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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a. '가예고(Gallego)'의 정
‘아, 가방을 싸야 하는데, 왜 이리 하기 싫은지 모르겠네! 맘 같아선, 샤워나 하고 짐 몇 가지 챙겨 바로 나갔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인야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여행을 그렇게 다니면서도 가방을 싸는 일은 인야에게 늘 어렵기만 했다. 어차피 바르셀로나는 가봐야만 했다. 인야가 스페인에 처음 도착한 곳이자 4년 정도를 살았기에 첫정이 들었던 고향 같은 곳이라, 빼놓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에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재활 치료 중인 ‘마놀로(Manolo)’를 봐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시절 알게 된 많은 사람을 찾아 나서는 길이기도 했다. 물론 그곳에 가서 해야 할 일도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인야의 여정은, 그날 밤 바르셀로나 행 비행기를 타면 자정 너머 도착하게 될 텐데, 그 한밤중에 마놀로 집에 찾아갈 수는 없어서... 공항에서 밤을 새운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놀로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근데, 마놀로 집에 가게는 되겠지만 거기서 며칠이나 머물지 모르겠네……’ 하는 암울한 심정 때문에 인야의 마음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출발지인 ‘비고(Vigo)’ 공항까지는 꾸꼬 부부가 데려다주어 편하게 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헤어진 뒤 체크인을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기내 반입 수하물 허용’ 승인서를 항공사 측으로부터 받아왔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런 게 있나요? 금시초문인데요?” 인야가 놀라서 되묻자,
그게 없으면 22유로를 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낭패였다.
비행기 표가 그토록 쌌던 이유가 바로 이런 함정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계속 여행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싼 항공권을 찾던 인야가 일주일 전 쾌재를 부르며 예약했던 것인데,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철저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인야는 나름의 기지를 발휘했다.
“그럼, 이 짐을 줄여 작은 배낭 하나를 만들어서 메면 되나요?”
직원이 그러라고 해서 인야는 작은 캐리어(마드릳 산티아고 집에서 마야가 주었던) 안에 들어있던 배낭을 꺼내 짐을 주섬주섬 옮겨 담기 시작했다.
다행히 짐은 다 들어갔지만 배낭이 빵빵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런 뒤, 아깝긴 했지만... 캐리어를 버려야 했다.
‘아담하고 튼튼해서 얼마든지 쓸 수 있을 텐데…… 진작 알았으면 꾸꼬 부부가 돌아가기 전에 돌려보냈거나 애당초 배낭만 챙겨 나왔을 것을.’
하지만 그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다시 체크인을 하러 가니 또 다른 문제라며,
“22유로를 내셔야 해요”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인야는 짜증이 났지만,
“돈을 안 내는 방법은 없나요?” 하고 물었다.
직원이 공항 내 여행사 사무실에 가보라고 해서 급히 뛰어갔지만, 인터넷 연결이 안 된다는 핑계와 함께,
“비행기 이륙 시간이 4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만 돌아왔다.
결국 인야는 다시 돌아와 22유로를 내고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약이 오르고 화가 치밀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인야는 나중에 바르셀로나에서 비고로 돌아올 때를 대비해 물었다.
“그럼 나중에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직원은 이륙 세 시간 전에 공항 사무실에 와서 해결하라고만 했다.
“미리 집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요?” 하고 물었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는 무책임한 답변뿐이었다.
결국 사람을 골탕 먹이는 상술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카드로 결제했다.
그렇게 맨 마지막 손님으로, 땀에 젖은 채 뛰어가서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인야는 밤 11시 출발인 줄 알았는데, 확인해 보니 10시 반 출발이었다.
‘난 왜 이리 매사에 허술할까?’
인야는 항상 바르셀로나에 갈 때마다, 감상에 젖어...
‘아, 바르셀로나......’ 하고 한탄을 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번에는 짐 문제로 하도 시달려서인지, 그럴 여유조차 찾지 못하고 말았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겨우 안정을 찾을 즈음 바르셀로나 공항에 닿았다.
새벽 1시였다.
국내선이라 수속은 간편했다. 인야는 공항 내 인터넷 코너에서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새벽 3시가 넘어가자 피로가 몰려왔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더니…… 하긴 나는 공항에서 17시간도 버텼던 국제적 떠돌이인데 4시간쯤이야’ 하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6시 반, 공항을 나섰다.
기차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3년 만에 ‘오르따(Horta)’ 역에 내려 마놀로의 집으로 향했다.
