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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객잔》
제14화 ― 한 사람과 천하
“오른쪽 길로 가면 한 사람이 죽고.”
풍백의 목소리가 숲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왼쪽 길로 가면 천하가 죽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쪽 길에서는 월령의 은빛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좁고 가파른 돌계단은 달빛을 받은 것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반면 왼쪽 길에는 붉은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안개 안쪽에서는 무엇인가 거대한 것이 숨을 쉬는 듯 낮은 울림이 들렸다.
두 길 사이에 세워진 부서진 비석.
그 위에는 오래된 문장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사랑으로 향하고, 하나는 구원으로 향한다.
청아가 연우의 옷자락을 힘껏 붙잡았다.
“한 사람이 누구예요?”
풍백은 대답하지 못했다.
코끝에서 떨어진 피가 턱을 타고 흘렀다.
백노인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다시 보아라.”
“누가 죽는지 알 수 없느냐?”
풍백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곧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보이지 않아.”
“얼굴이 전부 검은 안개에 가려져 있어.”
“한 사람이라는 것만 확실하네.”
묘묘가 오른쪽 길을 노려보았다.
“그 예언이 정말 미래입니까?”
풍백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본 것을 의심하는 건가?”
“지금까지 당신의 예언은 언제나 여러 뜻으로 해석됐습니다.”
묘묘는 차갑게 대답했다.
“이번에도 흑월이 보여 주고 싶은 장면만 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풍백은 반박하지 못했다.
이번 숲에 들어온 뒤부터 누군가 자신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수많은 미래를 보여 주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만 교묘하게 가렸다.
그것은 예언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 낸 악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른쪽 길에서 느껴졌던 죽음과,
왼쪽 길에서 보았던 멸망의 기운만큼은 너무나 생생했다.
풍백이 낮게 말했다.
“함정이라 해도 두 길 모두 위험한 것은 분명하네.”
설화가 오른쪽 돌계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에 걸린 붉은 보석이 은빛 기운에 반응하며 희미하게 떨렸다.
“오른쪽으로 가야 합니다.”
묘묘가 즉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른쪽에서는 월령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설화는 붉은 목걸이를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제 안에 있는 영혼의 조각도 저 길을 향하고 있습니다.”
묘묘의 황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설화가 차갑게 물었다.
“왼쪽 길을 택하자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왼쪽으로 가면 천하가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면 주인님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설화의 표정이 굳었다.
묘묘는 연우의 앞을 막아서며 말을 이었다.
“풍백이 본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월령님의 기운이 있는 길이라면 봉인이 천검성군의 영혼에 반응할 겁니다.”
“가장 먼저 위험해지는 사람은 주인님입니다.”
설화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천하를 위험에 빠뜨리겠다는 뜻입니까?”
묘묘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천하가 주인님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설화의 대답은 단호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한 사람의 목숨을 같은 저울에 올릴 수는 없습니다.”
묘묘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떠올랐다.
“말은 쉽군요.”
“죽는 한 사람이 당신이어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설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연우가 설화를 바라보았다.
“설화.”
“저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설화는 오른쪽 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제가 죽어서 천하를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우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말을 쉽게 하지 마세요.”
설화가 처음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쉬운 말이 아닙니다.”
“성녀로 태어난 순간부터 수없이 배운 말입니다.”
“한 사람의 삶보다 마교가 중요하고.”
“마교보다 천하가 중요하다고.”
연우가 낮게 물었다.
“그게 설화 씨의 생각입니까?”
설화의 입술이 잠시 멈췄다.
환영 속 월령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누구의 선택도 따르지 마.
네 삶은 네 것이니까.
하지만 설화는 곧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
“지금은 제 생각이 중요한 때가 아닙니다.”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설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연우가 한 걸음 다가갔다.
“자신의 목숨을 너무 쉽게 희생하려 하지 마세요.”
“당신은 누구를 위해 태어난 그릇도, 봉인을 여는 도구도 아닙니다.”
“그러니 죽는 것을 의무처럼 말하지 마세요.”
설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걸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백노인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왔다.
“아직 누구도 죽는다고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는 오른쪽과 왼쪽 길을 번갈아 살폈다.
“풍백의 말은 선택의 결과다.”
“그렇다면 선택하지 않으면 되지.”
청아가 눈을 깜빡였다.
“길을 안 가면 된다는 뜻이에요?”
“두 길 말고 다른 길을 만들면 된다.”
백노인은 허리에 찬 낡은 검을 뽑았다.
검날에는 녹이 슬어 있었지만,
그가 손잡이를 쥐는 순간 숲의 공기가 달라졌다.
웅.
날카로운 검기가 땅을 울렸다.
백노인은 두 갈래 길 사이의 절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거대한 검광이 절벽을 갈랐다.
돌가루와 흙먼지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청아가 눈을 반짝였다.
