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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7장의 주해와 적용
예수님은 과연 어떠한 메시아인가
이달 / 한남대 기독교학과 교수
서울대학교(B.𝙰.)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미국 프린스톤(Th. M.), 시카고대학교(PH. D.) 등에서 공부했다.
1. 본문의 위치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본문을 보다 넓은 문맥에서 보기 위해서는 우선 마태복음의 전체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서의 구조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의견 중에서 크게 두 가지 주장이 흥미를 끈다. 첫째는 베이컨(B.W. Bacon)이 말하는 ‘5대 강화’를 중심으로 마태복음의 구조를 이해하는 견해이다. 즉, 마태복음에는 산상보훈(5~7강), 선교 강화(10장), 비유(13장), 교회 치리 강화(18강). 그리고 종말 강화(23~25장)가 있는데, 이는 부활하신 예수가 마태 교회에 하신 주요 설교들이라는 것이다. 이 오중 구조는 각 강화가 끝나는 부분에 ‘예수께서 ~을 마치시매(7:28; 11:1; 13:53: 19:1: 26:1)’라는 문장 형식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에 바탕을 두고 마태복음 전체를 교차 대칭 구조(chiastic structure, 치아즘구조)로 설명하는 견해도 있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중요한 것은 이 구조를 통해 우리는 예수가 모세처럼 새 율법을 선포하며, 랍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있는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조는 예수의 탄생 및 유아 이야기(1~2장)와 수난 및 부활 이야기(26~ 28장)를 서언 및 종결 부분으로 처리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희석시키고 있으며, 또한 강화 (discourse) 사이에 존재하는 서사적 부분(natrative)을 보조적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다.
둘째는 로마이어(E. Lohmeyer)나 스톤하우스( N.B. Stonehouse), 그리고 나중에 이러한 견해를 요약해주는 킹스베리(J.D. Kingsbury)가 제시하는 것처럼 메시아 예수의 인격, 선포, 운명에 초점을 맞춘 삼중 구조로 마태복음의 구조를 이해하는 견해이다. 이 구조 분석에는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 하시기를 시작하셨다(4:17; 16:21)’는 두 번의 문장 형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형식을 기준으로 마태복음서를 구분하면, ① 메시야 예수의 인격(1:1~4:16), ② 메시야 예수의 선포(4:17~ 16:20), ③ 메시야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16:21~28:20)로 나눌 수 있다. 이는 마태복음 전체를 메시야 예수라는 기독론적 주제를 따라 일관성 있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첫 부분은 예수가 메시아로서 어떠한 인물이며 어떠한 자격을 갖춘 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둘째 부분은 예수가 메시아로서 이스라엘 앞에 자신을 공적으로 나타내고 하늘 나라에로 초대하는 내용을 다루며, 셋째 부분은 제자들 앞에서 그가 어떠한 운명을 맞이할 것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구조의 문제점은 두 개의 특징적인 문장 형식만을 가지고 마태복음서의 전체 구조를 세밀하고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어떠한 구조 분석도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본문에 대한 보다 넓은 문맥인 구조를 파악하고 그 가운데서 다루려고 하는 본문을 살펴보는 것은 큰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그리고 본문의 위치와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유용하다. 그러면 우리의 본문(마16,17장)은 위의 두 가지 구조에 따라 살펴보면 어떠한 위치에 속하고 있는가? 우리의 본문은 비유 강화(13장)와 교회 치리 강화(18장) 사이에 위치하는 서사적 이야기의 후반부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본문은 메시아 예수의 공적인 선포가 끝나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운명에 관해 은밀하게 가르치시는 내용으로 넘어가는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두 강화 사이에 존재하는 14장에서 17장 전체 서사 이야기를 본문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후자에서 말한 메시아 예수의 공적 선포에서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말한 가르침으로 넘어가는 전이적(transitional) 구조에 주목하도록 하겠다.
2. 본문 해석과 관련된 세 가지 주요한 대조적 관점
첫째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는 단계에서, 그 하늘 나라를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메시아이신 예수가 수난과 죽음을 당하시게 되는 단계로 발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주는 부분을 본문 중에서 지적한다면, 바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16:13~20) 과 뒤이어 나오는 수난 예고(16:21~28)이다. 그리고 이 수난 예고는 계속하여 반복됨으로써(17:22~23: 20:17~19: 26:1~2) 그 비중의 정도를 보여 준다. 이러한 대조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이 관점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관찰될 수 있다. 첫째는 교회 외적 관점으로서,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 고백과 당시 유대교적 배경 하에서 이해된 메시아 이해와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는 교회 내적 관점으로서, 역사적 예수(histonical Jesus)와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kerygmatic Christ) 사이에 인식의 불일치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태의 교회가 가진 신학적 환경은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위험스러울 수 있는 예수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본 문을 읽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본문은 전체적 구조와는 별도로 자체적인 구조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는 예수에 대한 잘못된 인식 및 부정적인 태도(A)와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인식 및 긍정적인 태도(B)를 보여주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에 대한 회의와 믿음의 반복적 구조가 나타난다.