길가의 사무실에 불이 켜진 듯했지만 이른 시간이라 바로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놀로의 큰아들 라울(Raul)이 건물 옆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가 반대편에서 오는 인야를 알아보고는,
“어이, 떠돌이 인야!” 하고 불렀다.
비아냥 섞인 인사가 달갑지 않았지만 인야는 낮은 목소리로,
“잘 지냈냐? 니 부모님은 집에 계시냐?”고 물었다.
라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야는 언덕길을 올라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아침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문을 열어 준 건 ‘까르멘’이었다.
“아이! 인야, 드디어 왔군!”
“까르멘, 반가워! 염치없게도, 내가 이렇게 다시 왔네!” 하며 인야가 머쓱해 하자,
“인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도, “어서 와! 이미 2층에 당신 방 준비해 뒀어.” 하며 스페인식 인사로 반겨주는 것이었다.
며칠 전 갈리시아에 갈 때는 꾸꼬 집에 연락도 없이 처들어간 것이지만, 여기 까르멘과는 이미 남미 여행 중에도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놀랄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까르멘은 많이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인야는 바로,
“마놀로는?” 하고 물었고,
“아침에 일어나 말끔하게 씻고 준비한 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하고 웃었다.
인야는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마놀로가 멀쩡하게 앉아 있었다.
“아, 마놀로!” 인야는 반가움과 놀라움에 이름을 크게 부르고 말았다.
의외였다.
인야가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마놀로가 작년에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지난 여름에 고향인 '갈리시아'에 갔다가, 거기서 다시 쓰러져 급히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뒤라기에,
인야는, 그가 침대에 누워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이었는데... (그러면, 인야의 얼굴마저 못 알아볼 수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는데)
“인야, 어서 와!” 하는 목소리도 제법 또렷했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홀쑥한 모습을 보면서 인야는,
‘어째, '종이 호랑이' 같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그 커다란(뚱뚱한) 덩치에 목소리마저 굵고 커서, 그냥 대하기로는 '독재자' 같은 이미지였던 그가... 이제는 정말 힘이 좍 빠져나간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묘한 ‘연민의 정’ 같은 것도 느껴질 수밖에 없었는데,
“마놀로, 괜찮아?”하고 반갑게 맞잡은 그의 손은 차갑고 약간의 부기가 느껴졌다.
안쓰러운 마음이 더해졌지만 인야는 다소 과장된 농담으로,
“근데, 마놀로... 당신, 환자 맞아? 무슨 환자가 이렇게 생생해 보여?” 하고, 환자도 아니면서 환자인 척하고 있는 사람 같다며... 그를 위로까지 하는데,
아주 흡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놀로는,
“인야, 당신이 나에게 ‘의무적’으로 잘 있으라고 해서...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잖아?” 하고 평소처럼 농담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했던 거고......” 하면서도 인야가 자세히 살피니, 한 쪽 팔이 부자연스럽고 말도 약간 어눌하긴 해도 혼자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인야는 마놀로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 너무 놀라고 불안해 그동안 까르멘을 통해서만 조심스럽게 상태를 전해 듣고 있었는데, 최근에 마놀로가 핸드폰을 사용할 정도로 회복되었다기에... 직접 문자를 쓰면서,
마놀로, 내가 당신을 보러 갈 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그건 당신의 의무야!
했던 말에 대한 답이기도 해서, 인야는,
‘그나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마놀로도 호아낀씨처럼, 다시 못보게 되었다면 어쩔 뻔했겠는가 말이다.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는 게, 너무 고마워서... 누군가에게 감사라도 드리고 싶다......’하면서 안도의 숨을 쉬기도 했다.
그런데,
“그래, 인야... 혼자서만 쿠바에 갔었단 말이지?”하고 이제는 농담까지 하는 마놀로였는데,
“그러니까 내가 서두르자고 했었잖아, 마놀로?”하고 공박을 가하면서도,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거 다 내려놓고, 다시 회복하는 거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어?” 하고 위로하는데,
까르멘이,
“인야, 아침 먹어야 하니까... 어서 2층에 짐을 풀고 내려와.” 하고 평소의 모습으로 인야를 챙겼다.
그럴 것이었다. 인야에게 먹는 걸 챙겨주는 건, 까르멘이 더했으면 더했지, 자신의 시누이(마놀로 여동생)인 아델라보다 못하지는 않은 사람이라서... 아니, 어쩌면 '아델라'보다 한 수 위이기도 하니......
“알았어. 짐만 내려놓고 바로 돌아올 게.” 하고 인야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이 집에만 오면, 늘 머물던 그 방이었다.