“새로운 길이에요?”
그러나 흙먼지가 가라앉은 뒤에도 절벽은 그대로였다.
검이 지나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백노인의 표정이 굳었다.
“환영이 아니라 법칙으로 만들어진 길이군.”
풍백이 입가의 피를 닦았다.
“누군가가 반드시 둘 중 하나를 고르게 만든 모양이야.”
연우가 두 길 사이의 비석을 바라보았다.
비석에 적힌 문장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선택하지 않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청아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모든 것을 잃는다?”
그 순간,
일행이 지나온 길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쿠구구궁!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안개가 벽처럼 솟아오르며 숲의 입구를 삼키고 있었다.
나무뿌리들이 땅에서 튀어나와 길을 뒤덮었다.
수백 장의 붉은 부적이 허공을 날아다니다가 하나의 거대한 봉인을 만들었다.
묘묘가 곧바로 달려갔다.
황금빛 손톱이 붉은 장막을 할퀴었다.
카앙!
강한 충격이 터지며 묘묘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연우가 그를 받아 냈다.
“괜찮아?”
묘묘는 팔에서 흐르는 피를 무시한 채 장막을 바라보았다.
“길이 완전히 닫혔습니다.”
백노인이 검을 휘둘렀다.
풍백도 부적을 던졌다.
설화의 검에서 붉은 검기가 솟구쳤고,
청아는 황금빛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모든 공격이 장막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퇴로는 사라졌다.
앞에는 두 갈래 길뿐이었다.
딸랑!
갑자기 청아의 목에 걸린 황금 방울이 크게 울렸다.
청아가 방울을 움켜쥐었다.
“아버지?”
황금빛이 방울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요계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천휘의 형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칠게 끊어지는 목소리만 방울 안에서 들려왔다.
“청아…”
“들리느냐?”
“네!”
청아가 다급히 방울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버지, 길이 두 개로 갈라졌어요.”
“한쪽으로 가면 한 사람이 죽고, 다른 쪽으로 가면 천하가 죽는대요!”
잠시 잡음이 들렸다.
뒤이어 천휘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선택해서는 안 된다!”
“두 길 모두 흑월이 만든 함정이다.”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설화가 황금 방울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숲의 입구도 닫혔습니다.”
천휘의 목소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두 길은 실제 장소가 아니다.”
“봉인의 숲이 너희의 두려움을 읽어 만들어 낸 가짜 길이다.”
풍백이 물었다.
“그럼 어떻게 깨야 합니까?”
“여섯 사람이 모두 같은 길을 선택하면 안 된다.”
천휘의 말이 잡음에 끊겼다.
청아가 방울을 세게 흔들었다.
“아버지?”
“잘 안 들려요!”
다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서로 다른…”
“선택을…”
“해야…”
딸랑!
황금 방울에서 불꽃이 튀었다.
연결이 끊어졌다.
청아가 놀라 손을 놓았다.
“아버지!”
그러나 방울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백노인이 천휘의 말을 되짚었다.
“모두 같은 길을 선택하면 안 된다.”
묘묘가 말했다.
“서로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설화가 두 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일행을 나누라는 뜻입니까?”
풍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한쪽에서는 한 사람이 죽고.”
“다른 쪽에서는 천하가 죽는 미래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네.”
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요계 왕은 두 길 모두 가짜라고 했습니다.”
“풍백 씨가 본 미래도 길이 보여 준 환영일 수 있어요.”
풍백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말이 맞기를 바랄 뿐이네.”
연우는 바닥에 작은 돌 여섯 개를 놓았다.
왼쪽에 세 개.
오른쪽에 세 개.
“무작정 움직이면 안 됩니다.”
“먼저 나눠서 각 길을 조사하고, 위험하면 바로 돌아오는 것으로 하죠.”
묘묘가 단호하게 말했다.
“주인님은 제가 있는 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설화가 즉시 반박했다.
“연우는 오른쪽으로 가야 합니다.”
“월령의 기운을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 길에서 죽는 사람이 주인님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함께 가겠다는 겁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연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짐처럼 나눠 가지지 마세요.”
청아가 손을 들었다.
“저는 주인님이랑 갈래요.”
백노인이 말했다.
“나도 주인과 함께 가지.”
풍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또 모두 한쪽으로 몰리게 되네.”
연우는 일행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제가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묘묘의 얼굴이 굳었다.
“안 됩니다.”
“월령이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연우는 오른쪽 길에서 흘러나오는 은빛 기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길이 저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묘묘가 연우의 팔을 붙잡았다.
“천 년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기다리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그리고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연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묘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연우는 한동안 묘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보다 두려움이 더 짙었다.
다시 천 년을 혼자 기다리게 될까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연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혼자 가지 않을게.”
“모두 함께 방법을 찾겠습니다.”
묘묘의 손에서 조금 힘이 빠졌다.