이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A. 16:1~12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표적 구함과
제자들의 적은 믿음
B. 16:13~20 베드로의 신앙 고백
A. 16:21~28 첫 번째 수난 예고
B. 17:1~13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
A. 17:14~23 제자들의 믿음 없는 행동과
두 번째 수난 예고
B. 17:24~27 하늘 나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 (성전세를 내시는 예수)
이러한 구조는 예수께 대한 올바른 인식(다른 말로 하면 기독론)을 촉구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예수께 대한 올바른 신앙(B 부분)은 하나님의 계시(16:17, 17:5, 그리고 ‘예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고 한 17:25을 참조하라)와 관련되어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마태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바른 기독론을 강조함으로써 당시 교회의 신앙을 든든한 토대 위에 세우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와 인자로서의 예수의 대조이다. 본문에는 예수의 칭호로서 인자(16:13,27,28; 17:9,12, 22)와 하나님의 아들(16:16; 17:5)이 부각되어 있다. 이 밖에 ‘그리스도’라는 칭호도 중요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별도로 취급하지 않는다. 킹스베리(J.D. Kingsbury)에 따르면, ‘인자(Son of man)’는 대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히 그를 대적하는 무리들 또는 백성의 지도자들과의 관계에서 쓰여지고 있다고 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인자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의 수난, 재림, 그리고 심판과 관련하여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은 철저히 ‘고백적’인 칭호로 사용되고 있어서 예수에 대한 마태 교회의 신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두 기독론적 칭호는 마태 기독론의 중심을 차지하는 가운데, 인자는 세상적인 시각에서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아들은 교회의 시각에서 예수를 소개하는 칭호로 부각되고 있다. 물론 이 두 칭호가 상호 배타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의 비교를 통해 후자가 전자보다 우위에 있는 칭호라는 것은 분명한 듯이 보인다. 이는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는 문맥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보통 사람을 뜻하는 인자와 동급에 속하는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예언자들 중 하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데서 확인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 가지 대조되는 관점은 우리의 본문이 예수께 대한 바른 인식, 즉 올바른 기독론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본문의 내용을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서 간략하게 짚어 보기로 하자.
3. 본문의 내용과 해석
본문은 마태복음서 안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본문은 예수의 공적인 사역이 마무리되고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적 사역의 결론에 이은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독자들은 예수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마태의 저자는 확정된 신학을 토대로 하여 마태 공동체를 가르치고자 한다.
우리는 앞에서 본문을 주제에 따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다. 여기에서는 본문을 보다 세분화하여 본문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어떠한지 살펴보려고 한다. 지면 관계상 한 절 한 절 살피지 못하고 단락별로 내용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1) 표적 가르침(16:1-4)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사두개파가 여기에 같이 등장하는 것은 마태 본문의 특징이다. 막8:11 참조)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요구하였다. 그렇다면 예수가 행한 이제까지의 표적들(가까운 문맥만 보더라도 14장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및 물 위를 걸으신 기적과 15장의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모두 땅에 속한 기적들이었단 말인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이러한 부정적 평가에 대해 예수는 그들의 음험한 속마음을 읽고 단호하게 내리친다. 그들은 땅이 아닌 하늘에 관심을 표명하는 것 같지만, 예수는 오히려 그들이 그렇게 선호하는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늘’이 오히려 땅에 속한 내용임을 드러내신다. 천기의 기상을 분별하는 일반 상식을 들어 종교 지도자들이 아는 것은 그 정도의 하늘 개념임을 드러내신다. 이것은 풍자요 조롱(parody)이다. 예수는 ‘시대’의 징조, 즉 새로운 세상, 다시 말해 하늘 나라의 도래를 알지 못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질책하신다. 그러면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선언하신다. 이는 이미 마태복음 12장 38절에서 40절까지의 본문에서 언급했던 내용의 반복으로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죽음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놓여져 있다.