짐을 놓고 다시 내려왔던 인야는, 까르멘이 아침 상을 준비하는 사이에,
인야는 다시 마놀로의 손을 잡고는, 자신이 스페인에 도착한 뒤 산탄데르에 가서 호아낀의 묘소에 방문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놀로는 상당한 관심을 갖고 진중하게 인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코로나 시국이이서 본인도 호아낀씨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던 당시를 회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니 인야는,
‘마놀로, 만약에 당신도 그 사이에 죽었다면? 이번에 내가 여기 스페인에 와서(이미 갈리시아에는 들렀다 왔으니까) 당신 묘도 갔었을 거 아냐?’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절로 나오는 한숨과 함께... 정말 애틋한 감정도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때 아까 길에서 만났던 큰 아들 라울이,
“인야, 당신은 일은 않고... 맨날 여행만 다니는 거야? 나는 이렇게 새벽부터 일을 하는데, 당신처럼 팔자 좋은 사람도 없어! 안 그래? 그러면 일은 언제 할 건데?” 하고 농담을 하면서 들어왔다.
순간 분위기가 확 깨지는 기분이었던 인야는,
“라울, 니가 예술가의 삶을 알기나 해?” 하고 역시 곱지 않은 대꾸를 하면서, “내가 너 같은 사람하고 무슨 얘길 하겠냐?...” 하는 식으로 무시를 해버렸다.
(최근에 라울은 인야를 만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해 오곤 했다. 물론 농담 같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만날 때마다 그러니... 인야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점점 안 좋아지는 추세였다.)
그렇지만 마놀로나 까르멘은 그런 대화마저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넷이서 아침을 먹었는데, 라울은 자신의 말처럼...
새벽 같이 사무실에 나와 일을 하면서, 더구나 지금은 쓰러진 아버지 마놀로 대신 사업을 맡게 된 이래, 아침은 이렇게 부모님과 함께 먹는다는 것이었다.
여기도 결국은 ‘가예고’의 집이라 장소만 바르셀로나일 뿐, 분위기는 갈리시아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먹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 마놀로는 재활 운동을 위해 병원에 갔고,
혼자 남았던 인야는 어젯밤 공항에서 밤을 새웠기 때문에... 잠깐 눈을 붙이기도 했다.
그래봤자 한 시간 여였을 뿐이지만.
그런 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샤워도 하고, 바르셀로나로 오면서 찍었던 사진도 정리하는 등, 나름 자신의 할 일을 하다가,
이 집 딸인 '마리 까르멘'과 그 자식(어느새 고등학생이 된 아들과 국민학생인 딸 손주)들이 합류해서 함께 점심도 먹고는...
오후는 마놀로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마놀로가 이 동네 '오르따(Horta)'에 있는 맛사지 방에 가야 한다기에, 인야는 그를 보호하는 의미로... 함께 갔는데,
너무 늦게 왔다고 다음에 오라고 해서,
둘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인야가 관찰해 보니,
마놀로는 이제 혼자서도 그런 곳에 다닐 정도로 웬만큼은 회복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약의 효과일지 모르지만......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거기 이 동네 사람들(노인들)이 주로 지나다니는 길목의 한 벤치에 앉게 되었고...
인야는 거기서, 그동안의 이야기(자신의 남미 여행과, 마놀로의 상황)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인야는 자신의 핸드폰에 넣고 다니는 마놀로와 까르멘의 초상(유화로 그린, 한국에 있는 그림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마놀로, 이런 초상화들도 우리가 얘기했던 ‘인야 미술관’에 전시하려고 내가 준비했던 건데... 이젠, 현실성이 없을 것 같지?” 하고, 슬쩍 마놀로의 의향을 떠보았는데,
그림을 보고 좋아는 하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선...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으려는 마놀로를 보며...
