있었다. 굴비가 담긴 양철 그릇을 앞에 놓은 장사 아주머니였다. 털퍼덕 주저앉아 땅에 내던진 종아리가 구릿빛이다.
집 안에 들어오고 조금 있으니까 초인종이 울렸다. 나가 보고 오더니 굴비장사라고 한다. 나는 사지 않겠다고 일러서 내보냈다. 잊어버릴 만한 때에 다시 또 벨이 이번에는 아주 길게 요란하게 울렸다. 굴비장사가 보잔다는 것이다.
약간 기분이 상하여서 나는 대문으로 나갔다. 굴비를 절대로 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하며 있었다.
문 앞에는 그 여자가 서 있었다. 누군지 나는 금시 알아내지 못하였다. 다만 긴 속눈썹 그늘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서린 눈이 나를 응시하는 것을 보자 까닭 없이 편안찮아오는 것을 느꼈다.
“나 모르겠니?”
낮고 억양이 없는 목소리가 말하였다.
“나 옥례야.”
덧니 있는 입술이 빙긋하였다. 덧니는 이제 귀염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늪같이 음울한 정열을 담고 있던 그녀의 노르께한 살갖도 다갈색으로 타서 억센 느낌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하나 그것은 옥례가 틀림없었다.
“너 너 였구나.”
우리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굴비 함지 둘레를 왕파리가 한 마리 윙윙거리며 맴을 돌았다.
“그런데 좀 올라가지 않으련? 그러자, 들어가자.”
“아니.”
아무렇지도 않게, 몇 번이라도 거절하고 마는 그녀에게서 나는 태연한 낙제생이던 옥례를 상기하였다. 모든 허례, 상식적 가치, 생활 같은 것조차 그녀에게는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육이오 때 어디 있었니? 결혼했겠지? 애기는?”
그런 소리부터 어쨌든 끄집어내었다.
옥례는 질문 비슷한 것에는 하나도 탐탁한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 모호한 표정으로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내 일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마당 귀퉁이의 모란을 바라보고 잔디에도 눈길을 돌리고 하다가 제물에⁹’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우리 아버지, 너 알지? (한 번 흘깃 보았을 뿐인 것을 옥례는 그렇게 표현하였다) 그 영감, 죽었어.”
흐흐흐흐 하고 그녀는 낮게 웃었다. 웃음의 뜻은 알 수 없었으나 무언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그 속에는 들어 있었다.
“늙은이가 벌을 받았어 .”
한참 있다 덧붙였다.
어머니이던 그이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나는 물었다. 그 여자를 보았던 두 개의 장면이 선명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옥례는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딴 이야기를―적어도 처음에는 딴 이야기로 들리는 밖에 없는 말을 시작하였다.
“육이오 때는 죽을 뻔했지. 감옥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 누가?”
“내가.”
옥례는 온건한 투로 대꾸하였다.
“니가”
“몇 년째 갇혀 있던 중이라 도망도 못 쳤어. 그냥 폭격을 맞아죽는 줄 알았더니 어떻게 그래도 놓여나서…….”
“아니, 니가 감옥엔 뭣 하러 들어갔었니?”
“잡아가니까 들어가지 , 얘는.”
“그러니까 뭣 땜에 잡혀갔냐 말야.”
“사람을 죽여버렸어. 남자 때문에.”
옥례는 그렇게 말하고 그 검은 안개가 눈 속에 뿐이 아니고 온 얼굴에 자욱이 덮인 듯한 낯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내 남자를 아주 어떻게 만들러 들지 않겠어?”
남자라는 발음에 독특한 음영이 있었다.
“남자하구 여자가 사랑할 때 일을 아니? 남자가 제일 처음 요구하는……”
하던 때의 그녀의 말소리를 다시 듣는 듯했다.
“내가 왜 그러라고 두겠어? 그 여자는 나 같은 건 문제시하지도 않는다는 태도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지만…….”
옥례는 미미한 냉소를 띠었다.
“그 영감이 살아 있을 때부터 우린 서로 얽혀 지냈지. 그 남자는 나와 그 여자 새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던 거야. 난 아버지에게 일르지 않았지만.”
“……”
“영감이 벌 받아 죽은 뒤에……”
그 사망에도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은 데가 있었던 것 같았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칼루 찌르구 말았어. 밤에 침실에 가서…… 여자만…….”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싸쥐고 눈을 감았다.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그녀는 오히려 이상히도 감미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그러니까…….”
옥례는 질문의 뜻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건너다보았다.
“너는 그 집에 계모 어머니와 함께 살았단 말이니?”
“우리 셋 이 살았어.”
옥례는 아무렇게나 대꾸하고
“얼굴은 매끈했지만 그 여잔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 남자가 그랬어. 구미가 당기는 여자는 못 된다고…….”
옥례는 그 언젠가처럼 씽긋 웃었다. 그와 함께 끈적대는 점액 같은 것이 웃음에서 배어 나와 무릎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무엇이 살해의 직접 동기였단 말인가? 삼각의 관계를 전부터 인정한 셈이었었다면?’
그를 아주 어떻게 만들려고 했다던 설명을 나는 해석해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아무 해답도 얻지는 못하였다.
“일사후퇴 후에 청주에 가서 그 사람을 찾아내었지. 얼마나 만나려고 고생 했는지 몰라. 둘이 살았어. 죽어도 좋을 만큼―정말 그렇게 좋았었어. 나를 경찰에 찔러 넣고 도망가버렸지만 나중 잡아서 물어보니 악의는 없었대. 미군에 들어가서 일을 하구 있어서 그렇게 오래 못 만났던 거지 뭐야.”
굴비 함지 둘레에 파리는 점점 늘어 크고 작은 놈들이 붕붕거리며 날고 있었다.
그때 경대 위에 사진이 있던 인물이 결국 그였을 테지 하고 나는 알 수 없는 초조로움 같은 것을 맛보며 다짐했다.
“참 잘났지? 그런 남잔 없어. 정말 없어. 또 숨었지만 언제든지 만나지기만 하면 도루 살 테야. 아무것두 따지지 않구.”
그럼 지금은 혼자 있구나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를 하나 얻었어. 퇴계로 자전거포에 다니며 일을 하지. 이렇게 실팍한 젊은 사람야.”
옥례는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나는 옥례의 굴비를 샀다.
빈 양재기 그릇을 옆구리에 끼고 일어나는 그녀를 나는 정시하기가 퍽 힘들었지만 원은 그다지 그럴 일은 아니었을지 몰랐다.
사람의 마음이 물질로 형성 되어 있고, 원자니 소립자(素粒子)니 하는 그 물질들의 활동 상황이 인간의 정신 현상도 지배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옥례의 운명도 백억 년 전 우주가 탄생했을 때, 원자가 자동적으로 태양이나 지구나 그 밖의 것들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녀라는 인간의 세포의 분자를 준비하였을 때 이미 과학적으로 결정지어져 있었던 것이라면.
-끝-
2016년 6월 12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