2) 누룩 가르침(16:5-12)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종교 지도자들뿐만은 아니었다. 여기에서는 제자들의 무지가 폭로된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예수의 정체성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갈릴리 건너편에서 기적으로 얻은 빵을 가져오지 못하였음을 아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이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이다. 한편으로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을 바탕으로 예수의 행하신 일들을 재단함으로써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한 점을 경계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실수를 한 것과 같이 우리는 예수의 정체성을 바르게 보지 못한다. 언제나 그러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 문제는 우리의 실상이 그러한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3) 베드로의 신앙고백(16:13~20)
예수는 사람들의 집중 공세를 받는 갈릴리 지역을 벗어나 한적한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을 깨우치고자 질문하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의 대답은 객관적인 보고였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그리고 예레미야는 모두 예언자들인데, 예수는 그런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예언자라는 평가는 기독론적 칭호나 신앙 고백적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생각을 나타내고 있는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보다 주체적이고 고백적인 대답을 듣고 싶어하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시몬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이는 풍랑 속에서 베드로를 구원하신 예수의 능력을 보고 제자들이 행한 고백(14:33)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여기에서는 그 의미가 후속적인 대화를 통해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이곳의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은 인자 기독론 또는 예언자 기독론에 비해 예수가 기대했고 교회가 요구했던 신앙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를 소개하고 있는 부분은 마태복음 전편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만(킹스베리, 「마태복음서 연구」, 기독교문 서선교회, 1993, 2장 참조), 이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직후에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음성이 들린 장면(3:13~17)이다. 두 장면 모두 하늘의 계시를 통해 예수의 정체성이 세상에 공개 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이러한 계시가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다. 세례 장면은 공생애의 선포(4:17~16:20)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위치하고 있으며,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예수의 수난과 영광의 사역(16:21~28:20)이 시작되기 직전에 자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계시없이 예수를 알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칭찬을 받기에 충분한 고백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자랑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하는 신앙 고백과 예수께 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적 은총에 의존한다. 오직 이러한 바탕 위에서만 교회는 설립되고 존재한다. 이 밖에 어떠한 요소도 교회를 순수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러한 신앙 고백의 반석(헬라어로 ‘페트라’) 위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인 맺고 푸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맺고 푸는’ 일이란 청지기들이 정확하게 업무를 수행하듯이 교회는 하늘 나라를 대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임과 동시에 위임 명령이다. 이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 나라의 비밀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4) 수난 예고(16:21~28)
이 단락의 처음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단어는 ‘그 때부터’와 ‘시작하셨다’(21절)는 것이다. ‘그 때’는 어느 때인가?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계시되고 공개된 때를 의미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공개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구약과 유대교가 기다려 왔던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메시아가 오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이스라엘은 속박에서 풀려나며 경제적으로 번영하게 되고 종교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맞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희망이 완성되고 기쁨이 요동치며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수의 수난과 영광 이후에도 세상은 크게 바뀐 것 같지 않았으며, 예수 자신도 그의 메시아 선포가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그런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역사적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꼭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이 여기에 스며들 수 있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진리가 선포된다. 메시아이신 예수가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승리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선언하기 일보 직전에서 패배자처럼 죽음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수난 예고는 상식적으로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 다름 아닌 방금 전에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베드로였다. 이것은 아이러니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아이러니의 신앙을 표방한다.
그래서 예수는 그가 수난을 당하여야 하며 그것을 통해서만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음을 밝히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베드로는 예수의 이러한 의도를 만류하다 못해 ‘책망하였다’(헬라어로 ‘에피티메인’이라는 동사를 사용함. 개역은 ‘간하였다’로, 표준새 번역은 ‘항의하였다’로 번역하였는데, 점잖지 못하게 들리더라도 ‘책망하였다’라고 강하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베드로의 책망은 ‘절대로(22절)’라는 부사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표준새번역을 따른다면). 예수는 앞 절에서 ‘반드시’ 수난을 당하여야 한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에, 예수와 베드로의 갈등은 ‘반드시(헬라어로는 ‘데이’)’와 ‘절대로(헬라어로는 ‘우메’)’라는 두 부사의 대결인 셈이다. ‘반드시’와 ‘절대로’는 글자 그대로 타협의 여지가 없는 개념이다. 이 두 개념은 충돌할 수밖에 없고 어느 하나가 물러서야만 한다. 타협은 있을 수 없으며, 중간 지대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역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똑같이 ‘에피티메인’이라는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두 진영 사이의 대결 양상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베드로의 태도는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을 생각한 것이기에 예수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너무나 치열한 까닭이다.