‘아, 그 얘기를 하지 않으려 하는구나. 그렇다면, 마음 정리를 했다는 건가?' 하면서, '그래, 어차피 이미 포기했던 일이니, 더 이상 그 문제로 서로(특히 마놀로)에게 마음의 찌꺼기를 만들지는 말자. 어쩌면 라울 녀석도 그 문제 때문에(미술관을 준비하고 운영하는 문제에 부정적이라던),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 예민해져 있을 수 있으니...... 앞으로 그 문제에 대해선 입도 벙끗하지 말고, 여기서... 완전히 포기를 하자. 그리고 이들에게 매달리지도 말자. 이들에겐 어차피 나야, 이름도 없는 떠돌이 화가일 수도 있으니까...... 설사 사실이 그렇더라도, 내 자신은 의연하게 대처하고 비굴해지지 말자.' 하는 다짐을 하면서도, '내 마음은 아프지만, 이들도... 내 상당수의 그림들을 스페인에 유치할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것이기도 한데, 이들에겐 그런 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니까......' 하다간, '혹시 아는가? 이들이, 나중에 이 일로... 두고두고 후회할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도 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니, 뭔가 훨씬 홀가분해진 느낌은 물론...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각오가 돼 있던 일이라서였을까? 그 짧은 순간의 흐름이었을 뿐인데도, 인야는 보다 편하고 자유로운 어투로... 옛날 '깐 까라예우(Can Caralleu. 인야가 처음 바르셀로나에 와서 살았던 동네. 그 당시엔 마놀로네 가족도 그 동네 주민이었다.)'에서 살던 때의 추억 등에 대한 얘기도 할 수 있었고...
그제야 마놀로의 허락을 받아, 둘이 거리의 벤치에 앉아 있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런 뒤 인야는, 그 사진을 바로 갈리시아의 '꾸꼬'에게 보냈는데,
은퇴한 두 늙은이
하는 답이 바로 왔다.
인야는 피식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는 말일 것이었다. 이제는 둘 다 영락없는 노인네들이니까.
어두워질 무렵에야 둘이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까르멘은 이미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려는 참이었다.
“인야, 오늘 저녁은 우리 셋 뿐인데... 뭘로 먹을까?” 하고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고,
“글쎄, 까르멘… 나야 뭐, 당신이 주는 건 뭐든 상관없어. 그러니 당신이 알아서 해.” 하고 웃자,
“마놀로 당신은?” 하고 이번엔 마놀로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놀로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나도 인야와 같은 생각이야. 까르멘 당신이 알아서 해!” 하자,
"물어본 내가 바보지. 남정네들은 맨날, 대답이 똑 같다니까! 하 하 하…” 웃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고 인야가 머쓱해 진 순간, 갑자기 마놀로가,
”까르멘, 인야 마시게 비노 좀 내 와!” 하자,
"당연하지!” 하더니, “인야, 하몬 내줄까? 아니면 다른 뭔가 먹고 싶은 게 있어?” 하고 물었는데,
”아무 거나! 당신이 내오는 대로..." 하자,
"또 같은 대답이야?” 했고,
”하 하 하 하…”인야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까르멘이 비노띤또 한 병과 하몬을 내왔는데, (만약 마놀로가 환자가 아니고 행동이 자유롭다면 자신이 그렇게 했을 텐데, 이제는 까르멘이 그 역할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인야는,
'이 집에서도, 분위기는 갈리시아와 똑 같구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갈리시아에서도 식사 때마다 꾸꼬가 늘 집 비노를 따라와서는 인야의 잔을 채워주는데, 여기야 병 비노이긴 하지만 그 역할을 마놀로가 했던 건데, 이제는...
"인야, 잔 비었어..." 하고 까르멘에게 알려주거나, 인야 스스로 따라 마시게끔 챙겨주는 역할로 바뀌기는 했지만.
그렇게 저녁 식사 전에 비노 한 잔을 하면서 인야는,
'이게 ‘가예고(Gallego: 갈리시아 사람)의 정’인데......' 하면서,
그런 일을 아주 능숙하면서도 너무 평안하게 하고 있는 까르멘을 보면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깊은 상념에 잠겼다.
'까르멘은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이지만, 이 큰 집의 살림을 혼자서 꾸려나가며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있구나. 쓰러진 남편 마놀로를 돌보는 일은 물론......' 하면서, 그녀가 이미 돌아가시기 전 친정 부모님을 10년도 더 넘게 모신 일부터(작은 아들 호아낀(Joaquin. 이 집 둘째 아들도 호아낀이다.)의 결혼식 무렵(2012년)까지 살아계셨던 어머니도 그 몇 년 뒤에 돌아가셨고, 가장 최근(2020년)에 인야가 방문했을 땐 거동이 불편해진 친정아버지를 보살피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마저 인야가 다시 오기 전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이제야 좀 쉴 수 있을까 했을 때, 마놀로가 쓰러진 것이라...... 어디 그 뿐인가? 여기서 가까운 곳에 사는 딸네 손주들, 그리고 큰 아들 라울네 식구들(작은 아들은 조금 멀리 떨어져 살기에 자주 오지는 못한다지만)까지 대가족을 보살피고 있는......
