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2장 1~10절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또는 배반당했을 때 “뒤통수 맞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제대로 뒤통수 맞았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선동에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린 고린도 교인을 생각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만약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배반에 치를 떨었다면, 그는 서신서를 통해 자신을 배반한 교인들을 인정사정없이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고린도 교인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10장부터 12장18절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혼란에 빠뜨린 거짓 교사들과 자신을 비교해가면서 여러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혹여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오해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서지 못할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제대로 설 수 있다면 자신이 거짓 교사들처럼 스스로 자신을 자랑해야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겠다고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영적인 체험을 자신이 더 깊이 체험했음을 어쩔 수없이 밝히면서도, 이렇게 밖에 자랑할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1-6)
바울은 14년 전, 즉 회심한 다메섹 사건 이후에 경험한 자신의 신비한 체험을 제삼자의 것처럼 기술하였습니다. 간혹 천국을 체험했다고 간증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이를 책으로 출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의 간증이나 책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이분들이 자신의 경험을 대중들 앞에서 일반화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합니다. 이유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사탄이나 귀신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이 있는데, 성경이 이들의 존재에 대해 명시했지만 이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관심 갖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인데, 우리는 마치 그들을 하나님과 동등한 대상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거짓 사도들이 그토록 자랑했던 신비적인 체험보다도 더 신비한 환상과 계시, 즉 언어로는 이루 표현하기 어려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 셋째 하늘에 가서 환상과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거짓 교사들처럼 사람들에게 떠벌이며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지 하나님이 거하는 그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7-10)
본문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육체에 가시, 사탄의 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칼빈은 육체에 가시를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적대자나 거듭나지 않은 영혼의 한 부분 때문에 생기는 육적인 유혹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질병이기에 사탄의 사자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바울을 고통 속에 있게 했나?라는 질문이 제기 됩니다. 이에 대해 다메섹에서 강력한 빛 때문에 생긴 안질이다, 또는 여러 서신서들을 살펴볼 때 편지는 유창하지만 외모나 언변이 보잘 것 없었다는 구절에서 언어적 장애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또는 정황상 간질이 아니겠느냐?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역시 모두 추측에 불과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바울과 같이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사도에게 하나님이 바울에게 질병을 주어 고통을 받게 하셨다는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며, 게다가 죽은 자도 살렸던 바울이 치유해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음에도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초점은 바울이 “어떤 병에 걸렸는가?” 또는 “치유되었는가?” 가 아니라 바울이 자신의 질병을 사탄의 사자라고 할 정도로 격심한 고통 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가?”입니다.
신앙인들 중에서 병에 걸리거나 불행한 일에 처하게 될 때, 원인을 자신의 죄로 인해서 질병에 걸렸거나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된다고 여기며 자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한 경우는 귀신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보면 죄로 인해 질병에 걸리거나 고통 중에 처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질병과 고통은 분명 에덴동산에서의 죄로 인해 기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병에 걸릴 때마다 이 병이 죄로 인한 것이라고 일반화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병에 걸렸을 때 의료기술을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기도로만 치료하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대부분의 학교는 나무 바닥이었고, 그래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엎드려서 걸레에 왁스를 발라 나무위에 왁스칠을 했었습니다. 나무 겉면이 곱지 않아서 손가락 또는 발바닥에 나무 가시가 박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빼내야 했는데 잘못하면 박힌 나무가시가 중간에서 끊어져 살 속에 그대로 가시가 있는 경우가 있는데, 조그만 가시가 얼마나 고통을 주는지 모릅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가시도 고통을 주는데 바울이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면 자신에게 큰 고통을 주는 병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병을 치유해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죽은 사람도 기도로 살려내었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병에 대해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대로 그를 고통 중에 두셨습니다. 두 번째 기도했지만 치유되지 않자 세 번째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나 기도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치유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때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이 병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만하지 못하게 하기위해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으로서 죽음은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은 우리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비록 육신적인 이별의 슬픔이 있지만 고인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축제의 날이며 우리 역시 그곳에서 고인을 다시 만난다는 사실을 믿기에 슬픔 가운데도 고인을 기쁨으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끝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세상과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은 믿지 않는 일반인들과 상이하게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병은 물론 자신이 이미 겪었고 현재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자신의 약함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더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9-10)
그렇다면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사도 바울처럼 세 번 기도해보고 치유되지 않으면 그대로 방치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손길은 기도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나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로 인해 파생된 병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병을 고칠 수 있는 지혜를 주셨고, 이 지혜로 말미암아 의술이 발전해왔고 앞으로 더욱 더 발전할 것입니다. 저는 제가 병에 걸렸을 때 처방받는 약이나 저를 치료하는 의료진의 손길에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를 진료하는 분이 믿는 의료진이건 믿지 않는 의료진이건 하나님은 저를 위해 그 의료진들의 손길을 당신의 도구 삼아주신다고 믿고 치료받곤 합니다. 힘든 역경이 닥칠 때면 힘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번에 어떻게 역사해주실까?를 생각하면 설레곤 합니다.
오늘도 나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 손길에 의지하시면서 힘찬 하루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학력, 지위, 소유, 명예 등을 자랑하며 살지만, 우리의 자랑은 세상 그 어떤 것도 아닌 오로지 주님 한 분임을 고백합니다. 주님, 병으로 인해 고통 받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처참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병에 걸린 사울은 그 병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서 허락하신 친구 삼아 그 병을 다스리며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님 우리 역시 병의 고통 중에도 주님께 감사하며 의료진의 손길 위에 주님의 치유의 손길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치료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병에 대해 노예로 전락하기 보다는 병을 주님께서 허락하신 벗 삼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날씨가 추울수록 힘든 불우한 이웃들을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따스한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