본문은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 24절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뜻을 접고 죽음을 통한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의 문맥에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적인 방식으로(다시 말해 유대적 기대대로) 하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모든 불이익과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순교를 포함하는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다운 생명을 얻는 길이다. 이러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인자가 재림할 때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보증한다.
제자는 ‘배우는 자(헬라어 ‘마떼인’에서 파생된 ‘마떼테스’)’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지만, 마태는 ‘따르는 자’가 제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따르는 것이 배제된 신앙은 껍데기 뿐인 열매와 같다. 신앙은 어떠한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으로 보여준 방식을 실천하는(27절의 ‘행실대로’라는 단어 참조)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은 윤리이며 윤리 이상의 것이다.
5) 변화산 사건(17: 1~13)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 이야기는 제자들이 따라야 하는 예수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여기 섰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16:28)’는 난해 구절에 대한 설명의 역할도 수행한다. 그러나 보다 넓은 문맥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는 대표적인 제자 세 사람(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더불어 한 높은 산에 올랐다. 여기에서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하나는 예수의 형체가 해와 같이 빛나는 모습으로 바뀐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말씀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린 것이었다. 변모된 예수는 율법서와 예언서의 대표격인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신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베드로는 이에 감동하여 초막 셋을 지어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겠다고 함으로써 예수를 다른 두 사람과 동등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 왔는데,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권위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기뻐한다’라는 음성이 들려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명령이 추가 됨으로써, 신적 형체를 가진 예수만이 권위를 가진 분임을 천명한다. 제자들에게 ‘본 것을 말하지 말아라’고 한 것이나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해석한 부분은 모두 앞의 내용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6) 겨자씨만큼의 믿음(17: 14~20)
예수와 세 제자가 변화산상에 있을 때 다른 제자들은 다른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귀신 들린 한 아이를 고쳐줄 것을 요청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예수가 내려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라고 책망하면서,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며,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느냐’고 한탄하신다. 여기에서는 ‘언제까지’라는 단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예수가 떠나고 없는 교회의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서, 교회는 예수 없이도 그 사명, 즉 믿음의 실천을 감당해야 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기에서 예수 당시의 과거적 사건의 인물들이지만 사실은 현재의 마태공동체를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마태의 교회)은 ‘적은 믿음(20절)’에 대해 예수님으로부터 질책 당하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겨자씨와 같은 믿음만 있어도 신앙의 기적은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예수에 대한 올바른 믿음(기독론적 토대)에 기초한 실천적 행동이 매우 어려웠던 교회의 사회적 정황을 알려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박하고 순수한 신앙을 단순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 두 번째 수난 예고(17:22-23)
예수는 다시 한 번 그의 수난을 예고하신다. 이를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고난과 죽음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듯이 부활도 역사적인 사실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제자들은 두 번째 수난 예고를 듣고 이제는 몹시 슬퍼하였다. 첫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나타난 제자들의 반응이 부인 혹은 거부였다면, 시간이 흐르고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의 말씀이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인간적인 감정적 슬픔을 나타내었다. 이 슬픔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고 고통스런 슬픔과 괴로운 심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사실로 드러날 것을 알고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8) 성전세(17: 24~27)
우리는 본문의 문맥이 메시아의 공적 선포에서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으로 넘어가는 전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성전세를 내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단락은 이러한 문맥 가운데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언뜻 보면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이 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먼저 우리들은 이러한 문제가 제기된 배경과 상황을 이해해야만 한다. 마태 복음서가 유대 전쟁(주후66~70년)을 치르고 난 이후에 쓰여졌다고 한다면, 마태 공동체는 당시 유대 전쟁을 일으킨 혁명적 유대인들과 차별화될 것을 요구받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로마 군대는 기독교인들을 혁명적인 유대인들과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로마와 평화적인 관계를 가지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된 ‘성전세’는 전통적인 성전을 위한 세금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로마인들은 이 성전세를 거두어 로마의 제우스 신전을 짓는데 사용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던 가버나움에서 성전세를 공개적으로 요청받은 예수와 제자들은 곤경에 빠질 수 있었다. 이교도 성전을 짓는데 세금을 낸다면 이는 매국적인 것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도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세금을 내는 결단을 내린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금이 면제되는 특권이 있지만, 이방인들과 충돌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으로 세금을 낼 것을 베드로에게 지시한다. 세금을 내는 문제는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인 문제라고 보고 있다. 사소한 문제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는 이 사건을 통하여 그가 추구하는 하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임을 암시하고자 한다. 물고기 입 속에서 기적적으로 은돈 한 닢을 찾아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전세를 내는 문제를 다루는 이 단락은 정당성을 얻고 있다.