끝없이 이어지는 헌신적인 모습은, 인야에게 감탄을 넘어 감동까지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인야는,
'그렇게 바쁘고도 힘들 까르멘인데, 나 같은 떠돌이까지 와서?' 하는, 이렇게 또 다시 신세를 지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가련하고도 염치마저 없었다.
IV.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a. '가예고(Gallego)'의 정
'아, 가방을 싸야 하는데, 왜 이리 하기 싫은지 모르겠네! 맘 같아선, 샤워나 하고 짐 몇 가지 챙겨 바로 나갔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인야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여행을 그렇게 다니면서도 가방을 싸는 일은 인야에게 늘 어렵기만 했다. 어차피 바르셀로나는 가봐야만 했다. 인야가 스페인에 처음 도착한 곳이자 4년 정도를 살았기에 첫정이 들었던 고향 같은 곳이라, 빼놓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에는 고혈압으로 쓰러져 재활 치료 중인 '마놀로(Manolo)'를 봐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시절 알게 된 많은 사람을 찾아 나서는 길이기도 했다. 물론 그곳에 가서 해야 할 일도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인야의 여정은, 그날 밤 바르셀로나 행 비행기를 타면 자정 너머 도착하게 될 텐데, 그 한밤중에 마놀로 집에 찾아갈 수는 없어서... 공항에서 밤을 새운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놀로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근데, 마놀로 집에 가게는 되겠지만 거기서 며칠이나 머물지 모르겠네......' 하는 암울한 심정 때문에 인야의 마음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출발지인 '비고(Vigo)' 공항까지는 꾸꼬 부부가 데려다주어 편하게 올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과 헤어진 뒤 체크인을 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기내 반입 수하물 허용 승인서를 항공사 측으로부터 받아왔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런 게 있나요? 금시초문인데요?" 인야가 놀라서 되묻자, 그게 없으면 22유로를 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낭패였다.
비행기 표가 그토록 쌌던 이유가 바로 이런 함정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계속 여행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싼 항공권을 찾던 인야가 일주일 전 쾌재를 부르며 예약했던 것인데,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철저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인야는 나름의 기지를 발휘했다.
"그럼, 이 짐을 줄여 작은 배낭 하나를 만들어서 메면 되나요?"
직원이 그러라고 해서 인야는 작은 캐리어(마드릳 산티아고 집에서 마야가 주었던) 안에 들어있던 배낭을 꺼내 짐을 주섬주섬 옮겨 담기 시작했다.
다행히 짐은 다 들어갔지만 배낭이 빵빵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런 뒤, 아깝긴 했지만... 캐리어를 버려야 했다.
'아담하고 튼튼해서 얼마든지 쓸 수 있을 텐데...... 진작 알았으면 꾸꼬 부부가 돌아가기 전에 돌려보냈거나 애당초 배낭만 챙겨 나왔을 것을.'
하지만 그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다시 체크인을 하러 가니 또 다른 문제라며, "22유로를 내셔야 해요"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인야는 짜증이 났지만, "돈을 안 내는 방법은 없나요?" 하고 물었다.
직원이 공항 내 여행사 사무실에 가보라고 해서 급히 뛰어갔지만, 인터넷 연결이 안 된다는 핑계와 함께, "비행기 이륙 시간이 4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만 돌아왔다.
결국 인야는 다시 돌아와 22유로를 내고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약이 오르고 화가 치밀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인야는 나중에 바르셀로나에서 비고로 돌아올 때를 대비해 물었다.
"그럼 나중에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직원은 이륙 세 시간 전에 공항 사무실에 와서 해결하라고만 했다.
"미리 집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요?" 하고 물었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는 무책임한 답변뿐이었다.
결국 사람을 골탕 먹이는 상술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카드로 결제했다. 그렇게 맨 마지막 손님으로, 땀에 젖은 채 뛰어가서야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인야는 밤 11시 출발인 줄 알았는데, 확인해 보니 10시 반 출발이었다.
'난 왜 이리 매사에 허술할까?'
인야는 항상 바르셀로나에 갈 때마다 감상에 젖어... '아, 바르셀로나......' 하고 한탄을 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번에는 짐 문제로 하도 시달려서인지 그럴 여유조차 찾지 못하고 말았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겨우 안정을 찾을 즈음 바르셀로나 공항에 닿았다. 새벽 1시였다.
국내선이라 수속은 간편했다. 인야는 공항 내 인터넷 코너에서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새벽 3시가 넘어가자 피로가 몰려왔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더니...... 하긴 나는 공항에서 17시간도 버텼던 국제적 떠돌이인데 4시간쯤이야.' 하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6시 반, 공항을 나섰다.