설화는 말없이 오른쪽 길을 바라보았다.
은빛 기운이 마치 자신을 부르듯 흔들리고 있었다.
가슴속의 월령의 조각도 점점 뜨거워졌다.
이쪽으로 와.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설화는 눈을 감았다.
월령의 목소리인지,
흑월의 속삭임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일행은 갈림길 앞에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
풍백은 끊어진 요계와의 연결을 다시 잇기 위해 황금 방울 주변에 부적을 붙였다.
백노인과 묘묘는 닫힌 입구를 조사했다.
청아는 바닥에 앉아 황금 열쇠를 들여다보았다.
연우는 두 길의 기운을 비교하며 천(天) 나무패의 반응을 살폈다.
설화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붉은 목걸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보석 속에서 은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 속에 월령의 얼굴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설화.”
설화가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듣지 못한 듯했다.
“당신이 부르는 겁니까?”
월령의 환영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 길로 와.”
“혼자서.”
설화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당신이 진짜 월령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네가 어린 시절 꿈속에서 보았던 달빛 호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기억이지.”
설화의 손이 멈췄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꾸던 꿈이 있었다.
은빛 호수와 하얀 꽃.
호수 건너편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여인.
그 꿈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월령이 말했다.
“한 사람이 죽는다는 예언은 맞아.”
설화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누가 죽습니까?”
월령의 시선이 연우에게 향했다.
“연우.”
설화의 얼굴이 굳었다.
“그가 오른쪽 길에 들어오면 봉인이 영혼을 알아보고 생명을 빼앗을 거야.”
“그렇다면 오른쪽 길로 가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으면 왼쪽 길이 열려.”
“무명겁이 깨어나 천하가 멸망할 거야.”
설화가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결국 한 사람은 희생해야 한다는 겁니까?”
월령의 환영이 설화를 바라보았다.
“연우 대신 네가 올 수 있어.”
“너는 내 영혼의 조각을 품고 있으니까.”
“봉인은 너를 나로 받아들일 거야.”
설화의 숨이 멎었다.
“제가 대신 죽으면…”
“연우도, 천하도 살아.”
월령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네가 선택하면 모두를 구할 수 있어.”
설화는 눈을 감았다.
환영 속에서 자신에게 했던 월령의 말이 떠올랐다.
네 삶은 네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의 월령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이었다.
어쩌면 둘 다 진짜일 수도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의 말만 품고 있지 않으니까.
설화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청아가 건네준 황금 열쇠를 살피며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청아가 엉뚱한 말을 했는지,
연우가 작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설화의 마음이 아파 왔다.
연우는 자신에게 누구의 그릇도 아니라고 말했다.
자신의 목숨을 의무처럼 버리지 말라고 했다.
그런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음을 택한다면,
연우는 결코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설화의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숲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일행은 잠시 쉬었다가 날이 밝으면 다시 방법을 찾기로 했다.
청아는 연우의 망토를 덮고 잠들었다.
풍백은 부적을 붙이다가 그대로 졸기 시작했다.
백노인은 술병을 품에 안은 채 눈을 감았다.
묘묘는 고양이 모습으로 돌아가 연우의 옆을 지켰다.
연우는 오른쪽 길을 바라보며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연우.”
설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설화는 평소와 다름없는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잠이 오지 않습니까?”
“네.”
“설화 씨도요?”
“저는 익숙합니다.”
그녀는 연우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오른쪽 길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돌계단 위로 길게 내려앉았다.
연우가 조용히 말했다.
“낮에 했던 말은 진심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누구의 그릇도 아니라는 말.”
설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연우는 말을 이었다.
“월령과 어떤 관계가 있더라도 설화 씨는 설화 씨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마세요.”
설화는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까지 제 삶을 걱정합니까?”
연우가 잠시 생각했다.
“설화 씨가 객잔 식구니까요.”
설화의 눈빛에 아주 작은 실망이 스쳤다.
연우가 뒤늦게 덧붙였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설화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소중한…”
연우는 어색한 듯 시선을 피했다.
“함께 밥을 먹고, 싸우기도 하고, 객잔을 지켜 준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이 사라지는 건 싫습니다.”
설화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이윽고 아주 작게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주무세요.”
“설화 씨는요?”
“주변을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연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멀리 가지 마세요.”
설화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이 그녀가 연우에게 한 첫 번째 거짓말이었다.
연우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뀔 때까지 설화는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묘묘는 연우의 품에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백노인과 풍백, 청아도 잠들어 있었다.
설화는 천천히 붉은 목걸이를 풀었다.
목걸이를 연우의 손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한동안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짧은 문장만 남겼다.
국수값은 다음 생에 갚겠습니다.
설화는 종이를 목걸이 아래에 놓았다.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검은 고양이의 귀가 아주 작게 움직였다.