4. 설교에의 적용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수난 예고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 본문은 한국 교회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식은 있는데 내용이 뒷받쳐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반석이 ‘걸림돌’로 책망받는 위치로 전락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본문을 어떻게 적용하며 살 것인지 몇 가지 요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믿음과 행위
믿음과 행위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바른 믿음을 가졌다면 바른 행실을 보일 것이다. 베드로는 칭찬 받을 만한 신앙을 고백하였지만, 신앙 고백의 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예수의 행위를 막고 나섰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 같은 말이라고 해서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함을 자랑하고 예수 믿는 신앙을 말하고 성령의 은혜를 내세운다. 저 사람은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신앙과 인격을 갖춘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목사도 다 같은 목사가 없고, 장로도 다 같은 장로가 없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 제각각이다. 똑같은 신앙 고백을 하는 것 같아도 다 같은 의미가 아니다. 이것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그 행실을 보아서 알 수 밖에 없다. 오로지 그 행실을 보아서 알 수 있을 뿐이다.
최근에 TV나 방송 매체를 통해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인간적인 ‘예수론’이 화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뉴스거리가 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있으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주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한국 사회를 향하여 바른 예수상과 교회상을 보여주지 못하여 그 불만과 오해가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예수의 인격과 활동을 본받아 살아나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더욱 크다고 하겠다.
2) 나를 부인함
‘나를 부인한다’는 말이 얼마나 오해되고 있는가? 이 말이 때로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성취 욕구를 억누르는 말로 둔갑하고 있지는 않는가? 자신을 비하하고 자존심도 없는 인간을 부추기는 말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가? 쓸데없는 저자세와 비굴한 겸손을 미화시키는 말로 쓰여지지는 않는가? 여기에서 ‘나를 부인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과 치열한 대결을 벌이는 상황에서 사용되어 지고 있다. 가장 강하고 소신에 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세상적인 생활 방식을 바꾸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3) 십자가를 짐
또한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얼마나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왔는가?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라는 말을 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희생 정신이 바탕이 된 십자가의 의미를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전락시키지는 않았는가? ‘제가 져야 할 십자가지요’라고 말하는 교인들도 있다. 자신의 실수나 죄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것을 마치 십자가를 진다는 숭고한 정신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아니었는가? 때로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지시오 라고 윽박지르거나 요구하는 말도 들린다. 힘들고 어려운데 그것을 군말 말고 감수하라는 명령에 다름 아니다. 불쌍한 노동자들이 임금을 제 때에 받지 못해 생계가 어려운 판인데, 자신의 이익은 손해 없이 챙기는 기독교인 악덕 기업주가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집시다라고 말했다면 이는 십자가라는 말에 온갖 허위의식을 덧씌우는 꼴이다. 우리가 이러한 말에 현혹된다면 권력의 횡포를 방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로서의 믿음과 삶의 방식 때문에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모욕을 당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들의 약점과 실수를 그 사람 대신 떠안는 것이다. 장애인들의 불행을 힘을 들여 도와주고, 불행하고 어려운 가족 관계를 묵묵히 견디어 내고 긍정적인 환경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4) 표적과 신앙
우리는 얼마나 자주 표적을 구하는 신앙에 떨어지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 피상적인 믿음의 소유자들이 아닌가 반성해 보게 된다. 끊임없이 새로운 요구 사항들을 하나님께 늘어놓으면서 그것 중 하나라도 응답되지 않으면 교회를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목회자에게 등을 돌리기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우리의 신앙은 자성적이지 못한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가? 왜 기독교의 신앙은 철학적인 깊이를 상실하고 있는가? 왜 기독교의 신앙은 구도자적인 진지함을 외면하고 있는가? 왜 한국 교회는 겉만 화려하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감언이설에 빠져드는가?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보다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하는가?
5) 바른 권위
한국 교회는 예수 이외의 권위에 얼마나 자주 굴복하고 있는가? ‘너희는 오직 예수의 말을 들으라’라고 말하는 하늘의 음성, 성령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잘못된 다른 힘에 이끌리고 만다. 교회 안에서도 세력 있는 장로와 금력 있는 권사의 말에 기울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기독교 기관에서도 비리와 부정을 보면서도 언젠가 다시 그들의 힘을 빌려야 할지 모른다고 하는 정치적 계산 때문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사람 자체를 사역의 초점으로 삼지 않고 조직과 프로그램으로 승부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제 한국 교회는 다시 한번 기본(basic)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리로 되돌아와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개혁 없이(semper reformande) 교회는 반석 위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