기차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3년 만에 '오르따(Horta)' 역에 내려 마놀로의 집으로 향했다.
길가의 사무실에 불이 켜진 듯했지만 이른 시간이라 바로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놀로의 큰아들 라울(Raul)이 건물 옆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가 반대편에서 오는 인야를 알아보고는,
"어이, 떠돌이 인야!" 하고 불렀다.
비아냥 섞인 인사가 달갑지 않았지만 인야는 낮은 목소리로, "잘 지냈냐? 니 부모님은 집에 계시냐?" 고 물었다.
라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야는 언덕길을 올라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아침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문을 열어 준 건 '까르멘'이었다.
"아이! 인야, 드디어 왔군!"
"까르멘, 반가워! 염치없게도, 내가 이렇게 다시 왔네!" 하며 인야가 머쓱해 하자,
"인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도, "어서 와! 이미 2층에 당신 방 준비해 뒀어." 하며 스페인식 인사로 반겨주는 것이었다.
며칠 전 갈리시아에 갈 때는 꾸꼬 집에 연락도 없이 쳐들어간 것이지만, 여기 까르멘과는 이미 남미 여행 중에도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놀랄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까르멘은 많이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인야는 바로, "마놀로는?" 하고 물었고,
"아침에 일어나 말끔하게 씻고 준비한 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하고 웃었다.
인야는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마놀로가 멀쩡하게 앉아 있었다.
"아, 마놀로!" 인야는 반가움과 놀라움에 이름을 크게 부르고 말았다.
의외였다.
인야가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마놀로가 작년에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지난 여름에 고향인 갈리시아에 갔다가 거기서 다시 쓰러져 급히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뒤라기에, 인야는 그가 침대에 누워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이었는데... (그러면 인야의 얼굴마저 못 알아볼 수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는데)
"인야, 어서 와!" 하는 목소리도 제법 또렷했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홀쑥한 모습을 보면서 인야는, '어째, 종이 호랑이 같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그 커다란 덩치에 목소리마저 굵고 커서 그냥 대하기로는 '독재자' 같은 이미지였던 그가... 이제는 정말 힘이 좍 빠져나간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묘한 연민의 정 같은 것도 느껴질 수밖에 없었는데,
"마놀로, 괜찮아?" 하고 반갑게 맞잡은 그의 손은 차갑고 약간의 부기가 느껴졌다.
안쓰러운 마음이 더해졌지만 인야는 다소 과장된 농담으로,
"근데, 마놀로... 당신, 환자 맞아? 무슨 환자가 이렇게 생생해 보여?" 하고, 환자도 아니면서 환자인 척하고 있는 사람 같다며... 그를 위로하는데,
아주 흡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놀로는,
"인야, 당신이 나에게 '의무적'으로 잘 있으라고 해서...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잖아?" 하고 평소처럼 농담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말했던 거고......" 하면서도 인야가 자세히 살피니, 한쪽 팔이 부자연스럽고 말도 약간 어눌하긴 해도 혼자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인야는 마놀로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 너무 놀라고 불안해 그동안 까르멘을 통해서만 조심스럽게 상태를 전해 듣고 있었는데, 최근에 마놀로가 핸드폰을 사용할 정도로 회복되었다기에... 직접 문자를 쓰면서,
마놀로, 내가 당신을 보러 갈 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그건 당신의 의무야!
했던 말에 대한 답이기도 해서, 인야는,
'그나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마놀로도 호아낀씨처럼, 다시 못 보게 되었다면 어쩔 뻔했겠는가 말이다.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는 게, 너무 고마워서... 누군가에게 감사라도 드리고 싶다......' 하면서 안도의 숨을 쉬기도 했다.
그런데,
"그래, 인야... 혼자서만 쿠바에 갔었단 말이지?" 하고 이제는 농담까지 하는 마놀로였는데,
"그러니까 내가 서두르자고 했었잖아, 마놀로?" 하고 공박을 가하면서도,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거 다 내려놓고, 다시 회복하는 거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어?" 하고 위로하는데,
까르멘이, "인야, 아침 먹어야 하니까... 어서 2층에 짐을 풀고 내려와." 하고 평소의 모습으로 인야를 챙겼다.
그럴 것이었다. 인야에게 먹는 걸 챙겨주는 건, 까르멘이 더했으면 더했지 자신의 시누이인 아델라보다 못하지는 않은 사람이라서... 아니, 어쩌면 아델라보다 한 수 위이기도 하니......