하지만 설화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른쪽 돌계단 앞에 서자 은빛 기운이 그녀를 감쌌다.
월령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잘 선택했어.”
설화가 차갑게 대답했다.
“당신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연우와 천하를 지키기 위해 갑니다.”
“그것으로 충분해.”
설화가 첫 번째 계단을 밟았다.
돌계단 위에 붉은 빛이 번졌다.
두 번째 계단.
세 번째 계단.
그녀의 몸이 은빛 안개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
설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잠든 연우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미안합니다.”
그녀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국수값을 못 갚겠네요.”
은빛 안개가 완전히 닫혔다.
오른쪽 길에서 설화의 기운이 사라졌다.
잠시 뒤,
연우의 품에 있던 묘묘가 눈을 떴다.
그는 곧바로 설화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묘묘는 검은 고양이 모습에서 인간으로 변했다.
“설화!”
그의 외침에 모두가 잠에서 깨어났다.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묘묘는 오른쪽 길을 바라보았다.
설화의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성녀가 혼자 들어갔습니다.”
연우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그의 손 옆에는 설화의 붉은 목걸이와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연우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국수값은 다음 생에 갚겠습니다.
종이를 읽는 순간,
연우의 손에서 강한 검기가 폭발했다.
콰앙!
주변의 바위가 갈라졌다.
청아가 놀라 연우를 올려다보았다.
“주인님…”
연우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온화한 미소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는 설화의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누가 마음대로 다음 생을 정하라고 했습니까?”
연우가 오른쪽 길로 걸어갔다.
묘묘가 그의 앞을 막았다.
“주인님, 기다리십시오.”
“오른쪽 길은 한 사람이 죽는 길입니다.”
연우의 눈동자에 푸른 검광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가야 합니다.”
“설화 씨를 데리고 돌아오겠습니다.”
풍백이 일어섰다.
“지금 따라가면 예언 속 죽음이 확정될 수도 있어.”
연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럼 예언을 바꾸겠습니다.”
“미래는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
연우가 풍백을 돌아보았다.
“바뀌지 않는다면 부수겠습니다.”
그 목소리는 연우의 것이면서도,
천 년 전 천하를 뒤흔든 천검성군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천(天)의 나무패가 눈부시게 빛났다.
연우가 오른쪽 길의 첫 번째 계단을 밟았다.
그 순간,
길 전체가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멀리서 흑월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결국 너는 또 한 사람을 선택하는구나.”
연우가 차갑게 대답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의 손에 푸른 검기가 모여 한 자루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저는 한 사람도, 천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연우는 붉은 안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오른쪽 길을 막고 있던 은빛 장막이 크게 갈라졌다.
그 너머에서 설화의 비명이 들렸다.
“연우!”
연우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찾았습니다.”
오른쪽 길 깊은 곳.
설화는 거대한 봉인진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은빛 사슬들이 그녀의 손목과 발목을 묶고 있었다.
바닥에는 수천 개의 요계 문자가 빛나고 있었다.
설화의 앞에는 월령이 서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온화한 모습이 아니었다.
한쪽 눈은 은빛이었고,
다른 한쪽 눈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설화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월령이 아니군요.”
월령의 검은 눈이 웃었다.
“절반은 맞고.”
은빛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절반은 틀려.”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나는 월령이면서 무명겁이다.”
설화의 몸에서 은빛 영혼 조각이 조금씩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월령이 손을 뻗었다.
“네가 죽으면 나는 완전해진다.”
설화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연우는 살릴 수 있습니까?”
월령의 은빛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검은 눈은 환하게 웃었다.
“물론.”
그 순간,
봉인진 바깥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콰아앙!
푸른 검광이 공간을 가르며 날아왔다.
설화를 묶고 있던 사슬 하나가 산산이 부서졌다.
월령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붉은 안개 너머에서 연우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푸른 검기가 응축된 검이 들려 있었다.
연우는 설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국수값을 남기고 가시면 곤란합니다.”
설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왜 왔습니까?”
연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받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요.”
그의 시선이 월령에게 향했다.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제 손님을 함부로 데려간 값을 받아야겠습니다.”
월령의 검은 눈이 휘어졌다.
“천검성군.”
“천 년 전에도 같은 선택을 했지.”
연우가 검을 들었다.
“저는 천검성군이 아닙니다.”
푸른 검광이 봉인진 전체를 뒤덮었다.
“천하제일 객잔의 주인 연우입니다.”
다음 화 예고
제15화 ― 설화의 선택
월령과 무명겁이 하나의 몸 안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로 연우를 맞이한다.
설화의 영혼 조각이 완전히 빠져나가면 월령은 봉인에서 깨어나지만,
설화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연우는 봉인진을 부수려 하지만,
그 충격으로 잠들어 있던 천검성군의 힘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월령의 은빛 눈이 연우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나를 구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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