"알았어. 짐만 내려놓고 바로 돌아올게." 하고 인야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이 집에만 오면, 늘 머물던 그 방이었다.
짐을 놓고 다시 내려왔던 인야는, 까르멘이 아침 상을 준비하는 사이에 다시 마놀로의 손을 잡고는, 자신이 스페인에 도착한 뒤 산탄데르에 가서 호아낀의 묘소에 방문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놀로는 상당한 관심을 갖고 진중하게 인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코로나 시국이라 본인도 호아낀씨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던 당시를 회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니 인야는, '마놀로, 만약에 당신도 그 사이에 죽었다면? 이번에 내가 여기 스페인에 와서 당신 묘도 갔었을 거 아냐?'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절로 나오는 한숨과 함께... 정말 애틋한 감정도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때 아까 길에서 만났던 큰아들 라울이,
"인야, 당신은 일은 않고... 맨날 여행만 다니는 거야? 나는 이렇게 새벽부터 일을 하는데, 당신처럼 팔자 좋은 사람도 없어! 안 그래? 그러면 일은 언제 할 건데?" 하고 농담을 하면서 들어왔다.
순간 분위기가 확 깨지는 기분이었던 인야는,
"라울, 니가 예술가의 삶을 알기나 해?" 하고 역시 곱지 않은 대꾸를 하면서, "내가 너 같은 사람하고 무슨 얘길 하겠냐?..." 하는 식으로 무시를 해버렸다.
(최근에 라울은 인야를 만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해 오곤 했다. 물론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었지만, 만날 때마다 그러니... 인야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점점 안 좋아지는 추세였다.)
그렇지만 마놀로나 까르멘은 그런 대화마저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넷이서 아침을 먹었는데, 라울은 자신의 말처럼 새벽같이 사무실에 나와 일을 하면서, 더구나 지금은 쓰러진 아버지 마놀로 대신 사업을 맡게 된 이래, 아침은 이렇게 부모님과 함께 먹는다는 것이었다.
여기도 결국은 '가예고'의 집이라 장소만 바르셀로나일 뿐, 분위기는 갈리시아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먹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아침 식사가 끝난 뒤 마놀로는 재활 운동을 위해 병원에 갔고, 혼자 남았던 인야는 어젯밤 공항에서 밤을 새웠기 때문에... 잠깐 눈을 붙이기도 했다. 그래봤자 한 시간여였을 뿐이지만.
그런 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샤워도 하고, 바르셀로나로 오면서 찍었던 사진도 정리하는 등 나름 자신의 할 일을 하다가, 이 집 딸인 '마리 까르멘'과 그 자식들(어느새 고등학생이 된 아들과 초등학생인 딸 손주)이 합류해서 함께 점심도 먹고는... 오후는 마놀로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마놀로가 이 동네 '오르따(Horta)'에 있는 마사지 방에 가야 한다기에, 인야는 그를 보호하는 의미로 함께 갔는데, 너무 늦게 왔다고 다음에 오라고 해서 둘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인야가 관찰해 보니, 마놀로는 이제 혼자서도 그런 곳에 다닐 정도로 웬만큼은 회복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약의 효과일지 모르지만......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거기 이 동네 사람들(노인들)이 주로 지나다니는 길목의 한 벤치에 앉게 되었고... 인야는 거기서, 그동안의 이야기(자신의 남미 여행과, 마놀로의 상황)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인야는 자신의 핸드폰에 넣고 다니는 마놀로와 까르멘의 초상(유화로 그린, 한국에 있는 그림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마놀로, 이런 초상화들도 우리가 얘기했던 '인야 미술관'에 전시하려고 내가 준비했던 건데... 이젠, 현실성이 없을 것 같지?" 하고 슬쩍 마놀로의 의향을 떠보았는데,
그림을 보고 좋아는 하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선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으려는 마놀로를 보며...
'아, 그 얘기를 하지 않으려 하는구나. 그렇다면, 마음 정리를 했다는 건가?' 하면서, '그래, 어차피 이미 포기했던 일이니, 더 이상 그 문제로 서로에게(특히 마놀로에게) 마음의 찌꺼기를 만들지는 말자. 어쩌면 라울 녀석도 그 문제 때문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더 예민해져 있을 수 있으니...... 앞으로 그 문제에 대해선 입도 벙끗하지 말고, 여기서 완전히 포기를 하자. 그리고 이들에게 매달리지도 말자. 이들에겐 어차피 나야, 이름도 없는 떠돌이 화가일 수도 있으니까...... 설사 사실이 그렇더라도, 내 자신은 의연하게 대처하고 비굴해지지 말자.' 하는 다짐을 하면서도, '내 마음은 아프지만, 이들도... 내 상당수의 그림들을 스페인에 유치할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것이기도 한데, 이들에겐 그런 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니까......' 하다간, '혹시 아는가? 이들이, 나중에 이 일로... 두고두고 후회할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도 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니, 뭔가 훨씬 홀가분해진 느낌은 물론...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각오가 돼 있던 일이라서였을까? 그 짧은 순간의 흐름이었을 뿐인데도, 인야는 보다 편하고 자유로운 어투로... 옛날 '깐 까라예우(Can Caralleu. 인야가 처음 바르셀로나에 와서 살았던 동네. 그 당시엔 마놀로네 가족도 그 동네 주민이었다.)'에서 살던 때의 추억 등에 대한 얘기도 할 수 있었고... 그제야 마놀로의 허락을 받아, 둘이 거리의 벤치에 앉아 있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런 뒤 인야는 그 사진을 바로 갈리시아의 꾸꼬에게 보냈는데,
은퇴한 두 늙은이
하는 답이 바로 왔다.
인야는 피식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는 말일 것이었다. 이제는 둘 다 영락없는 노인네들이니까.
어두워질 무렵에야 둘이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까르멘은 이미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려는 참이었다.
"인야, 오늘 저녁은 우리 셋뿐인데... 뭘로 먹을까?" 하고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고,
"글쎄, 까르멘… 나야 뭐, 당신이 주는 건 뭐든 상관없어. 그러니 당신이 알아서 해." 하고 웃자,
"마놀로 당신은?" 하고 이번엔 마놀로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마놀로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나도 인야와 같은 생각이야. 까르멘 당신이 알아서 해!" 하자,
"물어본 내가 바보지. 남정네들은 맨날, 대답이 똑같다니까! 하 하 하......" 하고 웃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고 인야가 머쓱해진 순간, 갑자기 마놀로가,
"까르멘, 인야 마시게 비노 좀 내와!" 하자,
"당연하지!" 하더니, "인야, 하몬 내줄까? 아니면 다른 뭔가 먹고 싶은 게 있어?" 하고 물었는데,
"아무거나! 당신이 내오는 대로......" 하자,
"또 같은 대답이야?" 했고,
"하 하 하 하......" 인야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까르멘이 비노 틴또(Vino Tinto) 한 병과 하몬을 내왔는데, (만약 마놀로가 환자가 아니고 행동이 자유롭다면 자신이 그렇게 했을 텐데, 이제는 까르멘이 그 역할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인야는, '이 집에서도, 분위기는 갈리시아와 똑같구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갈리시아에서도 식사 때마다 꾸꼬가 늘 집 비노를 따라와서는 인야의 잔을 채워주는데, 여기야 병 비노이긴 하지만 그 역할을 마놀로가 했던 건데, 이제는... "인야, 잔 비었어......" 하고 까르멘에게 알려주거나, 인야 스스로 따라 마시게끔 챙겨주는 역할로 바뀌기는 했지만.
그렇게 저녁 식사 전에 비노 한 잔을 하면서 인야는, '이게 가예고(Gallego: 갈리시아 사람)의 정인데......' 하면서, 그런 일을 아주 능숙하면서도 너무 평안하게 하고 있는 까르멘을 보면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깊은 상념에 잠겼다.
'까르멘은 천성이 부지런한 사람이지만, 이 큰 집의 살림을 혼자서 꾸려나가며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있구나. 쓰러진 남편 마놀로를 돌보는 일은 물론......' 하면서, 그녀가 이미 돌아가시기 전 친정 부모님을 10년도 더 넘게 모신 일부터(작은 아들 호아낀의 결혼식 무렵(2012년)까지 살아계셨던 어머니도 그 몇 년 뒤에 돌아가셨고, 가장 최근(2020년)에 인야가 방문했을 땐 거동이 불편해진 친정아버지를 보살피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마저 인야가 다시 오기 전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이제야 좀 쉴 수 있을까 했을 때 마놀로가 쓰러진 것이라...... 어디 그뿐인가? 여기서 가까운 곳에 사는 딸네 손주들, 그리고 큰아들 라울네 식구들까지 대가족을 보살피고 있는......
끝없이 이어지는 그 헌신적인 모습은, 인야에게 감탄을 넘어 감동까지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인야는, '그렇게 바쁘고도 힘들 까르멘인데, 나 같은 떠돌이까지 와서?' 하는, 이렇게 또다시 신세를 지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가련하고도 염치마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